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 ---
256. 사조영웅전 2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사조영웅전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가 전설의 무공비급 <구음진경>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치열한 욕망이다. 물론 그런 무공이 결국 주인공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무협의 국룰.
오늘은 그 <구음진경>의 일부를 훔쳐내 불완전한 무공을 익혔다가 남편(주인공 곽정이 엉겁결에 비수를 찔러 죽였다!)과 함께 사악한 존재의 대명사로 강호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어느 여인의 슬픈 사연을 한번 들어보자.
“난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녀였지. 부모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어. 그땐 이름이 매약화梅若華였어. 불행히도 부모님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신 후 나쁜 사람들에게 많은 고초를 당했는데…… 사부이신 황약사께서 나를 구해 도화도로 데려가 무공을 가르치고, 이름도 매초풍으로 바꿔주셨어. 사부님의 제자들은 모두 풍風 자 돌림이었거든. 진현풍이라는 사형이 있었는데, 눈썹도 진하고 눈도 컸지. 붉고 잘 익은 복숭아를 따주기도 하고, 무공도 가르쳐주면서 나를 극진히 대했어. 때론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야단치기도 했지만 모두 나를 위해서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사형이 제2대 제자였고, 난 제3대 제자였지. 우린 함께 무술 연습을 하며 자랐는데, 그러면서 은연중에 사형의 마음속엔 내가 있었고, 내 마음속에도 사형이 자리 잡았지. 그러던 어느 봄날 저녁, 복사꽃이 만발하게 핀 날 복숭아나무 밑에서 사형이 갑자기 나를 꼭 껴안았어.”
_ 김용, 『사조영웅전 2』
아오, 풋풋해라! 꼭 껴안고 거기서 땡 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그게 될 턱이 있나.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다음 진도를 빼버린 바람에 그들은 이제 사부한테 걸리면 팔다리 잘릴 판이다. 사부라는 황약사는 동사서독할 때 바로 그 동사東邪인데, 보시다시피 동사의 저 ‘사’는 ‘사악하다’ 할 때도 쓴다.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잃은 후 한층 더 개차반이 된 동사가 행복한 부부의 꼴을 연출하는 매초풍과 진현풍을 보며 허허 그래 이렇게 된 마당에 너희라도 만발하게 핀 복숭아나무 밑에서 성실하게 물고 빨고 막 행복하렴, 하며 그들의 사랑을 응원해 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겠는데 그들이 몰랐을 리가. 그래서 그들은 은밀히 도화도를 나오기로 결심하고 그때 <구음진경> 하권을 훔쳐 도주. 그런데 상권 없이 하권만 가지고 나왔더니 기초도 내공도 다질 길이 없었던 거라, 결국 사람의 백골을 가지고 연공하는 사악한 방법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진현풍과 매초풍은 흑풍쌍살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얻고 강호를 떠돌면서 사람을 죽여가며 불완전한 무공을 익히다가 곽정과 그의 일곱 사부를 맞닥뜨린 것. 이미 원수지간이었던 그들은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그 아비규환의 와중에 진현풍에게 사로잡힌 어린 곽정이 비수로 찔러 그를 죽여버린 것이다. 결국 매초풍은 죽어가는 남편을 안고 도망치는데…….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면서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었지. 남편이 말했어. ‘난 이미 틀렸소. <구음진경>은 가슴에…….’ 이것이 남편의 마지막 말이었어. […]
난 빗속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렸어. 처음엔 남편의 몸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더군. 나도 점점 추워졌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 ‘당신 정말 죽은 거예요? 그렇게 무공을 익혀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예요? 누가 당신을 죽였죠?’ 난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남편의 배에 박힌 비수를 뽑았어. 피가 뿜어져 나왔지. 나도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했어. 내가 옆에 없으면 남편이 저승에서 얼마나 허전하겠어? 난 칼끝을 혀 밑에 갖다 대었어. 혀 밑이 내 급소, 즉 연문이거든. 그때 문득 칼에 새겨진 글씨가 만져졌어. 자세히 더듬어 보니 양강이라고 새겨져 있더군. 아, 양강이라는 자가 죽였다고 확신했지. 이 원수를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어? 죽더라도 우선 양강이라는 자를 죽이고 나서 죽어야지. 그래서 남편의 품속을 더듬어 <구음진경>을 찾았지. 그런데 온몸을 뒤져도 책은 없었어. 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의 가슴을 더듬을 때 문득 피부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
회상이 이에 미치자, 목에서 고통 어린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비가 퍼붓던 그날, 황량한 그 숲속으로 되돌아가 있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만져보니 가슴 피부에 깨알 같읕 글씨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어. 그렇게 걱정하더니 결국 책 내용을 바늘로 가슴에 새겨놓고 책을 없앴던 거야. 사부님같이 대단한 분도 책을 빼앗겼잖아? 가슴에 새겨두면 그가 살아 있는 한 책도 그의 것이 되는 셈이지. 난 칼로 남편의 가슴 부분의 가죽을 벗겨냈어. ‘잘 보관할게요. 이것이 있는 한 난 당신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제 슬프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누가 하하, 웃더군. 웃음소리가 너무 음산하고 공포스러웠어. 알고 보니 내가 웃고 있더군. 난 손으로 땅을 파고 남편을 거기 묻었어. 남편이 내게 구음백골조를 가르쳐줬는데 결국 그걸로 남편을 장사 치른 셈이지.
_ 같은 책
이 모든 게 황약사 그 도른자가 제자들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내 와이프 죽은 이후 도화도에 더이상 섹스는 없다? 아아, 청춘 남녀들이 응? 복숭아 꽃 막 떨어지는 아름다운 섬에서 응? 땀 흘려 무공을 익히다 보면 눈도 맞고 막 그러는 게 섭리 아니냐고 이 양반아. 거스를 걸 거슬러야지……. 그렇게 섹스에 엄하게 굴었지만 정작 자기 딸 황용은 이제 곽정하고 섹스해서 딸 낳고, 그 딸은 또 후속작 신조협려 주인공 양과하고 섹스를 못 한다고 양과의 팔을 칼로 잘라버릴 것이다……. 못하게 하지 맙시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あれはいいものだ
257. 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
이솜 지음 / 필름(Feelm) / 2020
쪼꼬파이 먹으려고 교회 갔다가 엉겁결에 취미 붙여서 주말마다 일독을 거듭, 결국 전역 전까지 최소 20번은 읽은 syo의 최애 <전도서>에 이르기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하시었다(전도서 1장9절). 수없이 곱씹어 봤지만 여전히 그 말은 뭐랄까, 좌절과 위안의 샴쌍둥이 같은 느낌이다. 내가 쓸 모든 글들이(심지어 읽을 것들도) 이미 와 있으리라는 준엄한 경고. 어차피 뭘 써봐야 반복일 뿐인 마당에 글 같은 거 써서 뭣하냐고 따지는 냉소쟁이 장남과, 어차피 이미 한 일을 다시 하는 처지이기는 나같은 설치류나 도 선생님 톨 선생님 같은 공룡이나 똑같은 셈이니 신경쓰지 말고 계속 써내면 된다는 둔한 막내 놈이 멱살 잡고 싸우는 꼴을 두손 묶고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복잡한 심경이 되어 전도서를 읽는 동안, 전투복 입은 까까머리 아이들은 설교 공격을 귓등으로 빗겨 흘리며 격하게 졸고 있고……. 정말이지 헛되고 헛되고 헛된 주말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전부 이미 세상에, 심지어 나무 많이 있다는 것을 같은 장르의 책 몇 권만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 권을 더 세상에 내놓는 기분에 대해 짐작하다 보면, 결국은 전도서 생각에 도달한다. 그리고 답은 없다. 내 선에서는 그냥, 읽을 때는 조금 더 너그럽게 넘어가고(허허, 좋은 말씀이면 되었지) 쓸 때는 최대한 가혹하게 쪼아보는(단어! 어순! 조사! 문장! 문장! 문장, 임마!) 것.
우리는 때때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쉽게 말하곤 한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고. 가깝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배려와 다정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_ 이솜, 『얼어죽어도 아메리카노』
258. 인생 사용법
존 러벅 지음 /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8
좋지만 무난한 격언 말씀에 그친다. 이 책보다는, 그렇지, <전도서>를 추천해본다. 그 책은 정말이지 굉장한 <인생 사용법>이다.
평생 아무런 슬픔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빛이 있다면 반드시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까.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가시가 꽃을 보호해준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없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도 피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너무나도 어리숙하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과 힘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예견하고 있어야만 한다.
_ 존 러벅, 『인생 사용법』
마지막 문장은 좀 괜찮은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슬픔과 고통을 예견하고 있어야만 한다.”
259. 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
말재간 없고 무뚝뚝한 남자가 조용한 블로그에 쓰는 글 같은 문체라서 그 속을 헤엄쳐 지나가기가 수월치 않았다. 일본 에세이에서 자주 보는 바로 그 말투…….
어쩌라고- 하는 감각이 없지 않다. 인물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사는 게 다 이해하기 어렵고 알 수 없는 것들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온다 리쿠는 아주 예에에전부터 syo하고는 안 맞았다.
혹시나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한 대목 옮겨본다. 스키마와라시가 대체 뭥? 싶으신 분들에게 설명도 좀 하고. 꼭 흥미를 유발하거나 설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럼 스키마와라시는 어디에 깃들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스키마와라시. 한자라면 틈 극隙 자를 써서 극간동자隙間童子일까.
갑자기 기묘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벽장 아랫단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상자 옆 좁은 공간에 누군가가(물론 아이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다.
호리호리 가늘고 긴 팔다리가 보이지만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글쎄다. 굳이 말하자면 사람의 기억일까.”
형은 생각하며 대답했다.
예상한 대답과 달라서 나는 당황했다.
“기억에 깃들다니, 어떻게?”
“지금 이야기처럼.”
형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의 기억 사이에 깃드는 거야.”
형이 검지를 머리에 가져다 댔다.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기억을 맞춰가는 동안에 그 녀석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지.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면 정말은 없었던 그 녀석이 서서히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혹시 그런 녀석 없었어?’, ‘있었지?’, ‘맞아, 있었어. 그런 녀석.’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되면 될수록,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 녀석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지지.”
분명 그 녀석은 있었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공유하면 그 녀석은 존재했던 것이 돼.”
_ 온다 리쿠, 『스키마와라시』
260.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
만화, 웹툰, 웹 소설 같은 것에 잠시만 피폭되어도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다. 참신한 상상력, 독특한 구성 능력을 지닌 사람이 세상에 참 많구나. 나는 소설이라고는 웹 소설만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걸 몇 개 읽고 나면,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밍밍해지고, 어지간한 상상력은 다 불충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의 그 느슨한 설정들! ‘꿈을 파는 백화점’이라는 상상력이 참신하게 느껴지신다면 당신은 아직도 행복할 기회가 있습니다. 부디 너무 이른 시기에 만화, 웹툰, 웹소설을 만나지 마시기를.
그런 걸 떠나서, 문장 자체의 미숙함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
내가 몇 마디 했더니 글쎄, 자기들만 날아다니는 꿈은 만들 수 있으니 물건 끊기고 싶지 않으면 참견하지 말라더군요.
_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자기들만 날아다니는 꿈은 만들 수 있으니’ 라는 문장의 어디가 문제인지를 배우는 것은 아마 중학교 때쯤이 아닐지. 저 문장이 등장인물의 발화이며, 그 말을 하는 인물이 지금 살짝 흥분 상태라 어순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개연성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면 좀 더 티를 내야 한다. 저 인물은 지금 한 따옴표 안에 열 문장에 달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나머지 문장들은 전부 구어를 모사하는 ‘소설적 구어체’의 일반 공식에 최대한 부합하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말실수가 아니라는 것.
2권은 읽지 않아야겠다.
261. 세상에서 가장 쉬운 회계학
구보 유키야 지음 / 안혜은 옮김 / 2015
- 일독(1804xx)
- 재독(210802)
262. 만화 경제학 강의
조립식, 조윤형 지음 / 길벗 / 2018
--- 읽는 ---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
사조영웅전 3 / 김용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 리디아 더그데일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 안나미 아쓰시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글쓰기의 쓸모 / 손현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인생 수업 / 법륜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벽이 만든 세계사 / 함규진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도나 저커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