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문어가 뜬금없이 전화해 나한테 시를 어찌 읽느냐고 물었다. 국문과 석사 과정에 있는 그는 수용자론 같은 수업에 과제를 내야 했던 것 같았다. 시를 어찌 읽느냐,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시를 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읽는 것 같다. 그 길에서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을 내가 좋아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어쩌다 예쁜 꽃을 만나면 잠시 앉아 오래 머무는 그런 마음. 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문장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 시를 찾아 시집을 넘기다가 보물 같은 시를 발견하면 천천히 읽어보기도 하고,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때론 옮겨 적기도 하고. 

요즘은 어려운 시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마음으로 잘 싸우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마음보다 어쩌면 더 예민한 감정으로 썼을, 혹은 나보다 더 삶을 오래 살았을, 시인의 내밀한 마음의 구석까지 내가 모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때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쿨하게 좋아하는 선에서 그치기도 했다. 가끔은 한 편의 시도 이해되지 않는 삶이 부러운 적도 있었다. 나는 딱 지금의 나, 만큼의 시를 읽고, 이해하고, 좋아한다.

살면서, 삶의 층이 늘어나면서, 그것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냥, 오늘은 이 시. 언젠가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술을

김수영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랫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댓글(16) 먼댓글(1)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시론 셤 컨닝페이퍼
    from thebirdhasflown님의 서재 2010-07-08 01:38 
      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짧기 때문이고, 가끔 아주아주 쉬운 시만 즐기는데다, 게다가 시의 정반대편에 있다할 산문 전공자인 내가 종합시험(논문자격시험)은 시론을 덜컥 신청했다. 세 과목 중 두 과목을 골라야 하는데, 소설론은 그나마 해볼 만하지만 비평론은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기 때문. 게다가 시론은, 문제를 1주일 정도 전에 미리 가르쳐 주신다!    두둥, 시험 문제는 "시의
 
 
비로그인 2010-07-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공감가는 말씀.
딱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읽을 수 있더라구요.

웽스북스 2010-07-04 01:54   좋아요 0 | URL
네. 싸울 기운도 없고요. ㅎㅎ

차좋아 2010-07-0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의 마음을 읽을 땐 나도 길을 거니는 마음이었는데 아래 시를 읽으니 길을 찾는 마음...ㅜㅜ

웽스북스 2010-07-04 01:54   좋아요 0 | URL
찾았어요 길? ㅎㅎ

전호인 2010-07-0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는 글귀가 정말로 싯적입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멋진 말인데..... 라고 되뇌이고 있네요.

역쒸이~~!
글도 멋쟁이^*^

웽스북스 2010-07-04 01:55   좋아요 0 | URL
아이고,고맙습니다 전호인님. 아무리 그래도 총각 출신, 이 최고입니다. ㅎ

니나 2010-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틀 연속 회식하고 이 글을 읽으니 눈물이 나려고 한다 흑흑

웽스북스 2010-07-04 01:55   좋아요 0 | URL
아. 우리 너무 오래 못봤어.

마그 2010-07-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려운 포스팅입니다. 시 않읽은지 오백만년 된 나에겐
언제 쯤... 내가 시 읽고 울던 감수성 풍부한 소녀였다고 말하면. 믿어주실건가요? ^^

웽스북스 2010-07-10 14:07   좋아요 0 | URL
네네 믿겨요. 완전.
근데 마그님을 울린 시가 뭔지 궁금해요!!!

風流男兒 2010-07-0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아침부터 정말.. 마음이

웽스북스 2010-07-10 14:08   좋아요 0 | URL
시를 읽어요, 우리! ㅎㅎ

흰그늘 2010-07-0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두눈이 참으로 그의 '시' 처럼 거대한뿌리 같았었던 그 김수영인줄 알았는데..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또다른 김수영씨 였군요..
저도.. 순간.. 조금.. 얼빵.. 했는걸요..^^~~^^

웽스북스 2010-07-10 14:09   좋아요 0 | URL
실은 저도... 처음에...ㅋㅋㅋㅋㅋ
저의 얼빵의 역사는 대도대도...끝이 없어요 정말...

toon_er 2010-07-0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먼댓글 기능이 있군. ㅋㅋ
자네와 통화할 때쯤 거의 다 쓴 상황이라 글의 내용이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매우 좋은 참고가 되었다오. 노력이란 표현이 내 글에 있는데, 그 노력은 힘들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그냥 시 앞에 머무는 것-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을 의미하는 거로 받아들이면 될듯함.

좌우지간 내 시론보다 웬디양의 시론이 훨 시답소. :)

웽스북스 2010-07-10 14:12   좋아요 0 | URL
뭐, 사실 저건 시론도 아니지 ㅋㅋㅋㅋ
저렇게 글을 써놓고 내 허접한 글이 훨 시답다고 하면
나는 욕인지 칭찬인지 잘 구분을 못해요-

그나저나 요즘은 숙제 덕에 이래저래 정리되는 것들이 많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