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habilitation
그냥 숨만 쉰다. 그것도 일이다. 가만히 사는 것도 가만히 있으면 절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한번 궤도를 세게 이탈하고 나면 다시 무심無心과 상심常心을 찾기 위해 재활이 필요하다. 하루에 몇 통씩 전화를 받는다. 어제는 엄마 옷들을 수거함에 내놓는다고 잠깐 핸드폰 없이 나간 사이에 누나가 나한테 전화 2번, 동생에게 전화 1번을 했던 모양.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울리는 전화를 동생이 받았더니 대뜸 왜 전화를 안 받냐고 소리를 높이는 누나. 둘 다 안 받아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고.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저 사람들은 정말 우리를, 특히 나를, 잘, 아니 하나도 모르는구나 싶었다.
syo에게 슬픔은 무작정 부딪혀가며 이겨내는 것도 아니고, 슬픔 바깥의 다른 것에 몰두하며 이겨내는 것도 아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은 슬픔 속에 길을 낸다.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슬픔, 가치 있는 슬픔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으로 길을 내어 그 안에서 슬픔을 걷는다. 식어가는 엄마의 몸을 만지며 실컷 울다가, 너무 예쁘게 나와서 도리어 서글픈 영정을 바라보다가, 엄마의 가루를 폭넓은 붓으로 쓸어모아 유골함에 담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syo는 생각했다. 나는 이 장면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둘러싼 풍경을,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마음을 둘러싼 풍경이 멈추어 있는 이 순간을, 언젠가 쓰게 될 거라고. 그 지면이 종이일 수도, 픽셀일 수도, 혹은 내면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이 순간은 쓰일 거라고. 그것은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그렇게 될 거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순간을 문장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모든 번역은 읽기 위해 이루어지듯, 번역된 슬픔은 견뎌지는 것. 그것은 슬픔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입을 틀어막거나 아름다움을 위해 슬픔을 남용하는 일이 아니라, 슬픔에 길을 내어 언제고 그 길을 걸어낼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고 믿는 이가 슬픔 속에 사는 방법은 이렇다.
내가 번역한 나의 슬픔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때로 그것에 울고 격침될 수 있겠으나, 한번 난 길이 반복해 걸음으로써 더 분명한 길이 되듯이, 슬픔은 슬픔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나는 조금 더 선명한 사람이 되어 살 것이다.
--- 읽은 ---
251. 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다. 슬로베니아라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파편적으로 귀에 익힐 기회가 있는 류블랴나(수도다)라는 도시 하나 정도 알고 있어도 많이 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프투이’라는 도시도 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에는 ‘폴리트비체’라는 곳이 있고, 루마니아에는 ‘클루지나포카’라는 데가 있다. 좀 더 지명도 있는 나라 이탈리아에는 ‘트리에스테’, ‘우디네’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곳들. 지구는 참 넓고도 꼼꼼하구나.
책읽쟁이로서 도시마다 한 권의 책을 배치한다는 컨셉에 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라면 이 도시의 가슴팍에 무슨 책을 달아줄까. 내가 가본 도시들(모두 조선의 도시들)을 주욱 떠올리며, 아, 하나의 도시에 한 권의 책도 붙일 수 없다면 나는 책도 도시도 제대로 읽고 걷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냥 인생은 그대로 인생이다.
지독하게 자연스러워 지독해서 운명이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오히려 괜찮아지는 그런 운명의 인생. 소설의 결과가 과하게 슬프거나 극단적으로 처절해도, 읽는 이의 삶이 그보다 더 슬프거나 처절해서 공감은 되어도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황을 깨달으며 폴란드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 맛이 썼다. 마치 발치카 9번처럼.
여전히 내 주변의 관광객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아주 보기 좋게 광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형형색색의 건물들도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삶의 차이는 어쩌면,
딱 맥주 맛의 차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발치카 No.9》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들판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맞다.
우리 삶의 들판에도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지금도 불고 있고, 앞으로도 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맥주도 인생도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 언제나 부는 바람 앞에서.
_ 강병융, 『도시를 걷는 문장들』
252.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
좋은 문장에 대해 말하는 책을 계속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뭔가 많이 뽑아낼 필요도 없다. 한 권에서 딱 한두 가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좋은 문장의 공식들을 흔들어 미묘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한두 가지의 지침만 얻으면 된다. 선생님께는 선생님의, syo에게는 syo의 좋은 문장이 각각 있겠으나, 그것은 불변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변했다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 변화의 궤도를 칭할 때, 발전이라는 선형적 이름을 붙이기도 어색하고 나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냥 춤을 추는 것이다. 춤을 추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어느 순간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그 순간 바로 거기서 최대한 아름답고 싶은 마음을 욕심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과 앞뒤 순간들의 연속을, 바로 여기와 아까 거기와 다음의 저기 사이의 연결을, 그러니까 움직임 전체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은 욕구에 가깝다. 나는 더 나아지고 싶지만, 스스로 나아갔다고 생각한 걸음을 타인이 퇴보라고 판단하는 위험으로부터 완벽히 달아날 수 없음을 안다. 누가 뭐래도 그저 내가 보기에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저 내가 보기에 좋은 문장을 생각하며 추는 춤의 궤적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쓰는 일을 삶에 뭉친 사람에게, 완벽한 문장에 도달한다는 것은 마치 완벽한 삶이라는 게 있기라도 하다는 말처럼 허망하고 달콤한 환상이다. 신기루다.
퇴고할 때는 자신의 글이 상상력의 요소를 적절하게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글을 읽다 보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접하게 되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는지, 독자의 입장에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콘텐츠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뜻밖의 낱말이나 멋들어진 표현 하나가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서며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_ 윤태영,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
253. 사조영웅전 1
김용 지음 / 이지청 그림 /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 김영사 / 2020
무협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주인공 곽정의 탄생. 이 둔하고 얼타기 바쁜 영웅이 이제 남은 7권의 책에서 종횡무진하며 독자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얘만 보면 진짜 숨이 막힌다. 신필 김용 선생님이 배출한 스무 명 남짓한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정석에다 인간승리의 표번인데도 어쩐지 인기는 없는 희한한 히어로.
심지어 소질머리도 없다. 웬만한 무협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재능은 있는 법인데.
“너도 배웠느냐?”
곽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멍청하게 서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칠괴는 타뢰가 무척 똑똑한 반면, 곽정은 아둔한 것 같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한소영은 장탄식을 하며 눈시울을 붉혓다. 전금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저들 모자를 강남으로 데려가 구 도장에게 맡깁시다. 내기는 우리가 진 것 같아요.”
주총도 한 마디 했다.
“쟨 자지리 너무 형편없어. 무공을 배울 만한 재목이 아니야.”
한보구도 한숨을 내쉬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싹이 노란 것 같아.”
칠괴는 강남 말로 한마디씩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소영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타뢰는 곽정의 손을잡고 희희낙락 집으로 돌아갔다.
강남칠괴는 6년 동안 갖은 고생을 감수하며 겨우 곽정을 찾아내 뛸 듯이 기뻤는데, 그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사실에 다시 좌절감을 맛봤다.
_ 김용, 『사조영웅전 1』
자, 저렇게 모두에게 좌절감을 준 미련퉁이 곽정이 어떻게 최강자 동사서독남제북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가 되는지 지켜보자. 남은 7권을 읽으며…….
254. 논어에 반하다
김석 지음 / 북오션 / 2018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입니다. 그런데 원문이 동어 반복의 간단한 문장인데다 공자의 정치적 성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첫째는 이를 ‘존재 명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이고, 아비는 아비고, 자식은 자식이다’로 읽는 것인데, 이는 ‘위계적 신분질서 그 자체를 강조하고 이를 공고히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이 됩니다.
둘째는 앞의 일반적 해석처럼 ‘당위 명제’로 읽는 것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조건 명제’로 보는 것입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가 신하다워지고, 아비가 아비다워야 자식이 자식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지배층이 모범을 보여야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솔선수범의 논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넷째는 ‘명령 명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임금이 임금답지 못해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해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으로 맹목적으로 충효를 강요하는 그야말로 봉건적인 논리입니다.
이처럼 《논어》의 문장은 매우 압축적이어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뜻이 크게 달라지고 보수적으로도 진보적으로도 해서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 말을 한 공자의 얼굴도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_ 김석, 『논어에 반하다』
정말 이렇다. 논어는 하나일진대 검색하면 무한한 논어 책이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논어를 읽는 방법이 다양해서이다. 똑같은 책이 하나 없다. 한문이 원래 좀 그런 듯. 그래서 동양철학 개론서 읽기는 서양철학 개론서 읽기와 양상이 조금 다르고, 이것저것 읽어도 나쁘지 않다. 게중 마음에 드는 해석을 하는 책이 나타나면 몇 번 읽어도 좋겠다.
255.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고대 철학편
김재훈, 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
요즘은 만화로 본다는 식의 책들도 꽤 읽을만해진 것 같다. 아니면 내 수준이 지속적으로 퇴락중이든가.
어쨌든 애들한테는 이런저런 좋은 책이 많아진 세상이다. 라떼는 철학 같은 거 보려면 원전번역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냥 읽지 말라는 뜻이다. 추천도서목록 같은 거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초심자라는 뜻인데, 그 초심자들에게 바로 원전 읽으라며 목록 뽑아주는 사람들은 진짜 양심도 없다. 댁네들도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푸리에 트랜스폼 들이밀면 그게 뭔가 입문서 개론서부터 찾을 것이다. 그거 되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도.
세상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는 자연철학에서 출발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진실과 존재 이유를 따져묻기도 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지식과 논리를 방편 삼는가 하면, 올바른 지성으로 인간세계의 총체적인 학문을 구축하고자 했던 고대 철학은 삶을 대하는 바른 생각과 태도를 모색한 윤리학으로 이어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주어진 삶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고귀한 사유와 실천의 여정이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 말이죠!
_ 김재훈, 서정욱,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 서양 고대 철학편』
--- 읽는 ---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 이솜
슬픔이여 안녕 / 프랑수아즈 사강
스키마와라시 / 온다 리쿠
인생 사용법 / 존 러벅
만화 경제학 강의 / 조립식, 조윤형
이렇게 책으로 살고 있습니다 / 이나이즈미 렌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이미예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강신주
어떻게 이상 국가를 만들까? / 주경철
나는 장자다 / 왕멍
세상에서 가장 쉬운 회계학 / 구보 유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