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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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산 첫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사두기만 하지 않고 바로 때려 읽었다. 왜 재밌으니까.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후예답게 즐거움, 몰입 그리고 의미까지 모조리 잡은 최고의 책이었다. 작년 여름에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사서 좀 읽다 말았는데, 그리고 연말에 산 <바다의 긴 꽃잎>도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거다.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말이지.

 

소설의 시작은 1880년 어느 가을의 화요일이다. 화자가 태어났다. 엄마의 이름은 미국 샌프란시코에 살던 절세미인 린 소머스. 생부는 마티아스 델 바예, 소설에서 아마존 여전사급의 신화적 인물로 등장하는 파울리나의 맏아들이다. 공화국 여신상 모델로까지 추앙받던 린은 딸 아우로라(중국 이름으로는 리밍)를 낳고 곧 죽었다. 화자의 탄생부터 무언가 파란만장 썰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은가.

 

칠레 출신의 파울리나는 펠리시나오와 눈이 맞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아마존 여전사의 치부 능력은 남자들의 그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손대는 사업마다 대박이 터진다. 미국에 철도에 깔릴 시절에는 철도 산업으로 한몫 단단히 챙겼다. 적어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먹고사니즘을 걱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든든한 재정이 필요한 법이다. 주인공 아우로라처럼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돈이 많이 드는 사진을 찍으려면 장비나 암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당시 가난뱅이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상황이리라. 그러니 훗날을 대비한 작가의 빌드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피렌체 장인이 만들었다는 넵투누스 침대의 두 개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화려한 배달 의식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 정도의 압도적 장관 정도가 등장해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자락이 깔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특유의 집안/가문에 대한 집착은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어김 없이 등장한다. 아마 그쪽 동네 소설의 특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최소 3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지. 어떤 면에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종교와 보수주의는 기성 세대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새로운 세대,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런 과거의 인습을 인정하지 않고 뽀개는 투사로 등장하는 클리셰이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존 여전사 파울리나는 그런 점에서 선을 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다음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매력적인 남자 세베로 델 바예다. 파울리나가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 유능한 인물로 어쩌면 자신의 사업을 보좌할 미래의 변호사로 꼽은 이가 바로 조카 세베로였다. 세베로는 어찌어찌하여 내기로 절세미녀 린을 품은 사촌형의 딸 아우로아의 법적 아버지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고향 칠레에는 그를 사랑하는 미래의 아내 니베아가 있는데 말이다. 훗날 그 둘은 무려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생산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직 장교 출신 세베로는 사랑하는 린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기껏 사랑하는 연인 니베아까지 버리고 장가를 들었는데 졸지에 자신의 애도 아닌 아우로라까지 거둬야 하는 홀아비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지점까지가 델 바예 가문의 성쇠와 세베로 연애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다음 무대는 전쟁과 내전이다.

 

187945, 칠레는 당시까지만 해도 패자 노릇을 하던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을 시작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기사와 논문까지 찾아보기도 했다.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읽기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 아니던가. 전쟁의 발단은 아타카마 사막과 당시까지만 해도 볼리비아 영토였던 안토파가스타 지역에서 나는 구아노와 초석 채굴에 대한 것이었다. 산업화 시대에 천연 비료인 구아노와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은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볼리비아는 칠레 사업가들에게 자국 원료 생산을 허가하고 면세 조치를 약속했지만, 나중에 뒤집어 버렸다. 그 결과, 갈등이 폭발하면서 전쟁까지 치르게 된 것이다.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이들만이 당시 세상의 끝인 칠레 정복에 나섰다고 한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 칠레 병사들은 소설에 따르면 야만적이었다. 소설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전쟁 초기에 칠레 VS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의 전력은 비등했지만 전세가 칠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칠레군이 페루의 수도 리마를 함락시키고, 볼리비아에서 안토파가스타 주를 빼앗는 대승리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볼리비아는 졸지에 태평양으로 나가는 영토를 상실하고 내륙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 전쟁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칠레-볼리비아 국경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린을 잃고 오로지 죽기 위해 이 야만적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세베로 델 바예는 수도 리마 공략을 앞두고 적(여성!)의 도끼날에 맞아 왼쪽발을 절단하게 된다. 그리고 든든한 빽으로 후방으로 이송되어 니베아의 초월적인 간호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보니 <바다의 긴 꽃잎>에 등장하는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도 전투에서 왼발 부상으로 다리를 절게 되지 않았나. 무언가 닮은 점들이 많이 연결되는 아옌데 작가의 설정이 아닌가 싶다.

 

아 그리고 보니 몇 대째 중의(中醫) 출신으로 린의 아빠로 등장하는 타오 치엔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화자 아우로라의 아빠 노릇을 실제적으로 한 사람이자 훗날 그녀의 악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중국인 배척 조례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중국인들이 개와 비슷한 대접을 받던 시절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인술을 베풀던 인물로 평생의 연인 엘리사 소머스와 결혼(?)해서 맏아들 럭키와 린을 낳았다. 동시에 성노예로 팔려온 싱송 걸들을 구해내는 슈퍼히어로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다시 아우로라 이야기로 돌아가 그렇게 칠레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아옌데 작가는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해 두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칠레의 열 번째 대통령이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였고 내전을 치르다가 자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단 말인가. 혁명과 내전의 아수라장 속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파울리나 델 바예는 매 순간마다 돈벌이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설탕 소비가 폭발할 거라는 예상 아래 투자한 설탕 투기 사업이 역시나 대박이 터진다. 남편 펠리시나오가 죽은 다음, 새 남편으로 들어선 영국 출신 집사 프레데릭 윌리엄스와 프랑스 포도주에 대항할 만한 칠레 포도주 생산을 위해 말년을 투자한다. 역사와 사회적 현상들을 다루는 작가의 놀라운 솜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빵에서 풀려난 정치인이 언젠가 FTA로 값싼 칠레산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마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칠레에서 바다 건너온 적포도주의 연원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산티아고를 오가는 신명나는 빌드업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화자인 아우로라 델 바예,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아우로라에게 생부 마티아스는 아름다움은 저주라는 말을 했던가. 5살 때,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는 손녀딸을 파울리나에게 보내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홍콩에 묻기 위해 칠레를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나타난 생수 마티아스와 만나게 되는 아우로라.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13살 때부터는 코닥 카메라를 선물로 받아 사진 명장 돈 후안 리베로에게 사진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진행된 건 아니고, 델 바예 가문의 정통 혈통다운 똥고집으로 스승에게 사사받기 시작한다. 파울리나는 처음에 돈으로 명장을 매수하려 하지만, 돈으로 모든 게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예술가는 몸으로 보여준다.

 

공교육을 거부하는 아우로라는 사회주의자 출신 개인교사 마틸데 피네다 양와 황금시대 서점의 돈 페드로 테이 그리고 자신의 법적 아버지 세베로의 영향을 받아 주체적 아가씨로 성장한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카메라에 예전에 회화가 담당하던 귀족이나 귀부인들의 사진을 찍는 대신, 칠레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인디오들 같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은 그런 점에서 현실을 포착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역사의 기록이라는 사실도 주지할 수기 있었다. 물론 셔터를 누르는 이의 감정도 피사체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도 작가는 빼놓지 않는다.

 

오래 전, 열화당에서 나온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이 찍은 세기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도 이런 사진들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장비나 여건 그리고 스킬은 아마 그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그 때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필름 카메라 시절, 비싼 필름값 때문에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호흡을 멈춰 가며 신중하게 누르던 셔터 찰칵은 디지털 카메라 시절에 아무런 부담 없이 거의 수백장의 연속촬영을 하더라도 아무 부담 없이 더불어 생각 없는 셔터 찰칵으로 치환되지 않았던가.

 

이사벨 아옌데는 양친과 유일한 혈육 파울리나를 잇달아 잃은 기구한 아우로라의 서사를 풀어내기에 앞서 다양한 종류의 떡밥들을 투척한다. 그리고 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칼레우푸 농장 출신의 호남자 디에고 도밍게스와의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 칭기즈 칸 이반 라도빅과의 우정을 빙자한 연애 그리고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16년 만에 나타난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숨가쁜 전개가 이어진다.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서사의 원형을 담은 소설이 바로 <소피아빛 초상>이지 싶을 정도다.

 

말이 필요 없다.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나온 <소피아빛 초상> 단 한 권으로 바로 나는 이사벨 아옌데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이 소설은 내가 원하던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를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계묘년 연초부터 이런 좋은 소설을 만나게 되다니, 되는 대로 살자가 모토인 나에게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신년 선물이지 싶다. 어제부터 <세피아빛 초상>도 못 다 읽은 상태에서 읽기 시작한 <바다의 긴 꽃잎>을 읽고 나면 이사벨 아옌데 삼부작 <영혼의 집>에 도전해봐야겠다.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책과의 만남은 행복의 또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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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1-05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재미죠잉. 이야기꾼!

레삭매냐 2023-01-05 14:36   좋아요 1 | URL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전작들도 읽어야지 싶습니다.

이야기꾼, 쌉인정.

새파랑 2023-01-05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셀럽 분들이 모두 이 책을 추천하는군요 ㅋ 저도 이 책 샀는데 주말에 읽어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5 14:37   좋아요 2 | URL
그전에 절판책이라 참 가지고
싶었는데, 중고책방에 나와 있
어서 냉큼 사서 읽었답니다.

몰입, 즐거움 그리고 의미까지
모두 사냥하시길 기원합니다.

바람돌이 2023-01-05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보관함에 들어있는 이사벨 아옌데를 또 깨우시는군요.
이토록 완벽한 칭찬이라니

레삭매냐 2023-01-05 21:45   좋아요 1 | URL
82 피플 ~ 다 같이 질러 BoA요 !!!

후회하시지 않으리라고 단언합니다.

chika 2023-01-06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제 취향이 아니라 무심히 넘기는데 작가 이름보고 찾아 읽었는데 정말 장바구니에 넣게 만드십니다! ^^

레삭매냐 2023-01-06 10:19   좋아요 1 | URL
저도 민땡사 세문의 표지가
여엉 적응이 되지 않으나 -

책은 진국이었습니다. 쨩.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6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재밌으니까!
이렇게 멋진 리뷰가 있을까요. 읽고 싶은 소설인데, 언젠가 저도 읽게 될까요?

레삭매냐 2023-01-06 10:20   좋아요 0 | URL
몰입도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상찬 감사합니다.

세피아빛 대열에 곧 동참하
시길 기대해 봅니다.

<방어가 제철> 읽고 있는데...
참 느낌이 좋네요.

독서괭 2023-01-06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책은 미리 사두여야 한다˝
ㅋㅋㅋㅋ 정말 저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책을 안 사려고 하다보니 더욱, 읽고 싶은 책이 마침 집에 있으면 과거의 저를 칭찬하게 되네요? ㅎㅎ
이사벨 아옌데 3부작은 언젠가 꼭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1-06 11:49   좋아요 0 | URL
고기 먹을 적에 공급이 끊어지면
안되는 것처럼, 책 또한 마찬가
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작가의 책을 만나 뻑이 갔을
적에 바로 또 내쳐 달려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저도 과거에 두 번이나 옳은 선
택을 한 저에게 칭찬하고 싶습니
다.

부디 도전은 고고씽~하시길.

서니데이 2023-02-0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