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1

 

다시 대구다.

 

이번 주에는 엄마 집을 싹 다 비워보려 했지만 실패다. 아마 다음 주에 한번 더 내려와야 할 듯. 박스에 넣어 베란다에 쌓아둔 관계로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책들이 발굴되었다. , 내가, 내가 이걸 샀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하는 책들이 많았다. 뭐가 됐건 당시에는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놨겠지만 지금에서는 애를 써도 이게 왜 나한테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어디 책만 그렇겠는가.

 

그리고 또 어디 내가 오늘 납득한 책들이 내일도 그렇겠는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길게 하지는 않기로.

 


 

2

 

동생이 앨범을 정리하면서 이거 봐라 이거 봐라 내밀어 댄 사진들은 이미 몇 번씩 본 사진인데도 하나같이 다 새로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어린 엄마 젊은 엄마는 진짜 말도 안 되게 예뻐서 같이 사진 찍는 다른 사람들한테 이만저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힙스터였던 할아버지의 다양한 재능(금기서화에다 낙농에 박제에 심지어 버스회사 경영도 하신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을 풍성하게 물려받지는 못해 아쉬움을 남겼던 엄마지만(똑같이 했다던 찌개 맛이 매번 달랐다……), 그 와중에 또 만은 몰빵 받았는지,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찍은 사진의 패션이 자뭇 21세기적이다. 네 분의 이모 삼촌 가운데 이런 사람은 또 없다.

 

이제는 아버지 사진 가운데 절반은 지금의 syo보다 어린 아버지가 찍혀 있다. 그런데도 관상만큼은 그렇지가 못해서, 이렇게 닮은 얼굴인데도 지금 이 기세라면 마흔 다섯 나보다 서른다섯 우리 아버지가 형으로 보일 듯하다. 나와는 이래저래 애증으로 버무려진 삶이었지만, 이 양반도 고생 고생은 진탕 하고 살았구나 싶어 짠하기도 했다. 내가 제사를 폐했으니 장례식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던 큰 딸이니 작은 아들이니 하는 친구들도 딱히 제삿밥을 차려주진 않을 것 같고, 우리 아버지도 참 배고픈 삶을, 배고픈 죽음을 살고, 아니지 죽음을 죽고(?) 있겠다. 저기서도 엄마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하진 않겠지. , 않겠구나. 아버지는 어디 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확실히 좋은 데 가 있을 것. 우리 엄마가 못 가면 거기 갈 사람 정말 몇 없다.

 

 

 

3

 

그래도 그들 역시 서로에게 다정했던 시기는 있었음을 증명하는 몇몇 사진들이 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사진들 속에서 그들은 웃고, 웃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한곳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말년의 엄마라면 이렇게 내가 아버지와 자신을 묶기라도 하는 듯한 글을 쓰는 것조차 학을 떼며 싫어했겠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과는 별개로 몇몇 사진 속에서 나는 사랑을 본다. 가족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여자를 본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마음을 본다. 그리고 그 이후 천천히 바스라졌을 감정들과 돌이킬 수 없이 박살났던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들이 남기고 그러므로 끝내 지켜야 했던 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 사진을 찍었을 때의 그 마음, 그 순간을 영원에 박제하고 싶었던 그 치기 어린 동시에 예뻤던 그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가족이라는 관계와 필요충분으로 엮인 게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가족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족이 아닌 데로부터 얻으려 노력하면 끝내는 얻을 수 있으며, 필요한 것은 실은 마음의 깊이와 지속력이라는 것을, 나는 우리 가족의 탄생과 쇠락, 그리고 종말을 통해 배웠다.

 

묶지 않고 묶는 것, 그건 더 순수한 만큼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 읽은 ---



273.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장우진 지/ 알에치이코리아(RHK) / 2021

  

세기말 파리, 우리가 우연히 시선을 던진 그곳에는 항상 무하가 있다. 침실 머리맡의 장식 패널, 어제 읽다 잠들어 버린 책 속의 삽화, 그리고 그곳에 꽂아둔 엽서에서 그를 만난다.

  그의 그림이 광고하는 회사의 코르셋을 드레스 아래에 입고 그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와 주전자, 그리고 르페브르 위틸의 과자를 곁들여 한가한 티타임을 가진다. 아이들은 그가 광고하는 네슬레의 분유로 배를 채우고 어른들은 모에 에 샹동의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다. 페르펙타 자전거를 타고 나선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그가 표지를 그린 라 플륌을 한 권 사고, 식당에 들러 그가 디자인한 메뉴를 보며 식사를 주문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새로운 연극 포스터를 보고 서둘러 잘 차려입고서는 르네상스 극장으로 향한다. 연극이 끝나고 감동이 가시지 않자 푸케 보석 상점에 들러 사라 베르나르가 무대 위에서 걸친 액세서리와 비슷한 것을 하나 고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포스터를 그린 모에 에 샹동의 와인으로 가슴을 진정시킨 뒤 무하 풍의 가구로 채워진 방으로 돌아와 <황도12>이 그려진 달력에서 내일의 일정을 확인한 후 침대에 들어 주기도문과 함께 명상한 뒤에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_ 장우진,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일단 뛰어들 것낮은 자리에서 작은 것들을 만들며 즐거움 속에서 기다릴 것버려지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겁내지 말 것버리고 버려도 도무지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나의 것.

 

확실히 무하는 매력적이었다처음 무하를 접한 게 십수 년 전이지만아직까지도 그가 그린 그림을 만나면 그냥 스치게 되는 법이 없다이거무하네그런 것 치고는 인간 알폰스 무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반 고흐나 툴루즈-로트렉의 삶에 대해서는 열심히 찾아 읽었던 것과 대조적인데 왜 무하를 무시했는지는 모르겠다무하의 작품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관심을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확실히 아쉬운 대목이 없을 수는 없다없는 것은 선택의 여지다.

 

신경을 좀 더 썼으면 좋았겠다 싶은 문장들도 꽤 있다두 개만 짚자면,

 

그의 화실은 불 꺼진 난로와 더러워진 벽지 그리고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녔다.’(57)

: 난로의 불은 꺼졌고 벽지는 더러웠으며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니기까지 한 것인지아니면 난로와 벽지와 테이블 밑으로 쥐들이 기어다닌 건지 애매하다앞이라면 주술호응 실패고뒤라면 지울 것들을 다 지워내지 못한 문장이다.

 

그의 작품은 굳게 닫힌 미술관의 유리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는 거기에눈이 머무르는 어느 곳에나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93)

: 장우진 선생님이 콤마를 아끼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어느 곳에나 있는’ 뒤에 콤마 하나를 찍지 않고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 대중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는 모호한 문장을 만드셨을까.

 




274. 인생수

법륜 지음 / 유근택 그림 / () / 2013

 

어디서든 이 책이 발견되던 시절이 있었다. 북카페에도 미용실에도 이 책은 있었다. 배우며 사느라 인생이 벅찬데 인생을 사는 법마저 배워야 하는가 싶은 마음에, 제목만 봐도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도 가끔, 아니 자주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남들 다 봤다고 하니까 나도- 하는 마음으로 읽었을 뿐.

 

syo는 훌륭하지만 당연한 말을 으로 펴내는 것을 왜 싫어하는가. 그건 뭘 높이 치고 또 뭘 업신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인가. 이것은 쓸데 없는 다독이 선사하는 가장 해로운 독 가운데 하나다. 이 문장을 이미 다른 (많은) 책에서 읽었고, 이 이야기를 이미 다른 (복수의) 책에서 들었다는 것. 일 년에 열 권 읽는 이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가 지난 몇 달 동안 몇 번쯤 들은 이야기가 되고, 한 달에 두 권 읽는 이들의 눈에 기발한 문장이 클리셰의 반경 안쪽에서 포착되는 것.

 

지겨움, 깊은 지혜를 마주할 때마다 채 음미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내 혀에 얇고 끈적한 막을 쳐놓는 독서의 적.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_ 법륜, 인생수업

 

 

 


275.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김여울 지음 / 안전가옥 / 2020

 

전투력 측정불가의 히어로 랭킹 1위 캡틴 허니 번(남지영). 히어로 협회 회장이자 전대 캡틴인 캡틴 불칸의 딸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히어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그녀는 히어로로서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지만, 체중에 비례하여 능력이 막강해진다는 속성 때문에 언론은 늘 그녀가 해결한 사건보다 그녀의 체중 변화를 보도한다. 히어로 동료 새끼들은 강한만큼 강하게 빻았고 그녀는 늘 어리고 예쁜 히어로 김소희와 비교를 당한다. 한편 김소희는 히어로가 되고 싶으나 여성 히어로에게는 사건이 배당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캡틴 허니 번을 제외한 모든 여성히어로들처럼 연예계에서만 활동하는 중-

 

이런 초기설정에서 벌어지는 한판 활극을 담은 이야기인데,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되고 심지어 환영하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평면적인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접수부 부장이라는 작자는 '아재 꼰대'의 이데아에서 0.1만큼의 특수함도 추가되지 않는 식인데, 모두가 이런 식이면 좀 아이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느낌이 든다.

 

우리 지영이 몸무게 하나로 검색어 1위까지 올랐네? 좋겠다. 나는 밀입국자 체포 때나 겨우 올라갔는데.”

  “사진 꼴 봐라. 여자애가 좀 웃지, 이게 뭐냐?”

  “시끄러워!”

  협회 건물 깊숙한 곳에 있는 회의실.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나를 놀려 대는 놈들을 보니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정상적인 회의는 무리겠구나.

  믿기지 않겠지만 깐족거리며 웃는 저 세 명은 공식 랭킹 2위에서 4위까지의 최상위권 히어로들이다. 놈들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이들은 내 말을 무참히 씹으며 인터넷 뉴스들을 하나하나 읽어 주는 정성을 보여 줬다. 정말 친절하기도 하지. 감동받은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임무 수행 보고를 하러 왔으면 일이나 해.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들지 말고!”

  “지영아, 하늘 같은 오라버니들에게 야라니, 예의는 밥 말아 먹었냐?”

  “, . 요즘은 예의도 밥 말아 먹을 수 있어요? 어쩐지 남지영 덩치가 점점 커지더라~”

  “큰일 났네. 싸가지 없고, 예쁘지도 않고, 대학도 못 가고, 뚱뚱하기까지! 너처럼 최악만 모으기도 힘들겠는데? 그것도 능력이다.”

  …하아, 이래서 난 이 시간이 정말 싫다.

_ 김여울,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276. 산책하는 침략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 이홍이 옮김 / 최재훈 그래픽 / 알마 / 2019

 

성큼성큼 보폭이 큰 문장. 익숙해지기 전에 재빠르게 교체되는 챕터. 문체는 뭐랄까, 다소 틱틱대는 말투지만 그래도 재미가 있어서 밉지 않은 친구 같다. 외계인 선발대는 설렁설렁 산책하며 동네 주민을 대상으로 개념이라는 것을 훔쳐내는데, 개념을 잃은 지구인들이 무슨 일을 벌이리라 생각하며 읽어나갔지만 뜻밖에도 이야기의 마지막엔 사랑이 있었고, 그럼 syo는 진다. 사랑 앞에 필패하는 그야말로 사랑성애자(애성애?) syo의 개인 취향에 척 달라붙은 결말! , 울뻔했지만 이야기를 할 수가 없네…….

 

참 많은 것이 다 슬펐다. 신지를 잃는다는 것. 신지를 사랑했던 것. 신지와 함께했던 삶이 건조한 정보로 바뀐다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떤 말도 이어 붙이지 못한다는 것.

  "정말 괜찮은 거지?"

  "빨리 해."

  제발 부탁이니까 빨리 해. 지금 머릿속이 그걸로 가득 찼으니까.

  

  "고마워. 그거 가져갈게."

_ 마에카와 도모히로, 산책하는 침략자

 

 


277.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황희경 지음 / 메멘토 / 2021

 

표변豹變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마음이나 행동 따위를 갑작스럽게 바꾼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첫 번째 정의가 표범의 무늬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뜻으로,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이 뚜렷이 달라짐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이 말은 주역周易』「혁괘革卦상육효上六爻에 나온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자는 표변한다는 좋은 말이다. ‘잘 사는 삶이란 표범의 무늬가 아름다워지듯이 어려움에 처하거나 나쁜 상태에서 좋은 방향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멋지게 변신하는 삶이며, ‘잘못 사는 삶이란 그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삶일 것이다.

_ 황희경,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사기 열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청년이 있었다. s모 청년의 실명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하여간 그래서 그 청년은 도서관에서 김원중 선생님 번역의 사기 열전을 빌렸고, 다 못 읽고 반납하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까지 고이 반납했다. 마음먹기-대출-독서-포기-반납-마음반납으로 이어지는 이 패망의 연쇄를 네댓 번 쯤 반복하면서 기간상으로는 5회독 같은 1회독, 내실 면에서는 1회독 같은 5회독이 이러구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청년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아는데, 아주 잘 아는데,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청년은 정말이지 솔루션이 안 선다……. 그런 와중에 또 자기를 독서 멘토로 고 있는 멍청한 친구 녀석(역시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다)에게 야, 책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면 그 책은 반드시 이거지- 라며 사기로 사기를 쳤고, 멍청한 친구 녀석은 그 즉시 두 권 5만원 하는 세트를 구매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가? 아쉽게도 그 친구 역시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여전히 그냥 그 친구로 남아 있으며, 그 친구가 사놓고 몇 쪽 보다가 집어치운 사기 열전 두 권은 우리 집, 아니다, s모 중년의 집 책장 위에 가로로 누워 있다.

 

왜 그들은 망하는가? 사기가 실은 좋은 책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다. 사기는 당연히 좋은 책이다. 읽는 법이 틀렸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목표 없이,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따위의 애기 장래희망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하면 저 훌륭한 책에서도 뽑아낼 것이 없다. 그렇지만 만약 조금 더 선명한 그림을 가지고 들어간다면?

 

사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러므로 사기 속 다양한 인간군상들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여러 삶의 관점 가운데 이 책이 선택한 것은 표변하는 삶이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 좋은 지혜는, 사기를 읽고 나서 아슈발 이거 사기잖아- 가 아니라 와진짜 이게 사기지- 라고 외칠 수 있으려면 추구하는 인간상을 들여다보는 렌즈의 초점거리를 미리 조절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겠다.

 

 

 


278. 왜 읽을 수 없는가

지비원 지음 / 메멘토 / 2021

 

좀 길지만 한번 옮겨 적어 보겠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와 바우만을 통해 이 제도에 충실한 인간이 어떻게 ''이 되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우리'. '우리'가 과연 누굴까?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혹시 앞에 한나 아렌트와 바우만에 대한 언급(이야기)이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렇지 않았다. 아렌트와 바우만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짐작건대 뒤에 '악의 평범성''아이히만'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는 아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아렌트의 책을 말하는 듯싶다. 바우만은 지그문트 바우만을 말하는데, '제도에 충실한 인간이 어떻게 악이 되는가'를 언급하는 책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같다. 둘 다 쉽게 읽기 힘든 책이다. 하지만 '아렌트와 바우만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우리'라는 표현은 명백히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저 책들을 읽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누구일까? 필자의 동료 연구자일 수도 있고, 한나 아렌트/바우만 저작 세미나나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분명 '우리'가 맞을 것이다.

  아렌트와 바우만을 모른 채 이 책을 집어 든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라는 지칭은 절대 고의는 아니겠지만 누군가를 배제하고 난 뒤의 '우리'. 아렌트와 바우만의 책을 알고 있어도 그 책들이 어떻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예문을 읽었을 때 느낀 것은 소외감이다. 나는 분명 저 '우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소외감을 안고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아렌트와 바우만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시 이 ''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독서의 선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_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사실 이 대목을 옮긴 시점에서, syo가 덧붙일 말은 없는 것 같다.

 

 

 

--- 읽는 ---

문해력 공부 / 김종원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사조영웅전 4 / 김용

chaeg 2021. 6 / ()(월간지)편집부

그림 속 경제학 / 문소영

이렇게 책으로 살고 있습니다 / 이나이즈미 렌

언제까지나 내성적으로 살겠다 / 에비스 요시카즈

주민의 헌법 / 박주민

공대생도 잘 모르는 재미있는 공학 이야기 / 한화택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 민이언

이름들 / 박훌륭

뭘 해도 운이 따르는 사람들의 10가지 습관 / 우에니시 아키라

블루의 과학 / 카이 쿠퍼슈미트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 이희재

날마다 고독한 날 / 정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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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11 13: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표변이 그런 뚯이었어요?? 전혀 몰랐네요. 좋은 것 알고 갑니다.
근데 우리 중년이예요..? 아직 불혹 아니니 청년이라 치면 안 되나요..? 흑 ㅠ
이번 syo님의 1-3글은 참 너무 좋습니다. 마음 아프기도 하고.. 미소가 나오기도 하고…

syo 2021-08-11 13:58   좋아요 4 | URL
공무원질을 해보니 행정적으로 ‘청년‘이라는 이름을 단 혜택들이 대부분 35세까지더라구요..... 우리는 이미.... 🤧

2021-08-11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1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1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1-08-11 13: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Syo님‘읽는‘중 책들 재밌는 표지 몇 개 눈에 들어오네요.쓱싹ㅋ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도 젊은시절 사진보면, 리즈시절 알파치노를 참 많이 닮으셨지요...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8-11 13:53   좋아요 4 | URL
우리 아빠는 조형기 닮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심지어 킬러조 그 분 마냥 운전도 엉망진창…(아직 안 돌아가시고 어디 살아 있긴 하지만…)

청아 2021-08-11 13:57   좋아요 3 | URL
아 마초 스타일 외모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8-11 13:59   좋아요 6 | URL
우리 아빠는 나 닮았어요 🤣

그레이스 2021-08-11 1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의도적인것 같지는 않고 거기에 ‘있는‘, 어느 곳에나 ‘있는‘ 으로 읽어야 할듯요
있는을 꾸미고 있는 부사절
;알폰스 무하 마지막 줄

syo 2021-08-11 14:15   좋아요 3 | URL
ㅎㅎ 네
분위기상 그렇게 읽었지만, 컨텍스트에 기대지 않고 그냥 문장 자체만으로 여지없게 만들 수 있으셨을텐데 그러지 않으신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8-11 14:17   좋아요 3 | URL
아 네!
제가 syo님 정서를 못 읽었네요

죄송;; ~!^

syo 2021-08-11 14:19   좋아요 4 | URL
별 말씀을요 ㅎㅎㅎ
그런 오해가 발생했다면 백이면 백 syo의 글이 미숙해서 그런 겁니다. 장우진 선생님 뭐라할 입장이 못 되네요 ㅋㅋㅋㅋ 아유부끄러

그레이스 2021-08-11 14:34   좋아요 1 | URL
더 죄송!

얄라알라 2021-08-11 14: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과 함께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반납하였다는 s 모 청년은 이미 글로써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니 ˝훌륭한 사람˝ 이상 아니신지요?

언젠가 어플로 살짝 실물을 가린 s모 청년의 사진을 보며, 이건 B*에스감인가? 싶었는데, 역시 그 외모의 계보가 분명했군요. 같이 사진찍는 이들에게 민폐가 될 정도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으셨나봅니다.

소개해주신 책들, 모두 생소합니다. 이렇게 Syo님의 페이퍼 열독자이면서 책밭의 교집합 만들기에는 이렇게나 게으르다니. 매번 ˝0네!˝하고 뒤돌아서서, 더 안 찾봤나봐요^^;;

syo 2021-08-11 14:22   좋아요 4 | URL
북사랑님 🥺 제발 제발 난리나기 전에 B*S의 *이 U였다고 선언해주세요... 살려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s모 중년은 여러 서재친구님들의 오구오구에 힘입어 그나마 사람구실 하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

syo 2021-08-11 14:30   좋아요 5 | URL
아니 북사랑님.....
이건 아니지요 ㅋㅋㅋㅋㅋ B*S라고 쓰셨다가 B**으로 수정해버리시면, 제가 B만 알려줬는데 지혼자 그 이름도 찬란하신 분들 언급한 거라고 설레발친 놈처럼 되버리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 이건 진짜 아니예요 북사랑님 ㅋㅋㅋ

2021-08-11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21-08-11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 저에게 별 2개짜리 책을 읽고 허망한 마음으로 책장을 둘러보다 저 책을 클릭한 제 손가락을 후회하고 있었거든요.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길게 하지 않으신 이야기에 공감합니다~ㅎㅎ

3.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수학 문제집 뒤편에 부록으로 딸린 정답과 풀이과정이 세세하게 적혀있는 해설 페이지를 보는 듯했습니다.^^

273. 무하의 그림은 순정만화 캐릭터를 연상시킵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일단 뛰어들 것~버리고 버려도 도무지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나의 것‘ . 힘을 주는 문장이네요.^^

274. 두번째 단락의 첫 문장에서 순간적으로 맨 앞부분을 주술로 읽었습니다.ㅋㅋㅋ ‘syo는 훌륭하지만~‘^^;
한 얘기 또 하고 다시 하고 도돌이표 안에서 복붙이 일어나는 건 그 지경으로 지겹도록 들어야 그나마 실천으로 이어질까해서이지 않을까요. 독서량이 비루한 저도 같은 얘기 반복되는 건 딱 질색이라서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인용하신 문장들의 향연이라면 책꽂이에 그냥 꽂아놓아야겠군요

275, 276 인용하신 문장 첫 줄 오타(ㄱ~ㅆ, 깨)가 또 신경쓰이는 나비종^^;;

277. 저는 좀 더 내공을 쌓고 시도해봐야겠군요..

278-1. 옮기신 글을 읽으니 속이 후련해집니다. 부실한 저의 이해력을 한탄하며 종종 느끼던 소외감을 이해받은 것 같아서요.
278-2. 첫 번째 단락 마지막 줄, ‘세마나‘, 두 번째 단락 3째줄, ‘소외가‘...

syo 2021-08-14 09:23   좋아요 2 | URL
꼼꼼하게 읽고 오탈자를 다 잡아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아주 엉망진창이네요..... 😞

나비종님이 투여하신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이었어야 했는데, 망했네요. 죄송합니다....

stella.K 2021-08-11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로웠겠어요. 마치 어딘가 꿍쳐 둔 돈 뭉치를 발견한 느낌은 아니었을까요?ㅋㅋ

syo 2021-08-14 09:23   좋아요 1 | URL
아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이네? 새롭네? 이러고 덮고 말았어요.....

stella.K 2021-08-14 14: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아뇨. 난 책을 얘기했는 거인데...
내가 이런 책도 사놨었구나. 읽어야지 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중엔 아니 왜 내가 이런 걸...? 하는 것도 있겠지만.ㅋ

붕붕툐툐 2021-08-12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옛날 사진이니 공개도 좀 하고 그럽시다. 저 진짜 힙스러운 옛사진 넘나 좋아하거든요~ 제가 본 쇼님이 맞다면 어머님 미인, 아버님 미남은 따놓은 당상인 거 같습니다. 무서운 유전의 힘!!ㅎㅎ

syo 2021-08-14 09:24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어제 앨범 다시 한번 보면서, 이런 사진은 한번 올려 볼까? 그러고 있었어요 ㅎㅎㅎ
엄마는 미인이지만, 아버지와 저는 그냥 두 아저씨에 불과합니다....

2021-08-12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4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심력

 

 

 

1

 

내가 나의 언어를 가르친다. 배우는 마음과 가르치는 마음이 같은 마음이어서 내 언어는 내 마음대로, 내 마음이 원래 생긴 결을 따라 점점 진해지고 찐득해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욱 어제 같은 나, 나의 언어는 어제 방향으로 달리는 내일이다. 멈추어 선 시간 위의 머리 둘 달린 짐승이다.

 

나는 내게 언어를 가르치는 나를 해고할 수 있을까. 내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면, 천 권의 책이 결국 한 권이 되고 만 개의 문장이 결국 한 줄이 되는데, 이 무서운 파국의 바깥쪽을 꿈꾸며, 물이 반쯤 든 양동이를 빙글빙글 돌리듯이, 언제고 원 궤도 밖으로, 접선 방향으로, 튀어나갈 듯 팽팽하게, 구심과 원심이 동적으로 평형하는 그 터질듯한 문자의 세포벽을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2


 

특정 텍스트의 물질적 구성은 텍스트 자체의 내적 구성보다는 해당 텍스트가 극복한 재현 형식과 더 많이 연관될 것이다. 가정소설은 처음엔 귀족적 글쓰기 전통에 도전했고 이후엔 노동자계급 문화를 거부했다. 나는 이런 사유를 더 밀고 나가 특정 텍스트의 내적 구성은 텍스트가 기호를 통제할 권한을 얻기 위해 상반되는 재현 형식들과 벌이는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겠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의 외부와 대립되는 텍스트의 내부는 없으며,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구분도 없다.

_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이 대목이 바로 50페이지에 달하는 서론의 고갱이이며, 남은 450페이지를 통해 성공적으로 논증된다면 이 책을 단순한 영국소설사 책이 아니라 예술철학 영역의 고전에 자리시킬 키 포인트가 되겠다.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이 문단을 위한 개념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재현 이전에 일단 재현 대상이 먼저 존재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명제 자체가 실은 특정한 재현 형식이 구사하는 테크닉이라는 관점, 그게 우리 눈에 당연해 보이는 것은 사실 그 테크닉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효과라는 지적도 인상적이고, 그런 기술을 동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내용 자체, 그러니까 실은 재현 대상까지 창조해 내는 주체가 바로 재현 형식이며, 창조되는 재현 대상은 그 재현 형식이 다른 재현 형식과 싸워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구성된다는 것.

 

또한 재미있는 것이 재현 형식이라는 용어다. 이는 장르트렌드’, ‘양식’, ‘스타일등 우리가 자주 쓰는 말들이 지시하는 영역과 일부 교집합을 형성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가리키지 못하는 어떤 애매한 지점을 조명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재현 형식이라는 용어를 적확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독서가 될 것 같다.




3


은 지난달 초쯤 첫 소개팅을 나간 이후 syo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고는 기회 되는 주말마다 꼬박꼬박 그분을 만나고 있는데어제는 네 번째 만나는 날이어서 이제 정식으로 만나보자는 말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었던 것그래서 나는 멘트를 만들어줬고그것은 우리 사귀자!”라고 말하기엔 늙었고 내 아를 낳아 도라고 말하기엔 아직 섣부른 우리의 현 상태에 맞는 구성으로써요약하자면 1. 나는 연애를 하면 이런 이런 걸 하는 그림을 그려왔는데 2. 그걸 당신하고 하면 좋겠어요하는 구조였다그런데 어제 집에 돌아온 은 굉장히 애매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정황을 들어보니 이게 마인드컨트롤과 시뮬레이션 없이 현장에 나갔다가 준비된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던 것. 1을 애매하게 내뱉은 상태에서 2를 시전하는 바람에 구조가 와르르 박살 난 모양이다그래서 들은 대답이 지금은 더우니까 바다는 다음에 생각해 봐요였던 것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한 걸 보면 까인 건 아닌 것 같은데만날 때마다 다음에 만나면 뭐 할까 하는 대화를 나누었던 사정을 떠올려 보면 아무래도 저건 고백이 고백으로 인식되지 않은 상황 같다그렇지만 마음은 어느 정도 전달이 된 것 같고손잡고 집 근처까지 바래다 주겠다던 당초 계획은 당연히 실행이 안 됐고그래서 목하 그들은 지금 애매하다.

 

세상에는 이렇듯 애매한 것이 참 많다.


그렇지만 저들의 애매한 관계보다 더 슬픈 것이 바로,

 

 

 

--- 읽은 ---



268. 애매한 재능

수미 지/ 어떤책 / 2021

 

애매한 재능이다. 저들이야 다음주 쯤 되면 뭐가 됐든 되겠지만, 애매한 재능은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내가 내 재능이 애매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잘 되면 어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싶어서 죄책감이 들고, 못 되면 이게 다 재능이 없어서 그렇지 안 될 거야 난 아마, 싶어서 패배감이 드는 것. 때로 애매한 재능은 없는 재능보다 더 슬프기도 하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재능이 없는 것을 알기 어렵다. 재능의 유무를 알아채는 데도 적정량의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재능이 없어…….“ 라고 말하며 슬픔에 빠지는 사람들은 실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재능, 그러니까 충분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포기하거나 밀고 나가거나 결정을 해야 하는데, 경험상, 포기하면 편하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넘보지 않으면 시간은 걸려도 조금씩 마음이 낙낙해진다.

 

신춘문예에 계속 도전할 때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뭘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 개성을 찾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죠. 어쨌든 글의 형식으로 세상에 접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단련된 글쓰기 재능으로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작가로 살면서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고는 대학 동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언니는 나를 범재라고 표현했다.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찾아서 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그 말을 듣고는 맞아, 난 천재는 아니지씁쓸했다. 그 말이 내게 별 재능이 없다는 말처럼 느껴져 서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범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왔다.

범재.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보통의 재주를 가진 사람.

  []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은 얼마나 분명한 경지인가.

_ 수미, 애매한 재능

 

 

 


269.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

 

- 일독(분명히 이걸 읽긴 읽었는데)

- 재독(210806)

 

처음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때 했던 생각을 이번에도 역시 했다. ‘철학’ ‘’ ‘읽기는 싹 다 괴롭지. 아무렴, 정말이지. 괴로우면 안 해야 하는데 왜 하는 것이지, 인간은 왜 그런 것이지. 몰라, 하지만 그런 것이지, 인간이란 그런 것이지, 그런 것이 인간이지.

 

가뜩 철학도 어렵고 시도 어려운데, 철학으로 시를 읽는다거나 시로 철학을 읽는다거나 하는 변태같은 착상을 왜 하는 걸까? 그것이 syo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필요나 효용이 있긴 있기 때문일텐데 말이지……. 아직 그건 알듯도 말듯도 하다. 갈 길이 멀다.

 

10년 된 책이고 모르긴 몰라도 첫 읽기도 대충 그 정도 된 것 같은데,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내 인생이 뭐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다소 숙연해지긴 했다. 그래도 확실히 읽기는 쉬웠다. , 내가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다지 어렵다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내가 그렇지…….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스처를 배워서 그것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 저 친구는 저렇게 자신의 삶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는구나. 나도 그래야지. 이제 더 많이 내 감정과 생각을 돌아봐야겠다.” 이제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선생님이나 정신적 멘토로 숭배하지 마세요.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삶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언젠가 여러분도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_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270. 사조영웅전 3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3권의 포인트는 주인공 곽정이 이제사 주인공다운 활약을 펼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이 세계관에서 고강하기로 손꼽히는 무공인 항룡십팔장을 전수받는 대목에 있다. 동사서독이라는 말은 영화 제목으로도 쓰여서 유명한데 풀 버전은 동사서독남제북개중신통이다. 그들은 이른바 천하오절이라는 이름의 다섯 고수인데, 이 시점에 명실상부 최강자였던 중신통 왕중양은 이미 사망했고, 남은 사절이 다음 최강자를 가릴 날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항룡십팔장은 네 고수 중 북개(北丐, 북쪽의 거지라는 뜻. 대륙의 왕초, 삼백만 중국 거지의 총대장이시다) 홍칠공의 비전 무공으로서 그 이름만 봐도 용이니 십팔이니 겁나 쎌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겁나 쎄다. 곽정은 목하 동사 황약사의 고명딸인 황용과 썸을 타면서 유람 중이었는데 황용 이 소녀는 세상 모르는 게 없고 못 부리는 기예가 없으며 뭐든 한번 들으면 척척 외워버리는 이 세계관 최고클라스 똑똑이인 것. 갑자기 튀어나와서 닭고기를 좀 내놓아보라고 따져드는 저 거지 영감이 딱 봐도 자기 아버지와 동서남북하며 세상을 나눠 먹는 홍칠공이거든. 그래서 황용은 꾀를 부려 그로 하여금 곽정에게 항룡십팔장을 전수하게 만든다. 홍칠공이 무공 좋고 인품 좋고 다 좋은데 딱 하나, 식탐이 지나치게 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황용이 세헤라자드 전법을 동원, 끝나지 않는 요리의 향연으로 홍칠공을 붙잡아 놓고 곽정 쿵후 과외를 시킨 것이다. 홍칠공은 원래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마음이 동하면 3일을 들여서 자기 무공 딱 한 초식만 전수하고 떠나는 습벽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백주부나 빅마마나 뭔 킴 뭔 킴 못지 않은 황용의 요리실력과 곽정의 우직하(다고 쓰지만 멍청하다고 읽느)ㄴ 성격의 콤비네이션에 말려들어 항룡십팔장의 무려 열다섯 초식을 전수한 것이다! , 항룡십오장! 그게 얼마나 곽정과 어울리는 무공인가 하면,

 

초식 하나를 배울 뿐인데도 한 시진 이상을 소비했다. 곽정이 미련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내공의 기초는 이미 잡혀 있는 터라 이처럼 간결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심오한 무공을 배우기에 적당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하더니 두어 시진 후에는 기본이 잡혀갔다.

  홍칠공이 덧붙였다.

  “그 아이의 장법은 허와 실 가운데 허를 훨씬 많이 쓰는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겨루다 보면 틀림업시 계략에 빠져 벗어날 수가 없지. 그 애가 쓰는 수많은 허를 받아내고 이번에는 실이다 생각될 때도 허가 나올 거야. 반대로 허인 줄 알고 방심할 때 실을 쓰는 거지.”

  곽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장법을 깨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은 바로 아예 허실을 따지지 안흔 것이다. 상대방이 장법을 쓰면 허든 실이든 그냥 항룡유회를 한 번 쓰는 거지. 이 초식을 보고 나면 장법을 거두고 초식을 취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면 깨뜨리는 거야.”

  “그다음에는요?”

  홍칠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그 다음이야, 이 녀석아? 그 아이가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지금 가르쳐준 초식을 막지는 못한단 말이다!”

곽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지 못하면 다칠 거 아니에요?”

  홍칠공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장력을 뿜어낼 줄만 알고 거두지를 못한다면 힘의 경중과 강온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어찌 천하에 둘도 없는 장법, 항룡십팔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곽정은 ,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을 굳혔다.

  ‘내가 쓰고 거두는 것을 모두 배우지 못한다면 황용에게는 절대 시험해보지 말아야지.’

_ 김용, 사조영웅전 3

 

곽정은 곽정이다. 새끼.

 

 

 


271. 어려웠던 경제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미키 헤이스케 지음 / 이성희 옮김 / 김종선 감수 / 팬덤북스 / 2020

 

소략하다. 은행이나 병원, 주민센터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읽으면 좋다. 한 꼭지 읽고 고개 들어 전광판에 내 번호 떴나 보고.

 

 

 


272.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주경철 지음 / 김영사 / 2021

 

여기에는 우리의 삶이 개선될 수 있고, 사회는 진보할 수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 믿음은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고대나 중세에는 사회 전체를 개선하고 국가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꿔나간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주의 문학작품은 근대의 기획이다. 비록 스토리가 허무맹랑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현실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유토피아적 상상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상적인 방향을 타진하는 탄탄한 꿈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 가상의 국가 구조 모델을 구상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주의 작품은 정부 구성, 경제 작동 방식, 종교 제도부터 음식과 의복, 남녀 간 교제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모든 일을 꼼꼼히 디자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_ 주경철,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그러니까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문학은 계속 쓰여야 하고 우리는 오늘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애들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읽어 보자는 자세는 반쯤 무익한 것이다. 유토피아 문학만큼은 고전의 시간축이 물구나무를 섰다는군요. 덮으세요. 토머스 모어를 덮고, 우리 시대의 SF를 읽자구요!

 

 

 

--- 읽는 ---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장우진

소설의 정치사 / 낸시 암스트롱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 김여울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 황희경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주민의 헌법 / 박주민

인생수업 / 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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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08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은 일단 좋아요 눌러놓고 내일 출근해서 컴퓨터로 정독할 예정임다~^^

독서괭 2021-08-09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유토피아 제껴도 된다.. 끄적끄적 요점 체크.
<소설의 정치사>는 인용하신 부분도 어려운데 SYO님 해설도 어렵다!! 안 읽어야겠다..끄적끄적
오랜만에 나온 삼님의 소식 반갑습니다 ㅋㅋ 그분들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 계속 연재 부탁드려요!
<허삼관 매혈기> 읽은 것 나와서 반갑습니다!

syo 2021-08-09 18:29   좋아요 2 | URL
2댓글이 다 독서괭님... 역시 👍
삼이는 연애를 하긴 할 각인데 제가 독점중계권을 따낼 예정으로 협상중입니다......
페이퍼 쓸 거 풍성해지겠네 ☺

나비종 2021-08-1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심력>
1-1. 언어가 멈추어 선 시간,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머리가 둘이어도 언어의 다리는 현재에 서 있으니 그 언어는 지금 현재에 있다.
1-2. 구심력이 없으면 원심력도 없다. 접선 방향으로의 해방은 자유인 듯 하지만 이후의 유영은 등속 운동이라서 변화없이 지루할 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감이어도 터질듯한 무서움이어도 조금씩 방향이 바뀌는 원운동이 낫지 않나. 쳇바퀴라는 생각이 들면 반경을 넓히면 될 일이다. 혹은 문자의 세포벽을 세포막으로 몰랑몰랑하게 만들면 선택적 투과성을 지니니 파국의 안과 밖을 아우르게 될 지도... 물론 반대로 선택되어 몹시 곤란해지는 난감함을 만들지 않으려면 많은 내공이 필요하겠지만요.^^

2. 엄청난 문장이나 내용이 불현듯 떠오르면 시로 쓸거냐 산문으로 쓸거냐 갈등을 하거든요. 한동안 재현 형식의 싸움에서 시가 헤게모니를 장악했는데, 요즘은 산문에 꽂혀서 구구절절 문장으로 구현합니다. 그러면 시로 담았을 때와는 내용이 달라지게 되거든요. 산문의 형식에 맞게 내용이 맞춰지게 되죠.
(질문) 4개의 문장 안에 무려 ‘텍스트‘란 용어를 9회나 시전하신 낸시 님의 쭝얼거림이 이런 의미인가요?^^;;

3. 애매한 재능에 대해 쓰신 문장들이 많이 와 닿습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이러다가도 간혹 욕심이 생길 때가 있거든요. 나노급의 감성과 감탄스러운 센스와 넘사벽의 독창성과 기발한 유머와 어떤 묵직한 만연체를 시전하셔도 거뜬한 가독성을 겸비한 글을 보여주시는 syo님이 스스로를 애매하다 하시니 제 자신을 들여다보며 생각이 많아집니다.ㅡㅡ;

syo 2021-08-10 09:1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 원글보다 고퀄의 댓글이어서 한참을 읽었네요.

1-1과 1-2에서 구심력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나비종님의 관점을 추론하는 일은 어렵겠네요.
반드시 오해하거나 이해했다고 오해하겠지요.

2에 대해서라면 일부는 맞게 보셨고 일부는 정반대로 보셨습니다. 재현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큰 틀에서 보면 맞는데, 재현 형식이 다른 재현 형식과의 싸움에서 유리하도록 재현 대상 자체를 ‘구성‘한다는 말은, 그 형식이 시동을 걸기 전에 그런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어서, ˝엄청난 문장이나 내용이 불현듯 떠오르면˝이라는 말씀처럼 내용이 형식에 선행하는 글쓰기와는 맞게 빗대어지기 어렵겠습니다. 실제로 저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재현 형식‘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싸움을 위해 재현 형식을 창조하고 그 재현 형식이 재현 대상을 창조하는 역사적 구도인 것 같아서요.

3에 관해서는 과찬이셔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ㅎㅎㅎㅎ

나비종 2021-08-10 12:32   좋아요 0 | URL
대대댓글로 syo님을 번잡하게 만들어드릴 의도는 없었지만 무릇 무식한 인간은 배움의 열정이라도 들끓어야하기에..^^;

1. 관점을 추론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합니다. 선택적 투과성을 지닌다면 물질이 드나들 수 있으니까요.ㅎㅎ 다만 노폐물과 영양소의 이동 방향이 반대로 되면 곤란하지만요.
‘접선 방향으로, 튀어나갈 듯 팽팽하게, 구심과 원심이 동적으로 평형하는 그 터질듯한 문자의 세포벽을‘ 이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언어에 대한 절박함이 느껴지는 문장이라 많이 와닿습니다.^^

2. 음.. 핵심은 ‘기호를 통제할 권한‘을 위한 배틀이군요. 그래서 소설에 정.치.사.라는 말이 붙은 걸까요.
청자와 백자를 틀에 넣어굽는 방식이라면 일단 귀족적이냐 서민적이냐 의도한 틀을 먼저 선점하여 마련해놓고나서 비로소 거기에 내용물을 쏟아붓는다는 말씀이군요. 원하는 분위기의 집 외관을 이루는 뼈다귀를 만들고 그에 맞게 내부 인테리어 소품을 채운다는 의미요. 이번에는 제대로 해석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syo 2021-08-11 12:37   좋아요 1 | URL
저자의 의도는 제가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차치하고,
제 독해와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어서 나중에 제가 이해한 바를 페이퍼로 다시 쓰던지 해야겠어요 ㅎㅎㅎ

나비종 2021-08-10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1번에서 박을 밖으로 바꿔주실래요? 몇 번 읽다보니 읽을 때마다 자꾸 걸려서ㅋㅋ...조금의 오타도 참지 못하는 나비종 올림

syo 2021-08-10 09:13   좋아요 0 | URL
바로 수정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깜짝 놀랐네요.
감사합니닼ㅋㅋ

모운 2021-08-1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우리 사귀어요 해. 멋없어 보여도 심플하다. 1,2 단 나누고 뉘앙스 살리고...복잡해!

syo 2021-08-11 12:41   좋아요 0 | URL
이렇게 써서 그렇지 사실 실제로 말로 하면 복잡할 게 하나도 없었어요. 몇 문장 되지도 않고.

˝우리 사귀어요˝ 이 말도 커피 마시면서 다른 이야기 하다가 앞뒤 다 잘라먹고 갑자기 생각난 듯 저 문장만 툭 던지는 건 아니잖아. 그 앞에 서론 좀 떼고 분위기도 좀 잡겠지. 그리고 ˝사귀어요.˝ 하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상대방의 대답만 기다리며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 뒤에도 몇 마디 붙겠지. 그렇게 다 치면 결국 비슷해져.....


모운 2021-08-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정적으로 심플하게 말했을 때 멋없어보이면 뭘해도...

syo 2021-08-11 12:43   좋아요 1 | URL
아니야, 언어의 힘이라는 게 있다고....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모운 2021-08-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힘은 알겠지만, 나는 어쩐지 三씨한테 맞는 방법은 조금 더 심플한 쪽인 거 같기두...

syo 2021-08-14 09:26   좋아요 0 | URL
내 글을 좀 보고 三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26년째 보고 한 동안은 거의 매일보다시피 했던 나도 늘 쟤가 새롭다.....

모운 2021-08-11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아마추어야☺️
 

 

 

 

 

어느덧 딱딱한 복숭아는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아쉬울 여유도 없이 분주한 나 대신 아쉬워하던 사람이 그래도- 라는 말과 함께 복숭아를 보내왔다. 이 여섯 알의 복숭아에서 올해를 끝마친다면 한 알에 두 달을, 한입에 열흘은 베어 무는 셈이겠다. 복숭아는 목을 넘어가면서 그윽해지는 과일. 크게 베어 물어 지나치게 꼼꼼히 씹지 않고 삼키면 여름의 어떤 짓궂은 장난도 다 용서할 수 있는 맛이 난다.

 

좋은 일들은 대체로 겨울에 있었다. 여름은 그저 여름이기만 해도 힘든데 어찌 된 일인지 슬프고 괴로운 일의 시작이나 끝 중 최소한 하나는 여름에 온다. 여름이 길어지면 내 슬픔과 괴로움도 길어질 테고, 나는 추운 나라 서늘한 벌판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밤과 친해진다.

 

그저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버티는 것은 그래도 이 여름이 복숭아가 있는 여름, 복숭아를 보내주는 마음이 있는 여름이기 때문에.

 

성남이다.

 

 

 

--- 읽은 ---



263.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

 

- 일독(안녕이 하이인지 바이인지도 모르던 시절)

- 재독(210803)


아름다우면서 에두르지 않는 문장.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옮겨 적은 것 같은 마음. 천재의 펜은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로구나.

 

어느 날 저녁 안의 목소리가 그런 우리 둘을 떼어놓았다. 시릴은 내게 몸을 맞대고 길게 누워 있었다. 석양 무렵의 그림자와 불그스름한 빛살 한가운데서 우리는 거의 옷을 벗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안을 착각하도록 했던 것 같다. 그녀가 단호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시릴은 당연히 부끄러워하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어 내가 그보다 천천히 일어나며 안을 바라보았다. 안은 시릴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마치 그제야 그의 존재를 감지했다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쪽과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시릴은 대답하지 않고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어깨에 입을 맞추고 자리를 떴다. 그 행동은 나를 놀라게 했고, 마치 약속의 의미라도 담고 있는 듯 감동시켰다. 안은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하는 듯 심각하고 냉담하게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혹시 그녀가 다르게 생각했었다고 해도 시릴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순수하게 예의 차원에서 민망해하는 태도를 취하며 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내 목에서 솔잎 하나를 떼어낸 다음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특유의 경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안을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게 하면서 내게는 약간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뜩잖고 싫증 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종류의 심심풀이 놀이가 대부분 병원에서 끝난다는 걸 알아야 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선 채로 이야기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지독히 불편했다. 안은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는 이야기를 하려면 안락의자, 붙잡을 만한 물건, 담배 한 개비, 다리 흔들기, 다리가 흔들리는 걸 바라보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이 일을 과장해서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난 시릴과 그저 입맞춤을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 일로 병원에 갈 일이 생기지는 않잖아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부탁인데 그 청년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말에 토 달지 마. 넌 열일곱 살이고, 난 현재의 네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네가 네 삶을 망치게 두고 볼 순 없어. 게다가 네겐 해야 할 공부가 있잖아. 공부만 해도   오후 시간이 모자랄 거야." 내 말을 믿지 않는 기색으로 안이 말했다.

  그녀는 등을 돌리더니 침착한 결음으로 별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 논리, 내 부인에 그녀는 경멸보다 더 지독한 형태의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마치 내 존재가 없는 것처럼, 그녀가 줄곧 알아왔던 나 세실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그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그런 식으로 처벌해 마땅한 대상인 것처럼.

_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이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영역 밖에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토대가 될 만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기가 옳기 때문에 타인을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갈 자격이 있고 심지어 그럴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철석같이 믿는 타입. 세실은 이제 하루에 몇 시간씩 골방에 갇혀 베르그송을 공부해야 하고, 시릴과 만나려면 안의 눈을 피해야만 한다. 안에게 세실의 말과 생각은 그저 교정 혹은 무시의 대상일 뿐이고(“난 천박한 말은 싫어.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말이야.”, “요즘 유행하는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건 가치가 없어.”) 안의 그런 태도는 예민한 세실의 마음에 상처로 자꾸만 축적된다. 하지만 안은 그런 걸 모른다.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옳으니까. 내가 옳은 사람은 늘 그런다.

 

그러면서 자기 상처에는 또 지나치게 예민한 안은 결혼할 사람(세실의 아버지)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바로 집을 뛰쳐나가 차를 절벽 아래로 몰아 자살한다. 그 사건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었지만, 읽는 syo는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그녀는 항상 세실을 어리고 모자란 아이 취급하며 훈육하려 했지만, 상처를 견디는 마음에 관해서라면 그녀야말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세실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 마음속 슬픔 창고에 안의 죽음을 저장한 후, 계속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264.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4

- 일독(1804xx)

- 재독(210804)   


  바지락칼국수 국물 위로 떠오른

  조갯살을 날렵하게 집어먹는다고 해서

  내가 붉은어깨도요새가 될 수 있겠는가

  바지락 조개껍질에 아직 남아 있는

  갯벌의 잔모래를 씹어먹었다고 해서

  잔모래에 아직 남아 있는

  파도소리에 고요히 귀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가슴붉은도요새의 가슴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먼저 썰물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먼저 새들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어대는

  맛있는 갯벌이 되지 않고서는

  어떻게 머루처럼 까만 민물도요새의

  눈동자에 걸린 수평선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돌아가실 날만 남은

  틀니뿐인 늙은 아버지와

  자장면보다 맛있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식탁 위에 젓가락으로 수북이

  조개껍질을 쌓아놓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거룩한 패총이 될 수 있겠는가

_ 정호승,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전문

 

활자로는 보이지만 음성으로는 들리지 않는 종이 위의 시도 좋지만,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채록하여 활자에 매어둔 듯한 시도 좋다. 이 시인 말고는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시들도 눈부시지만,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고르고 부드러운 말들로 길을 잡아나가는 시들도 찬란하다.

 

 

 


265.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리디아 더그데일 지음 / 김한슬기 옮김 / 현대지성 / 2021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내 이름을 적어 넣은 날, 고르지 않은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새벽까지 앉아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모호한 구획과 포함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삶에 반대되는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수렁으로 생각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대단원으로 향하는 피할 수 없는 전개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게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끝단이라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단추라면, 죽음을 생각하면 좋을 시간이 비단 아침뿐일까.

 

혼자 죽지 말기를. 죽음의 순간에 공동체가 나의 죽음에 뭔가를, 내 죽음이 공동체에 또 뭔가를 더하는 풍성한 삶은 늘 죽음을 잊지 않고 준비하는 현명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바그다드의 상인이 하인을 시장으로 보냈다. 하인은 심부름을 간 지 얼마 안 돼 집으로 돌아왔다. 겁을 먹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인은 상인에게 이야기했다. "장을 보다가 어떤 여자가 등을 떠밀기에 뒤돌아봤더니 죽음이 지척에 있었습니다. 죽음이 저를 위협했어요. 주인님, 제발 말을 빌려주세요. 죽음을 피해 도망가야겠습니다. 사마라까지 말을 타고 가서 죽음이 저를 찾지 못하도록 숨어야겠어요."

  사연을 들은 상인은 하인에게 말을 빌려줬다. 하인은 지체하지 않고 사마라로 떠났다. 그날 오후, 상인이 직접 시장에 갔다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죽음을 목격했다. 상인은 죽음에게 그날 아침 하인을 위협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죽음이 대답했다. "위협한 게 아니었소. 놀랐을 뿐이죠. 오늘 밤 사마라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바그다드에서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소?“

  바그다드 상인 이야기는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도, 재촉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 마주하게 될 사마라의 밤을 준비해야 한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다.

_ 리디아 더그데일,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266.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


- 일독(1902xx)

- 재독(210804) 

 

인간은 매사에 서투르다. 관계를 다루는 일에는 더욱 그렇다. 특히 사랑을 운전하는 일이라면 인간은 악셀이 왼쪽인지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헷갈리니까 눈 감고 한번 생각해 보려 드는 위태천만한 운전자 비슷한 주제에 운인지 뭔지 잘도 안 죽고 사랑하는구나 싶을 때가 잦다. 깜빡이를 켜요. 와이퍼 말고 깜빡이를 켜라고요……. 마음속에 사랑이 흥성하는 도시보다 폐허를 더 많이 지어놓고 사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겠지. 여기는 폐허입니다, 끝났어요. 한때는 빛나던 이 도시에 살던 수많은 감각과 감정 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안 돼요. 저 흔적들은 깨끗하게 치울 수가 없든 거거든요. 그러니까 다음 사랑을 하려거든 다른 넓고 푸른 땅을 찾아보세요. 여기는 이제 못 써요. 잘 해야 박물관입니다.

 

우리가 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리고 이미 그 궤도를 돌리기에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일 사이의 시차는 멀수록 좋은 걸까? 그 반대일까? 어떤 사랑은 그 시차가 광대하여 결별 후에도 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 그때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랑이 정말로 끝나는 시점은 어디라고 봐야 좋을까? 그것은 중요하다. 지나간 사랑을 폐허로 정의하고 울타리를 둘러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다음 사랑의 도시를 그 폐허 위에 건설하다 종종 망하곤 하기 때문이다. 시점. 시점.

 

그러니까 망하고 있음과,

 

그렇게 매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폐점한 뒤에도 어딘가에 배어 있다가 밤공기를 타고 이 방으로 들어서는 닭기름 냄새를 느끼고 있자면 매기가 정말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리니까. 그 불규칙한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때 그 순댓국집에서 아줌마가 노래한 없어지고와 사라지고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사라진다는 것은 부재하는 대상의 강력한 능동이 감지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기는 지금 내 곁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저 욕실의 자락자락한 물소리가 여전히 매기를, 좀 전에 끝난 우리의 섹스를, 사랑해, 라는 말과 시간을 간신히 환기하고 있는데도.

_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그리고 망했음에 대하여,

 

스토어가 폐점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 안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매기와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망설이다가 이내 길을 건넜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물건들은 팔린 뒤였다. 그리고 여행을 온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 가게에 별로 없었다. 나는 제주에서만 난다는 천혜향을 몇 개 집고 먹을지 알 수 없지만 단단한 감자를 몇 알 샀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데 잘 있던 아줌마가 잠깐 일을 본다며 자리를 떠났고 졸지에 사무실에서 나온 그, 이미 지역신문에서 마르고 닳도록 내가 들여다봐서 아주 친근하게 얼굴을 새겨버린 매기의 남편이 내가 산 물품들을 계산했다. 18000원입니다, 담아드릴까요? 나는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넣어달라고 했고 그가 비닐봉지를 뜯어 그것을 넣고 내게 건넬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들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아마 긴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매기와 관련한 기억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가져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에도 미뤄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매기에게도 정권에게도 이 세상이나 어느 사랑에게도. 아무리 동산 수풀은 사라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더라도, 모두 옛날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간이 지나 나의 사랑, 매기가 백발이 다 된 이후라도.

_ 같은 책

 

 

 


267.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안나미 아쓰시 지음 / 전경아 옮김 / 필름(Feelm) / 2021

 

제목이 다 했다라는 지나치게 편리한 말은 쓰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내용은 여기저기 존재하고 문장은 글자의 나열에서 그리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존심 강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초합금으로 만든 로봇에 물총으로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스스로 자존심이 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방호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로켓포를 마구 쏘아대는 것과 같다.

  뭔가 불손한 대우를 받거나 매정한 소리를 듣고도 여유롭게 받아넘기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진짜 자존심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얄팍한 자존심은 버려야 십중팔구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

_ 안나미 아쓰시,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 읽는 ---


애매한 재능 / 수미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장우진

글쓰기의 쓸모 / 손현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강신주

어려웠던 경제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 가미키 헤이스케

소설의 정치사 / 낸시 암스트롱

문해력 공부 / 김종원

수학의 모험 / 이진경

마르크스를 읽자 / 미카엘 뢰비 외

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사조영웅전 3 / 김용

파이썬으로 시작하는 데이터 분석 /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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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1-08-05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재독을 이렇게 여러 권이나. 재독까지 하셨다니 다 읽어보고 싶네요.^^

syo 2021-08-05 22:58   좋아요 0 | URL
ㅎㅎㅎ syo의 재독은 읽어봄직함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전혀 남들에게 추천할 만하지 않은 책도 3독씩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페이퍼에 재독한 책들은 떳떳하게 권할 만한 책들이네요^-^

수이 2021-08-05 14: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복숭아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슬퍼 ㅠㅠ

syo 2021-08-05 22:58   좋아요 0 | URL
복숭아 사 주는 다정한 사람 있어서 맛있게 잘 먹고 있다는 이야긴데 왜 슬퍼 ㅠㅠ

독서괭 2021-08-05 15: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김금희 소설에 관해 적으신 글이 참 좋아요. 이제껏 syo님이 사랑에 대해 쓴 글들을 모으면 책 한권 나올 것 같은데요.

syo 2021-08-05 22:59   좋아요 1 | URL
금희누나 소설이 참 좋은 관계로 읽고 나서 아무렇게나 중얼거려도 썩 괜찮나 봅니다! 추천 추천.

새파랑 2021-08-05 16: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엄청난 읽는 책들 언제나 놀라워요~!! 좋은 일들이 많았던 겨울이 오길 바랍니다~!!
(전 사계절 다 좋았던 적이 없는거 같다는😑)

syo 2021-08-05 23:00   좋아요 1 | URL
읽다가 집어 던지는 책이 과반입니다.
읽기 시작한 책은 꼭 읽어내고 책마다 리뷰를 쓰는 님들에 비하면 저건 대단할 거 하나 없습니다.
그냥 읽는다고 써놨을 뿐인걸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8-05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오랜만에 딱복이 먹을 만하게 단 여름입니다. ㅎㅎㅎ벌써 세 박스를 사 먹는데 마지막 시킨 건 작고 덜 달아서 고구마야 하고 먹네요 ㅎㅎㅎㅎ

syo 2021-08-05 23:01   좋아요 1 | URL
제가 받은 딱복 여섯 알도 벌써 다 해치웠습니다.
일요일에 다시 대구 내려가서 뒷정리 하는 스케쥴만 아니었어도 끝물딱복을 주문하는 건데.....

얄라알라 2021-08-05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시집을 잘 읽지 못하지만 평소 북플 친구분들 서재에 올라오는 시 읽다보니,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며, 시인의 생각에 후와~~감탄하고 갑니다. syo님 시 옮겨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syo 2021-08-05 23:01   좋아요 0 | URL
북사랑님의 시집 읽기를 응원합니다 ㅎㅎㅎㅎ ^-^

공쟝쟝 2021-08-06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복 들어가고 아오리 철이로다. 내 사랑 청사과!! 더위 조심하시구요 쇼님 ^..^

syo 2021-08-08 12:20   좋아요 0 | URL
청사과 철과 함께 찾아온 쟝쟝님의 고된 시간. 노동 조심하시구요 쟝님 ^-^

페크pek0501 2021-08-0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이여 안녕을 읽은 1인입니당~~~
그런데 오래전에 읽어서 그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syo 2021-08-08 12: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그럴 때 해결책이 있지요.
책을 새로 사시면 있던 책이 귀신같이 나타납니다.

독서괭 2021-09-10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2관왕이다~~ 2관왕~~^^

syo 2021-09-10 21:28   좋아요 0 | URL
예, 그렇습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나는 2관왕 ㅎㅎㅎㅎ

고마워요 괭님 ㅎㅎ

그레이스 2021-09-10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축하드려요 ~♡

syo 2021-09-10 21: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
최근 이런 거 축하하는 따뜻한 알라딘이 되었네요 허허.

서니데이 2021-09-10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syo 2021-09-10 21:2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

이하라 2021-09-10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syo 2021-09-10 21:29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늘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초란공 2021-09-10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 늘~ 축하드립니다~^^ ㅋ

syo 2021-09-10 21:51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늘‘ 이라니 부끄럽네요.
늘 감사드립니다. 이 늘은 진짜예요! ㅎㅎ

초딩 2021-09-1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

황후화 2021-09-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려요
 

  

--- 읽은 ---



256. 사조영웅전 2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사조영웅전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가 전설의 무공비급 <구음진경>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치열한 욕망이다. 물론 그런 무공이 결국 주인공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무협의 국룰.

 

오늘은 그 <구음진경>의 일부를 훔쳐내 불완전한 무공을 익혔다가 남편(주인공 곽정이 엉겁결에 비수를 찔러 죽였다!)과 함께 사악한 존재의 대명사로 강호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어느 여인의 슬픈 사연을 한번 들어보자.

 

난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녀였지.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어. 그땐 이름이 매약화梅若華였어. 불행히도 부모님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신 후 나쁜 사람들에게 많은 고초를 당했는데…… 사부이신 황약사께서 나를 구해 도화도로 데려가 무공을 가르치고, 이름도 매초풍으로 바꿔주셨어. 사부님의 제자들은 모두 풍자 돌림이었거든. 진현풍이라는 사형이 있었는데, 눈썹도 진하고 눈도 컸지. 붉고 잘 익은 복숭아를 따주기도 하고, 무공도 가르쳐주면서 나를 극진히 대했어. 때론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야단치기도 했지만 모두 나를 위해서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사형이 제2대 제자였고, 난 제3대 제자였지. 우린 함께 무술 연습을 하며 자랐는데, 그러면서 은연중에 사형의 마음속엔 내가 있었고, 내 마음속에도 사형이 자리 잡았지. 그러던 어느 봄날 저녁, 복사꽃이 만발하게 핀 날 복숭아나무 밑에서 사형이 갑자기 나를 꼭 껴안았어.”

_ 김용, 사조영웅전 2

 

아오, 풋풋해라! 꼭 껴안고 거기서 땡 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그게 될 턱이 있나.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다음 진도를 빼버린 바람에 그들은 이제 사부한테 걸리면 팔다리 잘릴 판이다. 사부라는 황약사는 동사서독할 때 바로 그 동사東邪인데, 보시다시피 동사의 저 사악하다할 때도 쓴다.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잃은 후 한층 더 개차반이 된 동사가 행복한 부부의 꼴을 연출하는 매초풍과 진현풍을 보며 허허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너희라도 만발하게 핀 복숭아나무 밑에서 성실하게 물고 빨고 막 행복하렴, 하며 그들의 사랑을 응원해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겠는데 그들이 몰랐을 리가. 그래서 그들은 은밀히 도화도를 나오기로 결심하고 그때 <구음진경> 하권을 훔쳐 도주. 그런데 상권 없이 하권만 가지고 나왔더니 기초도 내공도 다질 길이 없었던 거라, 결국 사람의 백골을 가지고 연공하는 사악한 방법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진현풍과 매초풍은 흑풍쌍살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얻고 강호를 떠돌면서 사람을 죽여가며 불완전한 무공을 익히다가 곽정과 그의 일곱 사부를 맞닥뜨린 것. 이미 원수지간이었던 그들은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그 아비규환의 와중에 진현풍에게 사로잡힌 어린 곽정이 비수로 찔러 그를 죽여버린 것이다. 결국 매초풍은 죽어가는 남편을 안고 도망치는데…….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었지. 남편이 말했어. ‘난 이미 틀렸소. <구음진경>은 가슴에…….’ 이것이 남편의 마지막 말이었어. []

  난 빗속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렸어. 처음엔 남편의 몸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더군. 나도 점점 추워졌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 ‘당신 정말 죽은 거예요? 그렇게 무공을 익혀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예요? 누가 당신을 죽였죠?’ 난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남편의 배에 박힌 비수를 뽑았어. 피가 뿜어져 나왔지. 나도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했어. 내가 옆에 없으면 남편이 저승에서 얼마나 허전하겠어? 난 칼끝을 혀 밑에 갖다 대었어. 혀 밑이 내 급소, 즉 연문이거든. 그때 문득 칼에 새겨진 글씨가 만져졌어. 자세히 더듬어 보니 양강이라고 새겨져 있더군. , 양강이라는 자가 죽였다고 확신했지. 이 원수를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어? 죽더라도 우선 양강이라는 자를 죽이고 나서 죽어야지. 그래서 남편의 품속을 더듬어 <구음진경>을 찾았지. 그런데 온몸을 뒤져도 책은 없었어. 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의 가슴을 더듬을 때 문득 피부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

  회상이 이에 미치자, 목에서 고통 어린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비가 퍼붓던 그날, 황량한 그 숲속으로 되돌아가 있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만져보니 가슴 피부에 깨알 같읕 글씨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어. 그렇게 걱정하더니 결국 책 내용을 바늘로 가슴에 새겨놓고 책을 없앴던 거야. 사부님같이 대단한 분도 책을 빼앗겼잖아? 가슴에 새겨두면 그가 살아 있는 한 책도 그의 것이 되는 셈이지. 난 칼로 남편의 가슴 부분의 가죽을 벗겨냈어. ‘잘 보관할게요. 이것이 있는 한 난 당신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제 슬프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누가 하하, 웃더군. 웃음소리가 너무 음산하고 공포스러웠어. 알고 보니 내가 웃고 있더군. 난 손으로 땅을 파고 남편을 거기 묻었어. 남편이 내게 구음백골조를 가르쳐줬는데 결국 그걸로 남편을 장사 치른 셈이지.

_ 같은 책

 

이 모든 게 황약사 그 도른자가 제자들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내 와이프 죽은 이후 도화도에 더이상 섹스는 없다? 아아, 청춘 남녀들이 응? 복숭아 꽃 막 떨어지는 아름다운 섬에서 응? 땀 흘려 무공을 익히다 보면 눈도 맞고 막 그러는 게 섭리 아니냐고 이 양반아. 거스를 걸 거슬러야지……. 그렇게 섹스에 엄하게 굴었지만 정작 자기 딸 황용은 이제 곽정하고 섹스해서 딸 낳고, 그 딸은 또 후속작 신조협려 주인공 양과하고 섹스를 못 한다고 양과의 팔을 칼로 잘라버릴 것이다……. 못하게 하지 맙시다. 그것은좋은 것이다あれはいいものだ

 

 

 


257. 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

이솜 지음 / 필름(Feelm) / 2020

 

쪼꼬파이 먹으려고 교회 갔다가 엉겁결에 취미 붙여서 주말마다 일독을 거듭, 결국 전역 전까지 최소 20번은 읽은 syo의 최애 <전도서>에 이르기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하시었다(전도서 19). 수없이 곱씹어 봤지만 여전히 그 말은 뭐랄까, 좌절과 위안의 샴쌍둥이 같은 느낌이다. 내가 쓸 모든 글들이(심지어 읽을 것들도) 이미 와 있으리라는 준엄한 경고. 어차피 뭘 써봐야 반복일 뿐인 마당에 글 같은 거 써서 뭣하냐고 따지는 냉소쟁이 장남과, 어차피 이미 한 일을 다시 하는 처지이기는 나같은 설치류나 도 선생님 톨 선생님 같은 공룡이나 똑같은 셈이니 신경쓰지 말고 계속 써내면 된다는 둔한 막내 놈이 멱살 잡고 싸우는 꼴을 두손 묶고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복잡한 심경이 되어 전도서를 읽는 동안, 전투복 입은 까까머리 아이들은 설교 공격을 귓등으로 빗겨 흘리며 격하게 졸고 있고……. 정말이지 헛되고 헛되고 헛된 주말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전부 이미 세상에, 심지어 나무 많이 있다는 것을 같은 장르의 책 몇 권만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 권을 더 세상에 내놓는 기분에 대해 짐작하다 보면, 결국은 전도서 생각에 도달한다. 그리고 답은 없다. 내 선에서는 그냥, 읽을 때는 조금 더 너그럽게 넘어가고(허허, 좋은 말씀이면 되었지) 쓸 때는 최대한 가혹하게 쪼아보는(단어! 어순! 조사! 문장! 문장! 문장, 임마!) .

 

우리는 때때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쉽게 말하곤 한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고. 가깝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배려와 다정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_ 이솜, 얼어죽어도 아메리카노

 

 

 


258. 인생 사용법

존 러벅 지음 /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8

 

좋지만 무난한 격언 말씀에 그친다. 이 책보다는, 그렇지, <전도서>를 추천해본다. 그 책은 정말이지 굉장한 <인생 사용법>이다.

 

평생 아무런 슬픔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빛이 있다면 반드시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까.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가시가 꽃을 보호해준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없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도 피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너무나도 어리숙하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과 힘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예견하고 있어야만 한다.

_ 존 러벅, 인생 사용법

 

마지막 문장은 좀 괜찮은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예견하고 있어야만 한다.”

 

 

 


259. 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

 

말재간 없고 무뚝뚝한 남자가 조용한 블로그에 쓰는 글 같은 문체라서 그 속을 헤엄쳐 지나가기가 수월치 않았다. 일본 에세이에서 자주 보는 바로 그 말투…….

 

어쩌라고- 하는 감각이 없지 않다. 인물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사는 게 다 이해하기 어렵고 알 수 없는 것들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온다 리쿠는 아주 예에에전부터 syo하고는 안 맞았다.

 

혹시나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한 대목 옮겨본다. 스키마와라시가 대체 뭥? 싶으신 분들에게 설명도 좀 하고. 꼭 흥미를 유발하거나 설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럼 스키마와라시는 어디에 깃들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스키마와라시. 한자라면 틈 극자를 써서 극간동자隙間童子일까.

  갑자기 기묘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벽장 아랫단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상자 옆 좁은 공간에 누군가가(물론 아이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

  호리호리 가늘고 긴 팔다리가 보이지만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글쎄다. 굳이 말하자면 사람의 기억일까.”

  형은 생각하며 대답했다.

  예상한 대답과 달라서 나는 당황했다.

  “기억에 깃들다니, 어떻게?”

  “지금 이야기처럼.”

  형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의 기억 사이에 깃드는 거야.”

  형이 검지를 머리에 가져다 댔다.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기억을 맞춰가는 동안에 그 녀석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지.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면 정말은 없었던 그 녀석이 서서히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혹시 그런 녀석 없었어?’, ‘있었지?’, ‘맞아, 있었어. 그런 녀석.’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되면 될수록,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녀석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지지.”

  분명 그 녀석은 있었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공유하면 그 녀석은 존재했던 것이 돼.”

_ 온다 리쿠, 스키마와라시

 

 


260.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

 

만화, 웹툰, 웹 소설 같은 것에 잠시만 피폭되어도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다. 참신한 상상력, 독특한 구성 능력을 지닌 사람이 세상에 참 많구나. 나는 소설이라고는 웹 소설만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걸 몇 개 읽고 나면,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밍밍해지고, 어지간한 상상력은 다 불충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의 그 느슨한 설정들! ‘꿈을 파는 백화점이라는 상상력이 참신하게 느껴지신다면 당신은 아직도 행복할 기회가 있습니다. 부디 너무 이른 시기에 만화, 웹툰, 웹소설을 만나지 마시기를.

 

그런 걸 떠나서, 문장 자체의 미숙함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

 

내가 몇 마디 했더니 글쎄, 자기들만 날아다니는 꿈은 만들 수 있으니 물건 끊기고 싶지 않으면 참견하지 말라더군요.

_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자기들만 날아다니는 꿈은 만들 수 있으니라는 문장의 어디가 문제인지를 배우는 것은 아마 중학교 때쯤이 아닐지. 저 문장이 등장인물의 발화이며, 그 말을 하는 인물이 지금 살짝 흥분 상태라 어순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개연성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면 좀 더 티를 내야 한다. 저 인물은 지금 한 따옴표 안에 열 문장에 달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나머지 문장들은 전부 구어를 모사하는 소설적 구어체의 일반 공식에 최대한 부합하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말실수가 아니라는 것.

 

2권은 읽지 않아야겠다.

 

 

 


261. 세상에서 가장 쉬운 회계학

구보 유키야 지음 / 안혜은 옮김 / 2015


- 일독(1804xx)

- 재독(210802)




 


262. 만화 경제학 강의

조립식, 조윤형 지음 / 길벗 / 2018

 

 

 

--- 읽는 ---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

사조영웅전 3 / 김용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 리디아 더그데일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 안나미 아쓰시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글쓰기의 쓸모 / 손현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인생 수업 / 법륜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벽이 만든 세계사 / 함규진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도나 저커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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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8-03 0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벌써 262권…저는 올해 내내 읽어도 그 반절 읽을까 말까 한데…

syo 2021-08-03 10:04   좋아요 3 | URL
불의의 타격을 받아 조금 지체되었지만 탄력을 얻어 치고나가는 중입니다..... 500권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독서괭 2021-08-03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것은 좋은 것이다.. ㅋㅋㅋ 그걸 막은 게 이런 비극의 시초가 되다니. 정말 안 막아야겠네요.
반년동안 250여권을 읽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syo님의 올해 실적이 기대됩니다!

syo 2021-08-05 10:59   좋아요 0 | URL
400권으로 하향조정했습니다......😥

이하라 2021-08-03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못해서 팔을 자른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그리 생각하니 욕구 불만이란 게 살벌한 거였네요. 인용하신 문장만으로도 김영사의 김용소설 번역이 몰입감있고 유려하다는 게 느껴지네요. 김영사의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포스트입니다.^^

syo 2021-08-05 11:01   좋아요 0 | URL
물론 100퍼 못 해서 자른 거라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만 ㅎㅎㅎ

저는 해적판이나 다른 번역판을 읽은 적이 없어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꽤 괜찮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붕붕툐툐 2021-08-03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 넘게라닛! syo님의 전도서 사랑이 엿보이네용~ 그리고 해석도 탁월해용! 자기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너그러운 거 넘 어렵죠?(전 둘다에 매우 너그러운 타입~ㅋ)

syo 2021-08-05 11:01   좋아요 0 | URL
전도서 너무 유려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헛되고 헛되고 헛 헛 헛-

바람돌이 2021-08-0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조영웅전 사랑담은 무협지인가 했더니 엽기무협인가요? 남편의 가슴가죽을 벗기고 이것이 있는 한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거라니.... ㅎㅎ 우리 풍씨가 원한 것은 무림비급일까요? 남편의 가슴쪽 피부였을까요? ^^

syo 2021-08-05 11:03   좋아요 0 | URL
못지 않게 기이한 이야기들이 꽤 나옵니다.
특히 사랑에 얽힌 것들이라면.....
연애 이야기에 환장하는 syo가 김용 선생님의 작품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또 그렇습니다.😍

공쟝쟝 2021-08-0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나게 여름에는 안된다 사회적 거리두기 라서 안된다 그게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안된다 댓글달고 왔는 데... 알라딘 내의 황약사가 나였구나... 아니... 아니.. 내가 사부라니... 내가..내..가 사부라니..!!...(내가 ㄱㅈ라니 버전으로)

syo 2021-08-05 11: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회적으로는 거리두기 하고 사랑적으로는 거둬두기 하겠다!

단발머리 2021-08-03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전도서 좋아해요.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전 12:12)

공부 많이하면 피곤합니다ㅋㅋㅋㅋ 물론 많이 안 해도 피곤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8-04 13:56   좋아요 0 | URL
그럼 어떻게 해야해요.... 공부 해요? 공부 그냥 관둬요?

syo 2021-08-05 11:07   좋아요 0 | URL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수이 2021-08-05 13:11   좋아요 0 | URL
쇼님이 놀래요 ㅋㅋㅋㅋㅋ
 

  

Rehabilitation

 

 

 

그냥 숨만 쉰다. 그것도 일이다. 가만히 사는 것도 가만히 있으면 절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한번 궤도를 세게 이탈하고 나면 다시 무심無心과 상심常心을 찾기 위해 재활이 필요하다. 하루에 몇 통씩 전화를 받는다. 어제는 엄마 옷들을 수거함에 내놓는다고 잠깐 핸드폰 없이 나간 사이에 누나가 나한테 전화 2, 동생에게 전화 1번을 했던 모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울리는 전화를 동생이 받았더니 대뜸 왜 전화를 안 받냐고 소리를 높이는 누나. 둘 다 안 받아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고.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저 사람들은 정말 우리를, 특히 나를, , 아니 하나도 모르는구나 싶었다.

 

syo에게 슬픔은 무작정 부딪혀가며 이겨내는 것도 아니고, 슬픔 바깥의 다른 것에 몰두하며 이겨내는 것도 아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은 슬픔 속에 길을 낸다.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슬픔, 가치 있는 슬픔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으로 길을 내어 그 안에서 슬픔을 걷는다. 식어가는 엄마의 몸을 만지며 실컷 울다가, 너무 예쁘게 나와서 도리어 서글픈 영정을 바라보다가, 엄마의 가루를 폭넓은 붓으로 쓸어모아 유골함에 담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syo는 생각했다. 나는 이 장면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둘러싼 풍경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둘러싼 풍경이 멈추어 있는 이 순간을, 언젠가 쓰게 될 거라고. 그 지면이 종이일 수도, 픽셀일 수도, 혹은 내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이 순간은 쓰일 거라고. 그것은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그렇게 될 거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순간을 문장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모든 번역은 읽기 위해 이루어지듯, 번역된 슬픔은 견뎌지는 것. 그것은 슬픔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입을 틀어막거나 아름다움을 위해 슬픔을 남용하는 일이 아니라, 슬픔에 길을 내어 언제고 그 길을 걸어낼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고 믿는 이가 슬픔 속에 사는 방법은 이렇다.

 

내가 번역한 나의 슬픔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때로 그것에 울고 격침될 수 있겠으나, 한번 난 길이 반복해 걸음으로써 더 분명한 길이 되듯이, 슬픔은 슬픔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나는 조금 더 선명한 사람이 되어 살 것이다.

 

 

 

--- 읽은 ---



251. 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 슬로베니아라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파편적으로 귀에 익힐 기회가 있는 류블랴나(수도다)라는 도시 하나 정도 알고 있어도 많이 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프투이라는 도시도 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에는 폴리트비체라는 곳이 있고, 루마니아에는 클루지나포카라는 데가 있다. 좀 더 지명도 있는 나라 이탈리아에는 트리에스테’, ‘우디네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곳들. 지구는 참 넓고도 꼼꼼하구나.

 

책읽쟁이로서 도시마다 한 권의 책을 배치한다는 컨셉에 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라면 이 도시의 가슴팍에 무슨 책을 달아줄까. 내가 가본 도시들(모두 조선의 도시들)을 주욱 떠올리며, , 하나의 도시에 한 권의 책도 붙일 수 없다면 나는 책도 도시도 제대로 읽고 걷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냥 인생은 그대로 인생이다.

  지독하게 자연스러워 지독해서 운명이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오히려 괜찮아지는 그런 운명의 인생. 소설의 결과가 과하게 슬프거나 극단적으로 처절해도, 읽는 이의 삶이 그보다 더 슬프거나 처절해서 공감은 되어도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황을 깨달으며 폴란드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 맛이 썼다. 마치 발치카 9번처럼.

  여전히 내 주변의 관광객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아주 보기 좋게 광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형형색색의 건물들도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삶의 차이는 어쩌면,

  딱 맥주 맛의 차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발치카 No.9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들판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맞다.

  우리 삶의 들판에도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지금도 불고 있고, 앞으로도 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맥주도 인생도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언제나 부는 바람 앞에서.

_ 강병융, 도시를 걷는 문장들

 

 

 


252.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

윤태영 지/ 위즈덤하우스 / 2019

 

좋은 문장에 대해 말하는 책을 계속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뭔가 많이 뽑아낼 필요도 없다. 한 권에서 딱 한두 가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좋은 문장의 공식들을 흔들어 미묘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한두 가지의 지침만 얻으면 된다. 선생님께는 선생님의, syo에게는 syo의 좋은 문장이 각각 있겠으나, 그것은 불변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변했다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 변화의 궤도를 칭할 때, 발전이라는 선형적 이름을 붙이기도 어색하고 나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냥 춤을 추는 것이다. 춤을 추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어느 순간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그 순간 바로 거기서 최대한 아름답고 싶은 마음을 욕심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과 앞뒤 순간들의 연속을, 바로 여기와 아까 거기와 다음의 저기 사이의 연결을, 그러니까 움직임 전체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은 욕구에 가깝다. 나는 더 나아지고 싶지만, 스스로 나아갔다고 생각한 걸음을 타인이 퇴보라고 판단하는 위험으로부터 완벽히 달아날 수 없음을 안다. 누가 뭐래도 그저 내가 보기에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저 내가 보기에 좋은 문장을 생각하며 추는 춤의 궤적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쓰는 일을 삶에 뭉친 사람에게, 완벽한 문장에 도달한다는 것은 마치 완벽한 삶이라는 게 있기라도 하다는 말처럼 허망하고 달콤한 환상이다. 신기루다.

 

퇴고할 때는 자신의 글이 상상력의 요소를 적절하게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글을 읽다 보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접하게 되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는지, 독자의 입장에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콘텐츠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뜻밖의 낱말이나 멋들어진 표현 하나가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서며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_ 윤태영,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

 

 

 


253. 사조영웅전 1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무협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주인공 곽정의 탄생. 이 둔하고 얼타기 바쁜 영웅이 이제 남은 7권의 책에서 종횡무진하며 독자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얘만 보면 진짜 숨이 막힌다. 신필 김용 선생님이 배출한 스무 명 남짓한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정석에다 인간승리의 표번인데도 어쩐지 인기는 없는 희한한 히어로.

 

심지어 소질머리도 없다. 웬만한 무협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재능은 있는 법인데.

 

너도 배웠느냐?”

  곽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멍청하게 서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칠괴는 타뢰가 무척 똑똑한 반면, 곽정은 아둔한 것 같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한소영은 장탄식을 하며 눈시울을 붉혓다. 전금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저들 모자를 강남으로 데려가 구 도장에게 맡깁시다. 내기는 우리가 진 것 같아요.”

  주총도 한 마디 했다.

  “쟨 자지리 너무 형편없어. 무공을 배울 만한 재목이 아니야.”

  한보구도 한숨을 내쉬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싹이 노란 것 같아.”

  칠괴는 강남 말로 한마디씩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소영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타뢰는 곽정의 손을잡고 희희낙락 집으로 돌아갔다.

  강남칠괴는 6년 동안 갖은 고생을 감수하며 겨우 곽정을 찾아내 뛸 듯이 기뻤는데, 그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사실에 다시 좌절감을 맛봤다.

_ 김용, 사조영웅전 1

 

, 저렇게 모두에게 좌절감을 준 미련퉁이 곽정이 어떻게 최강자 동사서독남제북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가 되는지 지켜보자. 남은 7권을 읽으며…….

 

 

 


254. 논어에 반하다

김석 지음 / 북오션 / 2018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입니다. 그런데 원문이 동어 반복의 간단한 문장인데다 공자의 정치적 성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첫째는 이를 존재 명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이고, 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다로 읽는 것인데, 이는 위계적 신분질서 그 자체를 강조하고 이를 공고히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앞의 일반적 해석처럼 당위 명제로 읽는 것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건 명제로 보는 것입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가 신하다워지고, 아비가 아비다워야 자식이 자식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지배층이 모범을 보여야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솔선수범의 논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넷째는 명령 명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임금이 임금답지 못해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해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으로 맹목적으로 충효를 강요하는 그야말로 봉건적인 논리입니다.

  이처럼 논어의 문장은 매우 압축적이어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뜻이 크게 달라지고 보수적으로도 진보적으로도 해서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말을 한 공자의 얼굴도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_ 김석, 논어에 반하다

 

정말 이렇다. 논어는 하나일진대 검색하면 무한한 논어 책이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논어를 읽는 방법이 다양해서이다. 똑같은 책이 하나 없다. 한문이 원래 좀 그런 듯. 그래서 동양철학 개론서 읽기는 서양철학 개론서 읽기와 양상이 조금 다르고, 이것저것 읽어도 나쁘지 않다. 게중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하는 책이 나타나면 몇 번 읽어도 좋겠다.

 

 

 

 


255.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고대 철학편

김재훈, 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

 

요즘은 만화로 본다는 식의 책들도 꽤 읽을만해진 것 같다. 아니면 내 수준이 지속적으로 퇴락중이든가.

 

어쨌든 애들한테는 이런저런 좋은 책이 많아진 세상이다. 라떼는 철학 같은 거 보려면 원전번역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냥 읽지 말라는 뜻이다. 추천도서목록 같은 거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초심자라는 뜻인데, 그 초심자들에게 바로 원전 읽으라며 목록 뽑아주는 사람들은 진짜 양심도 없다. 댁네들도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푸리에 트랜스폼 들이밀면 그게 뭔가 입문서 개론서부터 찾을 것이다. 그거 되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도.

 

세상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는 자연철학에서 출발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진실과 존재 이유를 따져묻기도 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지식과 논리를 방편 삼는가 하면, 올바른 지성으로 인간세계의 총체적인 학문을 구축하고자 했던 고대 철학은 삶을 대하는 바른 생각과 태도를 모색한 윤리학으로 이어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주어진 삶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고귀한 사유와 실천의 여정이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 말이죠!

_ 김재훈, 서정욱,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고대 철학편

 

 

 

 

--- 읽는 ---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 이솜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

스키마와라시 / 온다 리쿠

인생 사용법 / 존 러벅

만화 경제학 강의 / 조립식, 조윤형

이렇게 책으로 살고 있습니다 / 이나이즈미 렌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이미예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강신주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 주경철

나는 장자다 / 왕멍

세상에서 가장 쉬운 회계/ 구보 유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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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30 14: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프던 어머님께서....
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를 때 제가 종교가 있었으면 좀 더 간절하게 어머님의 명복을 빌어줄 수 있겠다싶은데 안타깝워요. 부디 이제 아프시지 않고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쇼님 말씀대로 슬플 땐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것이 또 슬픔을 이겨나가는거라고 생각해요.

syo 2021-08-03 08:4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많이 괜찮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아무렇지 않게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예요. 이제 불의의 습격만 조심하면 되겠습니다.....^-^

2021-07-30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3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1-07-30 17: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슬픔을 번역한다는 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다행입니다. syo님에게 글이 있어서.
근데 달러구트를 읽고 계세요..?

syo 2021-08-03 08:44   좋아요 1 | URL
달러구트! 하도 난리길래 읽었는데! 허허허허......

그레이스 2021-07-30 19: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방법을 알고 계시는것 같아서...!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떠올리게 되는 글이네요.
보내드린 후에도 이별은 계속되는것 같아요
위로를 전합니다.

syo 2021-08-03 08:45   좋아요 2 | URL
말씀 듣고 보니까 생각나서 책장을 보니 <애도 일기>가 꽂혀 있네요.
처음 저거 읽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이제는 좀 다를 수도 있겠어요.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21-07-30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데.. 슬프면서 멋있으면 반칙입니다~

syo 2021-08-03 08:45   좋아요 1 | URL
😎 훗.......

2021-08-01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3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