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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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Foster 원제로 위탁 가정이나 위탁 아동인데, 표지의 쓸쓸한 아이 뒷 모습에 더해 영화로 나온 제목은 Quiet Girl이래서 얇고 조신한 양장본을 열기 전부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100여쪽 쯤 되는 소설의 일곱 쪽을 읽고 내 마음을 이 맡겨진 소녀와 저자 클레어 키건에게 맡겨버렸다.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엄마가 출산을 즈음해 셋째 딸인 주인공 아이를 (초등 입학 전의 나이로 짐작되는데 소설 내내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저자가 알았던, 혹은 저자 자신이었던, 아니면 나 어릴 적 그 아이였을 수도 있다. 집에선 편안한 내 자리가 없고 따스함을 낯선 곳의 낯선 사람들에게서 접하고 당혹해 하는 아이) 먼 친척집에 맡긴다. 마침 여름이고 그 친척집엔 '이젠' 아이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모든 상황과 풍경은 아이의 시점에서 묘사된다. 아무도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말없이 조용한 아이는 (아빤 아이가 '많이 먹는다'며 농담 반 핀잔 반 낯선 친척들 앞에서 말한다) 듣고 보고 생각하며 혼자 속으로만 상황을 이해한다. 아이는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아빠가 45 카드 게임에서 빨간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해 "이름이 불리지 않는 개"를 키우는 그 집에 도착한다. 아빠는 "서빙 포크 대신 자기 포크로" 음식을 덜어 먹고 식사 후 서둘러 떠난다. 


아이의 긴장감이 너무나 커서 책장 너머로 느껴질 지경이다. 그래도 너무 건조한 다음 비가 많이 온 그 여름 동안 아이는 매일 집에서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하고, 아주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며 그곳 풍경에 천천히 익숙해진다. 아빠는 한번도 잡아주지 않던 손을 친척 아저씨와 잡고 들판을 걷는다. (아, 여기서 긴장하는 독자들 많으실 겁니다. 안심하세요. 이 아저씨 정상인입니다)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부지런하고 깔끔한 아주머니는 아이의 실수를 못본 체 하고 상냥하게 아이를 배려한다. 아저씨는 "아, 애는 원래 오냐오냐하는 거지"라며 우리의 매슈 아저씨처럼 허허 웃는다. 아 그러니까 더 맴이 아릿아릿 아프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네 사정을 더 알게 된 그날, 아이는 바닷가 산책에서 저 멀리 둘이었던 불빛이 세 개가 되어 빛나는 걸 본다. 집에서 편지가 왔다. 엄마는 아이를 낳았고 이제 학교 가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아저씨에게 여름 동안 글읽기를 배운 아이는 읍내에서 산 책과 옷가지들을 가방에 챙긴다. 그리고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왔다. 그리고... 


늙은 독자는 울고 말았잖아요. 담담하게 조용하게, 하지만 강하게 마음을 강타한 소설. 클레어 키건, 당신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합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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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7-12 09: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에 참가하느라 전에 쓴 글을 다시 올립니다. (책 다시 또 읽고 또 울었...)

은오 2023-07-13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을 울린 소설이라니...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유부만두 2023-07-17 07:40   좋아요 0 | URL
은오님껜 어쩔지 궁금해요. ^^
 

“극락왕생” 만큼이나 언니들이 많이 등장한다. 남장 언니들의 주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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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3-06-30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년이 완결되었어? 한동안 열심히 웹툰 보다가 잊어버렸네.

유부만두 2023-07-01 09:38   좋아요 0 | URL
책이 6권까지 나왔는데 완결인지는 모르겠어요. 전 4권까지 봤고요.
김태리 주연 드라마 나온다고 해서 관심이 가서 봤어요. 소재는 특이한데 (여성국극, 1950년대) 사건 전개는 기대보다 평이해 보여요.

단발머리 2023-07-01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년이.... 보긴 봐야 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토요일 아침입니다. 자두 먹고 있어요, 헤헤

유부만두 2023-07-01 10:30   좋아요 1 | URL
전 신비복숭아 먹어요. 겉은 자두지만 안은 복숭아.

유부만두 2023-07-01 10:31   좋아요 1 | URL
장강명 포스팅에 얼마전 읽은 ‘노르웨이의 숲‘ 감상을 쓰다가 ... 너무 길어져서 따로 페이퍼를 쓰다가 ... 욕만 쓰게 되어서 지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3-07-01 10:36   좋아요 0 | URL
신비복숭아…. (또 적고 있음요)
욕 페이퍼 기다릴게요! ㅋㅋㅋㅋㅋㅋ 기다립니다, 욕 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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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6-30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년이 1,2,3,4 권

단발머리 2023-07-01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르웨이의 숲, 도둑맞은 집중력, Yellow Face.... 적어 두었구요.
그리고 토마스 쿤? @@

유부만두 2023-07-01 10:32   좋아요 1 | URL
생뚱맞죠? 네, 상상하신 그겁니다. 애 숙제 시키다가 얇아서 그냥 읽었어요.
 

바쁘지도 않은데 

책은 안 읽히고, 완독을 못하고 몇 챕터씩만 읽고 다음 책으로 건나가고 있다. 

(멀티버스를 여행하는 독자여) 


그 와중에 만화책을 엄청 엄청 사봤다. 이럴라고 나이 먹고 어른인가. 


<여학교의 별>이 애니로도 있다요? 여러분 알고 있었어요?

난 차라리 몰랐으면 했어요. 왜냐 .... 알면서 


라프텔 - 애니 추천 · 애니 스트리밍 서비스 (laftel.net)



 내가 주말을 날려먹은 건 다른 만화책들임.

제목은 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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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6-25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써주세요 ㅎㅎㅎㅎ
궁금하면 500원입니다. 제가 내는 건가요? ㅎㅎㅎ

유부만두 2023-06-26 09:58   좋아요 1 | URL
“스킵과 로퍼” 랍니다. 고등학생 늦둥이를 키우면서 고교 청춘물을 보다니 믿기지 않아요;;; 500원은 담에 만나서 꼭 주세요? ^^

책읽는나무 2023-06-26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멋진데요?
이런 애니를 읽으시는 중년 여성!!!
전 다방면으로 독서하시는 중년 여성을 존경하는 경향이 있는데 알고 보니 만두님??!!!ㅋㅋㅋ
근데 애니 보신다고 바쁘셨군요?ㅋㅋㅋ

유부만두 2023-07-01 09:39   좋아요 1 | URL
존경하지 마세요...ㅜ ㅜ 애니 더 찾아보며 흥청거리게 된단말이에요. ㅜ ㅜ
 

15년전, 총망받던 젊은 물리학자였던 제이슨이 여자 친구와의 가정적인 삶을 택하면서 가지 않은 길, 그 길이 열었던 우주가 있다.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가지 않은 길은 무수한 가능성과 더 많은 우주에 각각 다른 제이슨들의 인생을 만들었다. 지금의 제이슨은 때때로 다른 인생을 생각만 해본다. 그러다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긴 제이슨2에게 뒷통수를 맞고 지금의 생을 빼앗긴다. 


남편 제이슨이 어쩐지 달라졌다고 느끼는 부인 다니엘라. 남편은 어쩐지 더 우아하고, 더 뜨겁고, 새벽까지 아이패드로 넷플릭스를 보지도 않는다. 아이에게도 더 살갑게 군다. 이이가 어디 아픈가, 아니면 바람을 피우나? 의심해 보는 다니엘라.


튕겨나간 본체(?) 제이슨은 여러 멀티버스를 헤매며 원래의 우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 애쓴다. 30일 동안. 하지만 돌아온다 해도 제이슨2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며, 가족들에게 이 황당한 '슈레딩거의 고양이' 이론과 실제를 어떻게 설명하며, 자신이 진짜 자신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하지만 제이슨2도 제이슨은 제이슨인데?


이 소설이 알려주는 멀티버스 여행하는 법.

1. 상자 안으로 들어가 

2. '특별한 합성 약물 주사'를 맞고서 80여 분을 기다린 다음 

3. '열렬한 갈망'을 하며 (즉, 온 우주가 내 소망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문을 연다. 


그 곳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멀티버스이다. 어쩌면 연구소가 아닌 주차장 지하, 공터, 숲속에서 문을 열 수도 있다. 그곳에는 다른 나, 제이슨이 있거나 때론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여러 다른 인생을 연달아 경험하는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떠오른다. 하지만 여긴 돌, 은 안나와. 그럭저럭 예상대로의 전개에 좀 식상할만 하면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보다는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관짝 같은 상자에 들어가 주사를 맞고, 한시간 넘게 찌릿함을 느끼며 기다렸다 '열렬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새 세상을, 전과 다른 나와 환경을 마주한다는 건 ... 아무래도 마약 중독자 이야기로 읽혀서 어, 이 사람은 결국 미쳤던 거고, 나중엔 처자식에게 까지 마수를 뻗는구나 생각했다. 제이슨이 지나치는 여러 우주에는 전염병에 봉쇄된 죽음의 도시, 핵전쟁으로 눈처럼 회색 재가 흩날리는 도시도 나온다. 그리고 엄청난 과학 발전의 도시나 녹음이 우거진 환경친화적 도시도 있다. 우리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진다. 더해서 약이 필요하고요? 


덥다. 상자와 요술의 문, 도라에몽의 어디로든의 문을 상상해 본다. 저 문을 열어 시원한 바닷가가 나온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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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6-26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즈메처럼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겠군요?
근데 문을 열었는데 멋진 바다가 똭!!!
그건 넘나 멋지겠어요^^

유부만두 2023-07-01 09:40   좋아요 1 | URL
그쵸? 그런 상상을 자주 해요.
부산 가고 싶은데 역까지 이동 한시간, 기차로 세 시간을 생각하면 더더욱요.

psyche 2023-07-01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을 읽다보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아서 찾아보니 Dark Matter구나. 끝이 궁금해서 정신없이 읽긴 했었는데 나는 좀 별로였던 기억이. 잘 모르지만 이거 과학적으로 말이 되나? 앞 뒤가 맞나? 싶은 부분이 꽤 있었던 듯. 딱 영화로 만들 책 (특히 가족이 최고라는 헐리웃 식의 결말)이구나 싶었던 기억이. 딴 거 보다 문장이 엄청 짧고 단어로 줄을 바꾼 부분이 많아서 엄청 거슬렸었는데 번역에서는 어떻게 했나 모르겠네.

유부만두 2023-07-01 09:45   좋아요 0 | URL
아... 언니는 이미 읽으셨구나.
그쵸, 이거 말이 되냐? 싶어요. 하긴 양자역학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면서요?
번역본은 문장이 거슬리는 건 없었는데 이 제이슨이라는 인물이 너무 이상한거에요. 15년간 연구만 했다는데 이전 연인에 그토록 집착할 만큼 그 연구 인생에선 새 애인을 못 만들었나? 싶고요. 연구소에도 여자들이 있는데요. 그만큼 인성이 개쓰레기구나 싶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여러 ‘가능성‘에는 짜증이 확 올라오면서 결국 약물 주사로 환경을 바꾸는 거니까 이거 이거 마약 남용 이야기네 싶었어요.
얼마전 읽은 (비행기 시차로 생긴 도플갱어 이야기) ˝아노말리˝보다는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