광기라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정신 착란을 의미하는 무서운 질병인가 하면,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광기 속에서 격렬하게 작업한 천재’다. 모파상은 20대 때 매독에 걸려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렸다. 모파상은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이곳에서 환상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변에 보석이 들어 있다면서 소변을 모으기도 했다. 모파상은 자신만의 세계에 극단적으로 고립된 채 소설을 써내려갔다. 43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단편소설은 무려 300여 편이나 된다. 모파상은 자신만의 특이한 기질, 즉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한 꿈과 상상의 세계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

 

 

 

 

 

 

 

 

 

 

 

 

 

 

 

 

 

 

모파상은 단편소설 「어떤 이혼」은 예사롭지 않은 광인의 특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장원, 1996년)에 ‘어떤 이혼의 경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모빠상의 사랑》(정음, 2002년)과 《모빠상 단편집》(펭귄클래식코리아, 2015년)에도 수록되었는데, 두 책 모두 이형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번역했다.

 

 

 

 

 

모파상 단편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대부분은 작가처럼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 「어떤 이혼」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신혼 때 무척 상냥한 남편이었으나 갑자기 성격이 돌변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싫증을 느껴 폭력을 가한다. 아내를 피하는 남편은 밤낮 쉬지 않고 꽃이 가득한 온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그는 꽃에 격렬한 집착을 보인다. 심지어 온실의 꽃들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관능적인 여성으로 생각한다. 남편은 자신의 행동이 ‘열정’이라고 주장한다. 아내는 미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데, 아내 측 변호사가 남편이 쓴 일기 일부를 증거자료로 공개하면서 아내의 이혼 요구를 옹호한다.

 

아내 측 변호사는 남편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이상한 왕자의 정신착란’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이제 소개할 인용문을 보게 되면 모파상이 ‘이 사람’을 모티프로 소설을 집필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을 납득시키는 데는. 이 가여운 남자, 이 가여운 미친 사람에 의해 날마다 쓰여진 일기의 몇 부분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 미친 사람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최근에 죽은 불행한 왕자의 정신착란, 바비에르를 순전히 정신적으로만 다스렸던 괴상한 왕의 정신착란을 상기시키니만큼, 더욱 더 이 사건이 호기심을 끌고 흥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경우를 시적 광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상한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 한복판에 진짜 요정의 성들을 짓게 했습니다. 사물과 장소의 아름다움이 주는 현실조차도 그에게는 충분하지 않아서, 그는 그 거짓말 같은 저택에, 연극무대장치의 방법을 동원한 인조 수평선, 배경전환장치, 생생하게 그려진 숲, 나뭇잎이 보석으로 된 동화의 나라 등을 상상하고 창조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연주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실성한 왕족의 영혼을 시로 취하게 하고 있을 때, 호수에는 백조들이 헤엄치고 곤돌라들이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 171쪽)

 

 

변호사가 언급한 ‘이상한 왕자’는 독일의 옛 땅 바이에른 공국을 다스렸던 루트비히 2세다. 인용문에 ‘바이에르’가 역자가 ‘바이에른 공국’을 잘못 쓴 건지 아니면 모파상이 실재 인물에 대한 암시를 숨기려고 일부러 ‘바이에른’을 ‘바이에르’로 쓴 건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루트비히 2세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불행한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이상한 왕자’가 누군지 대번 알아차렸을 것이다. 루트비히 2세는 폐위된 지 5일 지난 1886년 6월 13일 호수에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떤 이혼」은 그해 8월 31일에 발표되었다. 모파상은 예전부터 자신과 똑같이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왕자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트비히 2세는 ‘미치광이 왕’ 혹은 ‘음악가 바그너와 거대한 성(城)을 엄청 좋아한 덕후’로 평가받는다. 왕자는 어릴 때부터 건물 짓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청소년 시기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본 이후로 열렬한 ‘바그너 빠돌이’가 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왕이 되자마자 바그너를 당장 자신의 성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취향 안에 갇혀 살았다. 재위 기간에 호화로운 세 개의 성을 짓게 했는데, 그중 하나인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모파상의 소설에 왕자가 지었다는 ‘요정의 성’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일 것이다. 실제로 왕은 스타른베르그 호수에 오페라의 백조가 이끄는 황금빛 배(곤돌라)를 띄웠다. 

 

 

 

 

 

 

 

 

 

 

 

 

 

 

 

 

 

왕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자신의 성안에 들어가 바그너의 음악을 실컷 들으면서 은거하듯이 지냈다. 장관들은 젊은데다가 멀쩡하게 잘생긴 왕이 정치에 소홀히 하는 모습에 불만을 품었다. 적자를 내면서까지 성을 축조하는 데 열을 올리는 왕이 백성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왕이 동성애자였으니 그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루트비히 2세는 ‘미치광이 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동생 오토도 형과 똑같은 증세가 있었다. (정말 불행한 형제다) 결국, 왕은 장관들의 계획에 말려들어 ‘강퇴’ 즉 강제 퇴위를 당했다. 굴욕적인 일이 5일 지난 후 왕과 그의 주치의의 시체가 스타른베르그 호수에 발견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왕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로 추측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시체가 발견된 호수가 많이 깊지 않았고, 주치의의 사인이 질식사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잊히고, 루트비히 2세는 광란에 시달리다가 호수에 빠져 자살한 미치광이 왕으로 알려지게 됐다.

 

 

 

 

 

 

 

 

 

 

 

 

 

 

 

 

 

시인 아폴리네르는 루트비히 2세의 사연을 토대로 시를 남겼다. 시집 《알코올》에 수록된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라는 시다. 이 시는 시집에서 가장 긴 내용이다. 아폴리네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미라보 다리」가 먼저 떠오르지만, 아폴리네르를 전공한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를 수작으로 손꼽는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257행에(!) ‘미친 두 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루트비히 2세와 그의 동생을 의미한다. (황현산 교수는 《알코올》 작품해설에 왕의 동생 이름을 ‘오톤’이라고 잘못 썼다) 아폴리네르는 불행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왕의 처지를 실연당한 자신의 신세와 동일하게 표현했다. 시적 화자(아폴리네르)와 루트비히 2세는 불행한 운명에 희생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아폴리네르는 루트비히 2세를 소재로 단편소설을 썼다. 소설 제목이 「달의 왕」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줄거리가 괴랄하다. 루트비히 2세는 신하들과 함께 지하궁전에 사는데, 그곳에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녀와 소년들을 상대로 음란한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경험한다. 소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폴리네르는 루트비히 2세가 ‘달의 기운을 받아 미쳐버린 사람(lunatic)’으로 생각했다.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무너뜨리라고 유언을 미리 남겼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민심의 불만으로 인해 성이 무너졌다면 왕이 혼자 즐겼던 성 주변 풍경의 운치를 감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의 선율이 나오지 않았으며 디즈니의 궁전 모양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쯤 되면 루트비히 2세의 광기가 재평가 각이다. 때로는 광인의 기이한 버릇과 취향이 창조성을 촉발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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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6-07-2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소리인데 알코올 책 표지보면서 바로 사이러스님 생각났는데 일부러 본인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표지를 고르시는 게 확실해요~ ㅎㅎㅎ
죄송해요.. 진지한 글에... ;;;

cyrus 2016-07-29 11:45   좋아요 0 | URL
댓글을 다는 일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하시나요? ㅎㅎㅎ

열린책들 <알코올> 앞표지 그림과 프로필 이미지의 그림 둘 다 마그리트가 그린 거예요. 제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해요. 마그리트 그림에는 항상 뒤돌아 선 중절모 신사가 많이 나옵니다. 마그리트의 중절모 신사 그림을 보는 순간,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는 익명성이 떠올렸어요. 그래서 프로필 이미지를 항상 마그리트의 그림만 쓰고 있어요. ^^
 

 

 

 

 

 

 

 

 

 

 

 

 

 

 

 

 

 

 

달만큼 인간과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동반자도 그리 흔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달은 오랫동안 시상과 임을 향한 그리움을 샘솟게 하는 것이었고 특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희망과 기원의 대상이었다. 고대인들은 달이 생명의 생멸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달이 차고 이지러짐은 사람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여겼다. 보름달이 뜰 무렵, 인체는 정신적 장애가 생긴다는 속설도 있다. 루나틱(lunatic)은 원래 달에 중독되어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을 의미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로 알려진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주인공 가구야 히메는 달나라에서 지상으로 보내진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는 8월 15일 달 밝은 밤에 승천했다. 승천하기 한 달 전부터 히메는 시름에 잠긴 채 달을 쳐다봤다. 주변 사람들은 달을 보면서 불길한 일이 생길 수 있다면서 히메의 달구경을 말렸다. 일본에서는 아주 밝은 달을 직접 바라보면 빨리 늙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고대 일본인들은 달을 감상하는 행위를 기피했다고 한다. 달은 그저 달이라도 보는 이의 느낌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다. 이태백에겐 달빛은 술맛 돌게 하는 낭만이지만, 일본인들은 마음 산란하게 하는 시름이었으니.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에 등장하는 유명한 요부다. 구약성서에는 헤롯왕의 의붓딸로 등장하는 데 헤롯이 반해 그녀를 탐하자 그녀는 조건을 달았다. 평소 연정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가 세례요한(민음사 판본에는 요카난)의 목을 요구했다고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와일드는 살로메를 첫눈에 요한을 사랑하는 관능적인 여인으로 그렸다. 살로메가 요한의 목을 손에 넣고 희열을 느끼는 장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희곡의 후반부에 살로메와 헤롯왕을 중심으로 욕망과 감정의 충돌, 광기와 에로티시즘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희곡이 시작되는 관능적인 첫 장면이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와일드는 달빛의 아름다움을 달의 불길한 징조와 죽은 여자(헤롯왕의 명령으로 살해되는 살로메의 미래를 암시하는 표현)와 연관 지어서 묘사했다. 희곡의 삽화를 담당한 오브리 비어즐리도 하늘에 비친 달을 죽음이나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는 불길한 대상으로 표현했다.

 

 

 

 

 

젊은 시리아인 : 오늘 밤에는 살로메 공주님이 유난히 아름다워!

 

헤로디아의 시동 : 달 좀 봐. 정말 이상해 보여! 꼭 무덤에서 일어나는 여자 같아. 죽은 여자 말이야. 꼭 죽은 것들을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걸.

 

젊은 시리아인 : 과연 이상해 보이는군. 노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어린 공주 같아. 발이 은으로 빚어진 공주. 발이 아니라 자그마한 흰 비둘기가 달린 것 같아. 꼭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걸.

 

헤로디아의 시동 : 꼭 죽은 여자 같아. 아주 천천히 움직여.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147, 149쪽, 민음사)  

 

 

시리아인은 살로메를 보호하는 젊은 근위대장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에서 무기력한 존재다. 살로메의 관능미에 사로잡힌 포로다. 그는 살로메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 주변을 맴돌면서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탐닉한다. 그러자 헤로디아의 시동은 살로메를 너무 많이 보면 시리아인에게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살로메가 우물 속에 갇힌 요한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자 시리아인을 그녀를 막아선다. 요한을 데려오라는 살로메의 명령까지 거부해보지만, 불길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살로메가 요한의 입맞춤을 시도하자 시리아인은 그 자리에서 자살한다. 헤로디아의 시동이 예감했던 대로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했다. 달, 즉 살로메의 첫 번째 희생자는 시리아인이었다. 근위대장은 살로메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로메를 향한 그의 사랑은 진실하지 않고, 건강하지가 않다. 시라아인은 살로메의 관능미에 중독된 루나틱이다. 살로메의 치명적인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탐닉하기 위해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다.

 

달의 주기와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는 이미 몇 차례 발표된 바 있다. 학자들은 보름달과 인간의 자살, 우울증 등이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보름달이 뜨면 조수간만의 차가 커지고 기온이 약간 올라가 대기압은 떨어지지만, 이 같은 현상이 인간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소설과 영화에서 만든 불길한 보름달의 거짓 효과가 계속 증폭된 것일 뿐이다. 터무니없는 속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으면 진실처럼 느껴져 깨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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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 2016-07-11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름달이 뜰 때 같이 조작업하는 남녀는 CC가 된다는 속설을 깨주고 졸업했지요. --;;

cyrus 2016-07-11 20:01   좋아요 0 | URL
야심한 밤에 남녀가 같이... ㅎㅎㅎ 그런 속설도 있었군요. 그런데 저도 왜 슬퍼지는 걸까요? ㅠㅠ

yureka01 2016-07-1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태백의 달이 제일 맘에 듭니다..술잔에 달빛을 마시는 거 ^^..

cyrus 2016-07-12 16:33   좋아요 1 | URL
달이 환하게 뜬 열대야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일이 현대의 풍류입니다. ㅎㅎㅎ
 
다케토리 이야기
민병훈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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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 다케토리 이야기

(※ 피터 박스올의 책 국내 번역본에는 '타케토리 이야기'로 되어있음)

 

 

 

 

옛날 일본에 사누키노 미야쓰코(讃岐)라는 이름의 노인이 대나무 대롱 속에 있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이 여자아이의 키는 고작 세 치 정도에 불과했다. 노인은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길렀다. 대나무에서 자란 작은 아이의 이름은 가구야 히메(かぐや)’.

 

 

 

 

 

 

노인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히메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히메가 미인이라는 소문이 남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하지만 히메는 구애를 펼치는 남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섯 명의 귀공자는 히메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직접 히메의 집으로 찾아가 간청했다. 노인은 결혼하지 않으려는 딸이 걱정되었다. 히메는 아무리 미모가 훌륭하고, 재산이 많다고 해도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상대와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자신이 원하는 물건(혼수품)을 가져오면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약속했다.

 

다섯 명의 귀공자는 히메가 말한 대로 세상에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혼수품을 장만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히메가 원하는 다섯 개의 물건들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돌로 된 부처의 바리때, 전설의 산에 자라는 성스러운 백옥(白玉) 나무의 가지, 절대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전설의 동물 불쥐의 가죽옷, 용의 목에 있는 오색 구슬, 제비 둥지에 있는 환상의 조개다. 당연히 다섯 남자 모두 히메의 미션에 실패했다. 이제는 임금님(천황)까지 히메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임금님마저 히메에게 퇴짜 맞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히메가 사랑을 잘 모르는 차가운 마음의 여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히메가 남자들의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히메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달나라 사람이었다. 천상에서 죄를 지은 바람에 잠시 인간 세상에 머물게 되었다. (히메는 천상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노인에게 단 한 마디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세한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달나라로 올라갔다) 인간 세상을 떠나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히메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달이 뜬 밤이 되면 그녀는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음력 815일에 보름달이 뜨면 히메는 달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보름달이 뜬 날에 임금님은 병사들을 동원해 히메의 승천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히메는 하늘로 돌아가기 직전에 임금님에게 애절한 내용의 와카(和歌, 일본의 전통 시)를 담은 편지와 불사약을 남겼다.

 

 

끝이라 하여 하늘의 날개옷을 입으려 하니

당신과의 추억이 무척 그립습니다.

 

はとて 羽衣 きるをりぞ

をあはれと ひいでける

 

 

다케토리란 일본어로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라는 뜻이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보다 앞서 나온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간략한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암울하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각자의 결말이 슬프다. 가구야 히메는 인간 세상에서 사랑 한 번 경험하지 못하고, 달나라로 돌아갔다. 하늘의 날개옷을 입으면 인간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린다. 히메의 승천은 죽음또는 유한한 삶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망령이 저승의 5개 강 중 하나인 레테의 강에 흐르는 물을 마시면 지상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다고 믿었다. 망각은 곧 죽음의 이미지다. 그녀를 애지중지 키운 노인은 히메가 없는 인생에 무상함을 느낀다. 그는 불사약을 거부하면서까지 병상에 누워 지냈다. 다섯 명의 귀공자, 임금은 히메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지 못한 실패한 남자들이다. 이 중에 가장 불쌍한 남자는 제비 둥지 속에 있는 환상의 조개를 찾으려고 했던 이소노가미노 마로타리(中納言石上のまろたり). 그는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바구니를 타고 제비 둥지 안을 살펴보다가 그만 부뚜막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소노가미는 조개를 구하지 못했고,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남자의 생명은 허리인데...) 자신이 평생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에 이소노가미는 부끄러워했다. 그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접한 히메는 그에게 위문의 편지를 보냈고, 이소노가미는 히메에게 보내는 답가를 쓰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임금도 히메의 부재에 상심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와카로 표현했는데, 그 속에 인생의 허무함이 짙게 배어있다. 이 문장이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날 수 없어 눈물로 지새우는 이내 처지에

불사약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ふことも なみだにかぶ には

なぬかはせむ

 

 

다케토리 모노가타리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운명과 삶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한 편의 우화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슬픈 줄거리와 결말은 단지 삶의 허무함과 인간 생명의 제한성을 표현하기 보다는 삶의 본질과 사람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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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왔으면 언젠가 가야하는 순리..이게 생의 허무...불변의 진리이겠죠. 하늘에서 어댓길래 왔을까요..

cyrus 2016-07-09 08:05   좋아요 0 | URL
히메의 진짜 정체가 궁금했었는데,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습니다. ^^;;

단발머리 2016-07-09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정말 재미있네요.
달나라 공주님 이야기요~~^^
하늘 날개옷을 입으면 인간 세상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것도... 뭔가 쓸쓸하면서도 근사해요~~

cyrus 2016-07-09 08:07   좋아요 0 | URL
지브리 스튜디오가 이 원작을 삼은 애니메이션을 만든 적 있습니다. 2014년에 ‘가구야 공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만화를 보셔도 좋습니다. ^^
 

 

 

 

제목만 보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 까는 글로 보셨다면, 낚인 겁니다. 파닥파닥!

 

 

 

 

 

 

 

 

 

 

 

 

 

 

 

 

 

 

 

 

 

 

1993년에 때아닌 ‘아라비안나이트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김준선의 <아라비안나이트>라는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더니 015B 객원가수 출신인 김태우의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도 주목을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태우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이미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잠깐 1993년에 나온 옛날 신문을 살펴보자.

 

 

 

 

 

 

동아일보에 실린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 책 광고다. 이때 당시 김태우의 노래가 서서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출판사는 긴 제목의 책이 1992년에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광고로 알렸다. 그러면서도 해당 광고가 김태우의 노래와 관련이 있다고 뻔뻔하게 밝혔다. 노래 인기에 기대어 책을 팔아보려는 출판사의 개수작이다. 김태우가 부른 노래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라비안나이트와 전혀 상관없다. 지금도 나는 이 노래 제목의 ‘아라비안나이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라면서 ‘고층빌딩’과 ‘보도블록’이 웬 말이냐.

 

아라비안나이트는 오랜 세월 동안 원작이 축약되는 과정에 이야기 일부는 삭제되고, 원작에 없는 엉뚱한 장면이 삽입되기도 했다. 어린이 동화로 만든 축약본과 완역본을 비교해보면 내용상 확연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완역본을 읽어보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알라딘, 알리바바, 신드바드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명성을 드높인 4대 주인공이다. 특히 알라딘은 ‘알라딘의 요술 램프’라는 제목으로 동화로 각색되었고, 애니메이션이나 연극, 영화로 많이 옮겨졌다. 아라비안나이트라고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가 알라딘과 요술 램프일 것이다. 보통 알라딘을 아랍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1992년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무대는 페르시아풍 도시 ‘아그라바’다. 애니메이션 주인공 알라딘은 원숭이 아부와 함께 사는 좀도둑으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이 워낙 유명해서 디즈니의 설정과 아라비안나이트 원작 설정을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알라딘은 원래 중국 사람이다. 당연히 알라딘이 사는 곳도 중국이다. 앙투안 갈랑은 중국 설화로 알려질 뻔했던 이야기를 아라비안나이트에 편입했다. 프랜시스 버턴도 갈랑의 전례를 그대로 따랐다. 알라딘은 중국인으로 나오지만, 작중 무대에 변화가 있었다. 갈랑은 아랍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중국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심지어 중국을 다스리는 군주를 ‘술탄’으로 표현했다. 애니메이션의 알라딘은 심성이 고운 좀도둑으로 나오지만, 원전의 알라딘은 철없는 백수다. 고집에 세며 버르장머리가 없고, 일하기 싫어하는 캐릭터다. 알라딘의 어머니는 밖에 싸돌아다니기만 하는 아들이 걱정된다.

 

아프리카에서 온 마법사가 알라딘에게 삼촌인 척하면서 접근한다. 마법사는 알라딘을 이용해 신비스러운 정령이 사는 램프를 얻으려고 한다. 마법사의 계략에 걸려든 알라딘은 램프가 숨겨둔 지하 동굴에 갇히고 만다. 알라딘의 손에 마법사가 준 마법의 반지가 껴 있다. 알라딘은 반지의 정령을 불러내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정령을 만난 알라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자신감에 도취한다. 그는 술탄의 딸 바드룰부두르 공주(애니메이션 알라딘에 나오는 공주 이름은 자스민)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알라딘은 공주와 꼭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계획에 어머니를 끌어들인다.

 

여기서 어머니를 설득하는 알라딘의 모습이 ‘극혐’이다. 어머니는 공주와 결혼하려는 아들이 미쳤다고 봤다. 알라딘은 어머니가 직접 술탄을 만나 자신의 청혼을 알려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시더라도, 다시 한 번 제 결심을 분명히 밝히겠어요. 전 공주님께 청혼을 할 작정이에요.”

 

“정말이지, 이놈아!” 어머니는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넌 지금 너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녀석 같구나. 좋다! 네가 네 결심을 기어코 실행해야겠다고 치자. 그렇다면 술탄께 가서 청혼하는 일은 누구에게 부탁할 건데?”

 

“누구긴, 어머니죠!” 알라딘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이건 제가 어머니께 정말 간곡하게 부탁드리는 것이니, 제발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만일 거절하신다면, 어머니는 이 아들이 죽는 꼴을 보게 되실 거예요.”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5》 1445쪽, 글쓴이가 임의로 인용문을 편집했음)

 

 

알라딘은 어머니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요술 램프를 가졌는지 모른다. 알라딘이 어머니에게 요술 램프의 실체를 밝힌 뒤에 본인이 직접 술탄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알라딘의 주체적인 행동이 돋보였을 것이다. 그 속에 알라딘의 영웅적인 면모가 부각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알라딘은 어머니가 있어야 공주와의 청혼이 가능하다면서 억지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알라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용감한 영웅이 아니다. 흙수저 주제에 운 좋게 요술 램프를 얻어 단번에 금수저로 변신한 백수건달이다. 알라딘의 어머니는 알라딘과 공주를 이어준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알라딘이 술탄의 총애를 받고 공주와 함께 살면서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축약본에도 알라딘의 어머니가 없다. 알라딘을 혼자서 난관을 극복하는 훌륭한 영웅으로 만들고 싶은 창작자들이 백수건달을 고아로 만들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늘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사랑은 너무나 큰 자식의 그림자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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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0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알라딘이 중국사람이었다니...놀랐습니다..ㅎㅎㅎㅎㅎ

cyrus 2016-07-07 15:05   좋아요 0 | URL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 삽화를 보면 알라딘이 변발을 하고 있습니다. ^^

아무 2016-07-0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에는 반지 정령과 램프의 정령이 다 있었어요. 삼촌인 척 접근하는 마법사도 있었고.. 나중에 램프를 몰래 훔쳐서 알라딘만 남기고 궁궐과 공주를 옮겨버렸나 그랬던 거 같은데..
그나저나 알라딘이 중국 사람이었다니 정말 충격이네요.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cyrus 2016-07-07 15:06   좋아요 0 | URL
저는 반지의 정령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알라딘 원전을 보면 반지의 정령의 존재감이 대단합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뺏겨서 위기에 빠졌을 때 큰 도움을 준 이가 반지의 정령입니다.

마립간 2016-07-07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비안 숫자가 인도 숫자라는 반전만큼

알라딘이 중국 사람이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네요.

cyrus 2016-07-07 15:0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한 번 정도 봤기 때문에 원전보다는 만화 속 알라딘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6-07-07 15:22   좋아요 0 | URL
제 기억의 기본은 TBC에서 방송한 `신밧드의 모험`이고,

이후 제가 읽은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 책 속의 소제목 `짐꾼 신밧드와 뱃꾼 신밧드`를 포함한 이야기로

어린이용도 아니고 성인용도 아닌 청소년 축약본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교적 분량이 되는 책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도 중국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마립간 2016-07-08 10:51   좋아요 0 | URL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읽었던 책에서 `알라딘`의 이야기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cyrus 2016-07-08 16:41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아라비안나이트 선집 중에 ‘알라딘’이 빠진 것도 있을 겁니다. ^^

붉은돼지 2016-07-0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낚인 돼지 한마리 있습니다. ㅋㅋㅋㅋ

cyrus 2016-07-07 15:09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라고 적지 않았네요. 저의 어설픈 장난에 속아주셔서 고맙습니다. ^^

stella.K 2016-07-0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싱겁긴...! 아닌가...?ㅋㅋ

cyrus 2016-07-07 21:36   좋아요 0 | URL
제가 여기 떠들어봤자 알라딘이 달라지는 일이 없을 겁니다.
마음에 안 들면 알라딘 브렉시트 해야겠어요. ㅎㅎㅎ

2016-07-08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하는 일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캐릭터가 있다. 이들을 민폐 캐릭터라고 한다. 본인들은 정작 순진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아 얄밉기까지 하다.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가만히 있기만 해준다면 고마울 지경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민폐 캐릭터가 나온다. 책 속에 나오는 대사로 민폐 캐릭터를 소개해본다.

 

나는 어젯밤에는 모술의 상인이었지만, 지금은 영광스러운 압바스 왕조의 일곱 번째 칼리프이며,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리를 계승한 하룬알라시드요!”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1296)

 

잠깐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오류 두 가지가 있다. 천일야화는 하룬 알 라시드(Hārūn al-Rashīd)하룬알라시드로 붙여 썼다. 역자가 칼리프의 이름을 왜 붙여 썼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칼리프는 자신을 아바스 왕조의 일곱 번째 칼리프라고 잘못 소개했다. 하룬 알 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다섯 번째 칼리프다. 그의 아버지 알 마흐디는 제3대 칼리프이며, 알 라시드의 형이 칼리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알 라시드가 즉위했다(786).

 

하룬 알 라시드는 셰헤라자드, 알라딘, 신드바드, 알리바바와 함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알 라시드가 등장하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바그다드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 라시드와 함께 등장하는 대재상 자파르와 왕궁 호위대 대장 메스루르도 실존 인물이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어린이용 동화로 축약되는 과정에 알라딘, 신드바드 등의 캐릭터가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룬 알 라시드의 존재가 잊혔다. 축약본 아라비안나이트를 기억하는 독자는 당연히 하룬 알 라시드가 누군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러분이 읽었던 축약본에 이름 없는 과 재상이 나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면, 그 왕이 하룬 알 라시드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천일야화에 알 라시드가 나오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1왕의 아들 세 탁발승과 바그다드의 다섯 아가씨 이야기, 2세 개의 사과이야기, 3알리 이븐 베카르와 하룬 알 라시드의 총비 솀셀니하르의 이야기, 4눈 뜬 채 꿈꾼 아부 하산 이야기, 5하룬 알 라시드의 모험이 전부다. 사실 프랜시스 버턴의 무삭제판에는 알 라시드가 등장한 이야기가 많다.

 

 

 

 

 

 

 

 

 

 

 

 

 

 

 

 

 

 

 

알 라시드는 성격이 조급하다. 그리고 호기심이 쓸데없이 많다. 그는 민심을 살펴보기 위해서 귀족으로 분장하여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다닌다. 칼리프가 외출하는 날에 재상 자파르와 호위대장 메스루드를 동행한다. 밤에 거리를 걷다가 칼리프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집을 발견했다.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한 칼리프는 나그네인 척하고 문제의 집을 방문했다. 재상은 칼리프의 호기심을 막으려고 했지만, 왕명을 어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집에는 조베이드와 아민느라는 자매가 살고 있었다. 자매는 칼리프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마침 집 안에는 세 명의 탁발승도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칼리프 일행과 세 명의 탁발승에게 자신에 관해서 궁금하더라도 절대로 묻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칼리프는 자매의 정체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재상은 칼리프를 차분하게 타이른다. “폐하, 몹시 궁금하더라도 저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이를 어기면 우리들의 정체가 탄로 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칼리프는 자신의 신변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재상의 진심을 몰랐다. 끝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조베이드와 재상의 뒤통수를 아주 시원하게 쳤다. 분노한 조베이드는 약속을 어긴 대가로 그 자리에 칼리프 일행과 탁발승 일행을 죽이려고 했다. 칼리프의 경솔한 호기심 때문에 한참 잘 먹고 푹 쉬던 사람들 모두 목숨이 잃을 상황에 부닥쳤다. 다행히 세 명의 탁발승들이 자신들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한 덕분에 칼리프 일행은 살아남았다. 조베이드의 분노가 거의 사라지자 알라시드는 자신은 상인이 아니라 위대한 칼리프라고 떳떳하게 고백했다. 그래서 세 탁발승 이야기는 칼리프로 시작해서 칼리프로 끝난다.

 

 

 

 

 

 

 

 

 

 

 

 

 

 

 

 

 

 

 

알 라시드는 8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랍 제국을 지배했다. 그가 제국을 다스리던 시기는 바그다드의 황금기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를 엎으려는 반대파들의 음모가 사그라지지 않았고, 복잡한 분쟁 해결을 거의 재상 자파르에게 맡겼다. 사실 자파르가 제국을 통치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알 라시드는 시를 쓰고, 술을 즐기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런데 알 라시드는 갑자기 자파르와 그의 일가들 모조리 죽여 버렸다. 공교롭게도 재상의 처형을 담당한 사람은 호위대장 메스루르였다. 칼리프가 무슨 이유로 재상을 제거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설에 따르면 칼리프가 재상을 질투해서 죽였다는 설이 있고, 자파르 일가(바르마크 가문)가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것이 멸족의 화근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파르가 처형당한 이후 알 라시드 혼자 정세를 살피게 되었다. 오히려 이때부터 반대파들의 불만이 거세졌다. 자파르의 부재가 너무 컸다. 알 라시드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이 칼리프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천일야화2세 개의 사과편에 보면 재상을 향한 칼리프의 본심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칼리프가 참혹하게 살해된 여인의 시체를 보고 재상에게 벌컥 화를 낸다. 무엇보다도 웃긴 것은 재상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호통 치는 칼리프의 모습이다. 여인을 살해한 범인을 잡지 못하면 재상과 마흔 명의 일족들을 처형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칼리프는 정말 재상이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것일까? 알 라시드는 놀고먹고 지내느라 나라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면서 자신의 잘못을 재상에게 덮어씌웠다. 이쯤 되면 알 라시드는 진짜 민폐 캐릭터다. (우리나라에도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측근들 탓으로 돌리고, 측근들이 대신 대국민 사과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분이 있다. 그분은 외국에 돌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버턴 무삭제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을 때 알 라시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유심히 지켜보시라. 다만 그의 행동을 보다가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의 앞날을 꼬이게 하는 엄청난 민폐력 덕분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하룬 알 라시드. 그는 좋은 민폐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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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월드북판 천일야화에 드는 의문^^;;;
    from 퀸의 정원 2016-07-06 00:20 
    cyrus님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한 글을 올리셨더군요.저도 책을 읽으면서 하룬 알 라시드란 술탄에 대한 기억이 나는데 cyrus님이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그러면서 알라딘에 있는 아라비안 나이트 책을 올려주셨더군요.맨처음에는 그냥 스치듯 책을 봤는데 아무래도 한개의 삽화가 눈에 상당히 익습니다.5권의 삽화가 상당히 눈에 띠는데 바로 제가 가지고 있던 69년에 동서에서 간행된 무삭제 비장본 천일야화에 수록된 삽화입니다.<ㅎㅎ 똑같
 
 
yureka01 2016-07-04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문득..여기도 알라딘이었네요..ㅋㅋ 긴 글 잘 읽었씁니다!~

cyrus 2016-07-04 20:31   좋아요 1 | URL
조만간 알라딘 까는 글을 쓸 생각입니다. ㅋㅋㅋ

표맥(漂麥) 2016-07-0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괜찮다고 느껴집니다. 왜? 도대체 제가 읽은 천일야화는 뭐였는지 모르겠다는...^^

cyrus 2016-07-05 10:28   좋아요 0 | URL
아라비안나이트 판본이 여러 개 있어서 내용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판을 제대로 읽으려면 여러 판본을 다 읽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힘든 일입니다. ^^;;

transient-guest 2016-07-05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2년에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갑자기 출판계에서 `성`이 해금된 적이 있죠. 이때 나온 책들을 보면 본문과는 무관하거나 억지로 성관계 장면을 넣은 것들이 꽤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책도 좀 그런 듯 한데, 원저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애의 묘사는 그 노골적인 수준이 거의 야설에 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도 제대로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이렇게 다양한 판본을 구해야하는 지난함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군요.ㅎ

cyrus 2016-07-05 12:21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버턴은 아라비안나이트를 편집할 때 선정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버턴의 아내는 남편 사후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삭제한 축약본을 다시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와 원본을 비교하면 많은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분의 서평을 참고하면서 알아봤는데요,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총 5권의 프랜시스 버턴 무삭제판이 있는데, 버턴의 주석까지 꼼꼼하게 옮겼습니다. 단점이라면 글자 폰트가 작고, 이야기가 너무 많은 점입니다. 읽다가 지루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

무삭제판 읽기가 부담스러우면 열린책들에서 나온 앙투안 갈랑 판본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