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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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코맥 매카시의 어느 책을 보고 기겁해서 다시는 그의 책을 보지 않겠다 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로드>도 읽어 보았지만 그렇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고 나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현대판 서부 스릴러는 나로 하여금 그의 전작들을 검토해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다음 선택은 1985년에 발표된 그의 다섯 번째 소설 <핏빛 자오선>이었다.

 

어려서 서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돌아온 튜니티를 좋아했고, 장고가 판초 사이로 악당들을 쏘아 대는 권총의 향연에 환호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그렇게 영화에서 보여 주듯이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리고 소설 <핏빛 자오선>에서 매카시 작가는 그런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핏빛 자오선>은 존 조엘 글랜턴 갱이라는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 이끌던 폭력 집단에 대한 소설적 고찰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소설은 서부 개척 연대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게 나의 추정이다. 내러티브 픽션이 레전드가 되어 가는 과정에 나도 동참한 건지도 모르겠다.

 

리뷰의 타이틀을 서부개척사로 뽑긴 했지만, <핏빛 자오선>에는 서부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심 마디로 말해서 서부개척이라는 미국의 신화를 저격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양의 어느 독자는 독후감으로, 그리고 원저자는 내러티브로 비슷한 의제에 도전한다.

 

동부에서 시작된 미국 건국의 역사는 점차 서부로 뻗쳐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서부에 어마어마한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유럽에서 이주한 동부의 고착된 계급 사회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린 서부로의 이주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길에서 죽어나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디언들의 공격이었다. 언제나처럼 백인들은 외부의 공격을 환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 글랜턴 갱들이 등장할 차례다.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 혹은 유격대 같은 수준의 소규모 무장폭력집단은 멕시코 주지자의 의뢰를 받아 멕시코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파치 인디언 사냥에 나선다. 문제는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 아파치 인디언뿐만 아니라, 자기 동료 혹은 멕시코 사람들의 머리가죽마저 벗겼다는 점이다. 아니 머리가죽은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죽이고 한 만행이 아니냐고?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캘프헌터(scalp-hunter)들에게 머리가죽은 영수증일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주인공 소년(the kid)에 대한 소개를 잊었다. 미국 어디선가 천애고아가 된 소년은 아무렇게나 굴러먹다가 글랜턴 갱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고, 사막을 헤매다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또 체포되어 교도소 신세도 졌다가, 실크해트와 연미복 심지어 면사포까지 뒤집어 쓴 코만치 인디언 전사들의 공격(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였다)에 포위되었다가 사지에서 벗어나는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서부개척사 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쨌든 글랜턴 갱들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폭력과 약탈의 연대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 땐 그랬지.

 

글랜턴보다도 더 소설에서 중요하게 묘사되는 인물은 바로 판사 홀든이다. 그가 정말 판사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글랜턴 갱의 실질적인 리더는 글랜턴이 아니라 판사가 아니었을까. 다양한 방면에 박식한 판사의 말에 갱들은 순한 양처럼 머리를 조아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판사의 행동이 지식인다운 건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집단에서 가장 악랄한 악당이야말로 판사가 아니었을까. 화약이 떨어진 채 인디언들에게 추적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갱들을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화약을 만들어 반격에 나서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연스레 소년과 판사가 대결하는 구도로 흘러간다.

 

판사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폭력과 약탈에 참가한 갱들에게 모든 것은 그저 두둑한 판돈을 건 게임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판돈으로 건 것은 바로 그들의 목숨이었고, 대가는 한 줌의 머리가죽 영수증을 넘긴 대가로 돌아온 금화였다. 과연 그만한 대가가 따랐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도대체 그들이 원했던 건 무엇일까? 판사가 주장하는 게임 이론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편, 글랜턴 갱의 전투 실력은 멕시코 정규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소수의 평화롭게 사는 인디언들이나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껏 용병들을 고용해서 약자를 보호하라고 주문했더니, 반대로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이 되어 주정부의 금품을 갈취하는 깡패로 변신한 모습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에 등장하는 폭력과 약탈로 얼룩진 서부개척에 대한 소설적 접근 방식은 인상적이었다. 국가라는 피상적 존재가 하지 못하는 일을, 일개 문학가가 나서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진실을 밝히는 여정에 도전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멀리 했던 코맥 매카시의 작품들, 특히 국경 3부작을 만나볼 시간이 이제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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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10-1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카시하고는 영 궁합이 맞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제 감상과 별개로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10-17 21: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근 십 년을 멀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네 권의 매카시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세 권이 올해 읽은
책이네요.

단발머리 2019-10-1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맥 매카시 왕팬과 같이 사는 1인입니다.
제게 자꾸 매카시를 권해서 난감한 차에, 레삭매냐님 글 읽고 나니 함 도전해볼까, 건설적인(?)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처럼,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10-18 08:12   좋아요 0 | URL
응원하는 바입니다 -

모든 책에는 시절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제가 다시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

카알벨루치 2019-10-1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억의 이름, “장고”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10-18 09:44   좋아요 1 | URL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죠 ~

요즘 서부영화는 그런 재미가 없더라구요.

뒷북소녀 2019-10-1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미친듯이 읽고 떨어져 나왔는데(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알라딘에 내다팔지는 않고 소장하고 있어서, 저도 언젠가는 다시 들춰보겠죠.
 
들판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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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필멸(生者必滅),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어떤 예외도 없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했다고 했던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작가 로베르트 제탈러의 <들판>의 주제다. 제탈러는 <들판>에서 가상의 작은 마을 파울슈타트 공동묘지에 묻힌 혹은 앞으로 그곳 들판으로 가게 될 29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나는 <한평생>으로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됐고, <담배 가게 소년>을 읽으면서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번에 나온 <들판>2018년에 발표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거의 빛의 속도로 제탈러 작가의 책을 내준 그러나 출판사에 감사를 표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소설을, 문학을 읽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야기꾼에 해당하는 작가가 들려주는 타인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자 독서의 원동력이 아닐까. 그런데 제탈러 작가는 특이하게도 행복한 순간들이라기보다, 어쩌면 그 반대에 서 있는 망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다스 펠트(Das Feld), 들판은 죽음을 상징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가상의 장소 파울슈타트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던가. 죽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인간의 삶은 공정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과연 죽음에 대처하는 파울슈타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가.

 

어떤 신부는 자신이 모시는 주님의 집에 불을 지르고 놀라운 환영 속에 죽음을 선택한다. 어느 노동자는 노름과 도박에 빠져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받는다. 꽃집 주인은 죽은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발견이 되기도 하고. 마을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의 엽색행각, 뇌물수수는 이야기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네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제각각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렇다면 미래 삶의 결과를 안다면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합당할까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백년을 넘게 산 할머니의 지혜를 빌려 보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착각이라고 할머니는 준엄하게 선언한다. 그렇다, 꾸준하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그리고 또 새로운 책에 대한 갈급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되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읽을거리가 내 삶 속에서 부재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건 행복한 전조가 아닌가.

 

<들판>의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주인공들이 사는 파울슈타트 마을을 매개로 어떤 인연으로 닿아 있다는 점이다. 누구는 호베르크 신부가 불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고, 또 누구는 시장의 비석에 오줌을 갈기기도 했다. 비록 원주민은 아니지만 채소장수 나비드 알 바크리는 파울슈타트의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알 바크리 같은 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지향적 인간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시민이 아닐까.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39년 동안 파울슈타트의 소식을 활자화한 기자, 편집자인 동시에 식자공이었던 인사는 또 어떤가. 그런 면면에서 나는 제탈러가 추구하는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외에도 독서하는 동안 떠오른 수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짧은 글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정말 너무 멋진 글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전율적이다.

 

산 자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 자신이 필멸의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쉽지 않은 주제를 29명의 주인공들을 통해 능숙하게 풀어낸 제탈러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주 진부하지만 다음의 구절로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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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10-16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삭매냐님 덕분에 제탈러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반가운 신간소식이군요! 일단은 찜 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9-10-16 19:09   좋아요 1 | URL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어제
달려 나가서 사서 읽었답니다.

동시대 작가의 책을 읽는 즐거
움이란 정말...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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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청년 페터 한트케는 여전히 이십대다. 그리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선형적 내러티브를 선호하는 독자에게 <골키퍼>의 줄거리는 싱겁다. 예전 유명 골키퍼였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건설 공사장의 조립공으로 일한다. 그러니까 축구 선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예전의 영광은 잊고 노동자로 변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때 나치 제3제국의 일원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후손들도 예외는 없다는 설정이다.

 

블로흐라는 친구는 현장감독의 수신호를 해고로 오해하고 일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바로 실업이라는 불안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빈의 곳곳을 누비는 남자의 모습은 왠지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에 나오는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베테랑 용사는 뉴욕에서 택시를 몰고, 축구 선수로 아메리카 대륙도 밟았던 왕년의 골키퍼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빈의 이곳저곳을 헤맨다. 불안은 개인의 방랑을 그리고 그 방랑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극장 매표원 아가씨 게르다 T를 우연히 죽인 블로흐는 머물고 있던 호텔에 가서 짐을 싸서 도주에 나선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폭력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자신을 검문하려는 순경을 전화번호부로 기절시키는 신공을 보여주는 블로흐. 그리고 그는 남쪽 국경 부근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는 헤르타를 찾아간다. 몸이 피곤한 탓인지 어쩐지 이 부분은 정말 지루했다. 인근 켈러나 성당을 누비며 무언가 건수를 찾는 듯한 블로흐에게 더블데이트 제안도 들어오지만, 남자는 시큰둥하다. 내재된 불안이 초래할 거대한 파도가 곧 다가온다는 걸 잘 알지만, 사내의 일상은 지극히 단조롭고 평온해 보인다.

 

사실 소설에서 발생할 만한 일들은 모두 초반에 발생했다. 나머지는 운동선수라기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듯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블로흐의 일상에 대한 스케치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인 블로흐의 불안에 소설은 방점을 찍고 있다. 과연 블로흐는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인가. 페터 한트케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누적된 현대인의 불안을 보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경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실업의 공포를 느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은 곧 생존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일자리를 잃고 돈을 벌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소비생활을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살기 위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처럼 블로흐 역시 도주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이야 실업수당 혹은 퇴직금으로 어찌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일자리 없이 지속적인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체국 시퀀스에서 페터 한트케 작가의 대리인인 블로흐의 언어유희가 가장 돋보인다. 그리고 전처에게(그는 이혼남이었다) 우편환을 보내 달라고 전화로 부탁한다. 전처가 그 부탁을 들어 주었을까? 물론 아니다. 한편, 블로흐는 도주하면서도 계속해서 지인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국경마을로 도주했으면서도 은신하는 대신, 동네 청년들과 싸움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혈기가 지금의 나락으로 블로흐를 밀어 넣은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칠칠치 못한 블로흐는 범죄 현장 곳곳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미국 동전들)를 뿌리고 다닌다. 아마 그는 곧 지명 수배되어 잡힐 것이다.

 

세관원과의 대화는 앞으로 벌어질 순경/경찰과의 대치 상황을 대비한 블로흐의 팁이라고나 할까. 블로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주할 것이다. 페널티킥을 막 차려는 키커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마치 체스나 장기판의 고수들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본 치열한 수싸움의 문학적 표현일 지도.

 

<페널티킥>은 나의 두 번째 노벨상 숟가락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패스했고(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게 나의 문제다), 내가 수용 가능한 것들만 골라 먹었다. 나도 페터 한트케를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자족적인 나의 독서, 멋지다. 그러나 저러나 페터 한트케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 중인데, 과연 스웨덴 한림원은 일절의 정치적 고려 없이 작가의 문학적 성과만 가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단 말인가. 그런 거짓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해대는 그네들의 강철멘탈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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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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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페터 한트케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이 책을 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페터 한트케가 노벨문학상을 지난주에 수상했고 작가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으로 좀비처럼 도서관으로 가서 그의 책들을 한 무더기 빌렸다. 다행히도 그의 책들은 분량이 적어서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십대의 패기넘치는 청년 페터 한트케가 1966년 발표한 <관객모독>은 하나의 선언이고 도발이다. 기존의 연극이 어떠해야 한다는 모든 주장과 질서를 청년 한트케는 과감하게 파괴한다.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고 하는데, 배우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저 독자는 선언처럼 발표되는 내레이션을 따라갈 따름이다.

 

우리는 연극 무대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아마도 하나의 사건이 아닐까. 그런데 작가는 아무런 사건도 그리고 호기심도 가지지 말라고 선포한다. 내가 만약 관객이라면 이런 황당한 사태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기존의 매표, 극장까지 도착 그리고 암막이 올라간 다음 무언가 기대하는 일단의 과정을 훈련받은 관객들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라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청년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유희를 마음껏 구사하고 관객을 농락한다. , 아무래도 적응이 잘되지 않는다. 그저 청년의 패기를 따라가는 것조차도 버거웠다고 고백해야지 싶다.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패전 20년이 지난 뒤 이제 바야흐로 유럽의 주인공으로 다시 부상하게 된 게르만 민족의 영혼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이라고 해석을 해야 할까?

 

어느 시점에서 느닷없이 관객은 준비된 욕설을 들어 먹는다. 아마 어느 누구도 장황하게 나열되는 대상화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오 마이 갓! 내가 도대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극은 막을 내린다.

 

청년의 소설은 대단히 실험적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다. 그리고 나는 <관객모독>을 읽으면서 다음의 이미지들이 연상됐다. 연출에 있어 완벽을 추구했다는 스탠리 큐브릭, 영화에 코믹한 그리스 희곡 요소들을 도입한 우디 앨런의 <마이티 아프로디테> 그리고 마지막 라스 폰 트리에의 비극 <도그빌> 말이다. 내 마음 속에 발생한 상관관계를 설명하자면 또 한바닥 정도는 써야겠지. 한트케의 욕설 덕분인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문득 그냥 어느 문청이 써제낀 치기발랄한 문학이 비평가들의 능수능란한 비평 솜씨에 힘입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번에는 <골키퍼>를 읽어봐야겠다.

 

[뱀다리] , 명백하게 이 리뷰는 노벨문학상 기념 나도 숟가락 얹기라고 자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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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14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숟가락 얹으러 준비(한트케 책 읽기)해야겠어요... ^^;;

레삭매냐 2019-10-14 19:44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 고고씽~입니다.

stella.K 2019-10-14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전 전에 사 놓은 책을 이번 기회에 읽으신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빌리기까지!
정말 진지하고 진정한 독자이십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시도 안 읽지만 희곡은 더더욱 안 읽지요.
더구나 이런 초현실적인 작품은...
노벨상 기념이면 어떻습니까?ㅋ

레삭매냐 2019-10-14 19:4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저도 아마 볼라뇨의 팬이 아니었다면 그의
시집은 읽지 않았을 겁니다...

페소아의 시집들도 샀는데 와 닿지가 않아
설라무네 짜비.

<관객모독> 읽고 나서 바로 <골키퍼>에
도전 중입니다.

Falstaff 2019-10-14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뱀다리가 진짜 재밌어요. ^^

레삭매냐 2019-10-15 10:11   좋아요 0 | URL
순수한 자백이지요...

노벨상 까면서도 또 궁금해서
엮이게 되는.
 
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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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작가라면 더더욱 환영이다. 그래서 해마다 부커상(보수적인 노벨문학상보다 좀 더 다양하고 선택의 폭이 넓다) 후보작에 오르는 작품들을 눈여겨보는 편이다. 올해도 케빈 배리나 맥스 포터 같은 작가들에 대해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알게 된 데이빗 설로이는 다음 달에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싸인 받으러 가야지. 부커상 숏리스트가 발표되자 곧바로 작년 수상작에 대한 관심이 갔다. 그렇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었지. 부커상 수상작이 우리에게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년 정도 필요한 것 같다. 그렇다면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책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솔직하게 말해서 애나 번스의 세 번째 소설 <밀크맨>의 장벽은 드높다. 우선 수백 년 동안 지속된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소설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오래 전에 세계 분쟁지역의 아일랜드 공화군(IRA) 덕분에 북아일랜드 상황에 관심을 가졌는데, 아무래도 우리의 일도 아니고 하다 보니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동안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가톨릭교도의 IRA와 신교도 UDA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위 정치권의 노력과 막대한 재정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과거사에 대한 상이한 시각 때문에 여전한 갈등이 임시적으로 봉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은 애나 번스 작가가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철저한 익명성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18세의 소녀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어쩌면-남자친구”, 주변 인물들 역시 핵소년”, “셋째 형부등으로 불린다. 참고로 그녀는 걸어다니는 소녀라고 불린다나. 애나 번스는 전체주의적 부족사회같은 북아일랜드 공동체의 지나친 관심이 버거운 십대 소녀의 감성을 대입해서 기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현대 영미문학 스타일의 짧게 치고 나가는 문장이 아니라 너무 길어서 몰입이 쉽지 않았다.

 

이런 장벽을 헤쳐 나가면 오롯하게 2018년 부커상에 빛나는 <밀크맨>의 고갱이를 만나볼 수 있다. 중년(41)의 반대파 준군사 조직원이자 지역 영웅으로 간주되는 밀크맨은 소녀를 스토킹한다. 그는 왜 주인공(18)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주인공은 그저 부족사회로부터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18세기 혹은 19세기 소설(<아이반호>)에 집착하면서 자신을 그들로부터 소외시키고 차단하고 싶을 뿐이다. 주인공의 엄마에게 딸들은 그저 때가 되면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출산해야 하는 존재로 비친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 끔찍한 트라우마 덕분에 우울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다.

 

주인공 소녀는 그놈의 밀크맨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관계를 부풀리고 확대 재생산한다. 소설에서는 유비통신으로 표현되는 가짜 뉴스 덕분에 그녀는 졸지에 행실이 나쁜 여자가 되었다. 주인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그녀에게 다가온 밀크맨은 그녀의 모든 것 심지어 상상까지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자동차 정비공인 그녀의 어쩌면-남자친구(20)가 어쩌면 큰형부가 됐을 지도 모를 첫째 언니의 남자친구처럼 자동차 폭탄으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북아일랜드)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한다. 바다 너머 저편의 나라는 팔백년 동안 걸어다니는 소녀가 사는 곳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리고 신교도들을 대거 유입시켜 종교 갈등을 유발시켰다.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지만 다른 방식의 믿음으로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가 수호자와 반대파들이 등장했다. 무장 경찰들은 밀크맨으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을 도청 감시하고, 개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 와중에 죽은 고양이의 사체를 묻어 주기 위해 나선 걸어다니는 소녀, 가운데언니는 상도를 벗어난 사람으로 치부되어 루머와 수치스러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뭐 그 세계에서는 놀랍지도 않은 설정이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밀크맨의 개입으로 걸어다니는 소녀의 주변에는 잇달아 불행이 발생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독을 먹이는 알약소녀에게 당한 걸어다니는 소녀는 전통 비법에 의한 구토와 주변 기도꾼들의 도움으로 살아나지만, 그녀에 대한 부당한 시선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게 잘못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스스로 고립과 소외를 선택한 주인공 걸어다니는 소녀의 결정이 오히려 주변인들에게서 상도를 벗어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밀크맨이 매복한 무장 경찰의 총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고, 걸어다니는 소녀의 엄마의 고백이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누군가와 무작정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비극은 또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저자가 설정한 어쩌면-남자친구에 대한 진실, 밀크맨의 정체성 등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후반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클럽에 간 걸어다니는 소녀가 아무개 아들 아무개에게 폭행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여성들이 보여준 연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설사 그들의 행동이 걸어다니는 소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상당히 정치적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비극적 시대를 경험한 개인의 서사이기도 하다. 소설의 상당 부분에 작가가 직접 체험한 자전적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한 보상이 따르는 그런 독서의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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