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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자라서 그런가. 자란 환경이 그런가. 아님 원래 성격이 그런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항상 타인의 눈치가 더 보였고, 그냥 기꺼이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는 걸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사실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원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타인에 대한 부끄러움, 자신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더욱 커질 것 같은 초라함과 좌절감, 이런 것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를 보내며 나는 내가, 스스로 원하는 걸 말하는 일을 이전의 나보다 비교적 능숙하게 잘해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더 배운게 있다면, 말을 함으로써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게 왜 그렇게 두려웠던걸까. 나는 이게 좋다고. 이런 걸 하고 싶다고. 이건 싫다고. 기쁘지 않다고. 나처럼 좋고 싫은 게 분명한 사람이,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음으로서 오는 그 간극은 도대체 어떻게 견뎌왔던 걸까.
회사에서 분명한 의사표현 이후 해보고 싶던 광고효과연구 업무를 맡게 된 것에 이어 교회에서도 어제 목사님과의 1시간 면담 끝에, 그간 해왔던 아동부 교사와 찬양단을 모두 내려놓았다. 사실 나는 아동부 선생님으로 그리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쇼잉하는 모습이 아닌, 그 안의 깊은 진심을 살펴보면 아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매우 심히 부족하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껴안아주지 못한다. 앞에서 마이크잡고 어린이여러부우우운. 잘 지내앴지요오. 는 할 지언정 말이다. 찬양단 역시 마찬가지다. 내 노랫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마이크를 통해 내 목소리를 듣는 일도 매우 고역이었거니와 찬양을 앞에서 드릴 때 그 시간을 보내는 내 마음이 예배보다는 업무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계속 이런 마음으로 찬양단을 해도 되는건가 하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들었다. 몇년째 있어왔던 나의 컴플레인 이후 목사님은 그나마 대안을 좀 찾으 수 있던 아동부 교사 업무는 내려주셨지만 찬양단 업무는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할 것을 권유하셨다. 평소같았으면 네, 했겠지만, 나는 이 일을 내가 하는 일이 왜 문제인지, 조목조목 설명을 했고, 결국 둘다 내려놓게 되었다. 대신 내년에는 청소년부 교사와 목사님 말씀 PPT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한결 마음이 가볍다. 그냥 한 번 용기만 내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최근 내가 생각했던 2009년 우리 교회의 방향에 대한 문제점까지 다 얘기를 해버렸다. 나는 이게 문제다. 멍석을 깔아주면 너무 솔직하다는 거. 물론 '매우 솔직하게' 모드로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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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기본 전제 자체가 다른 것에 대해 전제 자체를 들이대며 설득하려는 건 내게 아무런 설득력도 같지 못한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요즘 하는 행동들에 대해 내가 만나는 친구들(엄밀히 말하면 학교에서 함께 하는 강독모임 친구들)이 어떤 리버럴한 신학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가를 걱정하시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창호지처럼 얇고 넓게 모든 걸 빨아들이는 사람도 아니고, (귀는 좀 팔랑거리지만) 그들과 나의 신학이 그렇게 걱정하시는 만큼 막되먹은 리버럴함도 아니다. (나는 우리 친구들이 매우 건강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그 모임을 '매우 사랑' 모드로 샤방샤방 참석하기도 하고) 그 모든 것들을 통한 나의 목표는 내가 좀 더 하나님 뜻에 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어떤 것을 게을리 하기 위한 핑계를 만들기 위함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진행중인 인간이고,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를 완성형으로 정의할 생각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
한 교회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다른 신앙의 모습, 다른 신앙관을 가지는 건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인가. 아니, 그 전에, 꼭 같아야만 하는가. 다름이 틀림이 된다면, 내가 나의 다름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 곳에서의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나를 바꾸거나, 그럴 의지가 없다면 교회를 바꾸거나, 나와 맞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건가. 내가 사람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듯 사람들도 나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공존할 수는 없는건가.
나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끊임없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작정인데, 이런 나를 부디 너무 걱정은 말아주시길.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걱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늘 알아서 잘 맞추는 스타일이니까. 아마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나의 매우 큰 단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