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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나는 그렇게 날강도가 되었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출판사 다니는 동지가 나를 그렇게 규정했다. 알라딘 동지들의 버프에 힘입어 내가 클레어 키건 작가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서점에 가서 읽겠다고 했더니, 그가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고, 그의 말대로 나는 날강도가 되었다.
내가 클레어 키건을 만나게 된 건 작년 리뷰대회 참전 건이었다. 이 때도 나는 책이 사기 싫어서 부러 시간을 내서 먼 도서관까지 가서 대출해서 읽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되짚어 보면 그 시절에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은데, 아마 그게 패착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맥주 한 캔 한 김에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리뷰 대회 참전이라는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튼 이번에는 그런 특별한 목적성(?)이 없으니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24년 동안 4편의 소설을 썼다는(대단하지 않은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들이 국내에서 무척이나 인기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전작 <맡겨진 소녀>의 서사는 국내 독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그런 요소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지. 참고로 우리 달궁인들은 이달 말에 <맡겨진 소녀>를 읽고 책에 대해 이바구를 털어볼 계획이다. 그전에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다시 읽어야 하나 어쩌나.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알코올의 힘을 빌어, 그냥 글가는 대로 써볼 생각이다. 미혼모의 아들로 성공한 석탄 목재상인 빌 펄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성실한 가장이자,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들을 보살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상은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냥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남자다.
클레어 키건은 중년 아저씨 빌 펄롱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일상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누구나 그런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그는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자각한다. 그리고 자각한 펄롱은 다시는 평범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타인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펄롱은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바로 이 점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비범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라고 생각한다.
미혼모였던 빌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미혼모의 아들이었던 빌은 전쟁미망인 미시즈 윌슨의 도움과 그녀의 농장에서 일하던 네드 아저씨의 후원으로 성장해서 한 가족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자신이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었던 직소 퍼즐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냥 무시하거나 없었던 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내 아일린에게는 눈치껏 그녀가 가지고 싶어 하던 에나멜 구두를 그리고 다섯 딸들에게는 제각각 필요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그런 멋진 성실한 가장이 바로 빌 펄롱이었다. 하지만 선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수녀원에 평소처럼 석탄 배달을 하러 갔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자기 딸 또래의 세라 레드먼드를 만나면서 빌의 운명은 거칠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누구는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바라던 선물을 받지만,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착취당하던 소녀들은 탈출을 꿈꾸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성스러워야 할 수녀원에서 이런 불의와 부조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펄롱 아저씨는 바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펄롱이 철저하게 기득권층에 속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런 고민이나 갈등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한때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소녀 세라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그의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갈등하던 펄롱이 찾은 바의 여주인장은 그에게 경고한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가톨릭교회의 질서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던 아일랜드에서 다른 곳도 아닌 수녀원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가대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딸들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질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펄롱이 고민하는 모든 것들의 복합적 요인들을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라고 규정하는 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구원은 어쩌면 도탄에 빠진 타인을 구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나에게 무언가 이익이 되는 걸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나의 구원에 무슨 도움이 될까? 단순하게 순간적 행복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어떤 행동이 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펄롱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결국 엔딩에 가서 소녀 세라를 구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전에 이틀 전에 읽은 책의 내용들을 메모하면서, 빌이 자신의 구원을 지향하는 공격수라면, 펄롱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빌의 아내 아일린은 수비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세라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빌이 자신의 친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클레어 키건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소설의 엔딩에 나오는 빌 펄롱이 내린 결정은 자기 구원의 길인 동시에, 펄롱 가족에게는 어쩌면 고난의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저간의 서사보다도 어쩌면 그 다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소설의 여백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클레어 키건 작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사람은 자신이 어디든 원하는 데로 가야 하는 법이지. 소설에서 빌이 자기 양심의 목소리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