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승섭 옮김, 바나나몽스 그림 / 혜원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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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어오던 책을 직접 읽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사실 이번에 읽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 주말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부랴부랴 읽었다.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단박에 읽어냈다.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1932년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인류 지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른 미래가 마냥 밝지만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서구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소설로 창조해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83년 전에 이런 발상을 해내게 된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굳건하게 믿으면서, 미래세계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된 걸까하는 점이었다. 물론 기술문명의 발전이 예전에는 인간이 해야만 했던 일들을 대신해 주고, 생산효율을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렇게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면서, 기본적으로 노동자인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주체적 삶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들이 타령하는 포디즘이야말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을 유발한 효율의 극대화는 인간의 사유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찬동했던 포드는 소설에 등장하는 전체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서기 2540년에 해당하는 포드력 632년, 인류는 자연적 재생산을 미개한 방식으로 치부하면서 ‘디캔팅’이라는 방식의 인공적 방식의 재생산(reproduction)으로 대략 20억 명 정도 인구를 유지한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래사회는 디캔팅 룸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엡실론이라는 다섯 개의 카스트로 구성된 철저한 계급사회다. 계층 간의 상호이동을 막기 위해 자연 생산 방식은 오래 전에 도태되었고, 가족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용이하게 다루기 위해 수면교육과 행동조절이라는 정말로 비인간적인 방식과 소마라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게 해주는 신경안정제를 공급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류는 오로지 자신의 직분에 맞는 노동과 오직 소비만 하라고 강조하라고 세뇌된다.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독서나 미술 같은 예술 활동은 일체 금지되고, 성놀이라는 희한한 명칭의 에로틱한 활동이 장려된다.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주의자들이 시행하던 국가개조의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한편, 이 사회의 특이한 점은 인간이라면 필수불가결한 노쇠현상 역시 젊은이들의 피와 각종 기술로 젊음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래사회에서 노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렇게 젊음을 유지하다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일찍이 진시황이 꿈꾸던 영생불사의 노력은 미래사회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한 단락을 장식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죽음이 삶의 일부이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교육을 받는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미스터 야만인 존이 어머니 린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들이닥친 한 무리의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화내는 것에 대해 보모장과 아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전혀 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 그리고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대 그리스 에피쿠로스 철학의 한 단면도 엿볼 수 있다.

 

어느 사회에나 이단아가 존재하듯이 이 <멋진 신세계>에도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특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모두가 하루 정량의 소마를 먹으며 쾌락에 도취된 삶에 만족하지만, 신체적으로 자신의 계급에 미치지 못한 모습의 버나드는 그렇지 못하다. 아름다운 레니나와 데이트하면서 사랑이라는 관념을 구체화시켜 보려고 노력하지만 미래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고독을 칭송하는 버나드에게 자유연애주의자 레니나는 어쩔 수 없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극대화된 포디즘의 세례를 받은 전형적인 모델 레니나는 현대사회 소비 물신주의의 화신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버나드와 레니나의 캐릭터도 그들이 뉴멕시코 야만인 보존지역에서 만난 백인 청년 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자란 존은 우연한 기회에 버나드와 레니나를 만나 ‘멋진 신세계’에 편입된다. 19세기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흑인을 잡아다가 서커스에 이용한 것처럼 버나드 역시 신세계에 도착한 존을 이용해서 단번에 자신을 오지로 보내 버리려는 인공부화 및 조절 국장의 기도를 분쇄하고, 일약 유명인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신이 그나마 신세계의 양심 있는 지식이라고 자부해온 버나드의 그런 행동은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존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머니 린다에게 글을 배우고, 야생세계에서 다양한 생존 체험을 하고 우연한 기회에 획득한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주체적 자아를 형성한 존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레니나를 사랑하면서도, 신세계의 사랑 방식(성놀이)를 거부하며 진정한 사랑을 갈망한다. 서로 다른 탄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녀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훗날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선구적인 아이디어들을 다수 제공한다. 병에 태아를 넣어 기르는 디캔팅 방식을 통해 속성으로 인간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영화 <아일랜드>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영어문화권 독자가 아닌 번역을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이해는 물론이고, 저자가 작품에서 인용한 수많은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문장들에 대한 감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 간신히 다 읽은 이창래 작가의 <만조의 바다 위에서>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아류작이라는 비평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파악해낸 것도 하나의 수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하긴 하지만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도 주목할 만하다. 모든 종류의 책이라는 정보 전달 매체가 금지된 문명세계를 책을 통해 개화된 미스터 야만인 존이 비판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냥 문득 모든 것이 다 허용되지만, 책읽기가 금지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예전에 본 영화 <인 타임>이 생각났다. 영화는 시간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사회 이야기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을 시간으로 비틀었다는 점에서 섬뜩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개인의 욕망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통제받고 조종되는 가상의 디스토피아가 놀라울 정도로 작금의 현실과 닮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복을 미끼로 해서, 현실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아닌 진통제에 불과한 소마를 나눠주면서 카스트 구성원들에게 지금은 누구나 다 행복해라는 주술을 외우게 하는 프로파간다가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빅토리아 시대를 산 작가의 무시무시한 예언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리딩데이트] 2015년 2월 22일~23일 오후 9: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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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 독서모임 선정도서군요. 취업 준비 때문에 서울에 갈 상황이 되지 않아서 당분간 독서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달궁 독서모임에 함께했던 분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시간 나면 모임에 참석할께요.

레삭매냐 2015-02-25 16:50   좋아요 0 | URL
아숩네요. 싸이러스님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
저도 오랜 만에 출격이라 기대가 많이 됩니다.
곧 뵙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얼간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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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사[武士:부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미 여사의 <얼간이>를 읽었다. 이번 설날은 확실하게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제 2막 시대물과 함께 보냈구나 싶다. 가만 그런데 제목이 <얼간이>(뽕꾸라, 바보)라니. 고대해 마지않던 무사 이야기가 나왔는데 도대체 누가 얼간이란 말인가. 짐작대로다, 주인공 이쓰즈 헤이시로가 바로 그 얼간이란 말이다.

 

시대물이 그리는 어느 시대고 당대의 지명과 관직 그리고 풍습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해당 시대물을 애정하기란 쉽지 않은 미션일 것이다. 사실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을 읽으면서 오캇피키(발음도 물론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요리키, 도신이나 주겐 같은 관직 이름은 물론이고 하오리, 다스키 같은 복식도 낯설기 짝이 없다. 사실 캐릭터들이 외출할 때 어떤 복식을 갖추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저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 또한 몰랐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얼간이>에서는 에도의 신도시에 해당하는 혼조 후카가와 지역과 소설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뎃핀 나가야에 대해 상세한 설명으로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도해를 보고 나니 확실히 오토쿠 아줌마가 감자 조림과 곤약 조림을 파는 간이식당에 대한 대강의 이미지를 잡을 수가 있었다. 고마워요 미미 여사.

 

아울러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 철저한 신분제에 근거한 봉건계급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설명이 뒤따른다.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무사들은 느슨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치밀하게 조직된 사회시스템으로 인구 백만에 달하는 남초 소비도시 에도의 피지배계급인 평민과 상인 계급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얼간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우선 주인공 이쓰즈 헤이시로는 사십대 중반의 도신(하급 무사)으로 연간 쌀 서른 섬의 봉록을 받는 마치 담당 순시관이다. 왠지 무사라고 하면 칼도 마구 휘두르고, 소시민들을 무시하는 그런 거만해 보이는 그런 고정관념으로 다가오는데, 이 양반 헤이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담당을 맡은 뎃핀 나가야에서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오토쿠 아줌마네 집에 수시로 들러 끼니를 때우지만, 거저 얻어먹지 않고 항상 셈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성이 게으른데다가 무사태평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 취향마저 보여준다. 헤이시로의 상사는 그런 그의 특성을 꿰뚫고 보고, 새로 개발된 혼조 후카가와에 세상물정에 환하면서 동시에 물렁한 그를 임시 순시관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세월 좋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런가. 뎃핀 나가야의 채소 가게에서 기묘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헤이시로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그런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게다가 협박 때문에 뎃핀 나가야의 고참 관리인인 규베마저 줄행랑을 쳐버리고, 나가야의 주인인 미나토야의 소에몬은 풋내기 사키치라는 정원사를 임시 관리인으로 파견한다. 뎃핀 나가야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오토쿠 아줌마는 과부로, 간이식당을 운영하면 생계를 꾸리는 당찬 여걸로 이런 사키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불길한 새로 여겨지는 까마귀 간쿠로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도 마뜩치 않기만 하다.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미미 여사는 이런 방식으로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캐릭터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녀가 야심차게 준비한 <괴한>, <노름꾼>, <통근하는 지배인>, <논다니>, <절하는 남자> 등의 짧은 에피소드들은 소설 <얼간이>의 근간이 되는 핵심 이야기 <긴 그림자>를 위한 포석이다. 존속살해, 노름에 미쳐 딸자식을 팔아먹은 통장이 아버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 이야기, 화류계를 주름잡던 오쿠메 그리고 항아리 신앙 때문에 잘 지내던 나가야에서 야반도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면서도 대미를 장식할 미나토야 소에몬이 숨기고 싶은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헤이시로는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우선 범죄자에서 갱생하여 탐정 역을 맡게 된 오캇피키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에코인의 모시치 대행수(드디어 크로스오버가 되는 건가)의 뒤를 이어 활약하고 있던 마사고로, 암기천재 짱구와 함께 일하면서 자신의 선입견에 대해 재고해 보게 되는 계기도 마련하게 된다. 막부의 밀정으로 암약하는 오랜 지기 까만콩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접할 수 없는 아주 은밀한 정보도 취합해서 미스터리를 푸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미래 자신의 양자 후보이자 처조카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당돌한 12세 소년 유미노스케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계측과 측량의 달인으로 사사키 사부에게 배운 것을 실전에 활용하는 응용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성인의 시선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에 접근해 가는 방식도 눈여겨볼만한 지점이다. 소설 <얼간이>를 읽으면서 헤이시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 때문에 상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타인에게서 빌려 쓰는 능력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일을 내가 다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별난 능력을 가진 놈들의 활약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대단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도저히 놓칠 수가 없어 설날 연휴의 어느 새벽 세시까지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 헤이시로가 대면하게 되는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능력의 하급 무사 헤이시로가 거대한 음모와 마주치게 되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사실은 사실을 숨기고 싶은 권력이나 금권을 가진 이들에 의해 언제라도 자의적으로 왜곡되고 재단될 수 있다. 그렇게 된 사실을 과연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얼간이 무사 헤이시로의 인간적 고뇌가 시작되는 것이다.

 

숨 가쁘게 <얼간이>를 읽어내자 바로 후속편에 해당하는 <하루살이>와 미미 여사가 자신 있게 선보이는 연애소설이라는 <진상>이 읽어 싶어졌다.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는 대로 다시 미미 여사 시리즈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달에만 무려 5권의 에도 시대물을 읽었는데, 이런 스피드라면 나머지 시리즈도 조만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보다는 무사 헤이시로가 등장하는 수사물이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헤이시로는 칼만 차고 다니고 정작 사용은 하지 않는 건가, 궁금하다.

 

[리딩데이트] 2015220~22일 오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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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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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루트로 해서 미야베 월드 제2막의 몇 권을 접할 수가 있었다. 역시 같은 시대를 사는 작가 덕분에 계속해서 출간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랄까. 때마침 에코인의 오캇피키 모시치 대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맏물 이야기> 애장본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편에 해당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이하 기이한 이야기로 부르겠다)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간이 가진 유혹 때문에 <기이한 이야기>를 마저 다 읽지 못하고 <맏물 이야기>부터 읽게 됐다. 물론 <맏물 이야기>를 다 읽는 대로 <기이한 이야기>도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기이한 이야기>는 실제로 에도 시대에 전승되던 <혼조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모티프로 해서 우리의 미미 여사가 쓴 시대물이다.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에도 시대 중에서도 도대체 몇 년 정도일까라는 궁금증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따라 다녔는데, 마지막 에피소드인 <꺼지지 않는 사방등>에서 결정적 단서를 얻을 수가 있었다. 에피소드에서 십년 전인 분카 4(1807)에 있었던 에이타이 다리 붕괴사건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해서 19세기 초반이란 추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미 여사는 에도 시대 혼조라는 상인들의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전승되던 기이한 이야기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라는 살을 붙여 독자 홀리기에 나선다.

 

궁금했다. 다른 직업군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상인들의 이야기일까 하고 말이다. 항간에 떠도는 풍문 같은 이야기(모노가타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인들의 특별한 성정 때문이 아닐까. 아무래도 상인들이 상품을 유통하다 보면 세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미미 여사의 작품에는 국숫가게, 담뱃가게, 버선가게 같이 보통 사람들이 애용하는 친숙한 장소들이 다수 등장하게 됐다. 그리고 기이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해서 사건에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에코인의 오캇피키 모시치 대장에게 맡겨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근간 <맏물 이야기>에서는 진화된 모시치 대장의 활약이 돋보이지만, 일본에서 사반세기 전쯤에 출간된 <기이한 이야기>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작아 보인다.

 

어느 미미 여사의 인터뷰에서 보니 실제로 매일 같이 두 편의 백물어(百物語:햐쿠모노가타리)를 연기하는 배우에게서 아마 영감을 얻었다지. 원래 <화차> 같은 사회파 미스터리물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미미 여사가 언제부터인가 시대 수사물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독자들도 그녀가 구사하는 소설 세계에 흠뻑 빠진 것처럼 이야기 공장장인 작가의 시대물 쓰기 중독은 가히 환영할 만하다.

 

상인들은 사람(고용살이)을 부려 돈을 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유통 단계(직접 대면)를 생략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만큼 상업에서 인간관계는 필수다. 상인들이 다루는 각양각색의 물건 만큼이나 다양한 손님을 대하는 직업이니 만큼 스토리가 빠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미 여사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의 보물창고에 현미경을 대고 관찰하는 것 같은 관심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또한 상인들이 최종 목표로 삼은 돈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견실한 가게 주인의 후처로 들어가 가게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세우기도 하고, 오래 전에 딸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유한 상인을 위로하기 위해 가짜 딸을 수배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만사가 모두 돈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의심 때문에 전전긍긍(어쩌면 의부증?)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에도 시대 풍경에 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하녀를 동원해서 기원하는 이기적인 모습도 보인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적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은연중에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인 <외잎 갈대>의 인상이 길게 갈 것 같은 느낌이다. 한편, 사건의 해결사로 나오는 모시치 대장은 <맏물 이야기>에서 그 능력이 출중하게 발휘되긴 하지만, 냉정한 오캇피키로 그려지지 않는다. 자나 깨나 사건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시치 대장이지만, 마음 한 편에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중년의 멋쟁이 아저씨다. 자신의 관할 구역인 혼조 후카가와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니면서 서민들의 가려움을 긁어 주고, 때로는 선을 넘지 한도 안에서 자신의 재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기이한 이야기>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말이다.

 

최근 두 번째 에피소드가 개봉된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를 보면서 문득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떠올랐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미미 여사의 시대물 같은 시리즈를 다루는 작가가 없을까하는. 장르물과 시대물이 맥을 추지 못하는 우리의 출판 상황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하긴 미미 여사의 시대물도 우리나라에 연착륙하는데 마포 김사장님의 꾸준한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지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장르물과 시대물(사실 일반독자가 에도 시대의 풍습이나 관직 그리고 지명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옮긴이 주가 없었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단어들이 횡행하는 것이 사실이다)을 적절하게 혼합한 연작 소설이 주는 심리적 장벽을 통과해서 미미 여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도달하기란 역시 쉽지 않은 미션이리라. 지레 짐작이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15편의 시리즈 중에서 최근작인 모시치 대장의 <맏물 이야기>가 가장 호성적을 내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미야베 월드 제 2막 동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리딩데이트] 2015212~ 20일 오전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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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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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에 책이 들어오는 대로 단박에 미미 여사의 신작 소설 <맏물 이야기>를 읽고 싶었으나 살이가 그렇듯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을 내서 바지런히 읽어서 4일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사실 좀 더 시간을 두고 읽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읽다만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구입한 <메롱><흔들리는 바위> 그리고 도서관에서 막 빌려온 <얼간이><말하는 검>까지 밀려 있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혼조 후카가와를 누비는 에코인의 오캇피키(포리) 대장 모시치의 활약이 너무 재밌어서 책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맏물 이야기>는 편집 후기를 참조하니 자그마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 비해 미미 여사가 쓰고 있는 에도 시대물은 한껏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품의 연혁에 따른 구성과 확실한 캐릭터 그리고 시절에 맞는 에도 상가(商家)의 풍습이 어우러져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리라.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도 모시치 대장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에피소드의 개별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맏물 이야기>에서는 사건 해결에 나서는 모시치 대장을 화자로 캐스팅하고, 중년 곤조와 청년 이토키치라는 사이드킥까지 배치한 삼인조로 이야기(모노가타리)를 꾸려 나간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모시치가 취급하는 알쏭달쏭한 사건 해결에 영감을 해결하는 도미오카바시 다리 근처의 솜씨 좋은 유부초밥 노점 주인의 미스터리까지 곁들여서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유부초밥 주인장은 미미 여사가 <맏물 이야기>에서 준비한 첫 번째 쿠션이다. 유부초밥 노점의 주인장의 내력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거리의 요리사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사연 있는 무사의 기운이 넘친다는 것이 미미 여사의 발상이다. 게다가 거리의 살모사라는 가지야의 가쓰조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포스마저 장착하고 있다. 요리 솜씨는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계절 음식으로 독자의 구미를 돋울 정도로 빼어나다.

 

그렇게 미미 여사의 두 번째 쿠션은 <맏물 이야기>의 맏물/음식 혹은 계절요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미미 여사는 어떻게 모시치 대장의 사건과 맏물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배합한 걸까라고 독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 <뱅어의 눈>을 살펴보자. 모시치가 관할하는 후카가와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리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이 모여 사는 신사에 독을 넣은 유부초밥으로 꼬여서 아이들을 상해케 만든 파렴치한 사건이 발생한다. 고지식한 정의파 모시치 대장이 그런 아이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라 그는 더더욱 분노한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인 에도시대에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기부금을 받아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오캇피키 대장은 이 사건 때문에 좋아하던 팔딱팔딱 뛰는 뱅어회를 먹지 못하게 되었단다.

 

다음 에피소드인 <천 냥짜리 가다랑어>에서도 미미 여사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오월이 제철이라는 가다랑어 시즌을 맞아 난데없이 가다랑어를 손질하게 된 모시치는 자신이 없어 미요시초에서 생선 행상을 다니는 가쿠지로 씨에게 부탁해서 석쇠에 적당히 구워 먹음직스러운 가다랑어 요리를 맛보게 된다. 가쿠지로 씨에게 뜬금없이 천 냥짜리 가다랑어를 사겠다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진다. 무가나 상가에서 불길하게 생각하는 쌍둥이의 엇갈린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의 <도깨비는 밖으로>에서도 비슷한 소재로 다시 등장한다. 좀 진부한 설정이긴 하지만, 가난하더라도 작금의 행복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냐고 작가가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에도 초봄의 싱그러운 빛깔을 머금은 유채나물, 달달한 사구라모치 과자, 정월에 먹는다는 속풀이 나나쿠사죽 등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한 계절요리들의 향연이 <맏물 이야기>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미미 여사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세 번째 쿠션은 뭘까? 바로 영감 스님이라 불리면서 뛰어난 영시 능력으로 세간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해결사이자 기도사로 활약 중인 꼬마 니치도(조스케). 물론 모시치 대장은 니치도의 능력을 이용해서 원래 사업보다 더 열중인 니치도의 부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 하지만, 모시치 대장은 <맏물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때로는 니치도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니치도가 테러 당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하는 방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의 정체를 대충 파악하게 된다.

 

사실 미시마야의 오치카가 등장하는 변조괴담 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을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 결을 달리 하는 모시치 사건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어쩌면 특정 캐릭터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들을 기용하는 미미 여사의 전략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마치 배스킨 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 맛처럼 골라먹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수상쩍은 사연을 가진 유부초밥 노점 주인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모시치의 활약을 기둥으로 삼아, 뚜렷한 특징을 지닌 캐릭터(이토키치와 니치도)를 적절하게 조합해서 만드는 모노가타리(이야기)야말로 <맏물 이야기>의 감칠맛[うま]가 아닐까 싶다. 말미에 등장하는 당돌한 몽타주 프로파일러 오하나 역시 앞으로 계속될 시리즈에서 한몫 단단히 할 것 같다.

 

미미 여사는 <맏물 이야기>에서 에도 시대의 정치적인 요소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사회 문화적인 요소 그 중에서도 유통산업을 담당하고 있던 상인들의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무사들의 존재는 그저 무슨 나리로만 표현되고, 하급관리자인 오캇피키를 대신 기용해서 당시 사회상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에도 시대를 바탕으로 한 시대물이면서도 동시에 수사물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건사고 해결 과정에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탐문수사와 증거 확보 그리고 검안 같은 현대 탐정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초기작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진화해서 정교한 짜임새에 방점이 찍힌 기분이라고나 할까.

 

마포 김사장님이 발행한 장르문학 소식지 르 지라시 8호에 소개된 미야베 월드 시리즈 분류에 따르면, <맏물 이야기>는 북스피어에 나온 미야베 월드 제2막의 15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제 달랑 세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에도 시대라는 한 뿌리에서 가지치기를 해서 사방으로 마구 뻗어 나가는 다양하면서도 기이한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다. 게다가 뒤늦게 컬렉션 재미까지 붙여서 부지런히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나중에 미미 여사가 정성들여 만든 여러 캐릭터들이 한 편의 스핀오프에 등장해서 활약하는 크로스오버 작품은 또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봤다. 5일하고도 반나절이나 되는 이번 설날에 읽은 첫 번째 책이다.

 

[리딩데이트] 2015215~18일 오후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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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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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 포토샵에 그라데이션이라는 기능이 있다.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6자리 디지털 정보로 된 흑백 사이의 일련의 색깔들을 표시한 기능인데, 이번에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2막 미시마야 시리즈의 첫 번째 인스톨인 <흑백>을 보면서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 그라데이션이 떠올랐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앞서 주인공 오치카 아가씨를 거두고 있는 미시마야의 주인장 이헤에 숙부가 세상은 반드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틈새기의 색깔도 있지 않나 하는 표현이야말로 미시마야 시리즈에서 미미 여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미시마야 시리즈 중에서 제일 늦게 출간된 <피리술사>로 미야베 월드 2막을 시작해서 역주행 중에 있다. 개인적으로 사무라이, 에도시대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미미 여사의 시대물 미스터리에 흠뻑 빠져 버렸다. <피리술사>를 읽으면서 그전 이야기들인 <흑백>과 <안주>를 읽어 보지 못해 자못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시리즈의 시원이 되는 <흑백>을 통해 그런 궁금증들을 한방에 털어 버릴 수가 있었다.

 

본국에서도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인기가 있는지 지난여름, 소설 <흑백>에 실린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일본 NHK를 통해 5부작 드라마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이제 소설도 다 읽었으니 예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만주사화> 꽃이 어떻게 생겼나 싶었는데, 블로거들이 올려놓은 드라마 스틸샷으로 고혹적이면서도 무언가 스토리를 담고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실물을 직접 볼 수가 있어 좋았다. 우선 미미 여사는 오치카 아가씨가 어떤 사연(곧 알게 되지만 약혼자의 죽음) 때문에 에도에서 좀 떨어진 고향 가와사키 역참 마루센을 떠나 에도 간다 거리의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추리물답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적절한 사연의 배치를 통해 독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오치카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에 나서게 된다.

 

아무래도 상가(商家)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 신분으로 고용살이에 나서는 십대 청소년들의 고된 '고용살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17세기 일본에서는 이미 기술이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헤에 숙부의 바둑 상대로 미시마야를 찾은 도키치를 우연히 대접하게 된 오치카는 뜰에 핀 자신의 존재 같은 덧없고 쓸쓸해 보이는 만주사화를 보고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손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다. 그리고 도키치는 만주사화에 얽힌 평생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회한 덩어리를 풀어낸다. 무려 사십년 전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는 우연한 기회에 사람을 죽이고 15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형 기치조를 외면하고 마침내 형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도키치. 고용살이라는 팍팍한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 역시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타인/고용주의 시선이 두려워 돌아온 형을 외면한 원죄는 만주사화의 원념으로 남게 된 것이다.

 

만주사화 사건을 계기로 이헤에 숙부는 오치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묘수를 하나 개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흑백의 방에서 오치카가 변조괴담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 화자들의 고민상담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거짓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도 기르라는 숙제를 내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흉가>는 안도자카 언덕의 저택에 백냥이라는 거금을 벌기 위해 들어가 살게 된 오타카 가족의 이야기다. 직업소개꾼 안도 노인의 소개로 흑백의 방을 찾게 된 오타카는 과거의 이야기를 오치카에게 들려준 다음, 백냥이 아닌 마음의 평안함을 줄테니 귀신의 집 안도자카 저택으로 가자고 유혹한다. 그녀는 오치카에게 안도자카의 저택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섬찟한 에피소드는 맨 끝에 배치된 <이에나리>에서 다시 불쑥 독자를 찾아온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흑백>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오치카 본인이 흑백의 방에서 청자가 아닌 화자로 등장하는 <사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련(邪戀)의 정의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도덕이나 도리에 벗어나거나 떳떳하지 못한 연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시원을 밝히는 이야기로 도대체 가와사키의 마루센에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치카와 그녀의 도락을 즐기다 정신 차린 약혼자 요시스케 그리고 마루센의 업둥이이자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온 마쓰타로 이 세 명의 삼각관계가 시발점이다. 부모에게 버림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구조로 살아난 마쓰타로는 총명함과 성실함으로 마루센의 양자처럼 성장하지만, 결국 그는 남이었고 남몰래 오치카를 연모하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오치카의 부모나 오치카의 오라비인 기이치 역시 마쓰타로를 잘 대해 주면서도,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 생각해온 것이 문제였다. 왜 오치카의 부모는 마쓰타로를 놔주지 않았을까, 바로 그런 그들의 이기심이 끔찍한 결말의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물론 우리의 주인공 오치카가 느낀 자책감은 말할 것도 없다.

 

<사련>을 중심으로 배치된 <만주사화>, <흉가>, <마경> 그리고 <이에나리>는 서로 연관된 이야기들로 최종편에 해당하는 <이에나리>에서는 기존에 등장한 인물들이 모두 재등장해서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오치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쌓은 공덕은 마침내 안도자카 저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상인'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가리지 않고 장사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녀와 만나게 될 거라는 그의 말대로 그들은 <피리술사> '절기 얼굴' 에피소드에서 재회하게 된다.

 

<피리술사>에서 정립된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흑백의 방 원칙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고 하는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치카처럼 진중하게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힐링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치카도 처음에는 <피리술사>에서처럼 그렇게 능숙한 청자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꾸준하게 자가발전해 나가는 캐릭터를 지켜보는 재미야말로 미야베 월드 2막의 숨겨진 별미다.

 

이번에 새로 출간되는 <맏물 이야기>를 예약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설날 연휴를 겨냥한 주문이리라. <맏물 이야기>에 앞서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도 구해서 내친 김에 읽기 시작했다. 오캇피치 모시치가 에피소드 마다 출연하고 있는데, 오치카 아가씨가 나오는 미시마야 변조괴담에 시리즈에 견주어 보니 조금 맛이 덜하고나 할까. 어설픈 사무라이 헤이시로가 나오는 <얼간이>도 읽고는 싶은데 지금 수중에 있는 책들은 <안주>, <메롱> 그리고 <흔들리는 바위>가 전부다.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의 에도시대물과 함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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