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년 만에 다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었다. 그 때는 아디치에 작가의 책이 궁금해서, 그리고 이번에는 내일 참전할 달궁 모임 책으로. 처음 읽었을 적에도 그해에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다만 한 보름 정도 걸려서 천천히 하지만 막판에는 스퍼트를 내서 읽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리뷰를 썼겠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숙고하는 그런 느낌으로 뜸을 들여서 리뷰를 쓰게 됐다.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지금으로부터 21년에 발표된 작가의 데뷔 소설이다. 아니 그런데 초짜 작가가 이런 세련된 책을 썼다고? 지금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작품 활동(소설 쓰기)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좀 아쉽다. 그녀가 쓴 마지막 소설은 11년 전에 나온 <아메리카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다 읽고 나서 바로 9년 전에 읽다만 <아메리카나>를 펼쳐 들었다. 과연 이번에는 다 읽을 수 있을까.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화자는 이제 곧 15살이 되는 소녀 캄빌리 아치케다. 에누구에 있는 가톨릭 계열 여학교에 다니는 캄빌리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캄빌리는 웃지 않는, 또래 친구들에게 이른바 재수탱이 같은 존재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건 바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집안에서는 독재적인 모습의 짜르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영국 유학 출신의 타인을 돕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는 지식인 모습을 한 아버지 유진이 자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다.

 

자신의 아버지 파파은누쿠를 이교도라 부르며, 그의 개종을 원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다. 유진은 일찍이 서양 문물의 수혜를 입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니 여전히 미개한 전통주의 혹은 미신을 숭배하는 아버지와 결코 화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야말로 아치케 집안이 사는 땅인 나이지리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군인들이 헌정을 뒤집고 자신들만의 무법 천지를 만드는 건 일상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유명한 산유국이면서도, 기름 부족으로 캄빌리의 지식인 고모 이페오마네는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고 정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인식된다.

 

신문사 <스탠더드>를 운영하는 발행인 유진은 편집자 아데 코커를 전폭적으로 후원한다. 그가 정권을 탈취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스타일의 칼럼을 실어도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 물론 그에 따른 후과는 예상을 초월하는 비극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자신의 성공 방정식에 도취한 유진 아치케는 자신의 아들인 자자와 딸인 캄빌리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길 바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사 지식인 행세를 하는 유진이 구사하는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아들 자자의 왼손가락을 망치질 않나, 사촌 형제가 그려준 파파은누쿠의 미완성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펄펄 끓는 물을 자식들의 발에 부어 징벌한다. 자신이 예전에 서양 출신 선교사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작가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여전히 나이지리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위선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영국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리아 이보족과 하우사족에게 문명과 종교를 이식하는 동시에 그들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했다. 우선 종교를 앞세워, 전통적인 것들을 모두 미신과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렇데 정신적 불모지를 만든 다음에 자신들의 신을 강압적으로 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파파은누쿠 세대와 유진 세대의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전히 해방될 수 없는 식민주의 잔재의 어두운 그늘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포스트콜로니얼적 배경을 파악한 상태에서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는다면 좀 더 수월하게 텍스트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아버지 유진의 꼭두각시 같았던 존재였던 자자와 캄빌리가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은수카의 이페오마 고모네 식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그동안 아버지 유진에게 세뇌 받아온 것들이 모두 모순적 위선에 기반한 무엇인가라는 점을 작가는 현란한 소설적 빌드업을 통해 구현해낸다. 당연히 자자와 캄빌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삶에서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현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자자와 캄빌리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다. 평생을 아버지 유진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과정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아디치에 작가는 세련되고 점진적으로 내러티브를 진행시킨다. 소설 초반에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자의 모습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아니 어쩌면 선동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내가 믿고 살아온 세계가 붕괴되는 가운데, 어렵게 자각한 내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과거의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독자에게 묻는 느낌이랄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은수카를 떠나 미국으로 간 이페오마 가족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보니 아디치에 작가의 또다른 소설 <아메리카나>에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물질적으로는 미국이 모든 것이 결핀된 나이지리아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낯선 땅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만 많은 것이라는 게 나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캄빌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마디 신부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웃지 않은 소녀 캄빌리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기분을 포착하고, 그의 곁에서 응원하고 결국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영국 출신 베네딕트 신부와는 결이 다른 아마디 신부가 아니었던가. 자신들에게 새로운 신과 종교를 가져다 준 또다른 서구 국가인 독일로 가서 사역을 한다는 설정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엔딩은 왠지 그리스 비극의 그것을 닮았다. 겉으로는 인자한 성공한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집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정폭력을 행사하던 유진이 죽은 뒤 아들 자자는 교도소에 가 31개월의 징역 생활을 한다. 고난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확실히 자자 아니 추쿠카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캄빌리 역시 자신만의 삶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려고 하는 미국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다시 그렇게 이 작품은 <절반의 태양>을 지나 <아메리카나>로 연결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 리뷰에 모두 담았는지 모르겠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내일 달궁 독서모임에 가서 풀어보자. 언제나처럼 기대가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4-25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디치에 작품 갖고 있긴 한데,,, 읽고 싶었구요,,, 레삭매냐님 리뷰 보니 읽어야겠네요
토론은 잘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