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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환상 속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 서로에 대한 몽타주를 작성하고 있어요. 질문을 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그 질문들의 매력이죠. 그래요, 우린 서로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걸 피하면서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꾸 자극하고 계속 부채질해대고 있어요. 우린 행간을 읽으려 애쓰고 낱말과 낱말, 철자와 철자 사이에 숨을 뜻을 읽으려 애쓰죠.
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여느 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안에 있으면서 저와 늘 동행하는 제 2의 목소리같은 존재입니다. 당신은 저의 독백을 대화로 바꿔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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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우연한 루트를 통해 알게 된 누군가와 3년간을 음성메시지를 통해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입시 준비에 연락이 끊긴 기간도 여러 번 있었고, 학생이었기에 호출기가 중간에 사라지는 기간들도 존재하는 등 버퍼 기간이 적지 않았지만, 편지나 크리스마스카드 등을 통해 어쨌든 그렇게 3년간 연락을 지속해왔었다.
1분 30초의 시간이 짧아 말을 하다가 끊기고 또 끊기고, 해서 대여섯개의 음성 메시지를 남겨가며 그렇게 대화를 했었다. 상대방이 했던 얘기를 잊을까 하여 음성 메시지가 도착하면 나는 한 손에는 수화기를,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의 요점을 적었다. 그리고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그 이야기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대부분이 일상과, 거기서 오는 작은 소재들, 거기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과 나의 생각. 그렇게 조목조목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것이 꽤 즐거웠고, 어느 덧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내가 사용한 공중전화카드는 수집을 해도 좋을 정도였다. (실제로 살짝 어설프게 수집도 했었다. 지금은 다 어디에 있지?) 고1이었던 내가 고3이었던, 재수생이었던 상대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됐었고, 내가 고3이 됐을 땐 대학생이 됐던 상대가 다시 나를 위로했다. 그건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종의 오묘한 교감이었다.
전화번호를 알았지만, 전화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은 우리가 '음성메시지'라는 소통 방식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대화하기보다 편지쓰기에 가까운 일이다. 일방적으로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대에게 10분동안 혼자 말하는 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소통하던 사람이었기에 전화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전화기를 통해 이야기함에도. 그리고 입시가 끝났던 1998년 12월에 드디어 우리는 만남을 가졌고, 서로의 환상에 기대오던 시간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가 매우 폭탄이었다거나, 비호감형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그가 누구든, 어떻든 간에, 또 내가 누구든, 어땠든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3년간 품어왔던 상상속의 이미지를 극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후 1년 가까이 연락이 더 지속됐지만, 그 마음이 이전처럼 호기심어린 들뜸일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에게도 곧 새로운 세계(대학교)가 열려, 정신없는 적응기가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이전 세계의 대표격이었던 '호출기'의 시대가 종식되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소통의 수단이 사라지자 소통이 사라지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를 읽으며 나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해본 적 없던, (아니, 해놓구 까먹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떠올린 건 그의 얼굴이 아니다. (사실 1%도 기억나지 않는다.) 음성 메시지를 통해 들려 오던 저음의 목소리와, 몇번인가 주고 받았던 편지 속에 있었던 힘있는 글씨체. 그리고, 집앞, 학교앞, 독서실 앞 공중전화로 달려가던 그 때의 들뜬 마음. 마음 속에 머물던 독백들이 대화가 되어 흘러나가던 그 시간의 기억들이. 연락이 끊긴 기간동안 한없이 궁금해 안달하던 그 때의 기다림이.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가보다, 자신이 상대를 어떻게 상상하는가가 더 중요했던 책속 레오의 마음처럼, 그의 생김새(실체)보다는 내가 만들었던 그의 모습이 나에겐 더 중요한 것이었고, 하여 그런 것들만 또렷이 기억할 수 있겠다. (실은 98년 겨울 그날에 대한 기억은 설레는 맘으로 한번도 가본 적 없던 압구정동을 찾아가 두리번 거리던 내 모습, 그리고 압구정동 한복판에서 보도블록의 얼음 밟고 제대로 넘어져 죽을 만큼 창피해 하던 모습 (-_- 예나 지금이나)이 거의 전부다)
글씨체를 떠올리다 갑자기 그 편지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거의 5년만에 편지 모음파일을 열어 이전의 편지와 카드를 찾았다. 그 곳에 적혀져 있는, 1998년의 그 주소로 이 책 한 권을 보내면 상대방은 나를 떠올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갑자기 든다.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리스크 금액이 책 한권값 정도라면, 뭐 해볼만한 일 아닌가. 물론 내가 그 책을 보낼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ㅎㅎ 내가 알고 있는 건, 뭐든 밤에 하면 그르치기 십상이니 일단은 자야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