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냐 감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1

 

금토, 서울 경기 일대 부동산 문턱을 갈아 마시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필연적으로 읽은 책도 거의 없기도 했고,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신세 처량하여 북플이고 뭐고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더란 말이지요? 그러다 방금 뭐 새 책 나온 거 없나 어슬렁어슬렁 알라딘에 들어왔다가 실수로, 습관이 무섭지, 정말 자동적으로 내 서재를 눌렀다가 울 뻔. 눈 깜짝하면 syo의 코를 베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서울경기일대를 어리숙한 syo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동안, 많은 서재이웃 분들이 진심어린 응원의 댓글을 달아놓으신 것이 아닌가. --- 어쩐지 막 마음속에 용기가 피어올라 부동산 사장님들의 노련한 기술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더라니. syo가 사랑한다네요, 여러분…….

 

 

 

2

 

결국 가계약한 집은, 내부는 물론 외관까지 새로 공사를 마친, 딱 봐도 허름해 보이는 집들만 가득한 그 골목의 미친 매물이라 할 수 있는 깔끔한 집이다. 지하철역까지 도보 15분은 걸리니까 역세권이라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인류를 어여삐 여긴 신께서 마을버스라는 은총을 내리셨으니 아직 희망을 버리긴 이르다. 그러나 세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첫째, 우리 집이(아직 아니다) 산간지대(……농담 같죠?)의 꼭대기 바로 아래 블록에 위치해 있다는 것. 부동산 사장님이 syo을 차에 싣고 그 집을 향해 달려갈 때, ,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에버랜드의 추억이 떠올랐다. 거기 롤러코스터 정말 끝내주는데, 첫 낙하지점까지 딱 이 각도로 올라갔었어. , 방 보러 가는데 설렌다. 내려 보니 너무 탁 트인 시야. 정말 너무, 너무 탁 트인 시야……. 저 건너에 보이는 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게 지금 그 산의 정수리인 것은 확실했다. 에게 우리 이참에 고랭지 농업을 통해 쏠쏠한 부수입을 올려보는 게 어때? 라고 물어보려 했는데, 입을 채 떼기도 전에 이 이쪽을 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래도 배추가 좋겠다는 뜻 같았다. 가로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는 집들은 대체로 평등하나, 세로 골목은 그야말로 계층구조다. 마르크스적인 동네가 아닐 수 없군. 짱이다. 각도와 세기에 관한 정교한 계산을 마친 다음 아래방향으로 대차게 한번 넘어지면, 최단거리 도보로 1422걸음 걸린다는 이마트까지 단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마트 자동문을 밀고 굴러들어오는 나를 맞이하는 종업원의 특별 인사멘트도 기대할 수 있겠다. “명복을 빕니다, 고인님.”

 

둘째, 택배 받을 사람이 없다. 이걸 사소한 문제라고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만, 사실 아파트라도 들어가지 않는 한 도리가 없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해서 택배 시킬 줄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택배상자의 뜨거움

 집에 계시냐고 계시냐고 속삭이는 기사님

 돌아서는 그 등 뒤에서 터지는 쌍시옷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셋째, 근방에 도서관이 없다. 가장 가까운 곳은 송파도서관으로서,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40분이 더 걸린다. 결국 퇴근 후 강동도서관에 들러서 잽싸게 빌리든지, 2주에 한번 큰 가방을 메고 1시간 20분씩 버스를 달려 남산-용산 쌍도서관(재밌게도 걔네는 횡단보도 하나 건너 맞은편에 있습니다)에서 책을 맥시멈까지 업어오는 수밖에 없는가. 사실 출근하기 시작하면 그조차 다 읽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니 이건 정말 소소한 문제 같긴 하다.

 

 

 

3

 

어쨌든 가계약은 마쳤고, 이제 남은 일은 은행의 손에 달려있다. 사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만사가 금융 권력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니 뭐, 새삼스럽다 하겠다. 모쪼록 영농의 길을 허하소서…….

 

 

 

 

- 읽은 -

+ 9번의 일 / 김혜진 : 124 ~ 258

 

 

- 읽는 -

- 돈의 인문학 / 김찬호 : 98 ~ 184

- 안 느끼한 산문집 / 강이슬 : ~ 121

-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마시모 피글리우치 : 98 ~ 141

- 오릭스와 크레이크 / 마거릿 애트우드 : ~ 64

-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주네요 / 허재삼 : ~ 82

-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권김현영 :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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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5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5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19-12-15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금자리 마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택배는 부피 크지 않으면 회사에서 받으시면 되죠 뭐...ㅎㅎ

syo 2019-12-16 23:35   좋아요 0 | URL
아직 가계약일 뿐인걸요 ㅎㅎㅎ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네요. 신입이 눈치는 좀 보이니까, 한동안은 같이 사는 놈 회사로 보내야겠어요 ㅋㅋㅋ

2019-12-15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6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2-1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웬만한 택배는 부러 회사에서 받습니다. 집으로 다시 가져가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그러는 까닭은 타인에게 집주소와 이름을 알리는 것이 싫기 때문인데요, 택배는 굳이 집으로 시켜야 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사무실 배송으로 어느 정도 쇼부치면 될것입니다... 라고 쓰지만, 흐음,
일터의 분위기가, 그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가계약 하였다니 앞으로 남은 일정도 화이팅입니다. 그나저나 강동도서관.. 에서 우리는 간혹 마주칠 수도 있겠군요. 책 고르고 있는 쇼님 등 뒤로 다가가,
안녕? 여기서 보네요..
막 이러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12-16 23:39   좋아요 0 | URL
과연 은행이 저희의 가계약을 찐계약으로 드리블해 줄 것인가.....
보름 정도는 눈치를 살살 보면서 선배들이 일터에서 택배를 수령하는지 눈여겨보아야겠어요.
그때까지는 친구 회사로 배송을 ㅋㅋㅋㅋㅋㅋ

등 뒤에서 갑자기 불려지면 깜짝 놀라겠군요.
강동도서관에서는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고 책을 골라야겠어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12-1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끝에 가까운 동네, 공기 맑고 조용한 장점이 있습니다...(라고 하늘 받든 이라는 동네 이름 가진 곳 사는 주민이 스스로 위로중...즈이 동네도 해발고도 백 몇 미터래요...)

syo 2019-12-16 23:39   좋아요 1 | URL
하늘 받든 그 동네에 살고 계시는군요. 그 동네도 만만한 데가 아니지요. 마을 버스를 타고 한번 올라가 본 적이 있었는데, 와.....

잠자냥 2019-12-1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가난하다고 해서 택배 시킬 줄을 모르겠는가에서 진심 빵터졌습니다. ㅋㅋㅋㅋ 부디 무탈한 택배 라이프가 펼쳐지길 기원할게요~

syo 2019-12-16 23:4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역시 인생의 묘미는 택배에 있는 것인데 말이지요. 언제나 그랬듯, 반드시 해답을 찾을 거라고 생각합니다^_^

2019-12-15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6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19-12-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쿡에서는 전망이 집값에 아주 중요한 요건이랍니다. 산 꼭대기에 있을 수록 비싸죠. 시야가 탁 트인 곳이라니 퇴근때는 힘드시겠지만 출근하는 발걸음은 활기찰 거 같아요. 내리막을 탁 트인 경관을 보며 출근하니까요.
이제 가계약을 하셨으니 이사까지 남은 일정 모두 원활하게 이뤄지기를!

syo 2019-12-16 23:42   좋아요 0 | URL
눈비 오는 날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절뚝 미끄러지면 사망까지 손쉽게.....
무탈하게 입주까지 이어지기를 저도 바라마지않습니다.
응원말씀 감사해요! ^-^

목나무 2019-12-16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이 페이퍼 제가 작성한 걸로 잠시 착각했네요.
저도 지난 주말 이사갈 곳 정해서 가계약까지 마쳤습니다.
제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역에서 걸어야 하고 산과 인접한 언덕배기에 있는 저와 동갑인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정했네요.
도대체 이곳 사람들은 눈이 올 때 저 가파른 길을 어떻게 걸어서 출퇴근을 할까 싶었는데..알고보니 그곳은 이 동네 알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대부분 자차로 이동을...ㅎㅎ;;;; 저는 그냥 제 걱정만 하면 되겠더라구요. 아이젠을 하나 장만해야 하나...--;;

관리실에서 택배를 받아주기는 한다는데.... 그냥 관리실 문밖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택배를 보니 분실의 위험도 걱정이 되고.... 크지 않은 물건은 사무실로 받아야하나 싶기도 하구요.

암튼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도 걱정거리가 많아 주말엔 쉬이 잠이 안오더라구요. --;;
이 글 보니 syo님도 지금 딱 그런 심정이지 않을까......
진심 마음이 통하는 주말을 보냈구나 싶어 말이 좀 길었어요. ^^;

대출심사 잘 통과하실 거에요! 걱정마시고 서울살이에 대한 설렘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져보시길 바랄게요. ~

syo 2019-12-16 23:4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같은 시간 어느 하늘 아래 같은 일을 하고 있었군요, 우리가요.
지세가 비슷한 곳에서 살게 되었다니, 어쩐지 반갑고 눈물납니다.
근데 저희가 살 곳은 그냥 일반 주택이라 관리실도 없고, 택배 기사님과의 무한한 엇갈림이 예측됩니다.....
아, 정말 얼른 입주해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네요.
설해목님의 새로운 주거지 생활도 행복한 순간만이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ㅎㅎㅎㅎ

stella.K 2019-12-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같은데선 달동네도 엄청 낭만적으로 그리던데 막상 현실과는 엄청 달라요. 그죠?
전망 좋은데서부터 시작하는 걸로 위로삼아야겠네요.
비 오는 날은 그렇다고 해도 눈 오는 날이 좀 걱정이긴한데 서울은 눈이 와도
내려 쌓일 정도는 아니니까...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지 않습니까? 그맘 가지고 사시면...

그래도 공무원인데 나라에서 지원 좀 안 해주나...ㅠㅠ

syo 2019-12-16 23:46   좋아요 0 | URL
전망, 그거 한순간이지요. 리버뷰 오션뷰도 아니고, 그냥 마을뷰.....
저야 뭐 원체 서울 좋아하니까요. 몇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사는 건 마냥 즐거울 것만 같습니다.

아직 발령도 안 난 놈까지 챙겨주기엔, 공무원 좀 많으니까요 ㅎㅎㅎ

갱지 2019-12-1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금자리 갱신 축하드려요:-)!

syo 2019-12-16 23: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갱지님! ^-^

블랙겟타 2019-12-1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뒤늦게 글을 보고 남기게 되네요.
추운 날 집을 구하시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서울 아닌 곳에서 쭉 살아온.. 게다가 아파트에서 쭉 살아왔으며 그나마 혼자 잠시 살땐 학교 근처 원룸에 살았던게 다였던 누구(?)가 이 글을 읽기로서니 서울에 그렇게 다양한 집이 있는줄 몰랐으며 택배걱정이라는 것이 멀게만 느껴지는데요...
우물안 개구리인 제자신을 발견하게되는.. ^^;;
저는 우물을 나서는 순간 분명 코 베일꺼에요..ㅠㅠㅠ
syo님은 저와는 다르게 빠르게 정착하시리라 믿숩니다!

syo 2019-12-20 20:10   좋아요 0 | URL
응? 이거 언제 달았어 ㅎㅎㅎㅎㅎ
블랙겟타님 있는 집 자식이셨군요..... 우물안 있는자식.....
코 베이기 전에 제가 코 지키는 연습 시켜드릴게요. 으하하하하.

라로 2019-12-2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는데 이런 다이나믹한 글이라니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어쨌든 이사하시는 거 저는 축하드리고 싶어요. 그전에 고시원(?)에 사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넘 오랜만에 와서;;;;)
저는 그런 높은 곳에서 살아 본 적이 없지만 아주 예전에 결혼 전에 친정에 살때 저희 집이 이층이었는데 착한 우체부 아저씨께서 이층까지 올라와서 우편물을 전해주셨지요. 그러다가 우체국 적금이 나왔을 때 우체국 적금을 가입하게 되었지만.^^;;
젊으니시니까 매일이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저보고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라고 하면....ㅎㅎㅎㅎ
앞으로 출퇴근 길에 벌어지는 재밌는 글도 많이 올라 올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암튼 결론은 토비님의 젊음이 부러워,,,뭐 이런 내용입니다. ㅋ
요즘 한글이든 뭐든 글을 안 썼더니 맥락이 없어요.ㅠㅠ
추운데 조심해서 이사 잘 하세요. (가계약은 잘 성사되겠지요!)

syo 2019-12-20 20:11   좋아요 0 | URL
라로님ㅎㅎㅎㅎ
고시원은 탈출했고, 친구랑 투룸 하나 구해서 같이 살려고 계획중입니다. 가계약은 들어갔는데, 모르지요, 은행 손에 달린 일들은 마지막까지 방심하기 어려워서.....
저도 이제 젊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자주 들르시고 라로님 서재에서 자주 한글 구사해 주세요.
보고 싶단 말이에요....
 

 

침묵의 겨울

 

 

1

 

, 사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기란 언제나 있고 어디에나 있고 지치지 않고 있는 법이지만, 지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임무인건지, 허덕이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계속 방을 알아보고 있지만 결국 원하는 곳에서 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아무래도 투석을 계속 해야 할 모양이고, 항암을 시작할 때가 지났는데 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스케줄이 또 밀렸다. 그땐 내가 대구에 없을 텐데. 하려했던 공부는 뒷전이 되어 남은 2019년은 사실상 쓰레기통에 처박은 거나 다름없다. 보고 싶은 사람은 늘어 가는데 볼 기회가 마뜩찮아 대체로 혼자다. 몸은 저절로 불어나지만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하러 나가질 못하니 대책이 없다. 추워서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음 핑계 댈 거리가 없었겠다. 사랑하는 동안에도 웬만큼은 외로워서, 외로운 동안에도 웬만큼은 사랑하는가.

 

에픽테토스의 결정적인 요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상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정확히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집중한다그럴 게 아니라 인생의 방정식에서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스토아주의자들은 말한다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항해에 나섰고 거기에 정당한 이유들이 있는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그리고 우리 배(비행기)에 태울 최상의 선원들(항공사)을 탐색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그리고 관련된 준비 사항들을 챙겨야 한다그래서 스토아주의로부터 얻는 최초의 교훈 하나는 우리가 힘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주의와 노력을 집중하되그런 다음에는 우주가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이것이 많은 에너지 소모와 많은 걱정을 둘 다 덜어줄 것이다.

마시모 피글리우치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화창한 아침이 차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그래서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볼 때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영혼의 편지

 

 

 

2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즉시 멍청이가 되면 곤란하다.


 


사람들은 로맨스 서사의 판타지로 배워온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내가 하는 사랑은 이토록 구질구질한데 영화 속 사랑은 감미롭기만 하니번번이 내가 어[57]딘가 잘못된 사람처럼만 느껴진다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만 같고내가 하고 있는 이것은 어떤 실수이거나 고행이거나 투쟁처럼만 느껴진다.

김소연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해서 삶의 어느 시기에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밀란 쿤데라농담

 

 

 

3

 

간혹 우리는 누군가의 모든 것을 원하기도 하지만 결코 모두의 모든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충만이 아니라 피로의 영역에 닿는다. 그래서 이쪽의 예상보다 더 서둘러, 지나치게 활짝 열리는 사람은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것은 일종의 월권이고, 침범처럼 느껴진다. 모두 가운데 누구를 누군가로 만들지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내 권리고 내 취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김세희항구의 사랑

 

 


4

 

지금 세상에는 내 이별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는 선명한 차이가 있다. 애처롭다는 표정을 맞닥뜨리면 별일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데, 어쩌면 이 대답 속에 들어있는 슬픔의 총량이란 진짜 별일인지 아닌지 하고는 무관하게 딱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은 별일이라면, 별일이라서 슬프다. 진짜로 별일 아니면 와, 어떻게 이게 별일 아닐 수가 있지? 싶어서 슬프다. 뭐 어떻게든 슬플 일인가 봄.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오 숲길은,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때가 있어서

 두고 가는 사람을 짐작하지 않지만

 사람과 다른 과일도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황학주막 어두워지는 숲길〉 부분

 



5

 

이번 주에는 경기도 어딘가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올 예정이다. 부족한 예산은 물론 복잡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얻어낼 수 있는 대출이라는 제약조건까지 덤으로 안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꼼꼼하게도 지치게 한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집들의 상태와, 어쩐지 눈을 피하며 허공에다 설명 들어가는 중개소 사장님과, 그 흔한 자동차 하나 없어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집과 집들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내 불쌍한 발바닥과, 눈치 없이 바람 부는 겨울과, 모든 조건이 완벽한 집을 만났는데 등기부 등본을 떼보니 시궁창이라 여기에 돈을 부으면 이건 뭐 전세금이 아니라 기부금이겠구나 싶을 때 느껴지는 허망함과, 그렇게 자꾸자꾸 밀리고 밀려서 점점 근무지에서 멀어져만 가는 나의 동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지칩니다.

 

술도 안 먹는데 술이 고프네요.

불효잔데 엄마 보고 싶네요.

 

 

거실에서 엄마 도롱도롱 코 골며 자네요.

 


그러니 작은 통 속에서 살아가는 동료들이여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때로는 나의 세계를 좀 줄이는 것도 괜찮다축소해도 괜찮다세상은 우리에게 세계를 확장하라고기꺼이 모험에 몸을 던지라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지만 감당의 몫을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감당의 깜냥은 각자 다르니까빚내서 하는 여행이 모두에게 다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김혼비아무튼


 

 

 

- 읽은 -

+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 ~ 103

+ 읽으면 진짜 재무제표 보이는 책 / 유흥관 : ~ 219

+ 플라톤 국가 강의 / 이종환 : 261 ~ 427

+ 페미니즘 탐구생활 / 게일 피트먼 : 176 ~ 343

+ 파이어족이 온다 / 스콧 리킨스 : 157 ~ 297

+ 독서모임 꾸리는 법 / 원하나 : ~ 152

 

 

- 읽는 -

- 진격의 독학자들 / 인문학협동조합 : ~ 129

- 철학 한 입 / 데이비드 에드먼즈, 나이젤 워버턴 : ~ 92

- 돈의 인문학 / 김찬호 : ~ 98

- 9번의 일 / 김혜진 :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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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9-12-1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은 책을 어떻게 이렇게 많이 읽으시나요? 대충 읽으시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하네요 :D

syo 2019-12-12 22: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은 많이 읽는 것도 아니에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흘 동안 저걸 읽은 거니까요. 하루 300쪽 남짓 읽었을 뿐인데, 병행 독서 하다 보니 착시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300쪽이면 사실 하루 한 권 읽는 셈인데, 그게 적게 읽는 건 아니지만 알라딘 세상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잖아요...

겨울호랑이 2019-12-13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께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드실 듯 합니다. syo님께서 기운내시고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syo 2019-12-15 18:31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무려 60시간 가량 늦고 말았네요.
뜻밖에 따뜻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랑이님^-^

단발머리 2019-12-13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바람이 야속하네요. 야박한 서울 인심도 그렇구요. ㅠㅠ 마음에 드는 안식처를 얼른 구하시기 바래요.

syo 2019-12-15 18:32   좋아요 0 | URL
서울 인근 어느 도시의 높고 높은 마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는 집을 가계약하고 돌아왔답니다.
하하하하.....-_ㅜ

카알벨루치 2019-12-13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방을 구해야 쇼군 좋아하는 치킨배달이라도 시켜줄텐데...화이팅해요!

syo 2019-12-15 18:3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카알님이 배달시켜주신 치킨의 그 달달한 맛이 아직도 입에 남아있는 것 같구만요.
화이팅 늘 감사합니다^-^

수이 2019-12-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그마해도 쇼님이 원하는 공간을 얻으면 좋겠어요. 아자아자.

syo 2019-12-15 18:33   좋아요 0 | URL
출퇴근길이(특히 퇴근길이) 좀 고단한 높고 높은 마을이라 걱정되는 바는 있지만, 집 자체는 괜찮은 곳으로 가계약 했습니다. 수연님 응원 덕이겠네요 ㅎㅎㅎ

blanca 2019-12-1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눈물이 갑자기... 저도 겨울이 너무 싫어요. 인용해주신 글들 중 마시모와 고흐의 글은 너무 좋아서 메모해 두어야겠어요. 힘드시겠지만 그 시간을 통과하면 담담하게 회고할 날이 꼭 오더라고요. 부디 힘내세요. 화이팅!

syo 2019-12-15 18:3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의 이 응원 말씀을 집 구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좀 더 힘이 났을텐데요.... 이제야 확인하고 댓글을 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저도 왜 눈물이 갑자기....

2019-12-13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5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3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5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3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5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12-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 내 경기도 어느 동네에서 발품 팔고 계실 syo님...춥지 않고 비 안 내리고 적당한 방이 어이 환영하네- 하고 맞이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syo 2019-12-15 18:40   좋아요 1 | URL
반님의 간절한 바람 덕분일까요? 금요일은 정말 하나도 춥지 않고, 도리어 뜨겁다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토요일, 제가 가계약한 집이 있는 그 산간지대의 추위란.....

반유행열반인 2019-12-15 18:48   좋아요 0 | URL
산간지대에 오래 살아본 경험으로 보면...하체 건강에 아주 좋답니다. syo님의 건강은 보장되는 곳을 구하셨군요!!!

syo 2019-12-15 19:38   좋아요 1 | URL
비 오고 눈 올때 워터파크 스키장 개장이 기대됩니다. 와하하하하.....

반유행열반인 2019-12-15 20:09   좋아요 0 | URL
이야 신나는 물놀이 얼음지치기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위로와 공감의 눈물 ㅠㅠ.....

봄밤 2019-12-14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의 글을 읽으면 다양한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온라인 상으로, 글자로만 아는 사이라 그런지 때로는 소설 속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봤자 남남인 사이의 응원일뿐이지만 그래도.......응원합니다! 진심으로요.

syo 2019-12-15 18:43   좋아요 0 | URL
소설 속의 인물들도 뜨신 방 하나 구하겠다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니까요. 기왕이면 좀 재벌후계자 같은 캐릭터였으면 좋았을텐데.....

남남인 사이의 응원이라 하셨지만, 랜선 너머로 especially_you님의 진심어린 응원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은데, 기분탓만은 아니겠지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1

 

부동산에는 순진한 백수의 코 묻은 지갑을 노리는 포식자들이 산다. 어제 하루 송파구 일대를 쥐잡듯 뒤지면서, 정말 갖가지 기교를 목도했다. 그 예산에 이런 집 정말 없어요- 하는 말은 87.5% 확률로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났고, 근저당 액수는 안전범위 안이지만 알고 보니 임대인이 집의 7분의 1만 소유하고 있다든가, 등기부등본에서 임차권등기명령 받은 부분은 교묘하게 형광펜으로 표시하지 않고 얼버무린다든가. 특히 우리 아들하고 너무 닮아서 내가 꼭 좋은 방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다며 막상 아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방을 보여주신 사장님, 사장님은 우리 엄마랑 1도 안 닮으셨는데 제가 무슨 수로 당신 아드님이랑 닮았겠어요. 제가 하하호호 잘도 웃고, 사장님 나이보다 엄청 젊어 보이신다며 놀라기도 했지만 그게 과연 진심이었을까요, 예비공무원의 사회생활 연습게임이었을까요? 눈발 날리는 토요일에, 우린 왜 이렇게 서로 속고 속이며 계약도 하지 않을 빈집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보냈을까요? 허허허…….

 

가진 것 없음이 곧 제대로 살지 못한 증거라는 사실에 뼈가 저리도록 얻어맞는 순간을 자꾸 맞닥뜨리는 것이 이놈의 자본주의 세상 속을 꿈틀꿈틀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이야기를 나누고토론을 하고다투고 그러지서로 다른 시간의 지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밀란 쿤데라무의미의 축제

 

 

 

2

 

사랑을 통해 많이 배운다는 말은 이별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운다는 말로 치환되는 순간 더 엄밀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진실을 선명하게 꿰어 차는 말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도 이별도 아닌, 이별 후 이별을 애도하는 기간에 가장 많이 배운다. 충분히 아파하는 일이 사람을 충만하게 만든다. 어느 시기, 짧게 사랑하고 그보다 더 긴 애도의 시간을 거치며 오늘의 syo가 대부분 형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99개월짜리 사랑의 종말을 한 달 조금 넘게 애도하는 중인데, 그 사람과 나를 아는 세상 누구도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이 긴 연애의 꼬리가 생각보다 굵지 않아 많이 놀라고 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커피 한 잔 따라놓고 유치한 이별 노래를 듣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깨에 저녁을 짊어지고 아무 이유도 없이 호숫가를 빙빙 돌고 싶어지겠구나, 혹은 외출 다녀와 거울 앞에서 옷을 벗다가 내가 입고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전부 그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깨달으면 마음이 휑하니 비어버리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슬픔들은 견딜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얕고 가볍게 진동했고,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술에 잔뜩 취하면 펑펑 울어버리지는 않을까 해서 안전망이 될 친한 아이들을 둘러놓고 만취에 가까이 마셔 보았으나, 나 하나 잘못 만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시간을 가장 초라하게 보내버린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 사무쳤을 뿐, 바꾸지 않은 단축번호 1번을 꾹 누르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애도의 기간 동안 새로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별의 이유는 이별하면서 완전히 납득했고, 이별의 원인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내 두통의 원인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별하기 전에 내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 이별하고 난 지금 내가 되어야 할 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어지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던 나는 그 사람이 없어지기 전과 소름끼칠 만큼 동일한 인간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천천히 나는 알았다. 우리의 애도가 이별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벌써 몇 달 전부터, 최소한 봄부터는, 아니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헤어지면서 만나고 있었다. 이별하면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도의 봄이나 여름이 아니라 가을 어디쯤에 나도 모르게 도착해 있고, 밖은 이제 겨울이다. 서울의 어느 귀퉁이에서 나는 올 겨울 첫 번째 싸락눈을 맞다가 돌아왔다.

 

그날, 펑펑 울며 이별을 말하는 그 사람을 마주하고는 혹시라도 다시 돌아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말로 폼을 잡았다. 진심이었으나, 진실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도 그럴 생각이 없었고, 나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여겼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마음만 가지고 연애하는 사람의 뜨거운 말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늘 추락하듯 그렇게, 그냥 빈말로 끝날 말이었던 셈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열심히 돌다보니 우연히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었더라도, 다시 만난 그날은 99개월 하고도 1일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1일일 것이다.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주저 없이 다음 사랑을 할 것이고, 망하면 또 망할 것이고, 그런 반복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올해의 끄트머리나 내년의 첫머리쯤에 나는 아마 서울에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나는 늘 가난했고, 초라했고, 보잘 것 없었고, 어리석었고, 그리고 사랑을 했다. 나는 지금 가난하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어리석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이 비루해지거나사람 앞에서 세상이 비루해지는 걸 자주 목격했다사랑이 그 비루함을 어떻게든 구원할 수 있다고 여겼다사랑의 뒤꽁무니를 좇는 사랑이 아니라사랑이 끝나면 다른 사랑을 이어가면서사랑에 의해 사람이혹은 사람에 의해 사랑이 마모되는 류의 사랑이 아니라단 하나의 사랑을 인간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알고 싶었다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을 완성하는지를사랑의 무수한 결을 차곡차곡 조심스레 펼쳐서 잘 키워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길고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짧은 것 같았다.

김소연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김연수사랑이라니선영아


한해살이 풀이 죽은 자리에 다시 한해살이 풀이 자라는 둑과 단단히 살을 굳힌 자갈과 공중을 깨며 부리를 벼린 새들의 천변을 마주하면 적막도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낯선 소리라도 듣고 싶어 얇은 회벽에 귀를 대어보면 서로의 무렵에서 기웃거렸던 우리의 허언들만이 웅성이고 있었다

박준우리의 허언들만이전문

  

 

- 읽은 -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김소연 : 104 ~ 225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172 ~ 263

+ 최강의 일머리 / 레일 라운즈 : 172 ~ 334

+ 완전탈출 만성피로 / 스기오카 주지 : 95 ~ 205

 

- 읽는 -

- 타락한 저항 / 이라영 : ~ 65

- 파이어족이 온다 / 스콘 리킨스 : ~ 157

-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마시모 피글리우치 : ~ 98

- 페미니즘 탐구생활 / 게일 피트먼 : ~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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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가운 도시 서울, 그렇지만 반짝거리고 숨막히게 밀도 있는 서울, 제가 사는 도시 서울! ㅋㅋㅋ 자리 잘 잡으시고 무사히 뿌리내리시길 응원합니다.

syo 2019-12-08 20:3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반님이 계시니까, 차가운 도시에서 반짝거리고 숨막히게 밀도 있게 살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얼른 반님 계시는 서울에 자리 잡고 뿌리 팍 내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ㅎ

추풍오장원 2019-12-0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비공무원이셨군요~ 정규발령 후에도 정시출근과 칼퇴를 기원드립니다 ㅎㅎ

syo 2019-12-08 20:30   좋아요 0 | URL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2019-12-0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08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12-0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 차리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곳... 서울
결코 좋아 할 수 없는 곳 입니다.
항상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ㅠ

syo 2019-12-08 20:31   좋아요 0 | URL
항상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서울만 가면 정신을 못차리겠다니까요 ㅎㅎㅎㅎ
뜻밖에도 저는 서울을 좋아합니다. 북다님도 계시잖아요 ㅎ

Angela 2019-12-0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었으니, 남은건 사랑! 입니다!!

syo 2019-12-08 20:31   좋아요 0 | URL
정답입니다! 으하하하하......

stella.K 2019-12-09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요님 책만 읽으시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공무원도 되셨군만요.
축하할 일이네요. 물론 직장생활이 쉽지는 않겠지만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울엄마 지인분도 얼마 전 이사를 하셨는데 집 구하느라 고생은 말할 것도
새집 계약하는데 그렇게 겁이 날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이제 인구에 비해 집이 남아돌아가는 시대라는데 내가 살 집 구하는 건 이렇게도 어렵고 겁나는 일이 되었으니 원...

사랑은 또 온다더군요. 안 하는 것 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끝은 아무도 모르구요 비난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더 더욱 없는 거죠.
사랑할 때 사랑하면 그것으로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syo 2019-12-10 07:25   좋아요 1 | URL
책만 읽는 공무원 자리가 있다면 모두들 원하겠지만 저도 되게 간절하게 지원했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평범한(?) 일반행정직 공무원이 되려나 봅니다.

사랑 그 좋은 걸 왜 그치고 살겠어요.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스텔라님도 화이팅(?)

2019-12-09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0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0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0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혼자이게 아니게

 

 

1

 

머리를 하고 돌아오는 길지붕 위에 멍뭉이가


 

발 아래 천하를 굽어보니 온누리 백성이 사랑스럽구나, 

민정신이 그냥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동네를 둘러보고 있었다

곤룡포 색깔 자알 빠진 것 좀 보소

 

 

 

2

 


온 세상이 비에 젖어 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비가 오기 전에도비가 올 때도그리고 비가 온 후에도비 내리는 날에는 꼭 그림을 그려야겠다.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영혼의 편지


비에 젖으며 세상은 좀 더 선명해진다. 좀 더 선명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저것이 진짜 세상의 색깔이라고. 젖음으로서 진해진, 서늘하고 분명한 우리의 진짜 윤곽이라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바다에서 걸어 나왔으니까, 젖어 있는 색깔이 진짜 색깔이고, 진해진 우리가 진짜 우리라고.

 

그게 너무 좋아서, 비 오는 날은 맑은 날보다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자꾸만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

 

 

 

3



사실 혼자 있어도 완전히 혼자인 때는 별로 없다전화기가 울리고 택배가 오고 차 소리가 들린다무언가를 생각하면 그 무언가의 영향을 받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충동만으로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외로울 때야말로 누군가에 대한 지향이 가장 강하다혼자일수록 더 혼자가 못 된다정말로 혼자라는 것은 마음 둘마음 갈마음 쓸 곳이 없는 상태다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혼자가 된다면생각나는 사람도 없고생각나는 물건도 보고 싶은 사람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면어쩐지 사람답지 않은 무언가가 될 것 같다진짜 혼자일 수 있을까혼자이고 싶을까?

서한겸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늘 혼자였던 것은 아니어서 그 말을 우습게 알았다. 지금은 우습지 않고 가엾다. 혼자인 자기를 위로하는 가장 가여운 되뇜 같아서. 진리는 아니더라도 진심인 그 말, 우리는 모두 혼자라는 말.

 

혼자일 때 혼자인 것이 아니라 혼자라고 생각할 때 혼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척추동물들이 꼬리를 흔들거나, 다가와 손바닥에 머리를 부비거나, 퇴근을 해 내게 오거나, 핥아주거나 할 때도 혼자라고 생각하면 역시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과는 또 두어 뼘쯤은 달라서 어떤 혼자는 외롭지 않았고 또 어떤 외로움 속에서는 혼자가 아니기도 했다.

 

대체로 사랑이란, 이미 도래한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는 일과 닮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나머지 보는 시간을 보고 싶어 하는 데 빼앗긴다. 내일 오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할 거라면 이 사랑은 절망과 쉽게 착각된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진짜 혼자가 된다.

 



4

 

귤을 박스로 들였다. 엄마 손끝이 노래지겠다. 

 

 

- 읽은 -

+ 나만 잘 살면 안 돼요? / 이치훈, 신방실 : 118 ~ 236

+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116 ~ 243

+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 ~ 149

 


- 읽는 -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김소연 : ~ 104

- 플라톤 국가 강의 / 이종환 : 130 ~ 261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82 ~ 172

-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 데이비드 에드먼즈 : ~ 84

- 최강의 일머리 / 레일 라운즈 : ~ 172

- 완전탈출 만성피로 / 스기오카 주지 : ~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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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12-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론 리˝에서 머리하셨어요? ㅎ

syo 2019-12-05 07:1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ㅎㅎㅎㅎ 저긴 뭐하는 덴지 모르겠지만 문이 닫혀있더라구요. ㅎ

반유행열반인 2019-12-05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뭉멍뭉 임금님 귀엽다ㅎㅎㅎ알라딘 벌판 한가운데에서 늘 사랑을 목놓아 부르는 syo님, 실컷 사랑하시고 또 사랑받으시길 진심 기원합니다.

syo 2019-12-05 07: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항시 사랑사랑거리먼 지겹기 마련인데 늘 읽어주시는 반님의 곁에도 뜨거운 사랑 오래오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추풍오장원 2019-12-0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친구는 지붕위까지 어떻게 갔을까요^^

syo 2019-12-05 21:5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ㅎㅎㅎㅎ 제가 가까이 가니까 제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오더라구요 ㅎ

stella.K 2019-12-0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꿈 보다 해몽이라더니...!
저 멍뭉이 눈에 인간이 얼마나 같잖아 보일런지 곤룡포 포스에서 느껴지네요.ㅋㅋ

근데 머리를 하셨다함은 머리를 잘랐다는 건가요? 아님 빠마라도 하셨다는 뜻인가요?
보통은 자른 걸 가지고 했다고 하지는 않는데 말입쇼...

syo 2019-12-05 21:55   좋아요 0 | URL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리라 하는 표정이었어요 ㅎㅎㅎㅎ
빠마는 지난달에 하고 오늘은 커트만 했습니다. 남자들은 커트만 해도 했다고 하는 것 같아요 ㅎㅎ

lovelyNH 2019-12-0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바다에서 걸어나왔으니까˝ 마음에 들어요^^

syo 2019-12-08 17:1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완전히 제 문장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 기억 속에 무슨 바다를 가리키며, ‘저길 봐 우리가 다 저기서 나왔어‘ 이런 대사를 치는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

 

한때 이런저런 명화들을 갖다가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박아놓던 때가 있었다. 어찌나 부지런을 떨었던지 매일매일 새 그림을 찾아내어 성실하게 프사를 바꿔댔다. 처음에는 알려진 화가의 알려진 그림을 택했지만 그런 그림은 얼마 못가 고갈되었다. 그래서 알려진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진 그림,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까지 꽤 의욕적으로 찾아다녔던 기억이다. 카톡 세상에서는 syo가 프사를 뭘로 바꾸건 얼마마다 바꾸건 그딴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막상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전혀 뜻밖의 인물이 관심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서 놀랐다. 형 때문에 새로운 그림을 알게 된다니까? 그래? 난 지금 새로운 널 알게 되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잘난 척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 그 눈깔 한개 달린 그 그림 그거 뭐냐? 은근 좋던데? , 또 우리 고객님 또 그런 그림 좋아하시는구나? 아유 안목 좋으시다, 그 그림 그게 또 인상파 애들 한참 인상 쓰고 어깨에 힘 빡 주고 다니던 시기에도 또 꿋꿋이 독고다이 상징주의 외길 걸으신 선생님의 작품으로써 말입니다잉?

 

 

 

2

 

그런 정황 속에서도 프사로 삼지 못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받아는 놓았으나 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야 했던, 관심받기는 물론 잘난 척 하고 싶은 불같은 욕망조차 그 앞에만 서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어마무시한 녀석이. 분명히 유명 작가의 유명 그림인데도, 이 그림을 카톡 프사에 올림으로써 내가 하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를 어떤 주장의 무게와 쓸데없이 감당해야 할 통념의 공격력을 예상해보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 이런 그림을 병인양요 시절에 머스킷으로 시민들 탕탕 쏘아대는 나라에서 그릴 수 있었다니, 정말 전 당신께 존경밖에 드릴 게 없잖아요, 쿠르베 선생님…….


그랬는데 syo가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쿠선생님은 알고 보니 이런 분이셨다고.

 

 쿠르베는 취미로 주식거래에 손을 대던 사회주의자(대개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는 특징을 지닌 이들로 여겨지는)였으며 땅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마찬가지로 이상향을 향한 신념이 있었는데도그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사창가와 정부분별없는 청년들의 향락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시대와 계층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그런 까닭에 그는 "여자는 딴생각 말고 양배춧국이나 끓이고 살림살이나 신경 써야 한다"고 보았다그런가 하면그 같은 감상을 조금 더 드높여 기개 있는 금언을 만들었다. "숙녀의 임무는 남자의 사색적 합리성을 감정으로 교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씩 예술을 하느라 결혼할 시간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또한 이따금씩 결혼하려고 애를 썼다. 1872그는 같은 프랑슈콩테 지역 출신의 젊은 여자를 배우자로 점찍은 뒤 중매쟁이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나 자기 집안은 여자 쪽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말하고는 분별없게도 다음과 같이 늘어놓았다.

 

 촌사람들이 어리석은 조언을 할지도 모르지만그렇다고 해서 레옹턴 양이 내가 주려는 화려한 지위를 거절하리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레옹턴 양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프랑스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며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자리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프랑스 여자라도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요. 

 

 자만의 응보를 믿는 사람이나잘 만든 일일 연속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똑같이레옹턴 양이 프랑스 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신부가 되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면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쿠르베는 자기를 밀어낸 시골의 어느 경쟁자와 "지능은 그들이 키우는 소 정도 되지만 돈으로 치면 소만큼의 가치도 안 되는 뻔뻔한 촌뜨기들"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97-98)

 

 

 

3

 

동네 인근에 쫄쫄쫄 흐르는 도랑을 산책할 때도 쿠션 살아있는 운동화를 골라 신는 법인데, 하물며 미술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산책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덤벼서는 될 일이 없다. 아무리 그 산책이 사적인 미술 산책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미술을 너무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면 미적을 까먹듯이 미술을 까먹는다. 미술가는 잘 몰라도 무식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들 잘 모르니까.


대화 1

Q. 고흐?

A. 알지.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Q. 고갱?

A. …… 고흐 동생인가 그렇지? , 아니다, 형이다 형.

 

대화 2

Q. 레오나르도 다 빈치?

A. 모나리자.

Q. 미켈란젤로?

A. 천지창조.

Q. 라파엘로

A. , 알았는데, 걔 유명한데…….

Q. 도나텔로

A. …… 닌자 거북이?

 

대화 3

Q. 풀밭 위의 점심식사?

A. ……마네?

Q. 올랭피아?

A. ……모네?

Q. 수련?

A. ……마네?

Q. 피리부는 소년?

A. ……모네?

Q. 건초더미?

A. ……마네?

Q. 너 지금 순서대로 대답하냐?

A. ……모네?

 

이것들 중 딱 하나는 정말 실제로 벌어진 대화를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온데…….

 

 


4

 

이토록 평범한 인간 syo에게 미술 근처를 사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요원하지만 포기하기도 어려운 멋진 꿈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미술에 대해 알려준다기보다는 미술을 산책하는 신뢰할만한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나라별 시대별 미술 사조를 좌르르 꿴다거나, 알려진 화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알려진 작품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들을 파헤친다거나(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신나게 통달했다면 셋 중 하나일 공산이 크다. 업자, 수집가, 아니면 그림변태), 지식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몇 개의 그럴싸한 그림 해석을 암기해놓는 그런 방식 말고, 하나의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미술가의 삶에서 오늘 이곳에서의 내 관심사와 맞물리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접점들을 찾아내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렇게 써도 결국 이렇게 쓰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쓰긴 해야겠다는 느낌. 저곳에 도착하지는 못하더라도 저곳을 향해 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 북극성을 따라간다고 북극성까지는 못가겠지만 그래도 북극까지는 가서 북극곰하고 콜라 한잔 하고 올 수는 있겠다는 마음.

 

 

 

5

 

미술가의 삶은 미술가의 작품만큼이나 놀랍거나 아름답거나 기이하거나 경탄을 자아내거나 한다. 미술가의 작품이 예술이듯이 미술가의 삶 또한 하나의 예술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비약해서 다시 말하면,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가 예술가이듯이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사람 또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작업을 맡길 사람으로 줄리언 반스 정도의 거장을 데려오셨다면, 아 이놈의 무지렁이는 그냥 믿고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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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0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읽어야겠다. 너무 좋다. 나도 읽을래요. 다른 것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림에 있어서도 무식한 저는 이 책을 읽으면 너무 좋을것 같아요. 그리고 줄리언 반스 잖아요? 리뷰도 재미있고 책도 막 관심 생긴다. 훈늉한 리뷰입니당!!

땡투땡투~

syo 2019-12-03 15:51   좋아요 0 | URL
어쨌든 줄리언 반스니까요.
그거 하나면 뭐 일단 손해 날 일은 없다.

재미 없으면 내가 무식해서 재미 없는 거다. 근데 재미가.... 하하하. 재미있다 재미있다. 하하하. 하하. 하... 이런 식으로라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재미 있어요. 재미 있단 말이에요. 하하하. 하하. 하.

잠자냥 2019-12-03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면서도 이 책은 패스하려고 했었는데, 이 글 때문에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syo 2019-12-03 21:46   좋아요 0 | URL
정말요?? 가뜩이나 읽을 책 많은 세상에 제가 괜히 안 읽으셔도 될 책 읽으시도록 뽐뿌넣은 건 아닐까 우려도 되지만, 뭐 잠자냥님도 잘 아시다시피 줄리언 반스니까요 ㅎㅎㅎ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blanca 2019-12-0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정말 훌륭합니다. 짝짝짝.

syo 2019-12-03 21: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헤헤 칭찬 받았다.

반유행열반인 2019-12-04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은 하나도 모르는데요. 며칠 전 그냥 딱 생각나서 폰 잠금화면을 저장되어 있던 고흐 그림으로 착 바꿨어요. 별이 막 떠 있고 그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그나저나 못 걸어둔 쿠르베 그림 궁금하다...이참에 프사도 바꾸시고 여기도 하나 척 첨부해주시(거나 저한테 따로 아 왜 궁금하)죠? 야, 그 눈깔 한개 달린 그 그림 그거 뭐냐

syo 2019-12-04 07:58   좋아요 2 | URL
쿠 선생님의 그 그림은 알라딘이나 북플처럼 프사가 작게 보이는 공간에 올리면 더 사진처럼 보이는 바람에 아주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답니다..... 미친 놈 아니면 뭔가 주장하는 놈이 되는 건데, 전 아직 충분히 미치지도 못했고 딱히 주장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요 ㅎㅎㅎㅎ 한 번 검색해 보시고 나면 아차 하실 거예요. 병인양요는 1866년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12-04 11:11   좋아요 1 | URL
아아...무식한 제가 검색이라도 부지런할 것을...저도 아는 그 그림이군요ㅋㅋㅋsyo님 예술 감각과 유머에 부합하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 결례가 많았습니다. 프사는 역시 분노의 포도알갱이죠....(숨는다...딴청...)

추풍오장원 2019-12-0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르베 그림은 혹시 라캉 집에 있는 그림인가요 ㅎㅎ
syo님 덕분에 좋은 책 하나 더 알고 갑니다.

syo 2019-12-04 11:00   좋아요 1 | URL
바로 그렇습니다 ㅎㅎㅎ 역시 Comandante님의 식견은!!
저는 그 사실을 이 책에서 읽고 알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