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1
며칠 전부터 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아서 하루 12시간씩 술을 마시며 고성방가 중이다. 가장 많이 외치는 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이고, 그 다음이 “김진태 이 개 쉬벌로마”다. 그 두 마디가 8할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뭘 어쩌시겠다는 건지, 김진태는 당최 누구이며 어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쉬벌로마로 전락하고 말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도 반구도 없는 상황이다. 동네 사람들은 여유로운 건지 너그러운 건지 아무도 할아버지를 말리지 않는다. 다들 국가와 민족과 김진태와 쉬벌로마에 대해서 같은 의견인 것일까. 모쪼록 국가와 민족이 얼른 안녕을 되찾기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김진태 씨도 얼른 사람 되시길.
아침부터 사락사락 비가 내려서 기분이 좋다. 할아버지께서도 그러신가 보다. 유독 찰진 딕션. 구꽈와 민죠글 위해,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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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족장이야! 아파치 부족 족장이라고! 젠장맞을!"
"젠장은 혼자 맞으세요, 족장 나리." 그는 술을 마시며 거울 속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아파치족 빨래를 하세요?"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잔인한 말이었다. 그를 웃기려고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웃었다.
"레드스킨, 자네는 어떤 부족인가?" 그가 담배를 꺼내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내 첫 담배의 불을 붙여준 사람이 어느 왕자였다는 거 아세요? 내 말 믿겨요?"
"암, 믿고말고. 불 줄까?" 그가 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는 사이가 아주 가까웠고 그는 정신을 잃었고 거울 속에는 나 혼자였다.
_ 루시아 벌린, 「에인절 빨래방」
2
어제 마트에서 사온 요거트를 三과 하나씩 나누어 먹었는데, 요거트 뚜껑? 껍데기? 하여튼 그걸 양손으로 잡고 핥아먹고 있다가 역시 그걸 양손으로 잡고 핥아먹고 있던 三과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三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부끄러워져서 괜히 네이버를 열었다 닫았다 하고 아무 의미 없는 하얀 공간에 마우스를 클릭하며 뭔가 하는 척을 하게 됐다. 아니, 왜 사람이 작아지는 느낌이지? 이걸 안 핥아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요거트 뚜껑은 안 핥고 그냥 버리는 사치를 누려야지. 김밥 두 줄 시킬 때 그냥 김밥 + 참치김밥 말고, 참치김밥 + 치즈김밥 구성으로 시키는 호사도 누려야지. 콜라도 1.5L사면 500mL 시점에서 김 다 빠지니까, 500mL짜리 작은 페트만 사서 먹을 거고, 버거킹에서 셋트 먹을 때도 라지로 먹을 거야! 700원 더 주고!
와, 생각만 해도 개설렘…….
가끔 길을 걷다가 저 멀리 보석이나 꽃 같은 물체가 있는 것을 보지만 몇 걸음 더 다가가서 보면 그냥 쓰레기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물체도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는 아름다워 보인다.
_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3
시를 하루 딱 10편씩만, 천천히, 느긋하게, 꼭꼭 씹어 읽어야지- 하고 다짐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고 안도현을 뽑아 들었는데, 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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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왔네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견뎌야 하네
_ 안도현,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부분
--- 읽은 ---
123.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20
분식집 개도 삼 년이면 떡라면을 끓인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읽지 않고 마르크스 개론서/해설서만 읽으면서 빨간 심장의 표면만 할짝대던 것이 아아, 몇 년이던가.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원숭이가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인간에게도 좋은 책이기만 한 것은 또 아니라는 사실을. 후려치기란 늘상 그런 것이다. 후려친 책은 결국 사다리의 맨 아랫단에 불과하고, 읽을 뜻이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 단을 밟고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불필요한가? 사다리의 첫 단을 밟지 않고도 안전하게 올라설 자신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 syo는 워낙 뱁새다리이온지라.
124. 알기 쉬운 경제학
김경진 지음 / 지식공감 / 2020
거짓말은 아니었다.
125.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김언호 지음 / 한길사 / 2020
서점과 도서관을 거니는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지 오래다. 저 빌어먹을 감염병 때문에. 어떤 이는 수입이 줄고 심한 경우 직장 자체를 잃었다. 또 어떤 이는 건강을 잃고 심지어 생명을 잃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겨우 도락 하나 빼앗긴 게 무에 그리 대수냐 하옵시면 그건 뭐 또 그렇겠습니다만…….
책이 잔뜩 늘어서 있는 공간에서 시간을 탕진하는 데서 얻는 안온함 같은 것이 있다. 그렇게 책을 뺐다 꽂았다 하면서 보낼 시간에 그냥 아무거나 골라서 읽기 시작했으면 한 권은 읽었겠다는 비난은 좀 경영학적이라서 반사. 책광욕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독서가일 수는 있어도 애서가일 수는 없는 법.
서점이라는 공간이 내뿜는 문화적 광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고, 그 종이로 넘실거리는 건물 안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안함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겠다. 그런 이유로 syo에게 서점에 관한 책은 어지간히 좋은 책이어도 별반 의미 있는 책은 아니기 십상. syo의 세상에는 두 가지 서점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본 서점, 그리고 내가 가볼 서점.
126.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
마르크스의 문장과 니체의 문장 중 어느 것이 더 선동적인가?
그들은 둘 다 뭔가를 부쉈다. 마치 윈도우에 깔린 익스플로러처럼 사회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던 뭔가를. 그래서 그들(그들의 책)이 태어나기 전과 후의 세상은 같은 세상일 수가 없었다. 말과 글로 그런 파괴 행각을 벌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동과 추동의 문장이 필요하다. 혁명에는 사상이 필요하지만 사상만으로는 혁명이 충분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처음의 질문은 그들이 부순 것들, 부수고 세운 것들의 크기를 평가하는 사람의 잣대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범위를 좁혀서, 마르크스와 니체가 아니라 ‘고병권의’ 마르크스와 니체에서 생각해보자면, 좀 더 손쉽게 답을 내릴 수 있다.
고병권 선생님의 입지는 이 책에서부터가 아니었을까? syo는 니체보다 마르크스를 훨씬 더 좋아하지만, 고병권 선생님의 마르크스 책보다는 니체 책을 훨씬 더 사랑한다.
127. 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2
인생을 바꾼다는 제목을 달았다고 해서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꾸어줄 거라고 기대하거나, 왜 바꿔 준대 놓고 바꿔놓지를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유아적이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꿔놓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다만 내가 어떤 책 한 권을 통해 내 인생을 바꾸는 일이 가끔 일어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책이 우리에게 해 줄, 해주겠다고 선언한 일들에 큰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인생은 하나의 사건을 만나 크게 물길을 틀어놓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미세한 각도의 선로변경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두고 바뀌어 간다. 책에서는 한 줄의 문장, 하나의 지혜, 한 조각의 동력만 주워도 기쁜 일이다. 주운 것을 인생에 발라 뭔가를 바꾸는 것은 읽는 이의 일이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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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타인의 얼굴 / 강영안
홍차수업 / 문기영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북항 / 안도현
너 자신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 / 이정연
책 Chaeg 2020. 7. 8. / (주)책(월간지) 편집부
닥치고 데스런 스트레칭 / 조성준
다소 곤란한 감정 / 김신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