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는 가끔씩만 들어서 유툽으로 옮겨갔다는 것도 장강명 작가가 시즌 2로 그만 두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야 알았다. 책 팟캐스트는 많은 것 같지만 편안하게 들을만한 것은 별로 없다. 진행자들끼리만 너무 친하거나 목소리가 엇비슷하거나 소란스레 왁왁거리거나.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두 편, 엣세이 하나, 르포성 책 하나를 읽었다. 비소설 책에서 풍기는 느낌은 야무지고 얄밉....지만 꼼꼼하게 일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소설은 그에 비해 몰입해서 읽지는 못했다. '그믐'이 아련하게 남는 편이다. 


이번 책은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시작해서 진행하고 마무리 하는 동안의 팟캐스트 안팎의 이야기, 자신의 안팎에서 생기고 스러지고 다시 기어나오는 것들, 좋거나 나쁜 것들을 모두 이야기 한다. 초반부터 꽤 솔직하게 다른이들이 '자신에게' 한 말과 행동을 써놓아서 놀라기도 또 감탄하기도 했다. 트윗도 아니고 페북도 아닌 종이책에 이렇게. 박제. 기록. 책임. 혹은 자신감. 


어깨에 힘을 빼고 억지로 웃기려들거나 너무 끈적거리게 감상적이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책 이야기라 추천 도서를 주섬주섬 나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챕터가 많은 경우 말 줄임표로 끝난다. 참았다는 걸까, 아낀다는 걸까. 다 얘기하는 것 같아도 자기가 작가니까 자신의 몫이 있다는 걸까. 


마지막 챕터를 읽다 놀라서 웃음이 나왔다. 작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불러낸다. 책, 문자를 비판했던 그의 의견이 책에 대한 이번 책에서 아주 예외의 등장은 아니겠으나, 직접 대놓고 등장시키니 (한국어 잘함) 추석 특집 나훈아 콘서트가 바로 떠올랐다. 콘서트나 책 피날레에 이렇게 이루어지는 소크라테스 소환은 어떤 습관, 혹은 변명 같다. 장강명은 소크라테스를 테스 형 대신 '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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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09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작가가 팟캐를 그만두었다는걸 유부만두님 글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팟캐스트를 진행한 시간을 책 한권으로 남기다니 참 부지런히 기록하시는 분인가 봅니다. 작가를 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역시 다른가봐요… 마지막 ‘소 선생님‘에서 저도 웃고 갑니다ㅋㅋㅋ 행복한 한글날 되세요~

유부만두 2020-10-10 19:27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 한글날 잘 보내셨나요? ^^ 장강명 작가는 정말 바지런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어요. 그리고 계속 글의 세계와 말의 세계에 대해 그 흥망의 시류를 고민하더라고요. 작가 자신이 글의 세계에 있으면서 다른쪽을 마냥 경계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의미를 곱씹는달까...하는 인상이었어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단발머리 2020-10-09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강명 작가 책 몇권 읽었는데 전 <표백>이 젤 좋았어요. 이 책도 읽어보려는데 ‘소 선생님’에 먼저 한 번 웃습니다!

유부만두 2020-10-10 19:28   좋아요 0 | URL
이번 엣세이가 다른 책들보다는 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단순히 팟캐스트 방송 뒷이야기나 내용 정리가 아니라 책의 미래, 글의 의미, 더하기 ‘글로 먹고 살기‘ 라는 중요한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답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고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짠했어요.
 

만화 <은수저>가 드디어 완결됐다. 고등학교 졸업 직전, 학생들의 대입 시험과 취업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는데 마지막 권에선 모든게 후루룩 정리되고 새로운 도전을 향하는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이라니, 찜찜한 마음) 모습이다. 우리나라 주말 연속극의 몇 년 후, 어르신 팔순 잔치나 결혼식 등으로 마지막회를 꾸미는 것 처럼. 2011년 연재 시작해서 애니로 두번이나 시리즈로 나올만큼 인기 있었지만 작가의 개인사정 때문에 (남편 지병) 휴재를 반복하다가 급하게 마무리 지어서 15권은 (사실 14권도)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 아라카와 히로무는 <백성귀족>으로도 낙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리얼 라이프'를 그려내고 있는데 낙농고등학교에 전학 온 도시 학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인 <은수저>가 더 인상깊다. 매일 매일 성실하게 쌓아간다, 는 평범한 생활의 이야기...를 아줌마가 번역 만화책에서 굳이 찾아야 했냐고 묻는다면 ... 아, 책이니까요. 그림이 웃기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완. 결.




요즘 계속 읽/보는 중인 만화는 <어제 뭐 먹었어?>. 16권 까지 번역되어 나와있는데 이제 12권까지 읽었다. 10권에서 만 50을 맞는 남 주인공 변호사 시로가 미용사 애인 켄지와 함께 살며 '저녁 밥 해먹는' 이야기다. (11권에서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켄지) 주인공들이 게이로 설정되어 있지만 흥미를 더할 뿐, 차별과 인권 주제로 (법률 개정 에피소드는 있었다만)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11권에선 친구 게이 커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과외선생-제자 사이로 만났고 그때 제자가 열두살 (만 나이니까 중1)이었다고... 애인 사이가 된 건 고2때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더라만. 아, 내가 요리를 입힌 위험한 세계를 구경하는 건가 싶었다. 이 만화에서 중년 게이 커플의 일상 묘사는 어쩌면 BL의 숙성 버전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성적 취향이 뭐든 간에 밥은 먹어야 한다. 그것도 집밥, 주로 일식 (할아버지 식성이라고 핀잔을 들어도, 만드는 사람이 정하는 법)을 성인병을 경계하면서. 주인공들의 나이가 나이니 만큼 연로한 부모님의 병환, 생애의 정리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번 추석에 뵌 부모님께서 자꾸 본가에 있는 우리들 '추억의' 물건들을 챙겨가라 하신 게 겹친다. 그래, 밥.... 밥은 주로 시로가 하는데 퇴근길에 알뜰하게 장을 봐서 국, 메인 구이나 찜, 조림, 샐러드 등으로 네 가지를 뚝딱 (네 쪽 정도에 걸쳐서)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장르는 판타지. 사인분 만들어서 이틀치 노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솜씨를 동갑내기 아줌마의 눈으로 보자니 샘이 납디다? 대신 시로 변호사 센세는 기존 조미료, 양념을 잘 활용해서 요리 시간을 줄이고, 육수를 낸다거나 오래 재워두는 단계가 없는 음식을 만들고 그때마다 감탄하고 맛있게 먹으며 설겆이와 집안 청소를 맡아주는 애인이 있으니 또 납득이 되면서 한숨이 납지요. 음식 재료명이 7권까지는 여러 가지로 오가더니 (오크라를 아욱으로;;;) 후반부에는 어느 정도 실제 용어로 정리되어서 읽기에 (맛을 상상하며) 나았다. 이 만화 읽다가 오크라 1킬로 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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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0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수저> 처음 애니화 되었을때 들어봤는데 이제 완결이군요… 읽지 못한 책인데도 완결소식에 축하하는 마음과 쓸쓸한 마음이 듭니다
오크라는 처음 보는 채소인데 잘라놓은 모양이 별처럼 예쁘네요!

유부만두 2020-10-04 19:15   좋아요 1 | URL
그쵸?! 전 손질 후 튀김으로 주로 먹는데요,
잘라서 볶음에 넣어도 맛있습니다. 안에 들은 작은 구슬 같은 씨앗은 점성을 갖고 있어요. (고백하자면, 전 먹거리를 아주 좋아합니다;;;)

단발머리 2020-10-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오크라 너무 이뻐요!!!😍 아까워서 먹을 수 있을까요?!?

유부만두 2020-10-12 16:17   좋아요 0 | URL
네 예뻐서 더 잘 씹어 먹었습니다. ㅎㅎㅎ
 

표지가 무서워서, 인형 같아 보이는 무력한 여자가 머리부터 쪼개지고 그 사이로 연분홍 장미가 피어오르는 표지가 짜증이 났다. 그리고 치워두었는데. 그땐 몰랐다. 그 '본명'이 이미 표지 한켠에 적혀 있고 제목이 어쩌면 스포일러라는 걸.  


문목하의 최근작이라 시작했는데 '돌이킬 수 있는' 보다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IT나 과학 ...그러니까 sf 소설 경험이 많지 않아서 화자 '해마'의 정체와 나, 너, 백업, 숙주 등의 형태를 상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도 내가 머리 속에 그려놓은 그림들이 작가가 바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 '해마'는 기억, 정보(값)이다. 하지만 AI보다는 훨씬 발전된 상태로 자신을 '인격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12시간 교대로 '중앙'으로 회귀해 휴식하는 동안 행성세계, 즉 지구, 우리나라에 내려와서 활동하는 또다른 자신 '백업'을 어느정도 무시하고 일을 벌이기도 한다. 해마는 논리적인 답을 내놓지만 질문은 하지 않는다. 또한 해마는 지구에 와 있을 땐 '해마체'에 들어가는데 이건 목적과 용도에 맞추어 때론 기계, 자동차, 어선, 비행체, 물고기, 등등으로 모양을 바꾼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는 곳곳의 '숙주'에 접속해 얻는다. 언어나 전문 지식 등. 이 소설은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이 특정 해마, 닉네임 비파는 (친구 해마들 모두 아름다운 악기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 다정하게) 어느 한 인간, 이미정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가는데 도처에 깔린 cctv와 컴퓨터, 통신기기 덕에 (자연스러운 접속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게 문제인지 해마는 질문하지 않는다. 


360쪽 소설의 절반 1부 180쪽이 이런 설정에 할애되어있다. 해마 비파와 이미정이 어떤 '인격체'인지, 어떤 사연을 안고 있고 어떤 결심으로 '일탈'을 혹은 '임무'를 향해 달려, 날아, 혹은 헤엄쳐, 떨어지는지 해마의 인식 안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2부에 들어서면서는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부터 진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보십시다. 비파와 백업, 이미정, 이은하 (옛날 가수 생각 난 사람 풋쳐핸썹), 주성화, 로랑의 이야기, 혹은 투쟁이랄까. 그러니까 '돌이킬 수 있는'에서도 보았던 초대형 테크놀로지 기업의 그늘로. 싸울 준비 되셨나요?!!!! 


1부에서 나처럼 너무 지치지 않으면 절대 거짓말 못하는 해마의 해맑은 농담, 혹은 뼈 때리는 진담을 즐길 수 있다.(보석 같은 해마 어록은 따로 정리하겠다.) 그리고 눈부신 첨단 기술의 '웨어러블' 장치들을 쳐다보며 섬찟한 기분도 들 수 있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만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이토록 조용히 묻히고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기억해야 한다. 비록 잠깐 탈선한 해마는 중앙에서 리셋 되더라도 인간이라도 나나 너나 우리 중 누구라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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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사둔지 오래인데 유부만두님 페이퍼 읽어보니 읽을 자신이 없어져요. 내용 자체는 기대되긴 하는데(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이 있으니까!!)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SF 읽어본 경험도 별로 없단 말여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심지어 과학도 못했어요 학교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유부만두 2020-09-22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정통문과 독자입니다! 그래도 대충 ‘해마‘가 아주 아주 똑똑한 AI 정도라고 상상하고 읽었어요. ‘숙주‘라는 개념에서 헷갈렸는데 숙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해마체라는 지상용 옷이 따로 있고 숙주는 정보용 앱으로 하면 될 거 같아요. (틀리면 어쩌죠?;;) 설정은 어려웠지만 진짜 다루는 문제는 ‘돌이킬 수 있는‘ 보다 더 와닿는 이야기였어요. 읽으시라고 응원을 보냅니다!
 

음식을 키워드로 해서 중국사를 (일부) 훑어보는 이야기 책이다. 흔히 알고 있던 중국 음식을 역사적 배경을 검토해서 살펴보는데 가령 돼지고기의 선호도가 꽤 나중에야 생겨난 편이며 그 전엔 양과 닭고기를 더 많이 소비했다고 한다. 날 고기, 회 요리를 갑자기 먹지 않게 된 경위도 추적하고 호떡과 (중국 기준) 서방 음식의 영향과 향신료 후추의 경제적 흔적, 두부와 고구마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예상과는 다르게 중국 찬양이나 미화가 아니라 중국의 의도적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꼬집으며 실제 역사에서 지도층과 서민들의 생활을 짚어보는 책이었다. 사례들도 많고 설화 언급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도 재상(宰相)이 요리사 출신이라는, 음식을 차려서 사람들을 잘 먹이고 (제사를 치른 후에는 남은 음식을 고르게 잘 나눠주는) 보살피는 일이었다는 설명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재(宰)가 재상의 뜻도 있지만 집 안에 갇힌 죄인으로도 풀이된다니 어째 내 이야기인가 싶었다. 밥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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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필사진 바꾸셨네요~ 이번 리뷰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들을 잘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했다니 신기하네요~

유부만두 2020-09-22 07:43   좋아요 1 | URL
스튜디오 자브리에서 스틸사진을 공개했거든요.
http://www.ghibli.jp/info/013344/?s=03
몇개는 예뻐서 저장했어요.

이 책은 음식을 중심으로 역사를 풀었는데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일단 먹고 살만해야 문화나 예술을 챙기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파이버 2020-09-22 08:09   좋아요 1 | URL
우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왜 아직도 요리하는 일은 중노동일까요...ㅜㅜ
 

팟캐스트 '사각사각'의 추천을 듣고 읽고 시작했다.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의 전작 '아일린'이 그닥 내 맘에 들지 않아서 읽기를 미뤘던 책이다. 


부모를 잃고 허무와 무력감에 빠진 이십대 후반 여자 주인공이 향정신성 의약품에 의존해 계속 현실 도피성 수면을 이어가다 ... 극한 경험을 계획한다. 잘나가는 중국계 예술가와 협업으로 석달 집안에 자의로 감금되면서 자신의 수면(약에 취한) 상태일 때를 기록하여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마무리 되면 '바라건데' 정상으로, 어쩌면 예전으로, 원래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살 마음이 들지 않을까, 아니라면 그때 빌딩에서 뛰어내리자. 


소설의 문장은 매우 빠르고 발랄랄라 흐르지만 내용은 끔찍하게 바닥으로, 나락으로 추락한다. 매사에 의욕이 없어 잠으로, 죽음으로 도망치는 주인공은 이미 이 수면을 행하고 있었다. 점점 독한 약을 먹게 되는데 이러다 자신의 엄마처럼 불행한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고 약에 취해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고 일을 저지르는 게 위험천만이다. 약에 취한 그 블랙아웃 동안의 '하이드'씨는 별별 일을 다 벌이고 다닌다. 다만 이번엔 계획적으로 건강하게(?) 끝을 정해놓고 해보자! 결심한다. 다행인건 생계 유지를 위해 일을 따로 할 필요가 없고 그녀를 채근하는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친구 리바는 적당히 거리를 둘 수가 있다. (이 둘의 관계는 '폭스파이어'의 렉스와 매디와 매우 다르다)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도 알약 복용 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주인공.


책 소개처럼 동면 계획하는 무모한 이십대 뉴요커의 블랙 코메디라고 보기엔 어두운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90년대, 그 시절에도 이미 올드해진 이야기들을 툭툭 시크하게 던지니 (90년대 말에 VCR을 고집하고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도 유사과학 신봉자) 주인공이 어딘지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인 게 표가 난다. 시트콤 속의 패션너블한 부잣집 미녀 상속녀로만 보긴 애매.... 하지만 소란스럽고 정신 없는 90년대와는 매우 어울리긴 하다. 여기에 잔가지를 이리저리 뻗어서 연상작용으로 끌고 오는 이야기도 너무 많다. 언급하는 예술 이야기는 겉핥기 식이라 독자를 위한 배려인지 인물이 알맹이가 없다는 걸 말하는지 (둘다겠지) 한심하기도 했는데 비정상적인 관계를 고집하는 나이 많은 애인은 클린턴, (모니카 르윈스키가 성인용 컬러링 북을 냈더라;;;), 따따따 말 장난에 어쩐지 주종 관계인 주인공과 리바는 길모어 걸스와 프랜즈가 생각난다. 아무리 뉴욕, 젊은 독신 이야기에 자유분방한 사생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도 이젠 이십 년도 더 먼 옛날 이야기다. 그러니 조금은 울적해진다. 2000년은 나에게도 새 희망과 절망, 불안의 삼박자로 미치고 팔짝 뛰던 해였다고. (난 나이퀼 까지만 갔었지만)  


갱생 동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이 곤도 마리에 식이라 재미있기도 했고 석달 동면 (정확히는 봄방학?)에 규칙적 수면 (사흘;;;) 비타민과 운동도 챙기고 예전 우울증 시기와는 다르게 개인 위생도 신경쓰는 게 코메디 같다. 하지만 이거 어떤 수면유도 주사인지 ... 뉴스에 종종 나오는 연예인들 맞는다는 그 주사 비슷한 건데. 이렇게 석달, 백일쯤 갇혀서 미국인의 완전식 '피자'만 먹다가 커피도 끊는 새인간이 된다는 설정이 한반도의 곰보다는 나은 조건인 건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맞이하는 세상은 2001년 곧 911의 뉴욕이란 게 큰 아이러니. 


그리고 그 날. 그 일. 


Things are alive. She is beautiful. 이라고 되뇌이는 주인공의 마지막 몇 문장을 읽으면서는 여지껏 (그래 이건 과거의 일이고, 소설이고, 이렇게 씁쓸한 코메디로 쓰는게 이 작가의 스타일이야 라지만!) 재미있게 읽었지만! ....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고 말았다. 영어책으로 읽었으니 영어욕.

WTF 


그런데 지금, 거의 20년이 더 흘러서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다? 재선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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