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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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서가파먹기 프로젝트 #007> 

 

드디어 살만 루슈디와의 첫 번째 만남을 끝냈다. 다시 카슈미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낙원이라 불리는 카슈미르는 과연 어떤 곳일지 궁금해졌다. 지난 주말 인천집에 갔다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살만 루슈디의 <광대 샬리마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이 책을 갖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읽지 않았다. 읽기 시작했는데 카슈미르가 등장하더라. 이런 놀라운 인연이 다 있나 그래.

 

600쪽이 넘는 <광대 샬리마르>를 읽으면서 제각각 다른 세 개의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장소부터 모두 다르지 않은가. 천사들의 도시가 위치한 미국 캘리포니아, 지상의 낙원이라는 카슈미르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분쟁지역이었던 스트라스부르가 그곳들이다.

 

시작은 천사들의 도시다. 시간적 배경은 1991년, 24세 인디아 오퓔스가 첫 번째 주자다. 사실 첫 번째 챕터는 잘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저명한 그녀의 아버지 막스 오퓔스가 어새신(암살자)에게 처참한 모습으로 암살당했다. 도대체 누가 베스트셀러 작가에, 항동 레지스탕스, 하늘을 나는 유대인 그리고 주인도 미국 대사였던 미남자 막시밀리언 오퓔스를 죽였단 말인가. 아니 이 정도로만으로도 시작이 충분했던가.

 

살만 루슈디는 다시 시절을 되돌려 이번에는 지상의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카슈미르로 계곡으로 이동한다. 카슈미르 파치감이라는 마을에 무슬림 청년 샬리마르 노만과 힌두소녀 부니(부미) 카울이 살았다. 자, 그들은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되고 종교 때문에 격심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운명은 지금까지도 갈등이 지속되는 카슈미르의 숙명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마라하자가 지배하는 다수 무슬림들은 정치적으로 인도나 파키스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카슈미르인들을 위한 카슈미르라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세상을 원했다. 어쩌면 그런 이상이 수십 년간 계속되는 불화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파치감은 전통 예술공연과 60여 가지에 달하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법한 연회 요리로 유명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파치감에서 샬리마르는 줄타기의 달인이었고, 십대 소녀 부니는 아나르칼리를 연기하는 절세의 무희였다. 이질적 종교의 결합 사이에 자라나기 시작한 미세한 삶의 균열은 훗날 등장해서 부니를 앗아간 사악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 유대인 미국 대사 막스 오퓔스로 촉발된다. 문제는 부니의 선택이었을까. 지루한 시골 마을을 탈출하기 위해 부니는 막스와 자신의 육체로 거래에 나선다. 사랑 없는 육체관계가 과연 오래갈 수 있었을까?

 

당연히 오쟁이진 젊은 남편 샬리마르는 분노와 증오에 젖어 복수를 다짐한다. 부니와 막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재앙의 씨앗인 카슈미라까지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한편 잠무 카슈미르를 장악한 힌두 인도군은 카슈미르에 사는 무슬림들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자치를 원하는 카슈미르 무슬림들에게 지울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당연히 이에 분노한 카슈미르 청년들은 해방전선에 가입해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도군의 진압에 대항한다. 자살폭탄 테러를 비롯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한 때 지상의 낙원이었던 카슈미르는 이제 지상의 지옥이 되어 버렸다.

 

다음 무대는 소설 <광대 샬리마르>의 또 다른 주인공 막스 오퓔스가 사는 유럽의 복판 스트라스부르다. 프랑스의 영토이기도 했다가 보불전쟁의 패배로 독일제국의 땅이 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등 그야말로 카슈미르 버금가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스트라스부르에 막스 오퓔스를 배치한 점도 살만 루슈디의 혜안이 번뜩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레지스탕스 영웅 막스 오퓔스가 과연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 정 만으로 목숨을 건 저항운동에 나선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에 작가는 냉철하게 분석을 제시한다. 억울하게 강제수용소에서 의학실험의 대상으로 죽어간 부모의 죽음에 대한 복수, 그리고 어쩌면 불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낭만적 요소가 더 강렬한 유인책이 아니었을까. 막스 자신이 한 때,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막사의 테러와 샬리마르의 테러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모든 테러는 나쁜 것인가? 아니면 누구의 테러는 옳고, 또 다른 누구의 테러는 옳지 않다는 건가? 분노와 증오의 파도가 다시 한 번 넘실거리는 시절에 테러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살만 루슈디의 <광대 샬리마르>를 통해 미지의 세계인 카슈미르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소설적 장치로서 분열과 갈등보다 더 좋은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거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사랑과 전쟁” 그리고 복수라는 양념까지 추가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이후의 서사 전개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막스의 아이를 낳은 부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한 때 자매 같았던 친구들의 농간으로 그녀의 아버지 요리사이자 철학자 판디트 피아렐랄 카울마저 그녀의 죽음을 공인한다. 막스의 뚜쟁이 에드거 우드는 부니를 씹는 담배와 마약 그리고 폭식으로 길들였다. 부니가 호색한에게 제공한 쾌락의 여운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부니와의 관계가 스캔들로 비화되면서 미국 대사는 문자 그대로 추락했다. 부니의 귀향 소식을 들은 샬리마르를 바로 행동에 나서려고 하지만, 반드 파테르의 수장 아버지 압둘라 노만과 판디트 피아렐랄의 만류로 부니의 운명은 유보된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겉껍데기만 남은 샬리마르의 미래도 결정난 게 아니었을까. 산으로 들어가 해방전선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던 형 아니스 노만과 합류한 샬리마르는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테러활동에 온전하게 투입하고, 뛰어난 암살자로 거듭난다.

 

지상 낙원이었던 카슈미르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보여준 작가는 마지막으로 막스 오퓔스 대사가 암살된 미국으로 다시 무대를 이동시킨다. 미국대사 막스 오퓔스로 대변되는 미국의 어중간한 태도도 세계의 화약고로 변한 카슈미르 파괴에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닐까. 더 나아가서는 세계화에 발맞춰 상품과 재화의 자유로운 이동만큼이나 분노와 증오가 실린 폭력의 세계화에도 미국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래서인지 막스를 암살한 샬리마르가 미국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미국출신 변호사가 구사한 ‘주술사 전법’이 허무맹랑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탈옥에 성공한 샬리마르가 인디아 아니 이제는 카슈미라 오퓔스가 된 자신의 의붓딸과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처음 만난 살만 루슈디는 <광대 샬리마르>로 나에게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지난 주말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멍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서로 다른 세 권의 연작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지난주에 그의 대표작 <한 밤의 아이들> 상권을 사들였다. 집에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리고 어제부터 9개의 단편 소설이 실린 <이스트, 웨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훨씬 더 가벼운 느낌이다. <무어의 한 숨>도 재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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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윈스턴 그룸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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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초콜릿 상자!

그래 포레스트 검프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소설책으로. 아주 오래 전에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봤다. 기대했던 것처럼 재밌었다. 포레스트 검프 역을 맡은 탐 행크스의 연기도 좋았고. 정말 오래전 일이로구나. 그런데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인지는 어제 처음 알았다. 역시 갠춘한 영화에는 좋은 원작이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런데 소설로 만난 <포레스트 검프>는 영화와 아주 많이 달랐다. 영화에서 검프가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었는데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을 많이 덜어냈다. 물론 그래도 대통령 LBJ를 만나고, 핑퐁외교팀의 일원으로 중국에 건너가 마오 주석을 익사의 위기에서 건져내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베트남 파병 근무를 했다는 저자의 경험치에 의거해서인지 검프의 에피소드는 베트남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모빌, 앨바매바 출신 백치 소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풋볼 러닝백으로 일약 스타가 되면서 시작된다. , 그전에 검프의 평생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니 커런을 만난 이야기도 빼먹으면 안되지. 한국 드라마에서 애정 라인이 빠질 수 없듯이 검프 스토리에서도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앨라배마 대학까지 진학하는데 성공한 검프는 대학에서 훗날 자신의 사업적 성공의 기반이 되는 새우 사업의 꿈을 자신에게 불어 넣어준 친구 버바를 만나게 된다. 영화에서 버바는 흑인이었던 것 같은데, 소설에서는 인종이 달라 보인다. 그리고 룸메이트로 포악한 커티스도 등장하고. 오렌지볼에서 우승에 실패한 검프는 대학에서 낙제하는 바람에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징병되어 끌려 가게 된다. 그는 자신이 백치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그가 가는 곳은 죄다 백치들 투성이라 별 문제가 안된다고 한다. 대학 풋볼팀이 그랬고, 군대가 그랬다.

 

군대에 간 검프는 평생기지라고 할 수 있는 버바와 다시 만나고, 자신에게 삶에 대해 반추하게 해준 상이용사 댄 소위를 만난다. 잘못된 전쟁에 참가한 젊은이들의 국(gook)들과의 전쟁에서 손발을 잃고 심지어 죽기까지하는 장면은 정말 안타까웠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인사들은 징병기피를 해서 그런 똥더미 같은 전장을 피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영화에서처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동료 병사들을 구한 용감한 행위로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명예인 의회 명예훈장까지 검프는 받는다. 그리고 자신 역시 엉덩이에 부상을 당한 상이용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전쟁 본드 판매에도 나서게 된다. 이 장면에서는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가 연상되기도 했다. 군병원에서 탁구도 배우고.

 

영화에서는 그 유명한 딴따라 엘비스와 대통령 케네디와도 만나는 장면이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LBJ와 만나서 미스터 프레지던트에게 엉덩이를 들이미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미군 탁구 챔피언을 박살낸 검프는 당시 데탕트 분위기에 편승한 죽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한 핑퐁외교 사절로 중공을 방문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커트되었지만, 장강을 건너는 마오 주석을 익사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물론 같이 갔던 인사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 제대한 검프는 첫사랑 제니를 찾아 하버드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로 가서 걸출한 하모니카 연주로 제니와 밴드 활동을 하기도 한다. 반전시위대로 몰렸다가 NASA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우주비행에 나선다. 이 부분이 소설에서 가장 황당해 보이는데(사실 스토리의 전개가 전반적으로 황당의 연속이긴 하지만), 다른 여성 우주인과 오랑우탄 수와 함께 뉴기니 정글에 추락해서 4년간 식인종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부분은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걷어내졌다.

 

다시 사회에 복귀해서는 댄 소위와 만나 레슬러로 활약하기도 한다. 그렇게 쇼비즈니스 업계를 경험한 검프는 비로서 싸나이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한탕 거하게 땡겨서 전장에서 전사한 버바의 꿈대로 루이지애나로 가서 새우 사업 밑천을 벌겠다는 검프의 꿈은 제니가 그의 곁을 떠나면서 일장춘몽이 되어 버린다. 그제서야 검프는 홀로 남은 엄마를 찾으러 나섰던가. 암튼 이번에는 뉴기니 정글에서 배운 체스로 캘리포니아로 가서 체스 대회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버바의 아버지를 찾아가 드디어 새우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의 새우 사업이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그리고 나선 버스킹을 하기도 하고 블라 블라...

 

소설 <포레스트 검프>는 영화에 비해 여전히 황당한 전개이긴 해도 흥미로 가득하고, 무엇보다 재밌다. 신속한 전개에, 끝없이 변신하는 검프의 캐릭터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만 반전 메시지 같이 좀 더 진중한 컨텐트에 대해 좀 더 다루지 않은 점이 아쉽긴 했다. 영화는 아마 속편 <검프 회사>의 내용까지 더해서 나온 것 같은데, 속편은 저작권료 분쟁으로 영화화되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최고였노라고 말하고 싶다. 재밌으면 그만이지 뭘 그래.


[뱀다리] 아 그런데 표지하고 소설하고는 미스매칭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합중국을 달리는 검프 이야기는 나오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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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3-14 09:17   좋아요 0 | URL
얼마 전에 영화를 빨리 보기로 해서 보았는데
참 재밌더라구요.

올디 벗 구디인가 봅니다. 90년대 갬성으로.

노래도 멋졌습니다.

설해목 2019-03-14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표지가 안타깝네요. ^^;;
영화는 몇 번을 봤는데..... 소설은 영화와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고 하니 우선은 담아두지만
저 표지라면 선듯 데려오기가.....ㅎㅎㅎ;;;;

레삭매냐 2019-03-14 16:45   좋아요 1 | URL
소설이 영화보다 쫌 더 전개가 황당하고,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책도 읽는 동안 매우 흥미진진했답니다.

다만 표지는 좀 아쉽네요...

moonnight 2019-03-14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볼 때마다 눈물이ㅠㅠ 레삭매냐님 평을 믿지만 소설을 읽게 되지는 않을 듯. 포레스트 검프는 그냥 영화로 간직하고 싶어요^^ 표지 문제가 크네용-_-

레삭매냐 2019-03-15 09:38   좋아요 0 | URL
느낌상, 아무래도 영화는 속편이라는 <검프 회사>
하고 짬뽕 콜라보로 만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영화 좋지요 ~~~

cyrus 2019-03-15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구판은 김영사에서 나왔어요. 역자는 개정판과 비슷할 것입니다. ^^

레삭매냐 2019-03-15 18:1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답니다.

판권이 아마 다른 출판사로
넘어간 모양입니다.
 
광신의 무덤
볼테르 지음, 고선일 옮김 / 바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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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위대한 인문주의자였던 볼테르의 신랄한 그리스도교 비판서인 <광신의 무덤>을 읽었다. 내가 보기에 무신론자 볼테르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테르의 비판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 시대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신화는 기존에 존재하던 전승과 설화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창조적 변형의 과정을 거쳐 유대인들의 경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20년 전에 이미 길가메쉬 신화가 성경 기록 이전에 존재했다는 이야기로 반박을 하던 지인의 논박이 떠올랐다. 유대인들의 숙적인 페니키아인(블레셋 혹은 필리스타인 사람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 여타 민족을 약탈하고,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도적질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민족을 잔혹하게 멸족시키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믿음의 조상이자 위대한 유대왕국의 건설자 다윗이 범한 실수에 대해서도 냉철한 저술을 이어간다(49쪽). 볼테르에 따르면 자신을 환대한 아키스 왕과 동맹을 맺은 부족들을 약탈하고 학살했다. 왕위를 찬탈하고, 사울 왕의 후손들을 죽였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언급을 피하자. 그의 아들 솔로몬의 수많은 축첩행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것들은 구약 시대의 유대 풍습도 지금까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회의 십일조다), 또 어떤 것들은 현재와 맞지 않으니 지키지 말아야 한단다. 그렇게 현명했던 솔로몬의 타락으로 결국 유대왕국의 분열과 멸망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던가. 솔로몬이 지은 외설스러운 <아가>에 대해 교황파 신학자들이 갖다 붙인 해설은 정말 최고였다.

 

신성모독에 가까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되어 결국 거대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의 광신성에 대해 볼테르는 비판의 방점을 찍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점철된 전승으로 무장한 그리스도교가 다신교 세계인 로마 제국의 하층부에 서서히 침투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유일신 종교 특유의 불관용은 궁극적으로 다른 종교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사후, 그리스도교의 세계화의 결정적 공헌을 한 바울에 대해서도 횡설수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볼테르는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그 어떤 유대인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놀라웠다.

 

볼테르는 또한 그리스도교 초기 등장했던 다수의 복음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정경(캐논)으로 인정받은 현재의 복음서의 기술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이에 열성적인 유신론자 파스칼은 그것은 “합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의 위작설에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무게를 싣는다. 가령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 시절에 교회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후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에클레시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대로 과연 진리가 우리에게 늘 이로운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유대 지방을 벗어나 그리스 플라톤의 이원론과 결합하면서 발생한 삼위일체론에 도달해서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본질에 어떻게 세 개의 다른 위격이 존재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교부 철학자들이 매달려서 합리적 논리를 제시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해결이 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저 믿으라는 말만 하니 답답하다. 그전에‘ 트리니티’에 대해 질문하니 도돌이표처럼 맴도는 답변만 돌아오더라. 삼위일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었던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의 사제 클레멘스와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는 호교자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치열한 논박을 벌였다. <광신의 무덤>을 읽다가 도서관으로 달려가 오리게네스의 <켈수스를 논박함>을 빌려 오기도 했다. 다만 자그마치 8권이나 되는 책의 축약본이라는 점이 좀 아쉬웠지만 말이다. 언제 다 읽게 될 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구원에 이르는 비밀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의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에세네파, 마니교, 알비파(카타리파)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닌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볼테르는 이것이 광신의 특성이라고 역설한다)은 필연적으로 기존 종교를 믿는 이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초기 로마 제국의 박해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전승이 당시 어마어마한 박해가 있었다고 하는데, 볼테르는 이것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시한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어떤 카이사르가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볼테르가 적시한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박해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바오 출판사는 친절하게도 각주로 설명을 대신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초대 기독교 황제로 떠받들여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화에 대해서도 볼테르는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전혀 기독교 황제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 포악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제국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고 북방의 야만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역설은 또 어떤가. 그리스도교 내의 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당시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두고 도나투스파와 키프리아누스파로 나뉘고,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와 유세비수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초기 기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을 들여 비판한 볼테르는 중세시기 권력 자체가 된 교황권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논박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억압한 사실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처음의 결기는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어쨌든 볼테르의 비판을 읽으면서 현재 교회의 모습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스스로 정치세력화된 일단의 목사들은 돈과 권력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입으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면서도, 거대한 메가처치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상의 권력을 얻게 되자 초대 교회 시절, 교회라는 건물도 필요없다고 한 주장을 번복한 중세 교부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대신 맘몬을 더 가까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리가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볼테르는 283년 전의 저술로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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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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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유작 <달과 불>을 읽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며칠 전에 읽은 시바타 쇼의 소설처럼 나에게는 늦게 도착한 탓인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달과 불>의 배경은 작가의 실제 고향인 피에몬테/쿠네오 지방의 산토스테파노벨보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화자는 20년 간 고향을 떠났다가 성모축제에 즈음해서 고향에 돌아온 안귈라(뱀장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벌써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의 과거 행적을 돌아볼수록 안귈라가 고향에 어떤 미련을 두었을까 싶다. 사생아로 태어난 안귈라는 어려서는 오 리라를 받으며 가난과 싸우며 이부누이들과 파드리노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좀 자라서는 모라 농장의 하인이 되어 그저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랬던 안귈라가 군입대를 시작으로 해서 인근 대도시 제노바를 거쳐 미국의 태평양 바다 끝까지 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자수성가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안귈라는 자신이 부재한 시간 동안 엄청나게 바뀐 현실을 목도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지주들은 몰락했다. 다만 종교계를 대표한 주임신부는 건재해서 파시스트 스파이로 처형된 이들의 죽음을 위로한다. 물론 그가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시인으로 출발해서 소설가, 문학비평가 그리고 공산주의 반파시스트 혁명가였던 체사레 파세베가 그리는 현대 이탈리아의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독자의 그런 기대와 달리 <달과 물>은 이탈리아의 시골마을과 미국을 부유하는 한 오디세우스의 유랑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리노, 산토스테파노벨보, 카넬리, 알레산드리아 그리고 제노바 같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르는 낯선 지명들이 주는 이물감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성공을 구가하며 떠난 미국에서 이방인이었듯이, 고향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와서는 안귈라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부재한 동안 고향을 지켰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유쾌한 음악가 그리고 목수인 누토를 통해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의 궤적을 안귈라는 추적한다. 모라 농장의 하인이던 시절, 자신의 갈라테아였던 눈부신 이레네와 실비아에 대한 회상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급한 욕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레네 자매 역시 백작 부인의 저택에 초대받지 못해 안달하는 장면에서는 욕망의 본질은 결국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시절 안귈라와 누토에게는 가미넬라 언덕이라는 공간이 그들의 전부였지만, 안귈라는 그 너머 카넬리와 제노바를 거쳐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까지 탐험하고 결국 성공해서 지주가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런 금의환향이야말로 그네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역설적으로 고향에 남아 소작을 부쳐 먹던 발리노 삶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발리노의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살아남은 절름발이 소년 친토가 상징하는 건 어쩌면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탈리아 국가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호모 폴리티쿠스 독자는 자꾸만 정치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전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나라였다. 파시스트 두체 무솔리니와 독일군에 맞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운 빨치산 그룹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장 총선을 치르면 공산당이 승리할 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빅 브라더 역할을 하던 미국이 이것을 용인할 리가 없다. 그리스에서는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탈리아를 철의 장막에 내줄 수 없었던 미국이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가톨릭을 포섭해 우익 정부의 탄생을 도왔다. 그 결과,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은 전쟁 전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모라 농장의 막내 산티나의 운명적 삶이야말로 이런 혼란이 정점에 달한 시절을 묵직하게 타격하는 결말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산티나는 이상한 놈팡이들과 꼬여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언니들과는 달리 자주적인 신여성의 모습에 도전한다. 그녀는 파시스트 본부에 일하는 동시에 빨치산에도 협력하는 이중적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산티나는 과연 부역자였을까? 아니면 명예로운 빨치산 전사였을까?

 

내가 과연 체사레 파베세의 <물과 달>을 세세하게 이해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글가는 대로 읽고 싶었는데 역시나 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의 문학적 시원을 이룬다는 시집 <피곤한 노동>이 읽고 싶어졌다. 아쉽게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그의 시집이 없더라.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방증이겠지. 언제고 헌책방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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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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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신형철 씨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이다. 언제나 출간이 되는지 기다리다가 결국 망각해 버렸다. 그리고 작년 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처음 팟캐에서 들었을 때만큼 땡기지가 않아서 그냥 말았다. 아마 그 때라면 사서 읽었겠지만. 도서관에 입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게으르게 읽어볼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에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55년 만에 만나게 된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의 주인공은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후미오 군이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도쿄여대 출신의 세쓰코와 약혼하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의 삶은 지루하고 나른하게 진행된다. 불같은 사랑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의 시대처럼 들린다.

 

후미오가 헌책방 순례 중에 한 질의 H전집을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 같은 책쟁이를 위한 책인가 싶다. 헌책방에서 나도 이미 많은 사연을 만나지 않았던가. 콜롬비아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마르케스의 책을 샀다고 했던가. 지인에게 애써 선물한 책이 헌책방을 부유하는 것도 목격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잡설이고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세쓰코를 통해 자신이 헌책방에서 산 전집의 원래 주인이 사노라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면제를 먹고 죽은 사노가 남긴 유서에 따르면 한 때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혁명을 꿈꾸던 청년은 시위 도중에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사실로 괴로워했다. 육전협의 평화주의 노선 채택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청년은 일체의 운동을 접고 기득권층이 원하는 올바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간부인 부사장의 눈에 들어 데릴사위 후보가 되기도 하고, 전도유망한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미래의 간부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본질은 ‘배신자’가 아니었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비판적으로 바라본 지점은 바로 사노의 생각이었다. 그는 너무 순수해서 세상과 타협하는 걸 몰랐던 걸까? 자신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이데올로기와 동지들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을 마냥 사노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좀 그렇다. 그런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방법 말이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후미오의 주변에는 그런 허무주의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다. 후미오가 아는 고지식한 미래의 교수 후보는 세쓰코를 통해 자신이 곧 결혼하게 될 여자의 뒷조사를 부탁한다. 소설이 배경이 되는 시절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같아서는 참 거지같은 발상의 소유자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게다가 그 아가씨는 자신의 지도교수님과 불륜에 빠지지 않았던가. 과연 그들의 비밀은 지켜질 것인가.

 

후미오 주변에는 왜 그리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심지어 세쓰코조차 지하철역에서 넋을 잃고 있다가 중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후미오와의 결혼을 서두르던 세쓰코는 이런저런 사실들을 알고 난 뒤 지독한 고독감에 빠지기도 하고, 결국 무사안일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시골 마을로 가 자신의 알량한 영어 지식을 바탕으로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설의 진행에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편지들이, 그것도 속달이라는 방식으로 전달되어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낯설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메일이나 카톡 같은 메시지와는 다른 결이겠지. 젊은 날의 후미오는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라며 육체의 향연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안정을 찾아 세쓰코를 찾지 않았던가. 우리의 젊음은 모든 방종을 용인하게 만들어주는 만능 치트키 같은 것일까 과연.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기도 한다. 소멸 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심각한 고민을 해봤을까? 인생의 가장 절정기에 죽음을 두고 고민한다는 점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시바타 쇼 작가의 데뷔작 <록탈관 이야기>에 나오는 발칙한 라디오 마니아 중학생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실 왜 이 단편이 뜬금없이 등장하는가 싶었지만 작가의 시원을 밝힌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수록이지 않았나 싶다. “코리안 워”니 “레드 차이나” 같이 소년이 조립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에 먼저 눈이 간다. 왜 이 소년들은 그렇게 라디오의 세계에 열광했을까? 라디오 조립이라는 새로운 세계, 회로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신세계야말로 그들에게는 하나의 해방구로 작동한 게 아닐까.

 

패전 후,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기업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극적인 부활에 나서게 된다. 배터리만 하더라도, 미군들이 엄청난 재고 물량을 소진하는 전쟁특수를 맞게 된다. 이웃나라에서 전쟁이 나건 말건 그렇게 애타게 가지고 싶어 하던 진공관의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소년들의 마음을 산산 조각내 버린다. 아니 트랜지스터도 아닌 진공관에 대한 이야기라니 놀랍다 놀라워. 한편, 전쟁 투입을 앞둔 미군들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 몰래 빼돌린 진공관을 간다 거리의 암시장에 내놓기도 했단다. 주인공 소년은 우연히 얻어 걸린 고가의 록탈관을 200엔에 사들여 희희낙락한다. 문제는 나중에 그가 발견한 미세한 균열이었다. 그렇게 희망은 록탈관의 균열과 사라져 버리고...

 

아마 내가 청년이었을 때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었다면 다른 감성으로 만나게 되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어 만난 청춘 소설에 대한 감상은 솔직히 말해 심드렁했다. 나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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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03-05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책은 언제 어떤 상황에 읽느냐가 중요한가 봐요.
청춘일 때 이 소설을 읽었다면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이 전 세대를 아우를만한 명작은 아니란 생각도 들구요.
운명같은 소설과의 만남을 꿈꿔봅니다 저는 오늘도..^^

레삭매냐 2019-03-05 17:18   좋아요 1 | URL
이제 더 이상 청춘이 아님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 ㅋㅋㅋ 뭐 그렇게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짜 청춘일 적에는 술 퍼먹고 사느라
책 읽을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쪼록 운명 같은 책들을 연달아 만나
게 되시길 기원해 봅니다.

카알벨루치 2019-03-05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아디가 여기 떡 나오니 기분이 새롭네요 ㅎㅎ 전 이 소설 넘 좋아요! 시기상조인 것도 있지만~사람이 사람을 물리적으로 가까이있어도 외롭게 한다는 것을 보곤 마음이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03-05 17:20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

후미오 군이랑 세쓰코 양이 그렇게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외롭고 고독
하고 그런 감정을 느꼈다니 쫌 안타
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혁명
을 꿈꾸던 이들이 사회에 적응해서
이제는 꼰대가 된 시절이 지금이라는
생각을 하면 갑갑해집니다.

syo 2019-03-05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포에는 요놈이 서가에 꽂혔군요. 대구(중 제가 다니는 몇 군데 도서관)에서는 요놈이 대출과 예약과 예약과 예약의 연속으로 도무지 서가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읽으신 분들 평이 너무 떡떡 갈려서 차마 사보기는 그렇고 빌려서 보려 했는데 저는 아직도....ㅠ

레삭매냐 2019-03-06 10:33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저희 동네 외딴 곳에
있는 도서관에 예약도서로 신청을 헷 -

서가에서 데려온 녀석은 아니랍니다.

제 스탈의 책은 아닌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