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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을 사랑할 수는 없고, 단지 신을 신으로서 사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목표가 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의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진정한 신앙심을 보여 준 것이 아니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지옥은 신의 부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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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신의 부재,를 읽으며, 욥에 대한 언급은 없음에도 나는 계속 욥기를 떠올렸다. 그러다 저 부분을 읽을 때, 류선생님께서 수업에서 강조하셨던 욥기의 주제가 그대로 표현돼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아, 역시, 이 사람, 욥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끝부분 작가 노트에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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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도 다른 사람에게는 터무니 없는 헛소리로 받아들여진다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구약성서의 <욥기>가 좋은 예이다.
내가 욥기에서 불만족스럽게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마지막에 가서 신이 욥에게 복을 내린다는 점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보상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일단 제쳐 놓기로 하자. 신은 왜 욥에게 다시 예전의 복은 되찾게 해 준 것일까? 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단 말인가? <욥기>의 가장 기보적인 메시지 중 하나는 선이 언제나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착한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욥은 마침내 이 교훈을 받아들임으로써 미덕을 실행해 보이고, 그 결과 축복을 받았다. 이 부분은 본래의 메시지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욥기>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완수할 만한 용기를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이 이야기의 저자가 선은 언제나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말로 공감하고 있었다면, 결말에 가서도 욥은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태로 남아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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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각에 내가 얼마나 동의하는지는 2005년 4월에 썼던 글에 그대로 녹아 있다.
욥기를 읽으면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그 중 한가지는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지 않으셨더라면 어땠을까, 이다
예전 H양이 사회봉사 나가던 포항 모 교회 어린이 설교처럼
"욥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더 예쁜 부인과, 더 많은 재물과, 더 많은 자식들을 얻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긴 축복하셨으되
아무도 모르게 저 하늘나라에서 몰래몰래 많이 많이 축복하셨다면
욥이 끝까지 고통을 이겨낸 사실이 성경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욥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모든 고통을 끝까지 이겨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이겨낸 후에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셨기 때문이고,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고난의 순간보다는,
그 후 욥이 몇배나 더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를 강조한다
성경의 이해 시간에 배운 욥기의 주제는
당신은 하나님을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 있는가, 였다
그 분이 내게 축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 분이 내게 눈에 보이는 풍요를 주시는 분이 아니더라도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주시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가
나 역시 그 부분에 대해 들으면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한 축복을 주시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분을 신뢰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던 것 같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욥에게 마지막에
눈에 보이는 풍요를 허락하셔서
나의 고찰을 이리 흐리게 만들까
왜 하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순전한 믿음을 가져보려는 자에게
그래도 설마 이기고 나면 이 세상에서 내가 풍요로워지겠지...
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걸까
사실 욥 정도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축복 안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봤을 것 같다
그런 욥을 축복하신 건
대부분의 사람은 욥과 같지 못하기에
고난의 상황에 닥쳤을 때,
한줄기 희망이라도 갖게 하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절망에 빠지지 않을까
하나님이 내게 이만큼 복을 주셨어
나를 이만큼 사랑하시나봐, 라는 논리에 빠지는 사람들 뒤에는
같은 논리로 나는 이만큼을 덜 사랑하시나봐,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말이다
요즘 구약을 배우면서
구약 속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가
물질적 풍요로 설명되는 경우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서 나 또한 그런 논리에 의해 시험에 들지 않을까 싶어서
성경의 이해 시간에 배웠던 욥기의 주제를
다시한 번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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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W와 H를 만났고, 오늘 저녁, 다시 W를 만났다. 어제는 회식이어서 2시 30분이 넘어 끝났는데, H와 W가 강남에 있다는 얘길 듣고 1차와 2차 사이 잠깐 달려간 것이었다. W는 2년만에 만났는데, 2년 전 우연히 만났을 때 계속 준비중이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7급을 보려고 발령을 연장해놓은 상태라는 말을 전했고,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리고는 계속 연락 두절. 그런데 W의 얘기를 들으니, 그 때 우리들 앞에서 너무 창피해서 거짓말을 했었고, 거짓말을 한 게 너무 창피해서 그동안 연락도 피해왔었다고 한다. 마음이 짠해졌지만, 웃으면서 뭐 어떻느냐고 대꾸했다. 그거 준비중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거 아는데 뭐가 창피해. 응? 이제 연락좀 하고 살자 친구야.
짧았던 만남이 아쉬워 오늘 다시 만난 W는 늘 치열하고 신실한 H와 어제 만났던 이야기를 하며, 자기도 교회를 다녀봐야겠다고 의지할 데가 필요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H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는지 W에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했고, 성당에 다니던 W는 교회에 다녀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나는 선뜻 그러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H의 악의없는 말들에 대해 W가 했을 생각들을 떠올리며 또 속상해진다. 조심스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데...라고 이야기를 하니, 자신처럼 바닥을 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동생 친구 중에 한 명도 교회 다니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 입에 거품이 물도록 이야기하고 다닌다고. (그 축복이란, 월급이 500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서 아무 말 하지 못했지만, W는 나와 성격이 비슷한 친구이기에, 그렇게 찾아가는 교회가 그녀에게 위로를 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하지만 난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심스레 예전에 모 선생님께 들었던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욥기의 마지막은 후세에 의해 첨언된 것이라는 유력한 설이 있단다. 역시, 욥기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긴 한 거다. 그 부분이 지금 이 곳에서는, 핵심이 되고 있는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