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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평점 :

어느 이상한 신문에서 따뜻한 자본주의 3.0 시대를 준비하라는 뭐 그런 식의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자본은 생리적으로 따뜻할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의 안전이나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매일 같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을 정도로 산업재해가 많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그 노동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조금은 살벌했나?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 것을.
<자폐가족> 이야기로 시작되는 정지아 작가의 <자본주의의 적> 소설집을 보면서 든 사유의 파편들이었다. 작년 세간에 화제가 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정지아 작가를 알게 됐다. 만부 작가답게, 나의 레이더망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책의 발간 순서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보다 <자본주주의 적>이 먼저 나왔지만 왠지 모르게 전자가 후자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을 평생 달고 살아야 했다. 박사님에 교수님이 되어서도, 샤넬백을 매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출신은 사회주의자의 자식이면서도 자유와 평등 혹은 공평한 분배 같은 고상한 이데올로기 용어보다도 누가 봐도 산뜻한 샤넬에서 만든 클래식 플랩백을 갖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가 없는 욕망이다. 작가의 고백처럼,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그야말로 무한으로 유도한다. 신상백, 자동차 그리고 휴대폰 삼총사는 욕망의 디폴트로 제시되며 시대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꼬맹이조차 아이폰 타령을 해대니 할 말이 없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본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방현남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십년도 넘은 차를 타고 있으며 핸드폰은 직장 동료가 넘겨준 것을 수년째 사용하고 있다. 내가 왜 남들이 타는 그런 삐까뻔쩍한 신상 자동차 그리고 최신형 휴대폰을 사용해야 하는 거지? 어쩌면 경쟁을 아예 포기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물질적 소유로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그런 심리적 만족감을 욕망은 노린 게 아닐까. 방현남 패밀리처럼 새로운 것이나 사람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지만(사실 좀 너무 극단적 설정이 아닌가 싶다),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보수적 성품이라 그런 지도 모르겠지만.
설원 출신의 개의 입장에 대입해서 작금에 자신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다. 화자가 사람인가 개인가 헷갈렸다. 그러다가 개를 의인화해서 주인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그 무엇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이데올로기 전사로 산사람이었던 작가 부모들의 이상적 도전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처 사는 똥개는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에 길들여져 버렸다. 고기를 임금으로 치환하면, 자본가가 던져 주는 얼마 되지 않는 임금에 영혼을 파는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 댕댕이는 주인의 선심 삼아 던져주는 삼겹살 대신 이웃의 닭을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그리고 자신을 덮친 똥개를 비웃는다. 그것 참. 주인의 먹이는 거부하고 남의 걸 몰래 잡아먹는 건 괜찮다는 말인가? 그 닭들은 심지어 이웃이 애지중지하던 오골계였다고 한다. 똥개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건사하게 되는 웃픈 상황도 이어진다.
댕댕이 스토리는 나중에 새끼 냥이들을 내팽개친 어미 고양이 서사로 이어진다. 잘 나가는 로펌 대표 변호사 지원을 애인이자 미래의 남편감으로 둔 화자는 얼결에 고양이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결혼이나 출산 같은 일보다 현재 자신의 커리어가 더 중요하다. 남친 지원은 자신이 일과 자신의 애인이 최근에 돌보게 된 고양이보다도 못하다는 투정을 날린다. 집사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성장 배경과 사회적 조건들이 상이하게 다른 객체들의 이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포기하는 거지. 어떤 면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조차 물적 토대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직격하지 않나 싶다.
K읍에 사는 원어민 교사들의 이야기도 심상하게 다가온다. 독서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 서울에서 지내던 그들과 접점이 있어서일까. 편리함과 즐거움을 원한다면 응당 서울에서 지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거창하게 세계화 경쟁에서 밀려난 스텔라나 존 같은 이들이 남도의 어느 카페에 모여 봄밤 축제에 참가하고 그러며 산다는 거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가 끊임없이 선전하고 불안을 조성하는 소비와 성공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에 대해 걱정하라는 부추김이라고나 할까. 남도에 사는 우리 친구 B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전부터 구상 중이라던 글쓰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못한 지 참 오래됐다.
단기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케냐 커피 피베리를 즐겨 마시고, 안캅 팔레르모 잔의 미학을 아는 화자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나에게 커피란 그저 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데 또 누군가에게는 수준 높은 취향의 문제로구나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한 번 피베리 커피를 먹어 보겠다고 근처에서 파는 곳이 없나 찾아보겠지만, 이젠 그럴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 것이고 나는 또 내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을 때,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었다.
어제 도서관에 이 책을 빌리러 갔는데, 보통 사이즈의 책이 대출 중이어서 큰글자 책으로 읽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큰 글자책이 나쁘지 않았다. 큰 글자든 작은 글자든 내용이 중요하지 껍질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소설집에 실린 9편의 소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계속해서 자본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우리 평범한 독자들의 각성을 위해 건필해 주시길 바란다. 그나저나 정지아 작가가 표제에서 규정한 ‘자본주의의 적’은 어지간한 것도 사지 않는 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