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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Coool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독서 모임에서 야마다 에이미(이하 영미 씨로 표기)의 <소울뮤직 러버스 온리>를 읽었다.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지만, 여튼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주말, 종로로 달궁 모임을 출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고서점에 들러서 올랜도 파이지스 교수의 두툼한 역사책 하나 그리고 우리 영미 씨의 소설집 <120% COOOL>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스타의 <쏘 쿨>이란 노래가 생각나는 건지.
모두 9편의 소설이 담긴 이 책은 1994년에 발표되었다. 대략 영미 씨가 35살 정도에 쓴 책이 아닌가 싶다. 지난 이틀 동안, 그야말로 간만에 읽어 보는 독특한 스타일의 연애소설에 빠져 버렸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발칙하고 도발적인 콘텐츠의 가독성은 탁월했다고.
무려 30년이나 시간이 흘러 이제 그녀가 구사하던 도발적인 섹슈얼리티를 이제는 SNS나 너튜브를 통해 많이 접하게 되어 조금은 무덤덤했다고나 할까. 다만, 영상 콘텐츠가 아닌 문학 그러니까 글로 접하는 서사는 또다른 느낌이 들었다. 영상 콘텐츠가 자극적인 비주얼에 집착한다면, 역시 문자로 만들어진 책의 그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사실 허겁지겁 콘텐츠를 소화하다 보니, 정확하게 어떤 에피소드에서 어떤 서사가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좀 헷갈리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태생적 게으름으로 다시 찾아 보고 그런 것도 귀찮다. 게다가 또 바로 읽기 시작한 영미 씨의 다른 작품과도 헷갈린다고나 할까. 어쨌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상을 간단하게나마 써보고자 한다.
각 단편의 딸린 영어 제목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게 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감정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시도한다. 가끔 그런 사랑은 어쩌면 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지. 삼십대 중반의 영미 씨가 구사하는 사랑에 대한 언어는 상당 부분 몸의 대화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뉴욕에서 만난 부잣집 도련님 가미가제 씨와 만나는 순간, 이 둘이 언제 관계를 하게 되나 하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왜냐면, 영미 씨의 작품의 서사는 대개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 영미 씨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가는 아니었지. 뉴욕이라는 밀레니엄 캐피탈에 이방인처럼 부유하는 주인공은 펜과 종이로 글을 끄적이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나 어쨌나. 루크라는 이름의 흑인도 만나고 또 벨기에 출신 색소폰을 들고 다니는 남자를 만난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진짜 영미 씨가 체험해 본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지. 이런 야릇한 상상력이야말로 30년 전에 영미 씨가 구사하던 발칙한 서사의 원형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한참 만나던 남자 친구(?)의 침대 맡에서 머리핀이나 립스틱을 발견하고 결국 관계를 정리하는 내용의 단편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렇지, 그건 하나의 메시지였지. 나라는 존재를 상대방 혹은 연적에게 알리는. 아마 이런 설정은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도저히 잡아내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멋지지 않은가? 아마 편지나 쪽지 같은 방식이었다면 좀 진부하게 느껴졌겠지. 하지만, 그런데 어쩌면 자신의 분신 같은 물건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은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건 하나의 시그널이라는 거지. 내가 여기 버티고 있으니 너는 물러나라는. 그런 점에서 바로 "쿨"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화자의 모습 역시 쿨했다.
입술이 나비로 변태하기 전의 애벌레라는 설정은 또 어떤가. 영미 씨, 단편의 상당 부분은 "우연"이라는 요소에 기대고 있다. 우리 삶에 진정한 우연이 존재했던가? 우연히 만난 사람과 갑자기 결혼에까지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그런 과정들이 영미 씨 소설에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된다. 그리고 결혼의 주체인 둘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단다. 그런 우리의 일상과 평범함을 거부하는 게 바로 영미 씨 소설들의 진정한 매력일 지도 모르겠다. 매일 벌어지는 일상에 종속된 우리야말로 그런 일탈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에 소설로나마 언제라도 경도될 수 있다는 준비태세, 아마 이런 재미에 계속해서 영미 씨의 소설에 빠져 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화 작가로 등단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거남을 위해 그가 쓴 원고를 들고 여성지 편집자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자신의 수입으로 도저히 주문하기 어려운 값비싼 음식을 직장 상사를 이용하는 주인공. 부유한 중년의 늙다리 아저씨는 노골적으로 밥값을 하라고 채근한다. 아이고 추잡스러워라. 그 다음 주자인 편집자에게 자신처럼 예쁜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낯 뜨거운 자기 피알을 내던진다. 그리고 예의 편집자에게 한 수 배우고 돌아온 주인공은 남친에게서 드디어 자신의 만화가 연재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이 품고 있는 욕망의 정체를 타인의 통해 알게 되는 것 또한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 씨는 우리 독자에게 계속해서 "니가 사랑에 대해 뭘 아는데?"라고 서사의 변주를 통해 반복해서 묻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가 사랑에 대해 아는 게 뭔데. 영미 씨는 구사하는 평범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래서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우리 영미 씨가 창조해낸 소설의 주인공들은 일상의 금기나 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넘어 버린다. 두 번 생각하지 말고, 한 번 행동하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감정이 지시하는 대로,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고. 어제 도서관에서 영미 씨의 책을 세 권 빌려왔다. 당분간 영미 씨의 책들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