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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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상한 신문에서 따뜻한 자본주의 3.0 시대를 준비하라는 뭐 그런 식의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자본은 생리적으로 따뜻할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의 안전이나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매일 같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을 정도로 산업재해가 많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그 노동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조금은 살벌했나?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 것을.

 

<자폐가족> 이야기로 시작되는 정지아 작가의 <자본주의의 적> 소설집을 보면서 든 사유의 파편들이었다. 작년 세간에 화제가 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정지아 작가를 알게 됐다. 만부 작가답게, 나의 레이더망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책의 발간 순서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보다 <자본주주의 적>이 먼저 나왔지만 왠지 모르게 전자가 후자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을 평생 달고 살아야 했다. 박사님에 교수님이 되어서도, 샤넬백을 매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출신은 사회주의자의 자식이면서도 자유와 평등 혹은 공평한 분배 같은 고상한 이데올로기 용어보다도 누가 봐도 산뜻한 샤넬에서 만든 클래식 플랩백을 갖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가 없는 욕망이다. 작가의 고백처럼,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그야말로 무한으로 유도한다. 신상백, 자동차 그리고 휴대폰 삼총사는 욕망의 디폴트로 제시되며 시대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꼬맹이조차 아이폰 타령을 해대니 할 말이 없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본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방현남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십년도 넘은 차를 타고 있으며 핸드폰은 직장 동료가 넘겨준 것을 수년째 사용하고 있다. 내가 왜 남들이 타는 그런 삐까뻔쩍한 신상 자동차 그리고 최신형 휴대폰을 사용해야 하는 거지? 어쩌면 경쟁을 아예 포기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물질적 소유로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그런 심리적 만족감을 욕망은 노린 게 아닐까. 방현남 패밀리처럼 새로운 것이나 사람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지만(사실 좀 너무 극단적 설정이 아닌가 싶다),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보수적 성품이라 그런 지도 모르겠지만.

 

설원 출신의 개의 입장에 대입해서 작금에 자신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다. 화자가 사람인가 개인가 헷갈렸다. 그러다가 개를 의인화해서 주인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그 무엇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이데올로기 전사로 산사람이었던 작가 부모들의 이상적 도전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처 사는 똥개는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에 길들여져 버렸다. 고기를 임금으로 치환하면, 자본가가 던져 주는 얼마 되지 않는 임금에 영혼을 파는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 댕댕이는 주인의 선심 삼아 던져주는 삼겹살 대신 이웃의 닭을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그리고 자신을 덮친 똥개를 비웃는다. 그것 참. 주인의 먹이는 거부하고 남의 걸 몰래 잡아먹는 건 괜찮다는 말인가? 그 닭들은 심지어 이웃이 애지중지하던 오골계였다고 한다. 똥개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건사하게 되는 웃픈 상황도 이어진다.

 

댕댕이 스토리는 나중에 새끼 냥이들을 내팽개친 어미 고양이 서사로 이어진다. 잘 나가는 로펌 대표 변호사 지원을 애인이자 미래의 남편감으로 둔 화자는 얼결에 고양이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결혼이나 출산 같은 일보다 현재 자신의 커리어가 더 중요하다. 남친 지원은 자신이 일과 자신의 애인이 최근에 돌보게 된 고양이보다도 못하다는 투정을 날린다. 집사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성장 배경과 사회적 조건들이 상이하게 다른 객체들의 이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포기하는 거지. 어떤 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조차 물적 토대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직격하지 않나 싶다.

 

K읍에 사는 원어민 교사들의 이야기도 심상하게 다가온다. 독서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 서울에서 지내던 그들과 접점이 있어서일까. 편리함과 즐거움을 원한다면 응당 서울에서 지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거창하게 세계화 경쟁에서 밀려난 스텔라나 존 같은 이들이 남도의 어느 카페에 모여 봄밤 축제에 참가하고 그러며 산다는 거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가 끊임없이 선전하고 불안을 조성하는 소비와 성공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에 대해 걱정하라는 부추김이라고나 할까. 남도에 사는 우리 친구 B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전부터 구상 중이라던 글쓰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못한 지 참 오래됐다.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케냐 커피 피베리를 즐겨 마시고, 안캅 팔레르모 잔의 미학을 아는 화자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나에게 커피란 그저 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데 또 누군가에게는 수준 높은 취향의 문제로구나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한 번 피베리 커피를 먹어 보겠다고 근처에서 파는 곳이 없나 찾아보겠지만, 이젠 그럴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 것이고 나는 또 내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을 때,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어제 도서관에 이 책을 빌리러 갔는데, 보통 사이즈의 책이 대출 중이어서 큰글자 책으로 읽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큰 글자책이 나쁘지 않았다. 큰 글자든 작은 글자든 내용이 중요하지 껍질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소설집에 실린 9편의 소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계속해서 자본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우리 평범한 독자들의 각성을 위해 건필해 주시길 바란다. 그나저나 정지아 작가가 표제에서 규정한 자본주의의 적은 어지간한 것도 사지 않는 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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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1-09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 글자 책 궁금했는데 나쁘지 않군요@_@;;; 저도 자본주의의 적인가봐요.ㅎㅎ(은근슬쩍 레삭매냐님과 한 편 하고 싶은^^;;;) 십년 훨씬 넘은 차를 애지중지하며 타고 있어요. 신상백 같은 건 전혀 관심 없고 휴대폰 먹통 되어야 바꾸고ㅎㅎ;;;;

레삭매냐 2023-01-09 20:56   좋아요 1 | URL
오호라 저의 편이 여기 있으
셨군요, 달밤 동지님하 !!!

옷도 닳을 때까지 입은 닝겡
이가 바로 저랍니다. 구식이
지요.

헤진 청바지 보수해서 입겠
다고 세탁소에 맡겼다가 돈
만 날렸습니다 ㅠㅠ

고양이라디오 2023-01-10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군요ㅎ 레삭매냐 님 덕분에 정지아 작가 다음 책 정했네요ㅎ

레삭매냐 2023-01-10 19:12   좋아요 1 | URL
출간 순서로는 <해방일지>에
앞서 나온 책이더라구요 :>

부담스럽지 않은 소설집이었
습니다.

그레이스 2023-0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2022년 베스트셀러였더라구요?!
읽어봐야겠어요.
이 책이 먼저면 이것부터 읽어얄까요?

레삭매냐 2023-01-12 10:21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적>
을 읽고 나신 다음에, <해방일지>
를 만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3-01-12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소설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레삭매냐 2023-01-12 15:07   좋아요 0 | URL
정지아 작가 삶의 내력을
살펴 보면, 제목의 유래가
읽힌다고나 할까요.

<해방일지>와 셋트인 책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을 읽고 나서, 비축해 둔 그녀의 다른 작품 <바다의 긴 꽃잎>에 돌입했다.

 

작년 말에 램프의 요정에서 중고책 할인해 준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 나가서 사온 책이다. 지금 열심히 읽고 있다.

 

그 때 같이 산 책이 에시 에디잔의 <워싱턴 블랙>이다. 이 책도 읽기 시작하긴 했었지. 바베이도스 노예 제도를 다룬 기대작 <워싱턴 블랙>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그 어느 소설보다 잔혹해서 당분간 접어 두었다. 리얼리티라면 정말...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전에 본 영화 <안테벨룸> 생각이 자꾸만 났다.

 

현실의 미국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완전히 불가능하지 않을 만한 그런 설정이지 싶다. 그만큼 인종차별의 유구한 역사는 지울 수가 없다는 거겠지. 사람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편견을 수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고.

 

내가 새해 으로 산 책은 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이었다. 잔뜬 쟁여둔 적립금과 럭키백 할인으로 7,900원에 데려왔다. 조금도 책값이 아깝지 않았다.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사냥한 드문 책이었다.

 

칠레와 볼리비아/페루가 맞붙은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 궁금해서 군사전략연구소인가에서 나온 논문을 다 찾아봤다. 지금까지도 분쟁 중인 아타카마 사막과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해 알 수가 있었다.

 

다시 <바다의 긴 꽃잎>으로 돌아가 보자. 1938, 프랑코 파시즘에 맞서 싸운 공화군 소속 일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빅토르 달마우는 내전의 성패를 가른 테루엘 전투에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동생 기옘은 에브로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마르셀 류이스는 돌아 가시기 전에 차남의 전사를 예언하고, 프랑코 독재가 시작되면 엄청난 보복이 따를 거라며 어머니와 딸 같이 지내던 피아니스트 제자 로세르 브루게라를 데리고 망명을 떠나라고 권한다. 패배한 사람들의 집단 망명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목적지는 아마도 칠레겠지.

 

내가 살던 집, 언어, 사회 문화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에 가서 정착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나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에스파냐 말을 쓰니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내전 기간 동안 프랑코 독재집단의 공화파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만 줄로 알고 있었다. 물론 프로파간다이긴 하지만 공화파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만행 역시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제와 수녀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돌려 살해하고, 포로로 잡은 국민전선 포로들은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사실 조금 충격이었지만, 공화파가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그들 역시 프랑코 못지 않은 보복을 자행했을 거라고 앤서니 비버는 말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불굴의 전사 기옘의 말을 빌어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있었노라고 서술한다. 이런 균형 잡힌 서사를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국민전선 일파가 실질에 중점을 두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면, 공화파의 지나친 이상주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서방의 지원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새해 첫 주말, 나는 그렇게 <바다의 긴 꽃잎>이 구사하는 장대한 서사에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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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3-01-09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균형잡히고 장대한 서사....궁금해집니다~~

레삭매냐 2023-01-09 20:54   좋아요 0 | URL
연초에 여러 책들을 번갈아
가며 읽다 보니 순위가 좀
뒤로 밀리긴 했어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읽고 있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이
들이 위니펙 호에 올라 칠레
로 망명한다는 설정이 참 -

흥미진진의 연속입니다.
 
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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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회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주말어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물고기 잡는데 미친 듯이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종은 도미였는데, 밑밥을 물었을 때 파르르 떨리는 손맛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엄청 많이 잡았는데 누가 다 먹었는지 모르겠다.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 소설집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때 잡던 도미 생각이 났다. 자목련님을 통해 알게 된 책, <방어가 제철>을 읽었다.

 


130쪽 남짓한 얇다란 책에는 세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다 읽고 나서 왜 자꾸만 군침이 도는 걸까. 우리 인간은 먹지 않고 살 수가 없다. 다른 조건은 몰라도 끼니 때우기라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첫 이야기 <달밤>의 화자는 생일을 맞은 아는 지인을 위해 생일상을 차리고, 또 망자가 된 작가 언니를 위해서는 제상을 차린다.

 

그러니까 끼니, 음식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다. 뭐랄까 음식이라는 기준점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말일까. 그 중심에는 육개장이 살포시 자리한다. 아마 외국의 독자들은 이런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음식들에 대한 정감을 그리고 말맛을 알 수 있을까. 미슐랭 셰프들이 만드는 거창한 요리가 아닌 이런 소박한 요리의 조리 과정이 정감 있게 다가온다. 그렇게 우리는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했던 음식 혹은 끼니의 추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절친과 불쑥 떠났던 어느 늦여름, 지리산 피아골에서 먹은 닭백숙의 추억이 피어난다. 얼음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쏘주 댓병을 까고 나서 친구는 피로에 곯아떨어졌다. 너무 시원해서 취한 줄도 몰랐지. 그전에 시킨 닭백숙을 그나마 덜 취한 나 혼자 뜯어 먹던 기억.

 

같이 했던 끼니를 통해 망자의 기억을 소환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짠하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소멸하게 되겠지. 언젠가 한 줌의 재가 될텐데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폭풍처럼 몰려든다.

 

표제작인 <방어가 제철>은 사실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붙은 해설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죽은 화자의 오빠의 친구였던 정오 선배(?)는 겨울이 되면 화자에게 방어회를 사주었다. 술은 안동소주를 먹었던가. 그 둘은 청소년 시절을 같이 보낸 전우 같은 존재였던가. 아니 오빠와 정오 사이에 들러붙은 곁다리? 영화에 미쳐 살던 그 시절의 영화잡지 <키노>와 왕칼 아니 왕가위의 전설적인 <중경삼림>의 제목을 읽는 순간, 할리우드 키드를 꿈꾸던 시절의 소소한 기억들이 즉각적으로 소환된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아니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되는 대로 살자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들인 정오와 화자 모두 과거에 잘못된 무언가를 고치거나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그날 오늘의 하루를 덤덤하게 사는 것이다. 각장의 일터에서. 화자는 14년 전에 잃은 아들 때문에 생긴 술병으로 결국 간이 상해서 돌아가셨다. 예중에 진학해서 미대생을 꿈꾸었던 화자는 오늘도 어머니가 이모님들과 하시던 반찬가게의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에 자신을 구겨 넣는다. 어떤 지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그냥 아무 일도 없이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우리 보통사람들의 심리에 안윤 작가는 총알을 명중시킨다. 부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부디 어제와 오늘이 같기만을 바랄 뿐이다. 젊어서는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을 한탄했었는데 그 반대를 바라게 된 걸 보니 확실히 늙긴 늙은 모양이다.

 

원래 기름진 생선 대신 단백한 녀석들을 애정했는데, <방어가 제철>을 읽고 나니 얼마 전 너튜브에서 본 바닷가 갯바위에서 통통한 잿방어를 잇달아 걷어 올리던 강태공들 생각이 났다. 그렇지 낚시는 모름지기 갯바위가 최고지. 오늘 점심에는 스시가 먹고 싶어졌다.

 

<만화경>에도 어김없이 죽음과 끼니가 등장한다. 남편과 이혼하고 새롭게 둥지를 나경의 이야기. 친구는 애 둘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 가끔 전화를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게 친구 사이는 멀어져 간다. 자주 보지 못하면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하면 관계는 소멸의 수순으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전화 연락인 카톡이라는 끈을 유지해야 하는 게 우리네 관계의 숙명인가.

 

집주인 숙분, 세입자 나경 그리고 숙분의 고향친구 단심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살갑다. 여자들은 연대해서 음식을 나눈다. 치자 가루를 넣어 노릇노릇한 때깔의 부침개라고 했던가. 남자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먹거리 제조법이다. 확실히 신이 여자를 나중에 창조해서 남자보다 현명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삶은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건강한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나경의 전에 살던 세입자 미리내의 이야기에 문득 숙연해진다. 그리고 환풍구에 붙여진 야광별 스티커도.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예의 야광별 스티커가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줄까라는 부질 없는 환상을 품어본다.

 

다른 소설도 좋았지만, 집필 후기 같이 맨 끝에 실린 에세이는 더 좋았다. 무뎌진 고통이라.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는 이상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소중해질 기회가 박탈된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 한 방의 정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책무더기는 논외로 하자. 홍콩에서 왔다는 철제 쿠키 상자를 필두로 해서 오만 것들을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살아간다. 마음 같아서는 50리터 짜리 종량제 봉투에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모두 다 때려 넣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종량제 봉투에 투척하기 전까지의 마음이고, 그 순간에 또 변심할 거다. 나만의 이유를 만들어내며 그런 잡동사니들을 끌어안고 가야할 논리를 순식간에 만들어내겠지. , 왠지 꽁꽁 숨겨둔 속마음을 들켜 버린 느낌이랄까. ‘공간 낭비라는 말에 찔끔했다.

 

짧지만 강렬한 글들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다 읽고 나니 개운했다.

, 책에서 만난 네그리타 5구를 주문했다. 구근이 4천원, 배송료가 4천원이었다. 봄에 멋들어진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봄을 기다린다.

 


[뱀다리2] 점심은 예고한 대로 스시를 먹었다.

원래는 9,900원 세또를 먹으려고 했으나...

이천원 더 얹어서 포식을 했다.


이제 만원으로는 맛난 점심 먹기가 어려워졌다.



새우와 대게 덴뿌라는 일품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츄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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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1-06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밥을 물었을 때 파르르 떨리는 손맛의 추억˝이라고 쓰신 것을 보니
주말어부라 불리실 만 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중독성이 깊게 느껴집니다!
네그리다가 어떤 꽃인지 몰라서 검색해봤어요.
그랬더니 ‘네일 그리다‘와 ‘네그리‘만 검색이 되네요. ^^;;
암튼 작년 한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23-01-06 14:55   좋아요 0 | URL
그 땐 그랬지이~~~
카오 참말로 그립습니다,
그 시절이.

같이 다니던 동생들 밑밥
도 죄다 끼워 주고 채비도
맹글어 주고 그랬는데 말
이죠.

한 번은 클램으로 갈매기
도 잡...

네그리타는 보라돌이 튤립
품종이랍니다.

* 밥 먹으러 가느라 서둘러서
치다가 그만 오타가 나고 말
았네요. ‘네그리타‘라고 합니다.

독서괭 2023-01-06 14:40   좋아요 1 | URL
저도 궁금해서 검색에 돌입 ㅋㅋ ‘네그리타‘라고 치니 나옵니다^^ 색깔이 예쁘네요.

바람돌이 2023-01-06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반대
저는 낚시는 좋아하지 않고, 회는 엄청 좋아합니다. 지금 딱 방어철인데 아직 못먹었어...ㅠㅠ
레삭매냐님이 말하는 이 소설은 뭔가 아련한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네요. ^^

레삭매냐 2023-01-06 15:46   좋아요 1 | URL
지금이 방어철이로군요.

파도가 촤아~ 치는 바다
에서 시간을 낚는 낚시야
말로 감히 최고의 레저라
고 생각한답니다.

아련함 크하.

독서괭 2023-01-06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의 마음을 찔끔하게 만든 에세이 ㅎㅎ
마지막 튀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역시 먹는 건 중요하지요.
˝그냥 아무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 아 저도 점점더 그런 것 같아요. 평온하게 지나간 하루가 소중합니다. 저녁도 맛있게 드세요^^

레삭매냐 2023-01-06 15:51   좋아요 1 | URL
술밥향꽃으로 이루어진 소설들도
좋았지만, 엔딩의 에세이가 만점
이었습니다.

튀김, 카오 ~

되는 대로 살자주의자인 제게
오늘도 그저 무사히 -

오늘 저녁에는 매주 금요일마
다 세일한다는 바른치킨의 치
킨을 먹습니다.

자목련 2023-01-09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모의 트리플 시리즈는 말씀처럼 마지막의 에세이가 더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읽고 바로 리뷰를 쓰시는 매냐 님, 대단하세요^^

레삭매냐 2023-01-09 13:1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덕분에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이 방어철이라고 어제
장에 갔더니, 어물전 주인장
이 목이 터져라 외쳐서 살포
시 웃었답니다.

인스타에 올린 피드에는 안윤
작가가 들러서 살짝 좋아요
누르고 가셨더라구요 ㅋㅋㅋ

자목련 2023-01-12 13:07   좋아요 1 | URL
아마도 안윤 작가 님이 더 좋으셨겠지 싶어요.
인스타의 세계, 저도 시작해볼까 싶은 요즘입니다. ㅎ
 
글렌 굴드 - 그래픽 평전 푸른지식 그래픽 평전 8
상드린 르벨 글.그림, 맹슬기 옮김 / 푸른지식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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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 진심이다. 다른 건 항상 늦장을 부리지만 궁금한 책은 신속하게 빌리거나 사들인다. 인스타 피드에서 캐나다 출신 글렌 굴드의 그래픽 노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검색해 보니 신간이 아니라 지난 2016년에 나왔다고 한다. 마침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과 함께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저자 상드린 르벨은 아마 괴짜이자 기인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를 담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봤으리라. 하지만 그가 남긴 여백은 너무 많다. 아무래도 이 정도만으로는 부족하지 싶다. 더 알고 싶다면 글로 된 책을 읽어야지 않을까.

 


그의 대표 레코딩은 1955년 그러니까 그가 23살 때 녹음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데뷔 시절부터 그는 기행으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레코딩 엔지니어들은 그가 연주하면서 내는 허밍 소리와 박자에 맞춤 발소리 그리고 의자의 끽끽 거리는 소리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물론 괴짜 피아니스트가 그들의 그런 요청을 들어줄 리가 있나 그래. 결국 허밍은 방독면을 쓰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사실이라면 굴드는 진짜 또라이 연주자였으리라. MSG가 너무 많이 들어갔나. 그것도 아니라면 훗날에 만들어진 신화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강박증으로도 유명했다. 사람들과의 악수도 거부했다. 사람마다 악수하는 방식은 다른데 보통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아구에 힘을 줘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 방식은 이 강박증과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에게는 최악이었다. 아주 섬세한 악수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와 악수하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다.

 

호수에 낚시를 하러 가서도, 낚아 올린 물고기들의 죽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중에 성공해서는 버림받은 동물들을 위해 큰 농장을 설립할 거라고 했나 어쨌나. 반백년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고 지구별을 떠난 기인 피아니스트답게 기행에 대한 전언들도 차고 넘친다.

 

보통 연주자들은 관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아니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굴드였다. 그는 관객이라는 집단을 혐오했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르고 미 전역을 도는 연주 여행을 해야 했을 때, 얼마나 피곤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결국 서른 몇 살 전성기 때, 대중 앞에서 연주를 포기하고 침잠에 돌입한다.

 

대신 레코딩이야말로 이 괴짜 아티스트에게는 구원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가 장기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대위법 같은 클래식 음악과 용어를 전혀 모르니 그가 구사하는 음악 세계의 지평을 넓히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느 편집 소품 앨범에 담긴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인벤션 연주는 아주 오랫동안 즐겨 들었노라고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1975년 그에게 거의 강압적인 피아노 교육을 담당했던 어머니의 죽음, 강박증에 시달리던 젊은 날의 굴드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뒤죽박죽으로 등장한다. 보통 연대기 순에 따른 전개를 기대했던 나같은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쩌란 말이지? 그림체도 그렇지만,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어느 소설에서인가 북극에 가서 연주를 하는 굴드에 대한 상상을 그리지 않았던가. 하도 많은 글들을 섭렵하다 보니, 소설인지 무엇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냥 내가 원하는 바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독서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자기 마음대로 산 괴짜 피아니스트처럼 나 역시 그런 책쟁이이니 말이다. 전자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라면, 후자는 촌구석의 골방에서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쓰기의 업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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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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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산 첫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사두기만 하지 않고 바로 때려 읽었다. 왜 재밌으니까.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후예답게 즐거움, 몰입 그리고 의미까지 모조리 잡은 최고의 책이었다. 작년 여름에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사서 좀 읽다 말았는데, 그리고 연말에 산 <바다의 긴 꽃잎>도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거다.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말이지.

 

소설의 시작은 1880년 어느 가을의 화요일이다. 화자가 태어났다. 엄마의 이름은 미국 샌프란시코에 살던 절세미인 린 소머스. 생부는 마티아스 델 바예, 소설에서 아마존 여전사급의 신화적 인물로 등장하는 파울리나의 맏아들이다. 공화국 여신상 모델로까지 추앙받던 린은 딸 아우로라(중국 이름으로는 리밍)를 낳고 곧 죽었다. 화자의 탄생부터 무언가 파란만장 썰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은가.

 

칠레 출신의 파울리나는 펠리시나오와 눈이 맞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아마존 여전사의 치부 능력은 남자들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대박이 터진다. 미국에 철도에 깔릴 시절에는 철도 산업으로 한몫 단단히 챙겼다. 적어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먹고사니즘을 걱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든든한 재정이 필요한 법이다. 주인공 아우로라처럼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돈이 많이 드는 사진을 찍으려면 장비나 암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당시 가난뱅이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상황이리라. 그러니 훗날을 대비한 작가의 빌드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피렌체 장인이 만들었다는 넵투누스 침대의 두 개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화려한 배달 의식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 정도의 압도적 장관 정도가 등장해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자락이 깔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특유의 집안/가문에 대한 집착은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어김 없이 등장한다. 아마 그쪽 동네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최소 3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지. 어떤 면에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종교와 보수주의는 기성 세대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새로운 세대,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런 과거의 인습을 인정하지 않고 뽀개는 투사로 등장하는 클리셰이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존 여전사 파울리나는 그런 점에서 선을 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다음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매력적인 남자 세베로 델 바예다. 파울리나가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 유능한 인물로 어쩌면 자신의 사업을 보좌할 미래의 변호사로 꼽은 이가 바로 조카 세베로였다. 세베로는 어찌어찌하여 내기로 절세미녀 린을 품은 사촌형의 딸 아우로아의 법적 아버지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고향 칠레에는 그를 사랑하는 미래의 아내 니베아가 있는데 말이다. 훗날 그 둘은 무려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생산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직 장교 출신 세베로는 사랑하는 린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기껏 사랑하는 연인 니베아까지 버리고 장가를 들었는데 졸지에 자신의 애도 아닌 아우로라까지 거둬야 하는 홀아비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델 바예 가문의 성쇠와 세베로 연애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다음 무대는 전쟁과 내전이다.

 

187945, 칠레는 당시까지만 해도 패자 노릇을 하던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을 시작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기사와 논문까지 찾아보기도 했다.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읽기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 아니던가. 전쟁의 발단은 아타카마 사막과 당시까지만 해도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지역에서 나는 구아노와 초석 채굴에 대한 것이었다. 산업화 시대에 천연 비료인 구아노와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은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볼리비아는 칠레 사업가들에게 자국 원료 생산을 허가하고 면세 조치를 약속했지만, 나중에 뒤집어 버렸다. 그 결과, 갈등이 폭발하면서 전쟁까지 치르게 된 것이다.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이들만이 당시 세상의 끝인 칠레 정복에 나섰다고 한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칠레 병사들은 소설에 따르면 야만적이었다.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전쟁 초기에 칠레 VS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의 전력은 비등했지만 전세가 칠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칠레군이 페루의 수도 리마를 함락시키고, 볼리비아에서 안토파가스타 주를 빼앗는 대승리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볼리비아는 졸지에 태평양으로 나가는 영토를 상실하고 내륙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 전쟁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칠레-볼리비아 국경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린을 잃고 오로지 죽기 위해 이 야만적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세베로 델 바예는 수도 리마 공략을 앞두고 적(여성!)의 도끼날에 맞아 왼쪽발을 절단하게 된다. 그리고 든든한 빽으로 후방으로 이송되어 니베아의 초월적인 간호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보니 <바다의 긴 꽃잎>에 등장하는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도 전투에서 왼발 부상으로 다리를 절게 되지 않았나. 무언가 닮은 점들이 많이 연결되는 아옌데 작가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아 그리고 보니 몇 대째 중의(中醫) 출신으로 린의 아빠로 등장하는 타오 치엔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화자 아우로라의 아빠 노릇을 실제적으로 한 사람이자 훗날 그녀의 악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중국인 배척 조례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중국인들이 개와 비슷한 대접을 받던 시절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인술을 베풀던 인물로 평생의 연인 엘리사 소머스와 결혼(?)해서 맏아들 럭키와 린을 낳았다. 동시에 성노예로 팔려온 싱송 걸들을 구해내는 슈퍼히어로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로 돌아가 그렇게 칠레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아옌데 작가는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해 두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칠레의 열 번째 대통령이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였고 내전을 치르다가 자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혁명과 내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파울리나 델 바예는 매 순간마다 돈벌이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설탕 소비가 폭발할 거라는 예상 아래 투자한 설탕 투기 사업이 역시나 대박이 터진다. 남편 펠리시나오가 죽은 다음, 새 남편으로 들어선 영국 출신 집사 프레데릭 윌리엄스와 프랑스 포도주에 대항할 만한 칠레 포도주 생산을 위해 말년을 투자한다. 역사와 사회적 현상들을 다루는 작가의 놀라운 솜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빵에서 풀려난 정치인이 언젠가 FTA로 값싼 칠레산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마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칠레에서 바다 건너온 적포도주의 연원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산티아고를 오가는 신명나는 빌드업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화자인 아우로라 델 바예,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아우로라에게 생부 마티아스는 아름다움은 저주라는 말을 했던가. 5살 때,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는 손녀딸을 파울리나에게 보내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홍콩에 묻기 위해 칠레를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나타난 생수 마티아스와 만나게 되는 아우로라.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13살 때부터는 코닥 카메라를 선물로 받아 사진 명장 돈 후안 리베로에게 사진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진행된 건 아니고, 델 바예 가문의 정통 혈통다운 똥고집으로 스승에게 사사받기 시작한다. 파울리나는 처음에 돈으로 명장을 매수하려 하지만, 돈으로 모든 게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예술가는 몸으로 보여준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우로라는 사회주의자 출신 개인교사 마틸데 피네다 양와 황금시대 서점의 돈 페드로 테이 그리고 자신의 법적 아버지 세베로의 영향을 받아 주체적 아가씨로 성장한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카메라에 예전에 회화가 담당하던 귀족이나 귀부인들의 사진을 찍는 대신, 칠레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인디오들 같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은 그런 점에서 현실을 포착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이라는 사실도 주지할 수기 있었다. 물론 셔터를 누르는 이의 감정도 피사체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도 작가는 빼놓지 않는다.

 

오래 전, 열화당에서 나온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이 찍은 세기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도 이런 사진들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장비나 여건 그리고 스킬은 아마 그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그 때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필름 카메라 시절, 비싼 필름값 때문에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호흡을 멈춰 가며 신중하게 누르던 셔터 찰칵은 디지털 카메라 시절에 아무런 부담 없이 거의 수백장의 연속촬영을 하더라도 아무 부담 없이 더불어 생각 없는 셔터 찰칵으로 치환되지 않았던가.

 

이사벨 아옌데는 양친과 유일한 혈육 파울리나를 잇달아 잃은 기구한 아우로라의 서사를 풀어내기에 앞서 다양한 종류의 떡밥들을 투척한다. 그리고 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칼레우푸 농장 출신의 호남자 디에고 도밍게스와의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 칭기즈 칸 이반 라도빅과의 우정을 빙자한 연애 그리고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16년 만에 나타난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숨가쁜 전개가 이어진다.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서사의 원형을 담은 소설이 바로 <소피아빛 초상>이지 싶을 정도다.

 

말이 필요 없다.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나온 <소피아빛 초상> 단 한 권으로 바로 나는 이사벨 아옌데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내가 원하던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를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계묘년 연초부터 이런 좋은 소설을 만나게 되다니, 되는 대로 살자가 모토인 나에게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신년 선물이지 싶다. 어제부터 <세피아빛 초상>도 못 다 읽은 상태에서 읽기 시작한 <바다의 긴 꽃잎>을 읽고 나면 이사벨 아옌데 삼부작 <영혼의 집>에 도전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책과의 만남은 행복의 또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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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1-05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죠잉. 이야기꾼!

레삭매냐 2023-01-05 14:36   좋아요 1 | URL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전작들도 읽어야지 싶습니다.

이야기꾼, 쌉인정.

새파랑 2023-01-05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셀럽 분들이 모두 이 책을 추천하는군요 ㅋ 저도 이 책 샀는데 주말에 읽어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5 14:37   좋아요 2 | URL
그전에 절판책이라 참 가지고
싶었는데, 중고책방에 나와 있
어서 냉큼 사서 읽었답니다.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까지
모두 사냥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람돌이 2023-01-05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보관함에 들어있는 이사벨 아옌데를 또 깨우시는군요.
이토록 완벽한 칭찬이라니

레삭매냐 2023-01-05 21:45   좋아요 1 | URL
82 피플 ~ 다 같이 질러 BoA요 !!!

후회하시지 않으리라고 단언합니다.

chika 2023-01-06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제 취향이 아니라 무심히 넘기는데 작가 이름보고 찾아 읽었는데 정말 장바구니에 넣게 만드십니다! ^^

레삭매냐 2023-01-06 10:19   좋아요 1 | URL
저도 민땡사 세문의 표지가
여엉 적응이 되지 않으나 -

책은 진국이었습니다. 쨩.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6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재밌으니까!
이렇게 멋진 리뷰가 있을까요. 읽고 싶은 소설인데, 언젠가 저도 읽게 될까요?

레삭매냐 2023-01-06 10:20   좋아요 0 | URL
몰입도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상찬 감사합니다.

세피아빛 대열에 곧 동참하
시길 기대해 봅니다.

<방어가 제철> 읽고 있는데...
참 느낌이 좋네요.

독서괭 2023-01-06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여야 한다˝
ㅋㅋㅋㅋ 정말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책을 안 사려고 하다보니 더욱, 읽고 싶은 책이 마침 집에 있으면 과거의 저를 칭찬하게 되네요? ㅎㅎ
이사벨 아옌데 3부작은 언젠가 꼭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6 11:49   좋아요 0 | URL
고기 먹을 적에 공급이 끊어지면
안되는 것처럼, 책 또한 마찬가
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작가의 책을 만나 뻑이 갔을
적에 바로 또 내쳐 달려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저도 과거에 두 번이나 옳은 선
택을 한 저에게 칭찬하고 싶습니
다.

부디 도전은 고고씽~하시길.

서니데이 2023-02-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