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1
다시 대구다.
이번 주에는 엄마 집을 싹 다 비워보려 했지만 실패다. 아마 다음 주에 한번 더 내려와야 할 듯. 박스에 넣어 베란다에 쌓아둔 관계로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책들이 발굴되었다. 아, 내가, 내가 이걸 샀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하는 책들이 많았다. 뭐가 됐건 당시에는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놨겠지만 지금에서는 애를 써도 이게 왜 나한테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어디 책만 그렇겠는가.
그리고 또 어디 내가 오늘 납득한 책들이 내일도 그렇겠는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길게 하지는 않기로.
2
동생이 앨범을 정리하면서 이거 봐라 이거 봐라 내밀어 댄 사진들은 이미 몇 번씩 본 사진인데도 하나같이 다 새로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어린 엄마 젊은 엄마는 진짜 말도 안 되게 예뻐서 같이 사진 찍는 다른 사람들한테 이만저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힙스터였던 할아버지의 다양한 재능(금기서화에다 낙농에 박제에 심지어 버스회사 경영도 하신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을 풍성하게 물려받지는 못해 아쉬움을 남겼던 엄마지만(똑같이 했다던 찌개 맛이 매번 달랐다……), 그 와중에 또 ‘힙’만은 몰빵 받았는지,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찍은 사진의 패션이 자뭇 21세기적이다. 네 분의 이모 삼촌 가운데 이런 사람은 또 없다.
이제는 아버지 사진 가운데 절반은 지금의 syo보다 어린 아버지가 찍혀 있다. 그런데도 관상만큼은 그렇지가 못해서, 이렇게 닮은 얼굴인데도 지금 이 기세라면 마흔 다섯 나보다 서른다섯 우리 아버지가 형으로 보일 듯하다. 나와는 이래저래 애증으로 버무려진 삶이었지만, 이 양반도 고생 고생은 진탕 하고 살았구나 싶어 짠하기도 했다. 내가 제사를 폐했으니 장례식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던 ‘큰 딸’이니 ‘작은 아들’이니 하는 친구들도 딱히 제삿밥을 차려주진 않을 것 같고, 우리 아버지도 참 배고픈 삶을, 배고픈 죽음을 살고, 아니지 죽음을 죽고(?) 있겠다. 저기서도 엄마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하진 않겠지. 아, 않겠구나. 아버지는 어디 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확실히 좋은 데 가 있을 것. 우리 엄마가 못 가면 거기 갈 사람 정말 몇 없다.
3
그래도 그들 역시 서로에게 다정했던 시기는 있었음을 증명하는 몇몇 사진들이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사진들 속에서 그들은 웃고, 웃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한곳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말년의 엄마라면 이렇게 내가 아버지와 자신을 묶기라도 하는 듯한 글을 쓰는 것조차 학을 떼며 싫어했겠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과는 별개로 몇몇 사진 속에서 나는 사랑을 본다. 가족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여자를 본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마음을 본다. 그리고 그 이후 천천히 바스라졌을 감정들과 돌이킬 수 없이 박살났던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들이 남기고 그러므로 끝내 지켜야 했던 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 사진을 찍었을 때의 그 마음, 그 순간을 영원에 박제하고 싶었던 그 치기 어린 동시에 예뻤던 그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가족이라는 관계와 필요충분으로 엮인 게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가족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족이 아닌 데로부터 얻으려 노력하면 끝내는 얻을 수 있으며, 필요한 것은 실은 마음의 깊이와 지속력이라는 것을, 나는 우리 가족의 탄생과 쇠락, 그리고 종말을 통해 배웠다.
묶지 않고 묶는 것, 그건 더 순수한 만큼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 읽은 ---
273.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장우진 지음 / 알에치이코리아(RHK) / 2021
세기말 파리, 우리가 우연히 시선을 던진 그곳에는 항상 무하가 있다. 침실 머리맡의 장식 패널, 어제 읽다 잠들어 버린 책 속의 삽화, 그리고 그곳에 꽂아둔 엽서에서 그를 만난다.
그의 그림이 광고하는 회사의 코르셋을 드레스 아래에 입고 그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와 주전자, 그리고 르페브르 위틸의 과자를 곁들여 한가한 티타임을 가진다. 아이들은 그가 광고하는 네슬레의 분유로 배를 채우고 어른들은 모에 에 샹동의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다. 페르펙타 자전거를 타고 나선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그가 표지를 그린 《라 플륌》을 한 권 사고, 식당에 들러 그가 디자인한 메뉴를 보며 식사를 주문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새로운 연극 포스터를 보고 서둘러 잘 차려입고서는 르네상스 극장으로 향한다. 연극이 끝나고 감동이 가시지 않자 푸케 보석 상점에 들러 사라 베르나르가 무대 위에서 걸친 액세서리와 비슷한 것을 하나 고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포스터를 그린 모에 에 샹동의 와인으로 가슴을 진정시킨 뒤 무하 풍의 가구로 채워진 방으로 돌아와 <황도12궁>이 그려진 달력에서 내일의 일정을 확인한 후 침대에 들어 《주기도문》과 함께 명상한 뒤에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_ 장우진,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일단 뛰어들 것, 낮은 자리에서 작은 것들을 만들며 즐거움 속에서 기다릴 것, 버려지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겁내지 말 것, 버리고 버려도 도무지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나의 것.
확실히 무하는 매력적이었다. 처음 무하를 접한 게 십수 년 전이지만, 아직까지도 그가 그린 그림을 만나면 그냥 스치게 되는 법이 없다. 이거, 무하네. 그런 것 치고는 인간 알폰스 무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반 고흐나 툴루즈-로트렉의 삶에 대해서는 열심히 찾아 읽었던 것과 대조적인데 왜 무하를 무시했는지는 모르겠다. 무하의 작품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관심을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확실히 아쉬운 대목이 없을 수는 없다. 없는 것은 선택의 여지다.
신경을 좀 더 썼으면 좋았겠다 싶은 문장들도 꽤 있다. 두 개만 짚자면,
‘그의 화실은 불 꺼진 난로와 더러워진 벽지 그리고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녔다.’(57)
: 난로의 불은 꺼졌고 벽지는 더러웠으며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니기까지 한 것인지, 아니면 ‘난로와 벽지와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닌 건지 애매하다. 앞이라면 주술호응 실패고, 뒤라면 지울 것들을 다 지워내지 못한 문장이다.
‘그의 작품은 굳게 닫힌 미술관의 유리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는 거기에, 눈이 머무르는 어느 곳에나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93)
: 장우진 선생님이 콤마를 아끼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어느 곳에나 있는’ 뒤에 콤마 하나를 찍지 않고,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 대중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는 모호한 문장을 만드셨을까.
274. 인생수업
법륜 지음 / 유근택 그림 / 휴(休) / 2013
어디서든 이 책이 발견되던 시절이 있었다. 북카페에도 미용실에도 이 책은 있었다. 배우며 사느라 인생이 벅찬데 인생을 사는 법마저 배워야 하는가 싶은 마음에, 제목만 봐도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도 가끔, 아니 자주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남들 다 봤다고 하니까 나도- 하는 마음으로 읽었을 뿐.
syo는 훌륭하지만 당연한 말을 ‘책’으로 펴내는 것을 왜 싫어하는가. 그건 뭘 높이 치고 또 뭘 업신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인가. 이것은 쓸데 없는 다독이 선사하는 가장 해로운 독 가운데 하나다. 이 문장을 이미 다른 (많은) 책에서 읽었고, 이 이야기를 이미 다른 (복수의) 책에서 들었다는 것. 일 년에 열 권 읽는 이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가 지난 몇 달 동안 몇 번쯤 들은 이야기가 되고, 한 달에 두 권 읽는 이들의 눈에 기발한 문장이 클리셰의 반경 안쪽에서 포착되는 것.
지겨움, 깊은 지혜를 마주할 때마다 채 음미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내 혀에 얇고 끈적한 막을 쳐놓는 독서의 적.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_ 법륜, 『인생수업』
275.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김여울 지음 / 안전가옥 / 2020
전투력 측정불가의 히어로 랭킹 1위 캡틴 허니 번(남지영). 히어로 협회 회장이자 전대 캡틴인 캡틴 불칸의 딸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히어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그녀는 히어로로서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지만, 체중에 비례하여 능력이 막강해진다는 속성 때문에 언론은 늘 그녀가 해결한 사건보다 그녀의 체중 변화를 보도한다. 히어로 동료 새끼들은 강한만큼 강하게 빻았고 그녀는 늘 어리고 예쁜 히어로 김소희와 비교를 당한다. 한편 김소희는 히어로가 되고 싶으나 여성 히어로에게는 사건이 배당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캡틴 허니 번을 제외한 모든 여성히어로들처럼 연예계에서만 활동하는 중-
이런 초기설정에서 벌어지는 한판 활극을 담은 이야기인데,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되고 심지어 환영하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평면적인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접수부 부장이라는 작자는 '아재 꼰대'의 이데아에서 0.1만큼의 특수함도 추가되지 않는 식인데, 모두가 이런 식이면 좀 아이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느낌이 든다.
“우리 지영이 몸무게 하나로 검색어 1위까지 올랐네? 좋겠다. 나는 밀입국자 체포 때나 겨우 올라갔는데.”
“사진 꼴 봐라. 여자애가 좀 웃지, 이게 뭐냐?”
“시끄러워!”
협회 건물 깊숙한 곳에 있는 회의실.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나를 놀려 대는 놈들을 보니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정상적인 회의는 무리겠구나.
믿기지 않겠지만 깐족거리며 웃는 저 세 명은 공식 랭킹 2위에서 4위까지의 최상위권 히어로들이다. 놈들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이들은 내 말을 무참히 씹으며 인터넷 뉴스들을 하나하나 읽어 주는 정성을 보여 줬다. 정말 친절하기도 하지. 감동받은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야! 임무 수행 보고를 하러 왔으면 일이나 해.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들지 말고!”
“지영아, 하늘 같은 오라버니들에게 야라니, 예의는 밥 말아 먹었냐?”
“와, 형. 요즘은 예의도 밥 말아 먹을 수 있어요? 어쩐지 남지영 덩치가 점점 커지더라~”
“큰일 났네. 싸가지 없고, 예쁘지도 않고, 대학도 못 가고, 뚱뚱하기까지! 너처럼 최악만 모으기도 힘들겠는데? 그것도 능력이다.”
…하아, 이래서 난 이 시간이 정말 싫다.
_ 김여울,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276. 산책하는 침략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 이홍이 옮김 / 최재훈 그래픽 / 알마 / 2019
성큼성큼 보폭이 큰 문장. 익숙해지기 전에 재빠르게 교체되는 챕터. 문체는 뭐랄까, 다소 틱틱대는 말투지만 그래도 재미가 있어서 밉지 않은 친구 같다. 외계인 선발대는 설렁설렁 산책하며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개념’이라는 것을 훔쳐내는데, 개념을 잃은 지구인들이 무슨 일을 벌이리라 생각하며 읽어나갔지만 뜻밖에도 이야기의 마지막엔 사랑이 있었고, 그럼 syo는 진다. 사랑 앞에 필패하는 그야말로 사랑성애자(애성애?) syo의 개인 취향에 척 달라붙은 결말! 아, 울뻔했지만 이야기를 할 수가 없네…….
참 많은 것이 다 슬펐다. 신지를 잃는다는 것. 신지를 사랑했던 것. 신지와 함께했던 삶이 건조한 정보로 바뀐다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떤 말도 이어 붙이지 못한다는 것.
"정말 괜찮은 거지?"
"빨리 해."
제발 부탁이니까 빨리 해. 지금 머릿속이 그걸로 가득 찼으니까.
"고마워. 그거 가져갈게."
_ 마에카와 도모히로, 『산책하는 침략자』
277.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황희경 지음 / 메멘토 / 2021
‘표변豹變’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마음이나 행동 따위를 갑작스럽게 바꾼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첫 번째 정의가 “표범의 무늬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뜻으로,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이 뚜렷이 달라짐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이 말은 『주역周易』「혁괘革卦」의 ‘상육효上六爻’에 나온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자는 표변한다’는 좋은 말이다. ‘잘 사는 삶’이란 표범의 무늬가 아름다워지듯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나쁜 상태에서 좋은 방향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멋지게 변신하는 삶이며, ‘잘못 사는 삶’이란 그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삶일 것이다.
_ 황희경,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사기 열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청년이 있었다. s모 청년의 실명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하여간 그래서 그 청년은 도서관에서 김원중 선생님 번역의 사기 열전을 빌렸고, 다 못 읽고 반납하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까지 고이 반납했다. 마음먹기-대출-독서-포기-반납-마음반납으로 이어지는 이 패망의 연쇄를 네댓 번 쯤 반복하면서 기간상으로는 5회독 같은 1회독, 내실 면에서는 1회독 같은 5회독이 이러구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청년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아는데, 아주 잘 아는데,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청년은 정말이지 솔루션이 안 선다……. 그런 와중에 또 자기를 독서 멘토로 三고 있는 멍청한 친구 녀석(역시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다)에게 야, 책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면 그 책은 반드시 이거지- 라며 사기로 사기를 쳤고, 멍청한 친구 녀석은 그 즉시 두 권 5만원 하는 세트를 구매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가? 아쉽게도 그 친구 역시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여전히 그냥 그 친구로 남아 있으며, 그 친구가 사놓고 몇 쪽 보다가 집어치운 사기 열전 두 권은 우리 집, 아니다, s모 중년의 집 책장 위에 가로로 누워 있다.
왜 그들은 망하는가? 사기가 실은 좋은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다. 사기는 당연히 좋은 책이다. 읽는 법이 틀렸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목표 없이,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따위의 애기 장래희망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하면 저 훌륭한 책에서도 뽑아낼 것이 없다. 그렇지만 만약 조금 더 선명한 그림을 가지고 들어간다면?
사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러므로 사기 속 다양한 인간군상들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여러 삶의 관점 가운데 이 책이 선택한 것은 “표변하는 삶”이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 좋은 지혜는, 사기를 읽고 나서 아슈발 이거 사기잖아- 가 아니라 와진짜 이게 사기지- 라고 외칠 수 있으려면 추구하는 인간상을 들여다보는 렌즈의 초점거리를 미리 조절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겠다.
278. 왜 읽을 수 없는가
지비원 지음 / 메멘토 / 2021
좀 길지만 한번 옮겨 적어 보겠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와 바우만을 통해 이 제도에 충실한 인간이 어떻게 '악'이 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우리'다. '우리'가 과연 누굴까?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혹시 앞에 한나 아렌트와 바우만에 대한 언급(이야기)이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렇지 않았다. 아렌트와 바우만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짐작건대 뒤에 '악의 평범성'과 '아이히만'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는 아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아렌트의 책을 말하는 듯싶다. 바우만은 지그문트 바우만을 말하는데, '제도에 충실한 인간이 어떻게 악이 되는가'를 언급하는 책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같다. 둘 다 쉽게 읽기 힘든 책이다. 하지만 '아렌트와 바우만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우리'라는 표현은 명백히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 책들을 읽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필자의 동료 연구자일 수도 있고, 한나 아렌트/바우만 저작 세미나나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분명 '우리'가 맞을 것이다.
아렌트와 바우만을 모른 채 이 책을 집어 든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라는 지칭은 절대 고의는 아니겠지만 누군가를 배제하고 난 뒤의 '우리'다. 아렌트와 바우만의 책을 알고 있어도 그 책들이 어떻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예문을 읽었을 때 느낀 것은 소외감이다. 나는 분명 저 '우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소외감을 안고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아렌트와 바우만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시 이 '글'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독서의 선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_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사실 이 대목을 옮긴 시점에서, syo가 덧붙일 말은 없는 것 같다.
--- 읽는 ---
문해력 공부 / 김종원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사조영웅전 4 / 김용
책chaeg 2021. 6 / (주)책(월간지)편집부
그림 속 경제학 / 문소영
이렇게 책으로 살고 있습니다 / 이나이즈미 렌
언제까지나 내성적으로 살겠다 / 에비스 요시카즈
주민의 헌법 / 박주민
공대생도 잘 모르는 재미있는 공학 이야기 / 한화택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 민이언
이름들 / 박훌륭
뭘 해도 운이 따르는 사람들의 10가지 습관 / 우에니시 아키라
블루의 과학 / 카이 쿠퍼슈미트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 이희재
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