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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보름 뒤에 달궁 독서 모임이 있다. 지난달에 동지들이 이달 독서모임 책으로 정한 책이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다. 지난주에는 날강두 스타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고, 오늘은 도서관 전자책 6순위로 신청해서 단숨에 다시 읽었다. 그리고 보니 1년 만에 다시 읽었다.
만날 삼천포로 빠지니 오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맡겨진 소녀>는 원래 2010년 2월 7일, <뉴요커>에 단편으로 소개되었는데 8달 뒤에 정식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영어책, 뉴요커에 실린 단편 그리고 번역책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번갈아 찾아가며 아일랜드 웩스포드 지방에서 1981년 8월에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본다.
웩스포드, 클로너걸, 실레일리 그리고 카뉴라는 지명을 통해 이 동네가 아일랜드 동남부 지방이라는 걸 확인한다. 화자인 이른바 "맡겨진" 소녀인 나는 아버지 댄과 함께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비가 오지 않은 여름 가뭄의 시절에 맡겨진다. 왜 나는 존과 에드나에게 맡겨졌을까? 이유는 가난 때문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는 아버지 댄의 무능력함 때문이다. 게다가 댄은 거짓말쟁이기도 하다. 성실하지 않는 건 불문가지일 것이고.
두 명의 언니들, 남동생 그리고 또 엄마 메리는 임신 중이다. 아버지 댄은 나를 부탁하는 처지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 모양이다. 나의 짐도 내리지 않은 채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가 버렸다. 상황이 참 그렇다.
에드나 아줌마는 나를 변신시키기 시작한다. 일단 무언가 좀 먹인 다음에, 목욕을 시켜 준다. 뜨거운 물이 참을 수 없지만, 괜찮아 질거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맡겨진 소녀는 그렇게 삶에서 참을 수 없는 것들도 때로는 참아야 한다는 걸 배운다. 그건 마치 우리가 가기 싫은 학교에 가거나, 일용한 양식을 사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출근해야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일까. 에드나 아줌마는 목욕에 이어 피부관리 그리고 귀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주신다. 가난과 많은 아이들 시중 그리고 살림에 지친 나의 엄마 메리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존 킨셀라 아저씨는 무뚝뚝하지만, 지낼수록 진국이라는 느낌이 든다.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킨셀라 집안의 유사 가족처럼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낯선 곳에서 첫날밤에 실례한 나에게 에드나 아줌마는 잠자리가 습기가 많다며 창피를 주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게 바로 성숙한 어른들의 방식이 아닌가. 나의 아버지 댄의 빈정대는 건 정말 듣기 싫더라. 타인의 호의를 이상하게 비꼬는 게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모르겠다.
짧게나마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당시 IRA 출신 청년들이 벌이던 단식 투쟁이 소개된다. 5월 바비 샌즈를 필두로 해서 그동안 7명이 극한의 단식 끝에 사망했고, 1981년 8월에 세 명이 더 죽었다. 존 아저씨는 어떤 남자는 굶어 죽었는데 자신은 풍족하게 먹고 있다는 자족적인 말을 한다. 이에 에드나 아줌마는 그래도 당신은 밥값은 하지 않냐고 말한다. 되짚어 보면 작년에 <맡겨진 소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바로 이 극한의 정치투쟁에 대해 리뷰에서 상당 부분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나와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달라 기억이 휘발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랄까.
존 아저씨는 고리에 나가서는 나에게 주전부리라도 사 먹게 적은 돈이지만 일 파운드도 주고, 제법 괜찮은 드레스도 사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다 우연히 방문하게 된 이웃 마이클 레드먼드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킨셀라 부부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튼 간에 어디서나 오지라퍼들이 문제다. 이웃 밀드러드 아줌마는 마치 무슨 밀정처럼, 장례식장에서 부유하는 나를 돌본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네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겠다며 데려다가 갖은 질문 공세를 퍼붓고, 킨셀라 집안의 아이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그것 참, 꼭 그래야 했나.
적지 않은 시간을 살다 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맡겨진 소녀'는 정말 빠른 시간에 아주 간단한 그런 사실을 배웠다. 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배워도 좋을 것을,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때문에 강제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 메리를 필두로 해서, 소녀 주변에 있는 이들은 아이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캐내려 하고 이제 조금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소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정황들이 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꼬마 킨셀라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날, 존 아저씨는 소녀를 데리고 바다에 간다. 바다에서 소녀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대한 고민을 필두로 한 생각에 잠긴다. 어떤 점에서 <맡겨진 소녀>는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 소녀의 압축적 성장과정을 다룬 성장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복귀를 결정한 소녀에게 사소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풍족한 킨셀라 가정을 떠나 결핍으로 채워진 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 집에 가니 아버지 댄은 해서는 안될 말을 소녀를 진심으로 보살펴준 존과 에드나에게 서슴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는 정말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댄은 상대방의 호의를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빌런이란 말인가. 엄마 메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소녀를 추궁한다. 삶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소녀가 굳게 입을 다무는 시퀀스는 정말 찬란하게 다가왔다. 바로 이거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만큼이나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었다. 클레어 키건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밀도는 왠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지만, 그만큼의 빈 공간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우라는 밀명을 받은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과연 피할 수 없는 가난과 결핍에 잘 적응했을까? 언니들과 두 명의 남동생들 사이에서 제대로 밥은 먹었나 하는 실존적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시 포스터 차일드로 킨셀라 집에 가서 살게 되면 보다 더 행복했을 지에 대해서도. 그래서 삶이 미스터리라고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