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 회사는 몇년 째, 거래하는 회사들에게 명절 선물로 책을 주고 있다. 책을 고르는 일은 어찌하다 보니 내가 맡고 있는데,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에 쉬운 작업은 아니다. 올해는 다섯권 중 한 권으로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의 구매량은 100권 정도이니, 이 정도면 출판사가 기뻐할 우량 구매자 아닌가 ^^ 물론 구매 명의는 회사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 책을 펼 때 서문을 읽으며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있는데, 이 책의 서두 문구 역시 그랬다. 지식이란 머리를 높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게 하는 것이라는 말, 이 말이 참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아직도 한참이나 덜 낮아져서 그런가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절로 마음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지식'이라는 말에 반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마음으로 공감하고 느끼고 있음에도, 변화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함에도, 편리함, 안락함, 달콤함 등을 포기 못해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자꾸만 마음에 밟히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얼마간의 불편함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변할 수 있음에도 변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불편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구조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불편해진다. 이 책은 이런 불편한 지식들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정말로 알지 못했던 것, 누군가는 애써 알려 하지 않았던 것, 또 누군가는 알면서도 외면해 왔던 것들....

한 권의 책과 그 책이 전하는 짤막한 지식들을 접하며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겠다며 나설 사람은 적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럴 인물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스스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촉촉해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한 두가지 정도에는 더 부끄러워지고, 더 촉촉해지기에 그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깊이 알아가야겠다는 작은 결심들을 하게 된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더 읽어볼 만한 책들의 리스트를 수록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전하는 지식들의 짧음에 비해 오래 남는 책이다. 끝이 아닌 시작이기에 그렇다. 이 책이 주는 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작으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100명한테 무더기로 선물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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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 말까 여러번 망설였는데,님의 리뷰에 공감하며 바구니에 담아요~
읽고 너무 좋아서 100명에게 무더기로 선물한다고 설치지는 말아야지~~~ ㅎㅎ

웽스북스 2007-10-01 00:09   좋아요 0 | URL
와와~ 정말요? ^^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

다락방 2007-10-02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요.

웽스북스 2007-10-03 00:47   좋아요 0 | URL
잔인하게 만드는 주체가 우리 스스로라는 것도요 ^^
 
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책을 구매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아!

밥벌이가 내 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무시할 수 없으나 정말 무시하면서 살고만 싶은 이 밥벌이의 중요함, 그리고 지겨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삶으로 부딪치며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그리고 밥벌이가 매우 심히 지겹게 느껴지던 어느 날, 책꽂이에서 잊고 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아...! 나는 이 책이 정녕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조목조목 다 쓰여진 책인 줄로만 알았다. 밥벌이는 지겨운 일이니 우리 모두 그만 두세! 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래서 나의 마음을 좀 합리화해 준다면 기꺼이 그만둘 자세로 (정말?) 책을 읽던 스스로가 머쓱해진다. (그러고보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난 시기가 지금이 아닌 건 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 책은 세상에 대한 김훈의 단상이 담긴 에세이집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이 책에 실린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드러난, 세상의 구석구석을 보는 그의 시선은 예리하다. 하지만 따뜻하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집 호미를 읽으며 나는 수필을 쓰고 싶어졌다. 그만큼 편하며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김훈의 글은 어쩐지 나는 글을 써서는 안될 것만 같은, '작가의 길'이라는 것의 장엄한 벽을 느끼게 한다. (이는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도무지 저렇게 써낼 재간이 내게 없음을, 역시 작가는 이렇기 때문에 작가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글이다.

벌써 반백년 이상의 삶을 살아온 김훈의 에세이에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집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애착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2000년대 초에 쓰여진 책인지라, 나 역시 현실로 살아낸 시간들을 작가의 눈을 통해 다시금 보게 되는데, 이는 참 즐겁고 신선한 작업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였던 '밥벌이의 지겨움'이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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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도 제목에 낚여, 게다가 두권이나 묶어주기에 샀어요.
책이 온 날 주르르~ 훑어만 보고 읽지 않았는데, 님의 서평 보니 차분하게 봐야겠어요.
정말 공감이 화악~ 오기를 기대하면서, 에구 오늘은 쉬고 월요일부터 또 밥벌이에 나서야지요! ^*^

웽스북스 2007-09-29 09:56   좋아요 0 | URL
크크 역시...! 저도 두권 묶어줘서 냉큼 구매한 거였거든요 ^^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그 책도 얼른 읽어야 할텐데 말이죵 ㅋㅋ

비로그인 2008-02-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먹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몇안되는 작가중에 하나인걸로 알고 있어요. 어느 여성지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는 신념이라는 것도, 신념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고요..그 가치관에 매력을 느껴서 김훈작가를 좋아했어요.
실제로는 단편을 읽어보니 문체가 상당히 거침없으면서도 쓰디쓴게 저는 어쩐지 읽어내기가 힘들더라구요 ^^ 그건 열심히, 치열하게 쓴다는 의미도 되고, 다른작가와의 차별적 의미도 갖는 것이지만, 술술 읽히지 않아 불편한 느낌이었어요.
밥벌이가 지겨운 일인건, 세상천지가 다아는 일인데 굳이 저런 제목으로 글을 쓸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웬디양님 서평을 보니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해요. ^^

웽스북스 2008-02-08 22:49   좋아요 0 | URL
리사님, 저는 소설가로서의 김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에세이스트로서의 김훈의 글들은 읽을만 한 것 같아요 단편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거에요- 근데 리사님, 벌써 밥벌이가 지겹다는 걸 아시는 거에요? 전 그나이 때 몰랐던 것 같은데 ㅜㅜ

2008-02-08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9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의 무늬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품절


나는 그것이 욕먹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관념이 현실과 어긋난다고 판단되었을 때 즉 자신의 언어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용기는 현실에 맞추어 언어를 수리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의 변증법으로 현실을 바꿔치기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81쪽

닫힌 마음은 흔히 청결이나 순수를 향한 열망의 형태를 띤다.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대체로 청결이나 순수에 높은 값어치를 매긴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그런 청결이나 순수가 억압의 징표이기 십상이라는 사실이다. 담배꽁초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공중도덕의 성숙을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 사회의 억압성을 드러낸다. 그 거리의 청결함은 훼손된 자유의 대가이기 쉽다-232쪽

보기 민망한 것은 이 법에 손질을 하면 세상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부 보수 언론이다. 사상과 표헌의 자유는 언론인들에게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 자유를 옥죄는 법을 존치하자고 주장하는 언론은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 근거를 허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율배반이 보수 언론의 미욱함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보수 언론이 언론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다.-227쪽

모든 유토피아니즘이 실패로 돌아간 사실은 인간의 반성 능력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될 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 인간의 비루함의 원인은 그 적지 않은 부분이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233쪽

가장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진실로 사람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때의 사람은 그들의 관념 속에 있는 집단으로서의 인류였지, 그들의 주변에서 숨쉬고 일하고 고통받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략) 그들의 냉혹한 정치적 리얼리즘은 그들의 덜떨어진 심리적 아이디얼리즘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개인으로서의 사람 또는 노동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집단으로서의 인류 또는 노동자 계급을 사랑하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고 그것이 공산주의의 범죄의 근원이었다. 그러니 집단에 대한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고 할 만하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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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화성의 인류학자
화성의 인류학자 -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은 다소 독특하다. 지난 봄, 지인들과 '인생의 책'을 나눌 일이 있었는데, (엄밀히는 경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민정언니가 가져온 책이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심지어는 원가보다 비싼 가격에 이 책을 데려왔다. 와인을 한 잔 마셨던 탓이라 변명하지는 않겠다. 하하! 그냥 그날의 분위기가 그랬다. 후회같은 건 하지 않아요, 책값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ㅋ

이 책은 뇌신경학자인 올리버색스가 그가 만났던 일곱명의 환자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걸 하나 고르라 하면 그것은 단연, 나의 무지함이다. 다양한 뇌신경 질환에 대해 '아 이런 병도 있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무지함이라면, 살면서 수도 없이 느끼는 것 아닌가.

물론 나는 다양한 뇌질환 등에도 굉장히 무지하다. 하지만 무지는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은 폭력을 낳는다지. 나의 무지함은 스스로 나도 모르게 적용시켜 왔던 '정상'이라는 기준이 실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이며, 이 기준으로 누군가에게 정상이 될 것을 강요한다는 게 다분히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신체에 이상이 있어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경우에까지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심봉사는 당연히 눈을 떠야 하고, 초원이는 자폐증을 고쳐야 행복한 거겠지, 심봉사로, 초원이로는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없겠지, 라는 사고 방식이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버질은 눈을 뜨자마자 큰 혼란을 느끼고, 삶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한다. 저자는 시력회복이라는 선물이 저주로 탈바꿈했다는 표현을 쓴다. 나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가며 살아오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보게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의 이전 세계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정상이라는 기준을 우리 나름대로 만들며 제공하던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행복할 것을 강요해온 것이 그들의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 모습 그대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나가는 것, 하지만 역시나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 편협함을 스스로 일깨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일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었다.

웬디, 웬디의 따뜻함으로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의 다름을 마음 가득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길, 라고 언니는 책 앞에 메모를 해줬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그들의 다름에 대해 편협한 한 사람인 것을. 언제쯤 나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전히 기약은 멀고 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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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인류학자 -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0월
구판절판


I씨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사고를 당하고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더라면 색맹을 '치료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질서정연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 자체가 어리석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80쪽

우리는 가끔 의식과 도덕과 양심의 무게, 본분과 책임과 의무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질 때면 억제의 틀을 부수고 이성의 세게에서 탈출하고 싶어진다. 전두엽을 벗어나 휴일을 누리고, 감각과 충동으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즐기고 싶어진다. 이것이 전두엽 과잉에 시달리며 억눌려 있는 문명인의 본능이다. 인간은 누구나 전두엽을 잊고 잠시 휴일을 즐겨야 한다. -112쪽

전두엽절제술과 절리술이라는 엄청난 사건은 1950년대에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는 의학계의 반발로 보류된 것이 아니라 신경안정제라는 신종 도구가 개발된 덕분이었다. 신경안정제는 정신외과처럼 부작용이 없는 강력한 치료법이라고 선전되었다. 하지만 신경학적으로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신외과와 신경안정제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불편한 주제다. 신경안정제도 다량으로 복용하면 정신외과처럼 평안함을 유도하고 정신병 환자의 망상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신경안정제의 고요함은 죽음의 고요함과 비슷하다. 게다가 역설적으로 자연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환자를 약물로 인한 질병 속에 평생 가두어 놓는다. -112쪽

그는 능숙한 손길로 동상을 꼼꼼히 더듬으며 전과 다르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각장애인이던 시절에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독립적으로 살았는지, 두 손으로 얼마나 쉽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경험했는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그를 몰아세우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손쉬운 방법을 버리고 어렵고 낯선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202쪽

시각장애인도 나름대로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완벽하다. 시각장애인을 무능하다거나 사회부적격자라고 여기고 시각장애를 문제로 생각해 그것을 고치려 드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210쪽

프랑코는 자나 깨나 폰티토 생각뿐이었고 환영 속에서도 폰티토를 보았고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묘사했지만 정작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원래 향수의 중심에는 역설이 도사리고 있다. 향수는 이루지 못할 상상이고 실현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247쪽

프로스트는 인간을 순간의 퇴적으로 간주했고, 순간의 기억은 이후 벌어진 일을 더 이상 통보받지 않으며 잼항아리처럼 완전 밀봉 상태로 머릿속 창고에 보관된다고 했다. -251쪽

나는 자폐증 화가 제시 파크를 찾아갔을 때 딸에게 엄청난 애정을 표현하는 부모님을 보고 가슴 뭉클한 적이 있었다.
"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피부로 느껴지던데 따님도 부모님을 잘 따르나요?"
내가 물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의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302쪽

아스퍼거는 캐너보다 훨씬 분명하게 이런 가능성을 예견했다. 따라서 '고도의 능력'을 갖춘 자폐증 환자들은 아스퍼거증후군 환자라고 불린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과 느낌, 심리상태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자폐증 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전형적인 자폐증 환자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없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자의식이 있고 부분적이나마 자아성찰과 보고가 가능하다.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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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식한아가씨의반성록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09-24 23:24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은 다소 독특하다. 지난 봄, 지인들과 '인생의 책'을 나눌 일이 있었는데, (엄밀히는 경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민정언니가 가져온 책이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심지어는 원가보다 비싼 가격에 이 책을 데려왔다. 와인을 한 잔 마셨던 탓이라 변명하지는 않겠다. 하하! 그냥 그날의 분위기가 그랬다. 후회같은 건 하지 않아요, 책값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ㅋ 이 책은 뇌신경학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