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에서 진행한 낭독의 밤 행사에 다녀왔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임에도, 낭독회 장소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낭독회가 진행된 살롱드 팩토리 안에는 루시드폴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을 워낙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국, 타향, 이방인, 묘하게 겹치는 둘의 이미지... 그 둘이 함께 주고 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함께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는 사실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고요하게, 음악이 흐르는 카페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앉아 시집을 펴들고 가만가만 시를 듣는 밤.
쉬운 시를 쓰겠다,라고 마종기 시인은 다짐처럼 이야기한다. 그렇다. 그의 시는 쉽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그의 시 <우화의 강>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 할지라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시 때문에 마종기 시인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정작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뭔지는 잘 모르겠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 중에는 없는 것 같다...)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를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시...
상처4
- 마종기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려주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의 76% 가량은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이 시는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정말 마음에 드는 시집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시집의 제목은... <하늘의 맨살> 이다. 아. 하늘의 맨살이라니...
오늘 낭독된 시 중에는 없었지만,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수원에 내리는 눈
마종기
1
내가 고국에서 본 마지막 눈은 수원에서였다. 밤새 내리던 함박눈을 긴 포옹으로 느끼며 잠들었던 하숙방, 그 한 달 뒤에는 기지병원 공중 중위로 전역 신고를 했고, 또 그 한 달 뒤에는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춥기만 했던 기억 때문인지 겨울에는 한 번도 고국을 방문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사십 년 이상, 그간에는 수원의 눈도, 고국의 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국의 눈은 얼마나 늙어버렸을까, 그 아름답던 눈꽃들은 또 얼마나 시들었을까, 요즈음의 눈꽃들은 서로 무슨 말을 나누면서 지상에 내리고 있을까.
2
내 주위에 내리는 것들
내려서 서성이는 것들,
서성거리며 평생을 사는 것들,
보이다 말다 하는 미세한 것들이
모두 내 몸을 시리게 했네
눈 붉히며 울다가 떠나는 것들,
눈치 보며 뒷걸음만 치는 것들,
더 볼 것이 없다며 녹아버리는 것들,
주눅 들어 움츠리는 가여운 풍경이
왜 씁쓸한 한기로만 남았던 것인지
멀리서 소식을 알리며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가볍게 살아야 했는데
본 척도 아는 척도 말았어야 했는데
주위를 살피며 구식으로 얼어가는 사랑,
집 떠난 내 몸, 문득
가벼운 것들이 다가와, 빛나는
눈꽃으로 나를 다듬어 주네.
또 한 권의 좋은 시집을 만났으니,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문학과지성사 편집자 분은 이 시집 머리말로 마종기 선생님이 줬던 말 중에, "다시는 시집을 내지 않겠다" 라는 말을 편집자의 재량으로 삭제하는 깜찍한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오래오래 그의 시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참 고마운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모처럼 마음이 촉촉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