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의 문학, 손 밖의 종이 뭉치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서 잠 한번 깨 보겠다고 북플에 들어갔다가 성공했다. 친애하는 이웃의 서재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둘러싸고 어느 독서모임에서 벌어진 일을 읽게 되었는데, 그 모임의 선생님이라는 자의 입에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문학을 봐서는 안 된다, 그런 해석은 편향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해서,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와, 대박. 이건 syo가 2020년 하반기에 들은 말 가운데서 가장 편향된 말이군.
첫째. 어떤 판단 자체가 도덕적 판단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필요하다. 그 판단 자체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든가, 아니면 모든 판단을 판단할 수 있는 신이 있어서 이건 도덕, 저거는 정치, 그리고 요거는 그냥 개소리- 이런 식으로 딱딱 결정을 해주든가.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어떤 판단이 도덕적 판단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도덕률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고, 그 순간 메타-도덕적 판단은 그대로 하나의 도덕적 판단이 된다. 즉,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문학을 봐서는 안 된다는 말 자체가 문학을 보는 하나의 도덕적 잣대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 말은 ‘나는 신이오, 내 말을 들으시오’라는 뜻인데, 설마. 결론적으로 저 선생님은 문학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말로써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도덕적 잣대에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었다. 도덕적 잣대의 침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잣대에 쑤셔진 죽은 문학의 분노는 두렵고,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은 것일까.
둘째, 세상에는 여성주의 비평이라는 게 떡하니 존재한다. 이 모임에서는 세상에 뿌려진 별처럼 다양한 비평들 가운데 여성주의 비평만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합의가 있지 않고서야, 판단의 오류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의 판단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독서모임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일까? 그리고 ‘도덕적 잣대’라는 용어 자체가 어쩐지 여성주의 비평을 비평의 한 갈래로 보지 않는 듯한 느낌도 풍긴다.
셋째, 설령 그렇게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니 문학이 대체 뭐건대 지 혼자 도덕적 잣대를 피해가야 하느냐는 말이지. 문학이 할 일은 그냥 문학이다. 제 몸에 갖다 댈 잣대를 제가 고르는 일이 아니라. 두려우면 피하고, 두렵지 않으면 밀고 나갈 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문학은 제 시대에 박해받다 다음 시대에 인정받기도 하고, 어떤 문학은 제 시대에 반성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어떤 문학은 시대의 시각을 바꿔놓기도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어쨌든 자신의 시대에,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문학을 했다. 문학을 도덕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되는 거니까 살짝 비도덕적으로 써도 문학적 평가는 좋게 받을 수 있을 거야 헤헤- 이러면서 문학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쓸 수 있고 쓸 수밖에 없는 글들을 썼다. 그게 그가 사랑받는 이유이고, 개개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호오를 떠나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이 문학의 역사에 크게 새겨진 이유다. 그게 작가의 일이며, 독자가 할 일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잣대를 동원해 작품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창출하는 일이다. 문학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작가-작품-독자가 대사를 주고 받으며 펼쳐지는 연극이다. 작품은 그 연극을 위한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고, 결코 독자의 위에 있거나 독자의 시각을 제약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 연극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독자는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 도덕이건 뭣이건, 독자는 한다.
모든 문학은 역사성을 띤다. 지위가 변하지 않는 고전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셰익스피어는 시대를 안 탈까? 이제 고작 500년이 지났다. 500년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다자이 오사무의 아우라를 벗기고 나면 『사양』은 쓰레기에 가깝다. 최소한 이 시대에는. 나는 『사양』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과, 『사양』이 존재하지만 그걸 쓰레기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 가운데 하나를 골라 살라고 하면 0.1초의 고민도 없이 전자의 세상을 고르겠다.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이며 실로 그러한 범주들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다시 특별한 이해관계나 판단에 의해서 왜곡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분명히 가능하지만, 그보다도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이는 아예 지식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굳이 알려고 애쓸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해관계는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지식을 위태롭게 하는 한갓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몰가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
_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 입문』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_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문화의 불모지에서 잘난 척 날뛰고, 때로는 처절한 비명으로 변하는 내 아우성은 내 글의 표면을 집게손가락 끝으로 후벼팔 줄 아는 사람들, 많지는 않으나 내게는 충분한 그런 사람들에게만 들릴 뿐이엇다.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었다. 마치 알갱이마다 미세하게 풍경을 그려 넣은 쌀알 목걸이 같은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목걸이를 벗어 눈에 가까이 대고 알갱이마다 담겨 있는 풍경을 해독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용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_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 읽은 ---
131. 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고, 어떤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다. 우리는 저마다 감수성은 다르지만 어쨌든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그건 인간의 감각이다. 신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작가가 흐름의 시작점이고, 어떤 작가가 그 흐름을 거세게 만들었고, 그리고 어떤 작가부터 어떤 작가까지는 이미 존재하는 흐름에 그저 올라탔을 뿐이다- 라는 식의 자체적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 판단이 객관적이거나 여지없는 진리라고 우길 수는 없다. 그건 무지개에서 노란색과 초록색의 정확한 경계를 찾으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그런 판단조차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그 흐름이 거세어져 많은 이들이 동의하게 되고, 사회적 설명력을 지니면 패러다임이 되는 거고.
윤이형의 차례였다. 윤이형은 돌아와야 한다.
132. 어느 괴짜 선생님의 수학사전
김용관 지음 / 생각의길 / 2019
거의 대충 다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똑똑했던 나. 나라는 인간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33. 책 Chaeg 2020. 7. 8.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0
우린 모두 별에서 왔느니 어쩌니 하는 멘트는 솔직히 별 이야기 책마다 다 들어 있어서 별 이야기 아니다. <별, 빛의 과학>이라는 책을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근데 글 잘 쓰는 사람 정말 너무 많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책이라는 사실을 잡지를 읽을 때면 선명하게 느낀다.
--- 읽는 ---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 김진영
1일 1미술 1교양 1 : 원시주의~낭만주의 / 서정욱
이사 / 마리 유키코
별, 빛의 과학 / 지웅배
쓰기의 감각 / 앤 라모트
문학사를 움직인 100인 / 이한이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프로이트 패러다임 / 맹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