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을 읽고 나서, 비축해 둔 그녀의 다른 작품 <바다의 긴 꽃잎>에 돌입했다.

 

작년 말에 램프의 요정에서 중고책 할인해 준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 나가서 사온 책이다. 지금 열심히 읽고 있다.

 

그 때 같이 산 책이 에시 에디잔의 <워싱턴 블랙>이다. 이 책도 읽기 시작하긴 했었지. 바베이도스 노예 제도를 다룬 기대작 <워싱턴 블랙>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그 어느 소설보다 잔혹해서 당분간 접어 두었다. 리얼리티라면 정말...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전에 본 영화 <안테벨룸> 생각이 자꾸만 났다.

 

현실의 미국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완전히 불가능하지 않을 만한 그런 설정이지 싶다. 그만큼 인종차별의 유구한 역사는 지울 수가 없다는 거겠지. 사람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편견을 수정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고.

 

내가 새해 으로 산 책은 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이었다. 잔뜬 쟁여둔 적립금과 럭키백 할인으로 7,900원에 데려왔다. 조금도 책값이 아깝지 않았다.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사냥한 드문 책이었다.

 

칠레와 볼리비아/페루가 맞붙은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 궁금해서 군사전략연구소인가에서 나온 논문을 다 찾아봤다. 지금까지도 분쟁 중인 아타카마 사막과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해 알 수가 있었다.

 

다시 <바다의 긴 꽃잎>으로 돌아가 보자. 1938, 프랑코 파시즘에 맞서 싸운 공화군 소속 일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빅토르 달마우는 내전의 성패를 가른 테루엘 전투에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동생 기옘은 에브로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마르셀 류이스는 돌아 가시기 전에 차남의 전사를 예언하고, 프랑코 독재가 시작되면 엄청난 보복이 따를 거라며 어머니와 딸 같이 지내던 피아니스트 제자 로세르 브루게라를 데리고 망명을 떠나라고 권한다. 패배한 사람들의 집단 망명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목적지는 아마도 칠레겠지.

 

내가 살던 집, 언어, 사회 문화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에 가서 정착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나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에스파냐 말을 쓰니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내전 기간 동안 프랑코 독재집단의 공화파에 대한 만행에 대해서만 줄로 알고 있었다. 물론 프로파간다이긴 하지만 공화파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만행 역시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제와 수녀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돌려 살해하고, 포로로 잡은 국민전선 포로들은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다. 사실 조금 충격이었지만, 공화파가 내전에서 승리했다면 그들 역시 프랑코 못지 않은 보복을 자행했을 거라고 앤서니 비버는 말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불굴의 전사 기옘의 말을 빌어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있었노라고 서술한다. 이런 균형 잡힌 서사를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국민전선 일파가 실질에 중점을 두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면, 공화파의 지나친 이상주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서방의 지원을 이끌어 내지 못하면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새해 첫 주말, 나는 그렇게 <바다의 긴 꽃잎>이 구사하는 장대한 서사에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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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3-01-09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균형잡히고 장대한 서사....궁금해집니다~~

레삭매냐 2023-01-09 20:54   좋아요 0 | URL
연초에 여러 책들을 번갈아
가며 읽다 보니 순위가 좀
뒤로 밀리긴 했어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읽고 있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이
들이 위니펙 호에 올라 칠레
로 망명한다는 설정이 참 -

흥미진진의 연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