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무서워서, 인형 같아 보이는 무력한 여자가 머리부터 쪼개지고 그 사이로 연분홍 장미가 피어오르는 표지가 짜증이 났다. 그리고 치워두었는데. 그땐 몰랐다. 그 '본명'이 이미 표지 한켠에 적혀 있고 제목이 어쩌면 스포일러라는 걸.  


문목하의 최근작이라 시작했는데 '돌이킬 수 있는' 보다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IT나 과학 ...그러니까 sf 소설 경험이 많지 않아서 화자 '해마'의 정체와 나, 너, 백업, 숙주 등의 형태를 상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도 내가 머리 속에 그려놓은 그림들이 작가가 바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 '해마'는 기억, 정보(값)이다. 하지만 AI보다는 훨씬 발전된 상태로 자신을 '인격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12시간 교대로 '중앙'으로 회귀해 휴식하는 동안 행성세계, 즉 지구, 우리나라에 내려와서 활동하는 또다른 자신 '백업'을 어느정도 무시하고 일을 벌이기도 한다. 해마는 논리적인 답을 내놓지만 질문은 하지 않는다. 또한 해마는 지구에 와 있을 땐 '해마체'에 들어가는데 이건 목적과 용도에 맞추어 때론 기계, 자동차, 어선, 비행체, 물고기, 등등으로 모양을 바꾼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는 곳곳의 '숙주'에 접속해 얻는다. 언어나 전문 지식 등. 이 소설은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이 특정 해마, 닉네임 비파는 (친구 해마들 모두 아름다운 악기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 다정하게) 어느 한 인간, 이미정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가는데 도처에 깔린 cctv와 컴퓨터, 통신기기 덕에 (자연스러운 접속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게 문제인지 해마는 질문하지 않는다. 


360쪽 소설의 절반 1부 180쪽이 이런 설정에 할애되어있다. 해마 비파와 이미정이 어떤 '인격체'인지, 어떤 사연을 안고 있고 어떤 결심으로 '일탈'을 혹은 '임무'를 향해 달려, 날아, 혹은 헤엄쳐, 떨어지는지 해마의 인식 안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2부에 들어서면서는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부터 진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보십시다. 비파와 백업, 이미정, 이은하 (옛날 가수 생각 난 사람 풋쳐핸썹), 주성화, 로랑의 이야기, 혹은 투쟁이랄까. 그러니까 '돌이킬 수 있는'에서도 보았던 초대형 테크놀로지 기업의 그늘로. 싸울 준비 되셨나요?!!!! 


1부에서 나처럼 너무 지치지 않으면 절대 거짓말 못하는 해마의 해맑은 농담, 혹은 뼈 때리는 진담을 즐길 수 있다.(보석 같은 해마 어록은 따로 정리하겠다.) 그리고 눈부신 첨단 기술의 '웨어러블' 장치들을 쳐다보며 섬찟한 기분도 들 수 있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만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이토록 조용히 묻히고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기억해야 한다. 비록 잠깐 탈선한 해마는 중앙에서 리셋 되더라도 인간이라도 나나 너나 우리 중 누구라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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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사둔지 오래인데 유부만두님 페이퍼 읽어보니 읽을 자신이 없어져요. 내용 자체는 기대되긴 하는데(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이 있으니까!!)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SF 읽어본 경험도 별로 없단 말여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심지어 과학도 못했어요 학교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유부만두 2020-09-22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정통문과 독자입니다! 그래도 대충 ‘해마‘가 아주 아주 똑똑한 AI 정도라고 상상하고 읽었어요. ‘숙주‘라는 개념에서 헷갈렸는데 숙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해마체라는 지상용 옷이 따로 있고 숙주는 정보용 앱으로 하면 될 거 같아요. (틀리면 어쩌죠?;;) 설정은 어려웠지만 진짜 다루는 문제는 ‘돌이킬 수 있는‘ 보다 더 와닿는 이야기였어요. 읽으시라고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