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를 계속 읽고 있다.
죽을 것 같은 무료함에 살고 있는 겨울, 아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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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을의 빛   _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랏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날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 숲에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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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1-02-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어먹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혀가 아려요. 단어 하나하나가 혀를 그냥 넘어가지 않네...

웽스북스 2011-02-23 20:15   좋아요 0 | URL
빌어먹을, 아린 혀.. 네요.
단어 하나 하나 읽으면 읽을 수록 좋죠.

... 2011-02-2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집 바로 위의 특별판으로 가지고 있구요, 서점에서 일반판도 봤는데 둘 다 크기가 좀 애매하지 않나요? 저는 저 특별판 받고나서 난감했어요. 스케치북처럼 위로 넘겨보며 눈에 띄는 부분을 골라 읽어요.

무료함속에서 빛을 찾으려니...팍팍해욧, 흑.

웽스북스 2011-02-24 21:5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특별판 가지고 계시군요. 저도요.
특별판은 아무래도 침대용인 것 같아요.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책도 옆으로 세우면, 그렇게 잘보일 수가 없어요.

제 침대에는 아직도 이 책이 있답니다. ㅎㅎ

흰그늘 2011-02-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이..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옛 가을의 빛' 을 떠올려보게도 하는것 같군요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새로움의 하늘이 보였던 그 날이
그리워지게도 하는.. 그런.. '시' 네요..

웽스북스 2011-02-24 22:00   좋아요 0 | URL
흰 그늘길님의 옛 가을의 빛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져요.
그러고보니 흰그늘길, 이라는 닉네임의 이유도 궁금해지고요.

뜬금없죠? ㅎㅎ

다락방 2011-02-2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서재에 올려진 시 보고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오늘 뺐는데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아 어쩌지?그냥 가끔 알라디너들이 올려주면 읽으면서 살까..무료한 봄밤이에요.추천을 보니 무료함을 느끼며 공감하는 분들이 제법 많은듯ㅠㅠ 나도 봄밤에 대한 시 올리고 싶지만 지금은 졸리므로 자야겠어요.미친봄밤이에요ㅠㅠ

웽스북스 2011-02-24 22:01   좋아요 0 | URL
가을 시를 올렸는데, 다들 봄을 이야기하네요. 미친봄밤. ㅋㅋ
다락방님은 늘 다락방님과 어울리는 언어를 꼭꼭 잘 찾아내는 것 같아요. ㅋㅋ

다락방님. 봄밤에 대한 시, 찾아서 올려주지 마시고요.
지어주세요. 나 완전 기대되. ㅎㅎ

turnleft 2011-02-24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를 잘 안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연을 제외하곤 왜 이리 언어가 과잉되게 느껴질까요.
절제된, 효율적인 언어라기보단 왠지 너무 작정하고 시어들을 짜내는 느낌이랄까..

치니 2011-02-24 19:35   좋아요 0 | URL
(남의 집에서 댓글질 ㅋㅋ 웬디양 님은 용서해줄 거죠?)
턴레프트 님은 전체 시집을 다 읽지 않고도 문제점(이라고 하면 참 삭막하지만)을 잘 짚어내시네요. 이 시가 굳이 그렇다기보다, 저도 몇 몇 시는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시집을 덮고 생각했죠, 이런 '서정시' 읽은지가 대체 얼마만인가, 이런 시의 명맥이 이어지기나 했었나, 누군들 담백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상이라는 것이 이런 시집을 통해 이어지는데 의미가 있지 않나, 뭐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허수경 시인이 용감했다고 생각합니다아. :)

웽스북스 2011-02-24 22:07   좋아요 0 | URL
언제부턴가 시를 다 이해하겠다, 거나, 작가가 느낀 만큼 내가 느껴야겠다,
뭐 이런 욕심 같은 걸 버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느끼고 이해하고, 또 공감한 만큼이 그냥 제게는 그 시, 랄까요.
턴님에게 마지막 연이 와닿았다면 (아니라고 하면 말고. ㅎㅎ) 그냥 마지막 연으로 이 시를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ㅎㅎ 모든 시가 막 다 내 이야기같고, 막 다 와닿는 삶은 얼마나 괴로울까, 막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 그래서 가끔은 이해되지 않는 시 앞에서도 훗, 하고 좋아하기도 한답니다. 변태죠 ㅋㅋ

저도 이 시는 마지막 연이 제일 좋았어요. 내 감정의 흐름에 비해 좀 더 과잉으로 흐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게 그 때의 시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두에게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 전 그냥 그때그때 마음에 따라 다른 시집을 읽어요. ㅋㅋ 시인이 내게 맞춰 시를 쓸 수 없으니, 내가 시인에 맞추는거죠. ㅋㅋㅋ

turnleft 2011-02-25 04:40   좋아요 0 | URL
앞서 말했듯, 제가 시를 잘 안 읽어서..;;
그러니까, 제가 시랑 좀 안 맞는 사람인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항상 강조하듯 저는 표현보다 서사에 집중하는 타입인지라 서사를 압도하는 표현력(?)에 좀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해요 ㅋ

레와 2011-02-2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보니 그 무료한 나날들이 나를 키웠단 생각이 들어요. 중요한건 지.나.고.보.니.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싶어요!

웽스북스 2011-02-24 22:08   좋아요 0 | URL
하하하 지나고보니. 가 중요하니.
오늘의 지나고보니, 라고 생각하며 느낀 지점들도
또 내일의 레와님을 키워주지 않을까 싶어요

무럭무럭 자라보아요 우리 ㅋㅋㅋㅋㅋㅋ

굿바이 2011-02-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 오후, 봄은 오고 있는지...

風流男兒 2011-02-24 15:57   좋아요 0 | URL
오늘날씨로는 봄이 온듯, 바람은 다르지만, 이렇게 겨울이 순순히 가지는 않을테니, 악! 퇴근하고파요 ㅋㅋ

웽스북스 2011-02-24 22:08   좋아요 0 | URL
전 오늘
겨울이 갑자기 좀 불쌍했어요 ㅜㅜ
그렇게 괴롭히더니

아. 아무래도 나 변태 맞나봐요

따라쟁이 2011-02-2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가는 먼집... 저는 예전에 나온 허수경시인의 책을 읽고 있어요. 그것도 작가의 말 보니까 봄쯔음. 아니면 봄이 가는 쯔음 엮은것 같더라구요. 그 시집도 읽으면서 단어들이 아파서 책장이 잘 안넘어 간다.. 하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도 그렇군요.

웽스북스 2011-02-26 23:39   좋아요 0 | URL
앗, 따라쟁이님 안녕하세효!!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도, 빌어먹을, 그래요 ㅜㅜ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中











알라딘 트위터(@aladinbook)를 통해 이 시를 다시 만났다.

꼭 걸맞는 계절에 다시 만나게 되니,
이 역시, 실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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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0-10-07 01:01   좋아요 0 | URL
사랑합니다! :)

2010-10-07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호인 2010-10-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쓸함이 배어날 수도 있는데
낙엽이 친구가 되었네요.
낙엽에게서 친근감이라는 새로움을 봅니다.

웽스북스 2010-10-09 02:18   좋아요 0 | URL
네. 쓸쓸하게 다정한 시에요 :)

레와 2010-10-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좋아하는.. ♡

웽스북스 2010-10-09 02:18   좋아요 0 | URL
힝 ♡

굿바이 2010-10-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은, 제목이 전부였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가만히 좋아하는]이라는 말, 참 좋았습니다. 언제봐도 가만히 좋아요~~

웽스북스 2010-10-09 02:1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러게요. 제목도 제목이지만, 창비시선의 그 단아함, 김사인이라는 시인 이름, 가만히 좋아하는 시집 제목과, 그 속의 시들, 모두가 하나로 귀결되는 느낌이에요. 단아하고, 너무 좋지요. 가만히 좋아요 정말.
 



어제는 문어가 뜬금없이 전화해 나한테 시를 어찌 읽느냐고 물었다. 국문과 석사 과정에 있는 그는 수용자론 같은 수업에 과제를 내야 했던 것 같았다. 시를 어찌 읽느냐,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시를 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읽는 것 같다. 그 길에서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을 내가 좋아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어쩌다 예쁜 꽃을 만나면 잠시 앉아 오래 머무는 그런 마음. 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문장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 시를 찾아 시집을 넘기다가 보물 같은 시를 발견하면 천천히 읽어보기도 하고,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때론 옮겨 적기도 하고. 

요즘은 어려운 시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마음으로 잘 싸우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마음보다 어쩌면 더 예민한 감정으로 썼을, 혹은 나보다 더 삶을 오래 살았을, 시인의 내밀한 마음의 구석까지 내가 모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때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쿨하게 좋아하는 선에서 그치기도 했다. 가끔은 한 편의 시도 이해되지 않는 삶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나는 딱 지금의 나, 만큼의 시를 읽고, 이해하고, 좋아한다.

살면서, 삶의 층이 늘어나면서, 그것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냥, 오늘은 이 시. 언젠가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술을

김수영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랫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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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론 셤 컨닝페이퍼
    from thebirdhasflown님의 서재 2010-07-08 01:38 
      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짧기 때문이고, 가끔 아주아주 쉬운 시만 즐기는데다, 게다가 시의 정반대편에 있다할 산문 전공자인 내가 종합시험(논문자격시험)은 시론을 덜컥 신청했다. 세 과목 중 두 과목을 골라야 하는데, 소설론은 그나마 해볼 만하지만 비평론은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기 때문. 게다가 시론은, 문제를 1주일 정도 전에 미리 가르쳐 주신다!    두둥, 시험 문제는 "시의
 
 
비로그인 2010-07-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공감가는 말씀.
딱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읽을 수 있더라구요.

웽스북스 2010-07-04 01:54   좋아요 0 | URL
네. 싸울 기운도 없고요. ㅎㅎ

차좋아 2010-07-0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의 마음을 읽을 땐 나도 길을 거니는 마음이었는데 아래 시를 읽으니 길을 찾는 마음...ㅜㅜ

웽스북스 2010-07-04 01:54   좋아요 0 | URL
찾았어요 길? ㅎㅎ

전호인 2010-07-0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는 글귀가 정말로 싯적입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멋진 말인데..... 라고 되뇌이고 있네요.

역쒸이~~!
글도 멋쟁이^*^

웽스북스 2010-07-04 01:55   좋아요 0 | URL
아이고,고맙습니다 전호인님. 아무리 그래도 총각 출신, 이 최고입니다. ㅎ

니나 2010-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틀 연속 회식하고 이 글을 읽으니 눈물이 나려고 한다 흑흑

웽스북스 2010-07-04 01:55   좋아요 0 | URL
아. 우리 너무 오래 못봤어.

마그 2010-07-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려운 포스팅입니다. 시 않읽은지 오백만년 된 나에겐
언제 쯤... 내가 시 읽고 울던 감수성 풍부한 소녀였다고 말하면. 믿어주실건가요? ^^

웽스북스 2010-07-10 14:07   좋아요 0 | URL
네네 믿겨요. 완전.
근데 마그님을 울린 시가 뭔지 궁금해요!!!

風流男兒 2010-07-0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아침부터 정말.. 마음이

웽스북스 2010-07-10 14:08   좋아요 0 | URL
시를 읽어요, 우리! ㅎㅎ

흰그늘 2010-07-0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두눈이 참으로 그의 '시' 처럼 거대한뿌리 같았었던 그 김수영인줄 알았는데..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또다른 김수영씨 였군요..
저도.. 순간.. 조금.. 얼빵.. 했는걸요..^^~~^^

웽스북스 2010-07-10 14:09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처음에...ㅋㅋㅋㅋㅋ
저의 얼빵의 역사는 대도대도...끝이 없어요 정말...

toon_er 2010-07-0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먼댓글 기능이 있군. ㅋㅋ
자네와 통화할 때쯤 거의 다 쓴 상황이라 글의 내용이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매우 좋은 참고가 되었다오. 노력이란 표현이 내 글에 있는데, 그 노력은 힘들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그냥 시 앞에 머무는 것-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을 의미하는 거로 받아들이면 될듯함.

좌우지간 내 시론보다 웬디양의 시론이 훨 시답소. :)

웽스북스 2010-07-10 14:12   좋아요 0 | URL
뭐, 사실 저건 시론도 아니지 ㅋㅋㅋㅋ
저렇게 글을 써놓고 내 허접한 글이 훨 시답다고 하면
나는 욕인지 칭찬인지 잘 구분을 못해요-

그나저나 요즘은 숙제 덕에 이래저래 정리되는 것들이 많겠네.
 


문학과지성사에서 진행한 낭독의 밤 행사에 다녀왔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임에도, 낭독회 장소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낭독회가 진행된 살롱드 팩토리 안에는 루시드폴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을 워낙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국, 타향, 이방인, 묘하게 겹치는 둘의 이미지... 그 둘이 함께 주고 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함께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는 사실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고요하게, 음악이 흐르는 카페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앉아 시집을 펴들고 가만가만 시를 듣는 밤.

쉬운 시를 쓰겠다,라고 마종기 시인은 다짐처럼 이야기한다. 그렇다. 그의 시는 쉽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그의 시 <우화의 강>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 할지라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시 때문에 마종기 시인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정작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뭔지는 잘 모르겠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 중에는 없는 것 같다...)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를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과 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시...


상처4  

                 - 마종기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
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
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
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
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

부서진 곳 가려주고 덮어주는 체액으로
뼈를 붙이고 살을 이어 치유하는지
지난날 피맺힌 사연의 나무들만
이름과 신분을 하나 감추지 않네
나무가 나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네

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
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
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의 76% 가량은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

이 시는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정말 마음에 드는 시집이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시집의 제목은... <하늘의 맨살> 이다. 아. 하늘의 맨살이라니...



















오늘 낭독된 시 중에는 없었지만, 이번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수원에 내리는 눈

마종기

1

내가 고국에서 본 마지막 눈은 수원에서였다. 밤새 내리던 함박눈을 긴 포옹으로 느끼며 잠들었던 하숙방, 그 한 달 뒤에는 기지병원 공중 중위로 전역 신고를 했고, 또 그 한 달 뒤에는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춥기만 했던 기억 때문인지 겨울에는 한 번도 고국을 방문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사십 년 이상, 그간에는 수원의 눈도, 고국의 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국의 눈은 얼마나 늙어버렸을까, 그 아름답던 눈꽃들은 또 얼마나 시들었을까, 요즈음의 눈꽃들은 서로 무슨 말을 나누면서 지상에 내리고 있을까.  

2

내 주위에 내리는 것들
내려서 서성이는 것들,
서성거리며 평생을 사는 것들,
보이다 말다 하는 미세한 것들이
모두 내 몸을 시리게 했네

눈 붉히며 울다가 떠나는 것들, 
눈치 보며 뒷걸음만 치는 것들,
더 볼 것이 없다며 녹아버리는 것들,
주눅 들어 움츠리는 가여운 풍경이
왜 씁쓸한 한기로만 남았던 것인지

멀리서 소식을 알리며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가볍게 살아야 했는데
본 척도 아는 척도 말았어야 했는데
주위를 살피며 구식으로 얼어가는 사랑,
집 떠난 내 몸, 문득
가벼운 것들이 다가와, 빛나는
눈꽃으로 나를 다듬어 주네.


또 한 권의 좋은 시집을 만났으니,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문학과지성사 편집자 분은 이 시집 머리말로 마종기 선생님이 줬던 말 중에, "다시는 시집을 내지 않겠다" 라는 말을 편집자의 재량으로 삭제하는 깜찍한 만행을 저질렀다는데, 오래오래 그의 시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참 고마운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모처럼 마음이 촉촉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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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질러야 하는건가봐요~~~ㅠㅠ

웽스북스 2010-06-12 02:00   좋아요 0 | URL
꺄옹. 지르세요. 지르세요!!!

치니 2010-06-1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이 가장 맘에 들었다는 시, 좋다!

웽스북스 2010-06-12 02:01   좋아요 0 | URL
네네. 그냥 막 소리내서 읽고 싶지요.
눈에 대한 시인데도, 눈오는 날보다는 봄밤에 어울릴 것 같아요.

레와 2010-06-1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고마워요!

덕분에 울림있는 시집을 만났어요. ^^
(땡투)

웽스북스 2010-06-12 02:01   좋아요 0 | URL
레와님. 어떠셨어요? ㅎㅎ

비로그인 2010-06-1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종기 시인, 낭독의 밤.
멋진 밤이셨을 듯.


웽스북스 2010-06-12 02:02   좋아요 0 | URL
예. 그러고보니 마종기 시인은 HANSA님과도 참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6-1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셨겠어요. 오늘밤에 혼자서라도 낭독해봐야겠어요.

차좋아 2010-06-10 18:3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의 낭독 듣고 싶어요!!

무해한모리군 2010-06-11 08:32   좋아요 0 | URL
블라에서 뵈면 다음에 낭독해드릴게요 ^^

저 책읽어주는거 좋아해요.. 이힛~

웽스북스 2010-06-12 02:02   좋아요 0 | URL
책읽어주는 여자 휘모리님.
우연인듯, 인연인듯, 불라에서 만나야겠네요.

knownow 2010-06-1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에 나온 시집도 좋습니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 뿐이라"라는..반갑네요...마종기라는 시인을 좋아하는 분이 계시네요...

웽스북스 2010-06-12 02:23   좋아요 0 | URL
네 그리고, 마종기 시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참 많은 것도 같아요. ㅎㅎ

멜라니아 2010-06-10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낭독의 밤에도 갈 수 있고, 서울 사는 처녀는 좋겠다!

저는 마종기시선집( 문학과 지성사)가 있는데 거기에 우화의 강이 있구요
이번 신간은 수필집, 어떻게 그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짧게 쓴 거였는데요
제 블에 올려 두었어요

웽스북스 2010-06-12 02:24   좋아요 0 | URL
아. 읽으러 가야겠어요. ㅎㅎ

반딧불이 2010-06-1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화의 강'은 문지에서 나온 <그 나라 하늘빛>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웽스북스 2010-06-12 02:24   좋아요 0 | URL
여기 올려놓으면 알게 될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반딧불이님!!~
 


기러기 

- 메리 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 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밝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괙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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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뜬 2009-10-0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아 김연수 작가님이 번역하신 기러기네요. 류시화 시선집에 있는 기러기도 좋지만 저는 이 버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

웽스북스 2009-10-12 01:11   좋아요 0 | URL
흑. 김연수는 번역도 잘해...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