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력
1
내가 나의 언어를 가르친다. 배우는 마음과 가르치는 마음이 같은 마음이어서 내 언어는 내 마음대로, 내 마음이 원래 생긴 결을 따라 점점 진해지고 찐득해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욱 어제 같은 나, 나의 언어는 어제 방향으로 달리는 내일이다. 멈추어 선 시간 위의 머리 둘 달린 짐승이다.
나는 내게 언어를 가르치는 나를 해고할 수 있을까. 내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면, 천 권의 책이 결국 한 권이 되고 만 개의 문장이 결국 한 줄이 되는데, 이 무서운 파국의 바깥쪽을 꿈꾸며, 물이 반쯤 든 양동이를 빙글빙글 돌리듯이, 언제고 원 궤도 밖으로, 접선 방향으로, 튀어나갈 듯 팽팽하게, 구심과 원심이 동적으로 평형하는 그 터질듯한 문자의 세포벽을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2
특정 텍스트의 물질적 구성은 텍스트 자체의 내적 구성보다는 해당 텍스트가 극복한 재현 형식과 더 많이 연관될 것이다. 가정소설은 처음엔 귀족적 글쓰기 전통에 도전했고 이후엔 노동자계급 문화를 거부했다. 나는 이런 사유를 더 밀고 나가 특정 텍스트의 내적 구성은 텍스트가 기호를 통제할 권한을 얻기 위해 상반되는 재현 형식들과 벌이는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겠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의 외부와 대립되는 텍스트의 내부는 없으며,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구분도 없다.
_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이 대목이 바로 50페이지에 달하는 서론의 고갱이이며, 남은 450페이지를 통해 성공적으로 논증된다면 이 책을 단순한 영국소설사 책이 아니라 예술철학 영역의 고전에 자리시킬 키 포인트가 되겠다.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이 문단을 위한 개념의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재현 이전에 일단 재현 대상이 먼저 존재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명제 자체가 실은 특정한 ‘재현 형식’이 구사하는 테크닉이라는 관점, 그게 우리 눈에 당연해 보이는 것은 사실 그 테크닉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효과라는 지적도 인상적이고, 그런 기술을 동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내용 자체, 그러니까 실은 ‘재현 대상’까지 창조해 내는 주체가 바로 ‘재현 형식’이며, 창조되는 ‘재현 대상’은 그 ‘재현 형식’이 다른 ‘재현 형식’과 싸워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구성된다는 것.
또한 재미있는 것이 ‘재현 형식’이라는 용어다. 이는 ‘장르’나 ‘트렌드’, ‘양식’, ‘스타일’ 등 우리가 자주 쓰는 말들이 지시하는 영역과 일부 교집합을 형성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가리키지 못하는 어떤 애매한 지점을 조명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재현 형식’이라는 용어를 적확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남는 독서가 될 것 같다.
3
三은 지난달 초쯤 첫 소개팅을 나간 이후 syo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고는 기회 되는 주말마다 꼬박꼬박 그분을 만나고 있는데, 어제는 네 번째 만나는 날이어서 이제 정식으로 만나보자는 말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었던 것. 그래서 나는 멘트를 만들어줬고, 그것은 “우리 사귀자!”라고 말하기엔 늙었고 “내 아를 낳아 도“라고 말하기엔 아직 섣부른 우리의 현 상태에 맞는 구성으로써, 요약하자면 1. 나는 연애를 하면 이런 이런 걸 하는 그림을 그려왔는데 2. 그걸 당신하고 하면 좋겠어요, 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어제 집에 돌아온 三은 굉장히 애매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황을 들어보니 이게 마인드컨트롤과 시뮬레이션 없이 현장에 나갔다가 준비된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던 것. 1을 애매하게 내뱉은 상태에서 2를 시전하는 바람에 구조가 와르르 박살 난 모양이다. 그래서 들은 대답이 ”지금은 더우니까 바다는 다음에 생각해 봐요“였던 것.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한 걸 보면 까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만날 때마다 다음에 만나면 뭐 할까 하는 대화를 나누었던 사정을 떠올려 보면 아무래도 저건 고백이 고백으로 인식되지 않은 상황 같다. 그렇지만 마음은 어느 정도 전달이 된 것 같고. 손잡고 집 근처까지 바래다 주겠다던 당초 계획은 당연히 실행이 안 됐고. 그래서 목하 그들은 지금 애매하다.
세상에는 이렇듯 애매한 것이 참 많다.
그렇지만 저들의 애매한 관계보다 더 슬픈 것이 바로,
--- 읽은 ---
268. 애매한 재능
수미 지음 / 어떤책 / 2021
애매한 재능이다. 저들이야 다음주 쯤 되면 뭐가 됐든 되겠지만, 애매한 재능은 어떻게도 되지 않는다. 내가 내 재능이 애매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잘 되면 어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싶어서 죄책감이 들고, 못 되면 이게 다 재능이 없어서 그렇지 안 될 거야 난 아마, 싶어서 패배감이 드는 것. 때로 애매한 재능은 없는 재능보다 더 슬프기도 하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재능이 없는 것을 알기 어렵다. 재능의 유무를 알아채는 데도 적정량의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재능이 없어…….“ 라고 말하며 슬픔에 빠지는 사람들은 실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재능, 그러니까 충분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포기하거나 밀고 나가거나 결정을 해야 하는데, 경험상, 포기하면 편하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넘보지 않으면 시간은 걸려도 조금씩 마음이 낙낙해진다.
“신춘문예에 계속 도전할 때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뭘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 개성을 찾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죠. 어쨌든 글의 형식으로 세상에 접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단련된 글쓰기 재능으로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작가로 살면서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고는 대학 동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언니는 나를 ‘범재’라고 표현했다.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찾아서 하는 사람’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그 말을 듣고는 ‘맞아, 난 천재는 아니지’ 씁쓸했다. 그 말이 내게 별 재능이 없다는 말처럼 느껴져 서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범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왔다.
범재.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보통의 재주를 가진 사람.
[…]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은 얼마나 분명한 경지인가.
_ 수미, 『애매한 재능』
269.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
- 일독(분명히 이걸 읽긴 읽었는데)
- 재독(210806)
처음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때 했던 생각을 이번에도 역시 했다. ‘철학’ ‘시’ ‘읽기’는 싹 다 괴롭지. 아무렴, 정말이지. 괴로우면 안 해야 하는데 왜 하는 것이지, 인간은 왜 그런 것이지. 몰라, 하지만 그런 것이지, 인간이란 그런 것이지, 그런 것이 인간이지.
가뜩 철학도 어렵고 시도 어려운데, 철학으로 시를 읽는다거나 시로 철학을 읽는다거나 하는 변태같은 착상을 왜 하는 걸까? 그것이 syo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필요나 효용이 있긴 있기 때문일텐데 말이지……. 아직 그건 알듯도 말듯도 하다. 갈 길이 멀다.
10년 된 책이고 모르긴 몰라도 첫 읽기도 대충 그 정도 된 것 같은데, 이번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내 인생이 뭐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다소 숙연해지긴 했다. 그래도 확실히 읽기는 쉬웠다. 아, 내가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다지 어렵다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 내가 그렇지…….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스처를 배워서 그것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아! 저 친구는 저렇게 자신의 삶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는구나. 나도 그래야지. 이제 더 많이 내 감정과 생각을 돌아봐야겠다.” 이제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선생님이나 정신적 멘토로 숭배하지 마세요.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삶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언젠가 여러분도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_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270. 사조영웅전 3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3권의 포인트는 주인공 곽정이 이제사 주인공다운 활약을 펼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이 세계관에서 고강하기로 손꼽히는 무공인 “항룡십팔장”을 전수받는 대목에 있다. 동사서독이라는 말은 영화 제목으로도 쓰여서 유명한데 풀 버전은 “동사서독남제북개중신통”이다. 그들은 이른바 천하오절이라는 이름의 다섯 고수인데, 이 시점에 명실상부 최강자였던 중신통 왕중양은 이미 사망했고, 남은 사절이 다음 최강자를 가릴 날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항룡십팔장은 네 고수 중 북개(北丐, 북쪽의 거지라는 뜻. 대륙의 왕초, 삼백만 중국 거지의 총대장이시다) 홍칠공의 비전 무공으로서 그 이름만 봐도 용이니 십팔이니 겁나 쎌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겁나 쎄다. 곽정은 목하 동사 황약사의 고명딸인 황용과 썸을 타면서 유람 중이었는데 황용 이 소녀는 세상 모르는 게 없고 못 부리는 기예가 없으며 뭐든 한번 들으면 척척 외워버리는 이 세계관 최고클라스 똑똑이인 것. 갑자기 튀어나와서 닭고기를 좀 내놓아보라고 따져드는 저 거지 영감이 딱 봐도 자기 아버지와 동서남북하며 세상을 나눠 먹는 홍칠공이거든. 그래서 황용은 꾀를 부려 그로 하여금 곽정에게 항룡십팔장을 전수하게 만든다. 홍칠공이 무공 좋고 인품 좋고 다 좋은데 딱 하나, 식탐이 지나치게 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황용이 세헤라자드 전법을 동원, 끝나지 않는 요리의 향연으로 홍칠공을 붙잡아 놓고 곽정 쿵후 과외를 시킨 것이다. 홍칠공은 원래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마음이 동하면 3일을 들여서 자기 무공 딱 한 초식만 전수하고 떠나는 습벽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백주부나 빅마마나 뭔 킴 뭔 킴 못지 않은 황용의 요리실력과 곽정의 우직하(다고 쓰지만 멍청하다고 읽느)ㄴ 성격의 콤비네이션에 말려들어 항룡십팔장의 무려 열다섯 초식을 전수한 것이다! 와, 항룡십오장! 그게 얼마나 곽정과 어울리는 무공인가 하면,
초식 하나를 배울 뿐인데도 한 시진 이상을 소비했다. 곽정이 미련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내공의 기초는 이미 잡혀 있는 터라 이처럼 간결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심오한 무공을 배우기에 적당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하더니 두어 시진 후에는 기본이 잡혀갔다.
홍칠공이 덧붙였다.
“그 아이의 장법은 허와 실 가운데 허를 훨씬 많이 쓰는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겨루다 보면 틀림업시 계략에 빠져 벗어날 수가 없지. 그 애가 쓰는 수많은 허를 받아내고 이번에는 실이다 생각될 때도 허가 나올 거야. 반대로 허인 줄 알고 방심할 때 실을 쓰는 거지.”
곽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장법을 깨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은 바로 아예 허실을 따지지 안흔 것이다. 상대방이 장법을 쓰면 허든 실이든 그냥 항룡유회를 한 번 쓰는 거지. 이 초식을 보고 나면 장법을 거두고 초식을 취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면 깨뜨리는 거야.”
“그다음에는요?”
홍칠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그 다음이야, 이 녀석아? 그 아이가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지금 가르쳐준 초식을 막지는 못한단 말이다!”
곽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지 못하면 다칠 거 아니에요?”
홍칠공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장력을 뿜어낼 줄만 알고 거두지를 못한다면 힘의 경중과 강온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어찌 천하에 둘도 없는 장법, 항룡십팔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곽정은 “예, 예”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을 굳혔다.
‘내가 쓰고 거두는 것을 모두 배우지 못한다면 황용에게는 절대 시험해보지 말아야지.’
_ 김용, 『사조영웅전 3』
곽정은 곽정이다. 새끼.
271. 어려웠던 경제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가미키 헤이스케 지음 / 이성희 옮김 / 김종선 감수 / 팬덤북스 / 2020
소략하다. 은행이나 병원, 주민센터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읽으면 좋다. 한 꼭지 읽고 고개 들어 전광판에 내 번호 떴나 보고.
272.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주경철 지음 / 김영사 / 2021
여기에는 우리의 삶이 개선될 수 있고, 사회는 진보할 수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 믿음은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고대나 중세에는 사회 전체를 개선하고 국가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꿔나간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주의 문학작품은 근대의 기획이다. 비록 스토리가 허무맹랑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현실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깔려 있다. 유토피아적 상상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상적인 방향을 타진하는 탄탄한 꿈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 가상의 국가 구조 모델을 구상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주의 작품은 정부 구성, 경제 작동 방식, 종교 제도부터 음식과 의복, 남녀 간 교제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모든 일을 꼼꼼히 디자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_ 주경철,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그러니까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문학은 계속 쓰여야 하고 우리는 오늘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애들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것.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읽어 보자는 자세는 반쯤 무익한 것이다. 유토피아 문학만큼은 고전의 시간축이 물구나무를 섰다는군요. 덮으세요. 토머스 모어를 덮고, 우리 시대의 SF를 읽자구요!
--- 읽는 ---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장우진
소설의 정치사 / 낸시 암스트롱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잘 먹고 잘 싸운다, 캡틴 허니 번 / 김여울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표범처럼 멋지게 변신하는 삶, 사기 / 황희경
허삼관 매혈기 / 위화
주민의 헌법 / 박주민
인생수업 / 법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