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지구의절망을치료하는사람들
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 국경없는 의사회 이야기
댄 보르토로티 지음, 고은영 그림 / 한스컨텐츠(Hantz)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S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면 참 화가 치밀어오른다. 명백한 불의 앞에 제 목소리를 내야 할 많은 공직자들은 이미 S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상태이기에 침묵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런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내부고발을 감행한 한 변호사의 고군분투를 떳떳하게 응원하고 지지해줄 만한 이가 많지 않다. 그 용기가 쓸쓸한 울림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들 중, S사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은 얼마 되지 않을테니.

하물며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도 이럴진대, 재정의 많은 부분이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NGO의 경우라면 어떨까. 비정부기구,라지만 실제로 특정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받는 상황이라면, 그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국경없는 의사회(이하, MSF)의 이야기를 다룬 책인 '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을 읽기 전, 실은 나는 매우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목부터도 그렇고,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짠해져오는 것 같은 표지도 그렇다. 어떤 뜨거움으로 가득한 열정을 만나기 원했고, 그 열정으로 인한 자극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기대는 어긋났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을 한마디로 정의해보자면, 인도주의의 현실과 고민, 그리고 그에 대한 MSF의 방향성에 대한 모색, 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부족한 내 수준에서의 정의다) 많은 사람들이 열정과 환상으로, 어떤 명분을 가지고 NGO 활동에 뛰어들게 되지만, 현실은 단순히 생각하던 것과 다른 문제, 아니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던 문제가 많다는 것과, 그건 단순히 '알고보면 디게디게 힘들어요' 정도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아닌,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인도주의가 처한 현실에서의 딜레마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는 MSF가 만들어지던 때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MSF는 그 태생 자체가 적십자사와 같은 기존 구호단체들의 '지나친 중립성'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실제로 구호에 필요한 많은 지원금을 여러 국가들로부터 받게 되기 때문에, 어떤 곳에도 개입하지 않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는 그들의 침묵이 어떤 상황 앞에서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주의가 불의한 정권을 뒷받침해주는 데 이용된 전례도 있다고 한다. 하여 MSF는 민간후원 이외의 지원은 받지 않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으며, '의료지원' 이외의 정치적 개입은 하지 않지만, 목소리를 내야 하는 명백한 불의 앞에서 목소리를 분명하게 낼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MSF의 인도주의의 원칙은 분명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듯, 오늘의 경험 또한 내일의 그들을 만들어갈 것이다. 지금 그들의 모습과 현재 그들의 지향점이 옳든 그르든 간에, (책에 서술된 모습이 전체는 아닐테니) 내가 그들에게 희망을 보게 된 이유는 적어도 그들이 바르게 서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되짚어보고 성찰하고 고민하며, 그러한 고민들을 나누고 진지한 모색을 도모하는 그 건조함은 뜨거움, 혹은 촉촉함이 전해주는 감정의 환기만큼이나 내게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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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어제 졸려서 마무리를 너무 대충 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ㅋㅋ 수면 리뷰라 부끄럽지만 ;; 귀찮아서 안고치고 막 ㅋㅋㅋ

사족같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책은 예스24 리뷰어 클럽에서 받은 책인데, 남들보다 열흘이나 늦게 책을 받았다. (리뷰마감일날 받은 사건) 생난리를 떨다가 결국 재배송,까지 해서 받게된 터라- 힘...들...고... 귀...찮...아..도....안쓸수가 없었다, 흑!
 
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 국경없는 의사회 이야기
댄 보르토로티 지음, 고은영 그림 / 한스컨텐츠(Hantz) / 2007년 10월
구판절판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을 한 명 치료한다면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말라리아가 평상 수준보다 심각한 난민 캠프나 재난 상황에서 치료를 하면서 '어차피 이 일을 내년에는 못할 테니 올해도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죠. 누군가에게 '미안해, 너를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내년에는 아마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내년에도 치료가 가능하게끔 노력하겠지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장하는 게 MSF의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몫이죠. 종종 우리는 과거 개발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향후 10년 도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년이 흐르면 백신이 개발될지도 모르죠. 단지 올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190쪽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 보건이며 동시에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안전한 식수를 마셔라, 손을 씻어라, 기타 등등 말이죠. 그러나 티베트 사람들은 단지 신선한 물을 원하지 건강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업이 끝나면 개통식을 하는데 사람들이 꼭 와서는 끝없이 제게 맥주를 권하며 고마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말하죠. 여자들은 물을 길러 언덕까지 3-4킬로미터를 걸어가곤 했는데 그들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한 무리의 10대들이 와서 팔꿈치로 찌르고 눈을 찡긋거리고 발을 끌며 춤을 춥니다. 그들은 골짜기의 모든 여자들이 이제는 마을에서 살기를 원하게 되어 결혼할 가능성이 열배나 뛰었다는 겁니다."-225쪽

미국인들은 우리가 자신의 동맹군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미군의 동맹이 된다면 그것은 인도주의의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그들은 이슬람군대가 우리를 괴물로 보고, 적으로 보기를 원하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공격을 하는 자들이 이전의 탈레반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가서 '우리는 미국인들의 동맹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재건할 생각도 없어요. 우리는 당신들과 미국이 생각도 안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고통을 덜어주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빈 라덴이 여기를 차지하든지 조지 부시가 차지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하죠. -236쪽

MSF에서 처음 훈련을 받을 때 '새 냉장고 증후군'에 대한 농담을 들었습니다. 미션을 떠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며 미션에서 본 일, 부패, 사망자, 즐거웠던 일들에 대해 얘기하려 하면 엄마가 쳐다보며 말하는 거죠. '흠 멋지다. 내가 새 냉장고를 샀다고 얘기했니?" (중략)
멀리 있을 때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죠. 어떤 이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그들에게 들려주기는 무리라는 느낌이 들죠.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중략)
일부 귀국한 자원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고국의 관심을 일깨우려는 의지에 불탄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얼마나 행운아며 그들의 문제가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장실 물을 내리며, 그들은 머나먼 땅의 난민들은 하루 종일 쓸 물이 그만큼도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 자칫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방종하며 경박하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248쪽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원조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으며 반대로 다른 어느 NGO보다 재빨리 현장에 의료 구호 및 사람들을 파견한다. MSF는 자기 손을 비틀지언정 얽어매지는 않는다. -292쪽

인도주의는 단순히 관대함이나 자선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들 가운데서 정상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295쪽

침묵은 오랫동안 중립성과 혼동되었으며 인도주의 활동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시작부터 MSF는 이 가정에 대한 반발로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이 언제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침묵은 반드시 생명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96쪽

언어란 결정적인 것입니다. 언어는 문제를 구조화시키며 반응, 권리에 따라서 책임감을 정의합니다. 언어는 의료적 혹은 인도주의적 대응이 부적절했는지 말하며 정치적 대응이 부적절했는지도 말합니다. 아무도 강간을 복잡한 부인과적 응급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간은 강간이며 인종 학살은 인종 학살입니다. MSF의 인도주의 활동은 고통의 경감과 자율성의 회복과 부당함의 진실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책임감을 묻는 것입니다. -297쪽

인도주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인조 학살을 막지는 못합니다. 어떤 인도주의자도 전쟁을 저지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인도주의자도 인종 청소를 막지는 못합니다. 또한 어떤 인도주의자도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도주의의 과제가 아닌 정치권의 과제입니다. 저는 다음 사항을 명확히 하겠습니다. 인도주의 활동은 어느 활동보다도 비정치적이며 그러나 그 활동의 도덕성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장 심오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죄 행위를 하고도 무사한 것에 대한 투쟁이 이런 함의들 중의 하나입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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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구의절망을치료하는사람들]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1-14 09:44 
    최근 S사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면 참 화가 치밀어오른다. 명백한 불의 앞에 제 목소리를 내야 할 많은 공직자들은 이미 S사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상태이기에 침묵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런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내부고발을 감행한 한 변호사의 고군분투를 떳떳하게 응원하고 지지해줄 만한 이가 많지 않다. 그 용기가 쓸쓸한 울림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들 중, S사로부터 자유로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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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동안 참 쓸쓸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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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11-14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왜 쓸쓸해질까요. 제목에서는.. 쓸쓸함을 달래줄 것 같은데.. :) 멋진 제목이네요.

웽스북스 2007-11-14 01:00   좋아요 0 | URL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달까요 -_-
암튼 제목에 낚였어요 ㅋㅋㅋ

얼음장수 2007-11-14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쓸쓸했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 떠올려보니 포근해지더라구요.
나만 외롭고 쓸쓸한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달까요^^

웽스북스 2007-11-18 19:25   좋아요 0 | URL
전 그래서 더 쓸쓸해졌어요 ^^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품절


만약에 남북의 언어가 정말 '이질화' 됐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과정이 가속도를 얻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전체주의 질서를 채택하지 않는 한, 그 이질화의 흐름을 바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굳이 그 흐름을 바꿀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언어가 아니라면 언어는 변화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언어적/언어외적 조건과 상황이다. 우리가 지금의 한국어를 19세기 한국어와 일치시킬 수도 없고 굳이 일치시킬 필요도 없다. -36쪽

내가 감염된 인간이듯, 내 한국어는 감염된 언어다. 우리는 모두 감염자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감염된 언어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민족어에 대해서, 그리고 민족어 문학에 대해서 관찰자의 거리를 가지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73쪽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국경의 높이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고 그 낮아진 국경을 넘어 유럽-미국산 언어들은 점점 더 자주 한국어와 접촉하고 한국어에 간섭할 것이다. (중략)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물론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꼭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언뜻 멋져 보이는 한자어를 포함한 외래어의 남용에는 분명히 다소간의 허영심(을 향한 호소전략)이 작용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 허영심을 비웃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공동체 차원에서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92쪽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 언중은 당연히 자신의 언어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소통을 확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외래어를 비롯한 이물질이 한국어에 스며드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소통 가능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듯 하다. 소통 가능성이 없거나 극히 약한 외래 요소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외래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된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뒤에 흘끗 살피겠지만 이들은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소통 가능성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그들은 불순해진 지금의 한국어를 한탄하고 순수했던 과거의 어떤 한국어를 상상한다. (중략) 그러나 그 순수한 한국어 가운데도 깊이 살펴보면 그 어원이 중국어나 몽고에서 온 것이 상당수 있다. (중략)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문명어들은 외래 요소와의 혼합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혼혈은 그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98쪽

한 힘있는 일간신문이 주묵도가 높은 난의 제목으로 사용해 매일 독자에게 읽히는 수고를 하고도 낱말 하나의 생명력을 되살려내지 못한다면, 한국어 어휘의 '순도'를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겠다는 순수주의자들의 꿈이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더구나 이런 시도는 윤리적으로도 바탕이 튼튼하지 못하니,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극소수 동지들만이 아는 말을 사용하면서 내 말을 알아듣고 싶으면 이 말을 배워라 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이 사전에서 찾아낸 순수한 한국어는 그 효과에서 그들이 책상 위에서 새로 만들어낸 말과 다름없다. 누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개인 언어'를 사회에 강요할 권리를 주었는가. 그런 개인언어가 이내 민중언어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는 멋진, 무서운 신세계일 수밖에 없다. -100쪽

나는 이 잡종 언어의 흐드러진 개화가 걱정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발랄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어떤 해방감을 드러낼 뿐이다.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진짜 세상, 곧 오프라인 세상에서 빠져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해방감 말이다. (중략) 물론 채팅 언어의 일부는 언젠가 표준 한국어로 편입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어 화자의 다수가 그것을 표준 한국어로 받아들일 때다. 그리고 그것이 표준 한국어에 편입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어떤 말이 바른 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언중이기 때문이다. -102쪽

섞임과 스밈은 문화적 생물학적 진화의 피할 수 없는 요건이다.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 역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다.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순수한 한국어'만으로 이뤄진 언어 체게는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전체주의의 언어일 것이다. 아름다운 순수어를 고집하는 마음은 아름답지 않ㄴ다. 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 -104쪽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110쪽

민족주의라는 것은 비록 이념의 모습을 갖추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감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120쪽

민족주의의 융성이 한 민족의 독립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독립을 얻은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한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강대국의 민족주의든 약소국의 민족주의든 얼마나 자주 대외적 패권주의와 대내적 집단주의를 가져왔는가? -123쪽

우리는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자어화된 서양의 문화를 손쉽게 빌어쓰는 길을 걸었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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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쓰다 힘들어서 일단 스톱

다락방 2007-11-0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거 한번 읽어볼까요? 저는 소설아니면 취미가 없는데, 아프락사스님도 웬디양님도 급칭찬모드시라면..흐음..

웽스북스 2007-11-04 22:02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다락방님! 저도 소설이 제일 좋아요 ㅎㅎ
고종석 아자씨는 소설도 잘쓴다는! ㅋㅋ

마늘빵 2007-11-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고종석씨 소설 <제망매>도 있답니다. :)

웽스북스 2007-11-05 12:22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제망매 읽으셨어요?

마늘빵 2007-11-06 08:33   좋아요 0 | URL
네!

양승훈 2008-02-1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씨 글이 아름답죠~~ 유려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해요~~ 보통 비평적 글쓰기에선 항상 '건조함' 때문에 졸음 유발이 일색인데,, 이 책 저도 읽으면서 참 윤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언젠가 이 블로그 놀러왔었는데~ 잘 지내시나요? ^^
 
[애덤 스미스 구하기] 서평단 알림
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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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요...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오오오...
하며 신관 사또들에게 나타났던 장화와 홍련, 아랑 등의 처녀귀신들. 그녀들 덕분에 신관사또들은 시체가 되어 나갔지만, 그녀들의 사람잡는 억울함에 대한 호소는 그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에 억울함만큼 복장터지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억울함은 풀리기 전에는 잘 잊혀지지도 않는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억울한 애덤 스미스'의 진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책에서의 애덤스미스의 호소 역시 '사람 잡는 호소'이다. '영적 대화'를 위해 몸을 빌린 숙주의 입장에서는. 세상에나!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을까.

어쩌겠어, 이게 암기식 교육의 결과인 것을. 나도 모르게 애덤스미스 하면 다른 건 하나도 모르고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부터 뛰어나오는 것을. 아울러 자유방임주의까지 자동적으로 떠오르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의 많은 부분들을 애덤스미스에게 떠넘기고 싶어질 때도 있는 것을. 이런 지경이다 보니 애덤 스미스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하긴 하겠다

이 책에서는 경제학자였던 애덤스미스보다는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타이틀인 '철학자'로서의 면모에 주목한다. 자연히 우리 대부분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만큼은 잘 알고 있는 국부론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저서인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이 더 많이 등장하게 된다. 도덕감정론은 

'인간이 타인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동과 덕성을 판단하는 근본적인 원칙을 분석/검토한 논문'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으로 국부론보다 먼저 쓰여졌다. 이 사실은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의 이론들을 세상에 적용시키기 이전에 도덕감정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원칙들을 전제로 해야 할 것임을 상정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한 본성'에 주목하고, 그 본성을 계발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국부론에서의 그의 이론이 적용되야 할 시점은 그 이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기본 원칙인 도덕감정론은 사라지고, 그에 바탕한 이론인 국부론만이 존재한다. 첫단추가 아예 끼워지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이 책이 만약 애덤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론서로 쓰여졌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소설의 형식을 빌어 애덤스미스의 이야기를 한다는 작가의 선택은 잘 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소설과 이론의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소설로서의 재미도, 이론서로서의 지적 충족도 모두 조금씩은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 이 책은 소설로서의 재미는 거의 없었다. 실은 차라리 소설의 형식은 살짝만 빌리고, 나머지는 그저 둘이 영적대화로 서로에 대한 오해만 풀어나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론적인 부분의 텍스트가 좀더 풍성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역시 토끼는 한마리만 확실하게!

생각해보면 도덕교과서, 사회교과서 속에서 억울함에 울고 있는 철학자, 경제학자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보는 것, 한가지로 기억하는 것의 위험함,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편리함, 그리고 지적능력의 한계 등을 이유로 그가 가지고 있는 일부로 그들을 규정하고 있는 우리는 혹시 옛 철학자나 경제학자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들었다. 

 
* 알라딘 서평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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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1-0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서평단으로써, 공감 가는 내용입니다. 추천!

웽스북스 2007-11-04 22:01   좋아요 0 | URL
앗 치니님 공감해 주신다니, 어쩐지 안심이 됩니다 ㅋㅋㅋ

프레이야 2007-11-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셨네요, 웬디양님.^^
꾸욱(이건 리뷰와 님에 대한 애정의 표시에요^^)

웽스북스 2007-11-04 22:01   좋아요 0 | URL
혜경님 감사드려요!
혜경님 서재에서 뒤늦게 조곤조곤 따님과 대화나눴던 페이퍼를 읽고 나니,
혜경님의 칭찬이 마치 선생님, 혹은 엄마의 칭찬처럼 느껴집니다 (다큰 아가씨가 징그럽게 말이죠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