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식 구성인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의 '원고'라고, 실제 이야기라 무섭고 슬프다고 너스레를 떨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한다. 챕터도 0이라고 되어있으니 진짜 이야기는 아직이다. 그리고 챕터1에서 다른 '나'가 나오며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두 명의 '나'가 있다. 원고 속의 '나'와 더 큰 틀의 '나'.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헨리 제임스 소설은 더 꼬여서 진짜 사건은 독자로 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원고의 나와 그 원고를 전하는 소설의 나 사이에도 단계가 여럿이다. 


1.원고 '나'

2. 원고 저자와 더글라스의 만남과 원고 전달 

3. 더글라스의 원고 낭독

4. 소설 큰 틀의 화자 '나'는 원고 낭독 듣고 원고 건네 받음

5. 세월이 흐른 후 더글라스가 병사함 

6. 소설 큰 틀의 화자 '나'가 정확한 복사본 제작

7. 독자가 전후사정과 함께 묶은 원고 복사본을 읽음  


 갓 스무살이 된 원고 저자, 여성 '나'는 시골 외딴 저택에서 두 어린이 (열 살 마일스와 더 어린 여자 아이 플로라)를 맡는 가정 교사가 된다. 자신을 고용한 남성, 런던에 거주하는 매력적인 독신남은 자신을 귀찮게 말라며 고액 임금과 함께 전권을 위임한다. 가난한 목사의 세째딸 '나'는 경력도 없이 덜컥 이 일을 맡았고 극한 긴장감에 짓눌린다. 유월 초여름, 저택에서 여러 인물들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기대에서 빗나가는 아이들의 행동에 맞닥뜨린다. 더하기 유령.


마침내 

붕괴하는 '나'와 아이들.

어쩌면 애초에 망가져 있던 저택과 아이들, 그 상황에 무력하게 던져진 가정교사. 


마일스와 퀸트라는 거친 사나이 사이에, 마일스와 이 가정교사 사이에, 퀸트와 전직 가정교사 사이의 이야기가 얽히며 (더해서 마일스의 교우관계) 어린이를 정서적 (그리고 아마도 성적으로) 학대하는 상황이 암시된다. 마지막에 멈춰버린 심장의 고동은 이 비극의 마침표일까.


하지만 다시 챕터0으로 돌아오면 애초에 이 원고를 들고 오는 인물인 더글러스가 의아하다. 그는 이 원고가 자신보다 열살 위 여성, 자신의 여동생의 가정교사가 쓴 글이라고 했다. 마일스와 겹치는 프로필이다. 마일스네 비극이 끝나고도 이 여성은 버젓이 다른 어린이를 맡아서 가르쳤다는걸까. 분명히 더글러스와 이 여성은 가까운 관계가 되었고, (마일스가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을 원해요'라는 말로 계급차이를 드러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원고를 그에게 넘기고 그녀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이 원고를 친구인 소설 큰 틀의 '나'에게 넘기고 더글러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죽는다. 


끝까지 모르겠는 사람속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겹으로 싸고 접고 묶어서 우리 앞에 놓은 헨리 제임스. 더해서 우리글 번역본의 파파고 문장이 독자의 독서와 몰입을 방해하며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한겹 더 접은 영화 버전으로도 만났다. 



다행히 이 영화에는 더글라스나 그 친구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90년대로 설정된 시기의 가정교사는 케이트라는 이름이 있고 그녀에겐 저택 바깥에 멀쩡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아주 안 멀쩡하게 부서진 정신 상태의 엄마도 있다. 영화의 마일스는 중학3년생 쯤으로 보이는 소년이라 케이트와의 사이에 생기는 긴장감이 더 명확히 보인다. 말이나 행동뿐 아니라 체격으로도 케이트를 누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케이트는 저택의 비밀을 파헤치는 탐정이 되고 저택에서 아이들을 구출해 내는 (혼자만의) 임무를 가지고 분투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 부터 구해야한다. 저택을 나가도 엄마가 있는 세상에서 케이트가 갈 곳은 많지 않다. 택시처럼 보이는 그녀의 노란 자동차는 눈에 확 띄어서 숨을 수도 없고 그녀를 어디 멀리로 데려가기엔 너무 낡았다.


영화는 케이트와 저택을 케이트 엄마의 그림 속으로, 수영장을 닮은 작업실 속으로, 저택 옆의 인공 호수 속으로 여러 겹의 물 이미지에 담가 놓았다. 나사를 더 여러번 돌려 놓아서 풀기가 어렵다. 


잠깐, 그러니까 영화나 소설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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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4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이 책 안읽었는데 민음사 번역은 별로라고 하셨죠? 다른 출판사 번역 봐야겠어요.

유부만두 2022-08-24 11:39   좋아요 1 | URL
네. 민음 번역이 엄청나요. 어쩜 우리 말 문장을 이렇게 해놨지, 싶었어요.

mini74 2022-08-24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민음사로 읽은...그래서 나사가 풀리질 않았나봐요. ㅎㅎ

Falstaff 2022-08-24 12:3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제 경우엔 이걸 벤자민 브리튼이 작곡한 같은 제목의 오페라로 처음 만났는데, 대본만 읽고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서 책을 읽었다가.... 다 읽자마자 책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있는 힘껏 내 팽개쳤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역시 민음사 전집으로 읽었습죠.

유부만두 2022-08-24 14:29   좋아요 2 | URL
미니님// ㅎㅎㅎ 나사를 너무 많이 회전시켜 놨어요. ㅎㅎㅎㅎ

골드문트님// 전 이번 번역처럼 문장을 공들인 건 또 드물다고 생각해요. 어쩜 이리 기괴한 - 기괴한 소설의 분위기를 더하려는 책략일지도 - 우리말 문장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전 내팽개치진 않았어요. (패대기친 책은 역시나 민음사의 파리대왕 입니다)

Falstaff 2022-08-24 2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 번역에 관한 이유 때문에 팽개친 건 전혀 아닙니다.
여태까지 독서력이 몇 년인데 작품의 맥을 잡지 못하는지, 도무지 (무려 헨리 제임스가 만든 이야기의) 내용을 감도 잡지 못해 헤매는지 허탈해서 그랬습지요.
설마 진짜로 귀신 이야기가 나올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ㅎㅎㅎㅎㅎ

유부만두 2022-08-25 17:59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님// 무려 헨리 제임스가 쓴 무려 고딕 소설이잖아요. 심령현상이나 유령은 필수 아이템 아닐까요? ^^

페넬로페 2022-08-24 1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공유하신 연극 예매했어요.
마침 딸아이가 이번에 명동예술극장에서 스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든요~~
이 책도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보려고 해요^^

유부만두 2022-08-24 14:31   좋아요 2 | URL
어머나! 따님이 마침 그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군요. 대견해요.

헨리 제임스의 이 책은 워낙 유명해서 미뤄뒀다가 이번에 읽었는데 과연 클래식하네요. 큰 기대는 마시고 주인공 여성의 심리와 긴장감을 따라가시면 좋을듯 합니다. ^^

앨리스 관람 하시고 감상 나눠주세요. ~

scott 2022-08-28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편집자가 한글을 모르던가
번역자가 학생들 숙제로 내준것 같습니다

책이 품절 될때 까지
오역을 고칠 생각이 없는 것 같음요 ㅎㅎㅎ


psyche 2022-08-31 0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뭔 소리지 했던 게 내 탓만은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