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숲에서 -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지음, 비르질 뒤뢰이 그림, 박효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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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에 대한 갈급함은 책읽는 이들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익숙한 작가의 이름도 좋지만, 또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 모르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나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아니 오히려 환영한다.

 

<노숙 인생>이라는 책으로 나는 실뱅 테송을 알게 됐다. 단편집인 <노숙 인생>을 읽다 말고, 그의 다른 책도 조금 읽었다. <눈표범>이라는 책도 재밌게 읽기 시작했는데 못다 읽고 결국 반납했다. <노숙 인생>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 책을 쉽게 읽겠지 싶어 도전한 책이 바로 그래픽노블 <시베리아의 숲에서>란 책이다.

 

지구상에서 춥기로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6개월 정도 은둔하는 삶을 살겠다며 실뱅 테송은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득 오래전, 일 년 중 어느 계절에 미디어 다이어트를 하신다는 교수님이 기억났다. 우리는 너무 미디어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중동에서 분 바람 덕분에 당장 출퇴근하는 차에 넣어야 하는 기름값이 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난 다른 건 모르겠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로 몇 개월씩 떠날 수 있다는 작가의 여유가 부러웠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 묶여 도저히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수은주가 떨어지고, 여름이 되면 곰돌이들이 출몰하는 그런 곳이 이 기인 같아 보이는 작가에게는 낙원이었다니.

 

실뱅 테송이 시베리아에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읽지 못한 책들을 읽는다던가,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주변의 지인들을 찾아가 말동무를 하거나 그러는 것. 아니 어쩌면 그런 거야 말로 우리네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없다면, 러시아의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오두막으로 떠나기 전에 다양한 물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역시 나같은 책쟁이에게는 작가가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책궤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윙거의 일기, 사라진 70년대>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여기서 말하는 윙거는 내가 아는 바로 에른스트 윙거일까? 그의 책은 <강철 폭풍 속에서> 정도 읽은 게 전부인데, 전쟁일기도 있다고 하니 궁금해진다. 지금 찾아 보니 윙거 작가의 책들이 모두 절판되었군 그래. 이래서 책은 읽지 않더라도 이렇게 절판을 대비해서 일단 사두어야 한다는.

 

읽은 지가 제법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프랑스에 있는 여자친구가 작가에게 이별 선언 정도. 어떤 관계라도 단절은 참을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인 실뱅 테송에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시베리아 6개월 살기 체험은 글쓰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그의 여자친구에게는 또다른 이름의 시련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뛰어 넘는 관계라면 실뱅 테송이 복귀했을 때 좀 더 단단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래픽노블에서처럼 빠른 정리가 필요하다.

 

도시인들에게 시간은 항상 부족한 무엇이지만, 바이칼 호수 통나무집에 살림을 차린 누군가에게 시간은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물질이다. 그렇게 주변에 자신의 사유를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당연히 사유는 깊어지겠지.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지고, 그런 생각들을 가다듬어 자신만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까 실뱅 테송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과 바이칼 호수의 외딴 통나무집은 작가로서의 삶에 있어 어느 순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노라고 지적하고 싶다.

 

나중에는 이웃에 사는 지인이 강아지 두 마리도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가끔 너튜브로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야생에서 전문가처럼 뚝딱뚝딱 통나무집을 짓는 콘텐츠를 보고 하는데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화면에 강아지 한 마리라도 등장하게 되면 콘텐츠에 갑자기 활력이 생기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 어쩌면 실뱅 테송은 과거에 이미 이른바 부시크래프트 콘텐츠를 기획한 선구자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늦겨울부터 시작해서 초여름까지 바이칼 호수에서 지낸 작가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스케치가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실뱅 테송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엉뚱하게도 수년 동안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바이칼 호숫가로 떠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책읽기마저 금방 질려 버려서, 시시껄렁한 너튜브 콘텐츠 타령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 그래픽노블로 워밍업을 했으니 오리지널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전에 도중에 포기한 <눈표범>부터 읽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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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작가도 이렇게 알게 되네요. 그래픽노블이라 읽어볼려구요. 늦겨울에서 초여름까지의 숲생활 부러워지네요.

레삭매냐 2024-04-23 16: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인
<노숙 인생>이란 책으로
실뱅 테송을 알게 되었네요.

그림만으로도 바이칼 호수
오지 언저리의 고독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