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를 계속 읽고 있다.
죽을 것 같은 무료함에 살고 있는 겨울, 아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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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을의 빛   _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랏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날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 숲에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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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1-02-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어먹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혀가 아려요. 단어 하나하나가 혀를 그냥 넘어가지 않네...

웽스북스 2011-02-23 20:15   좋아요 0 | URL
빌어먹을, 아린 혀.. 네요.
단어 하나 하나 읽으면 읽을 수록 좋죠.

... 2011-02-2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집 바로 위의 특별판으로 가지고 있구요, 서점에서 일반판도 봤는데 둘 다 크기가 좀 애매하지 않나요? 저는 저 특별판 받고나서 난감했어요. 스케치북처럼 위로 넘겨보며 눈에 띄는 부분을 골라 읽어요.

무료함속에서 빛을 찾으려니...팍팍해욧, 흑.

웽스북스 2011-02-24 21:5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특별판 가지고 계시군요. 저도요.
특별판은 아무래도 침대용인 것 같아요.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책도 옆으로 세우면, 그렇게 잘보일 수가 없어요.

제 침대에는 아직도 이 책이 있답니다. ㅎㅎ

흰그늘 2011-02-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이..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옛 가을의 빛' 을 떠올려보게도 하는것 같군요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새로움의 하늘이 보였던 그 날이
그리워지게도 하는.. 그런.. '시' 네요..

웽스북스 2011-02-24 22:00   좋아요 0 | URL
흰 그늘길님의 옛 가을의 빛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져요.
그러고보니 흰그늘길, 이라는 닉네임의 이유도 궁금해지고요.

뜬금없죠? ㅎㅎ

다락방 2011-02-2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서재에 올려진 시 보고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오늘 뺐는데 다시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아 어쩌지?그냥 가끔 알라디너들이 올려주면 읽으면서 살까..무료한 봄밤이에요.추천을 보니 무료함을 느끼며 공감하는 분들이 제법 많은듯ㅠㅠ 나도 봄밤에 대한 시 올리고 싶지만 지금은 졸리므로 자야겠어요.미친봄밤이에요ㅠㅠ

웽스북스 2011-02-24 22:01   좋아요 0 | URL
가을 시를 올렸는데, 다들 봄을 이야기하네요. 미친봄밤. ㅋㅋ
다락방님은 늘 다락방님과 어울리는 언어를 꼭꼭 잘 찾아내는 것 같아요. ㅋㅋ

다락방님. 봄밤에 대한 시, 찾아서 올려주지 마시고요.
지어주세요. 나 완전 기대되. ㅎㅎ

turnleft 2011-02-24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시를 잘 안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연을 제외하곤 왜 이리 언어가 과잉되게 느껴질까요.
절제된, 효율적인 언어라기보단 왠지 너무 작정하고 시어들을 짜내는 느낌이랄까..

치니 2011-02-24 19:35   좋아요 0 | URL
(남의 집에서 댓글질 ㅋㅋ 웬디양 님은 용서해줄 거죠?)
턴레프트 님은 전체 시집을 다 읽지 않고도 문제점(이라고 하면 참 삭막하지만)을 잘 짚어내시네요. 이 시가 굳이 그렇다기보다, 저도 몇 몇 시는 그렇게 느꼈어요.
그런데 시집을 덮고 생각했죠, 이런 '서정시' 읽은지가 대체 얼마만인가, 이런 시의 명맥이 이어지기나 했었나, 누군들 담백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상이라는 것이 이런 시집을 통해 이어지는데 의미가 있지 않나, 뭐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허수경 시인이 용감했다고 생각합니다아. :)

웽스북스 2011-02-24 22:07   좋아요 0 | URL
언제부턴가 시를 다 이해하겠다, 거나, 작가가 느낀 만큼 내가 느껴야겠다,
뭐 이런 욕심 같은 걸 버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느끼고 이해하고, 또 공감한 만큼이 그냥 제게는 그 시, 랄까요.
턴님에게 마지막 연이 와닿았다면 (아니라고 하면 말고. ㅎㅎ) 그냥 마지막 연으로 이 시를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ㅎㅎ 모든 시가 막 다 내 이야기같고, 막 다 와닿는 삶은 얼마나 괴로울까, 막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 그래서 가끔은 이해되지 않는 시 앞에서도 훗, 하고 좋아하기도 한답니다. 변태죠 ㅋㅋ

저도 이 시는 마지막 연이 제일 좋았어요. 내 감정의 흐름에 비해 좀 더 과잉으로 흐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게 그 때의 시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두에게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 전 그냥 그때그때 마음에 따라 다른 시집을 읽어요. ㅋㅋ 시인이 내게 맞춰 시를 쓸 수 없으니, 내가 시인에 맞추는거죠. ㅋㅋㅋ

turnleft 2011-02-25 04:40   좋아요 0 | URL
앞서 말했듯, 제가 시를 잘 안 읽어서..;;
그러니까, 제가 시랑 좀 안 맞는 사람인건 사실인 것 같아요. 항상 강조하듯 저는 표현보다 서사에 집중하는 타입인지라 서사를 압도하는 표현력(?)에 좀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해요 ㅋ

레와 2011-02-2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보니 그 무료한 나날들이 나를 키웠단 생각이 들어요. 중요한건 지.나.고.보.니.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싶어요!

웽스북스 2011-02-24 22:08   좋아요 0 | URL
하하하 지나고보니. 가 중요하니.
오늘의 지나고보니, 라고 생각하며 느낀 지점들도
또 내일의 레와님을 키워주지 않을까 싶어요

무럭무럭 자라보아요 우리 ㅋㅋㅋㅋㅋㅋ

굿바이 2011-02-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 오후, 봄은 오고 있는지...

風流男兒 2011-02-24 15:57   좋아요 0 | URL
오늘날씨로는 봄이 온듯, 바람은 다르지만, 이렇게 겨울이 순순히 가지는 않을테니, 악! 퇴근하고파요 ㅋㅋ

웽스북스 2011-02-24 22:08   좋아요 0 | URL
전 오늘
겨울이 갑자기 좀 불쌍했어요 ㅜㅜ
그렇게 괴롭히더니

아. 아무래도 나 변태 맞나봐요

따라쟁이 2011-02-2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가는 먼집... 저는 예전에 나온 허수경시인의 책을 읽고 있어요. 그것도 작가의 말 보니까 봄쯔음. 아니면 봄이 가는 쯔음 엮은것 같더라구요. 그 시집도 읽으면서 단어들이 아파서 책장이 잘 안넘어 간다.. 하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도 그렇군요.

웽스북스 2011-02-26 23:39   좋아요 0 | URL
앗, 따라쟁이님 안녕하세효!!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도, 빌어먹을, 그래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