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1
부동산에는 순진한 백수의 코 묻은 지갑을 노리는 포식자들이 산다. 어제 하루 송파구 일대를 쥐잡듯 뒤지면서, 정말 갖가지 기교를 목도했다. 그 예산에 이런 집 정말 없어요- 하는 말은 87.5% 확률로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났고, 근저당 액수는 안전범위 안이지만 알고 보니 임대인이 집의 7분의 1만 소유하고 있다든가, 등기부등본에서 임차권등기명령 받은 부분은 교묘하게 형광펜으로 표시하지 않고 얼버무린다든가. 특히 우리 아들하고 너무 닮아서 내가 꼭 좋은 방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다며 막상 아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방을 보여주신 사장님, 사장님은 우리 엄마랑 1도 안 닮으셨는데 제가 무슨 수로 당신 아드님이랑 닮았겠어요. 제가 하하호호 잘도 웃고, 사장님 나이보다 엄청 젊어 보이신다며 놀라기도 했지만 그게 과연 진심이었을까요, 예비공무원의 사회생활 연습게임이었을까요? 눈발 날리는 토요일에, 우린 왜 이렇게 서로 속고 속이며 계약도 하지 않을 빈집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보냈을까요? 허허허…….
가진 것 없음이 곧 제대로 살지 못한 증거라는 사실에 뼈가 저리도록 얻어맞는 순간을 자꾸 맞닥뜨리는 것이 이놈의 자본주의 세상 속을 꿈틀꿈틀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투고 그러지. 서로 다른 시간의 지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_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2
사랑을 통해 많이 배운다는 말은 이별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운다는 말로 치환되는 순간 더 엄밀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진실을 선명하게 꿰어 차는 말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도 이별도 아닌, 이별 후 이별을 애도하는 기간에 가장 많이 배운다. 충분히 아파하는 일이 사람을 충만하게 만든다. 어느 시기, 짧게 사랑하고 그보다 더 긴 애도의 시간을 거치며 오늘의 syo가 대부분 형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9년 9개월짜리 사랑의 종말을 한 달 조금 넘게 애도하는 중인데, 그 사람과 나를 아는 세상 누구도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이 긴 연애의 꼬리가 생각보다 굵지 않아 많이 놀라고 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커피 한 잔 따라놓고 유치한 이별 노래를 듣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깨에 저녁을 짊어지고 아무 이유도 없이 호숫가를 빙빙 돌고 싶어지겠구나, 혹은 외출 다녀와 거울 앞에서 옷을 벗다가 내가 입고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전부 그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깨달으면 마음이 휑하니 비어버리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슬픔들은 견딜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얕고 가볍게 진동했고,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술에 잔뜩 취하면 펑펑 울어버리지는 않을까 해서 안전망이 될 친한 아이들을 둘러놓고 만취에 가까이 마셔 보았으나, 나 하나 잘못 만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시간을 가장 초라하게 보내버린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 사무쳤을 뿐, 바꾸지 않은 단축번호 1번을 꾹 누르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애도의 기간 동안 새로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별의 이유는 이별하면서 완전히 납득했고, 이별의 원인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내 두통의 원인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별하기 전에 내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 이별하고 난 지금 내가 되어야 할 것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어지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던 나는 그 사람이 없어지기 전과 소름끼칠 만큼 동일한 인간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천천히 나는 알았다. 우리의 애도가 이별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벌써 몇 달 전부터, 최소한 봄부터는, 아니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헤어지면서 만나고 있었다. 이별하면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도의 봄이나 여름이 아니라 가을 어디쯤에 나도 모르게 도착해 있고, 밖은 이제 겨울이다. 서울의 어느 귀퉁이에서 나는 올 겨울 첫 번째 싸락눈을 맞다가 돌아왔다.
그날, 펑펑 울며 이별을 말하는 그 사람을 마주하고는 혹시라도 다시 돌아오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말로 폼을 잡았다. 진심이었으나, 진실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도 그럴 생각이 없었고, 나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 여겼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마음만 가지고 연애하는 사람의 뜨거운 말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늘 추락하듯 그렇게, 그냥 빈말로 끝날 말이었던 셈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열심히 돌다보니 우연히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었더라도, 다시 만난 그날은 9년 9개월 하고도 1일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1일일 것이다. 나는 기회가 주어지면 주저 없이 다음 사랑을 할 것이고, 망하면 또 망할 것이고, 그런 반복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올해의 끄트머리나 내년의 첫머리쯤에 나는 아마 서울에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나는 늘 가난했고, 초라했고, 보잘 것 없었고, 어리석었고, 그리고 사랑을 했다. 나는 지금 가난하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어리석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이 비루해지거나, 사람 앞에서 세상이 비루해지는 걸 자주 목격했다. 사랑이 그 비루함을 어떻게든 구원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랑의 뒤꽁무니를 좇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끝나면 다른 사랑을 이어가면서, 사랑에 의해 사람이, 혹은 사람에 의해 사랑이 마모되는 류의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을 인간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을 완성하는지를. 사랑의 무수한 결을 차곡차곡 조심스레 펼쳐서 잘 키워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길고,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짧은 것 같았다.
_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_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한해살이 풀이 죽은 자리에 다시 한해살이 풀이 자라는 둑과 단단히 살을 굳힌 자갈과 공중을 깨며 부리를 벼린 새들의 천변을 마주하면 적막도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낯선 소리라도 듣고 싶어 얇은 회벽에 귀를 대어보면 서로의 무렵에서 기웃거렸던 우리의 허언들만이 웅성이고 있었다
_ 박준, 〈우리의 허언들만이〉전문
- 읽은 -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김소연 : 104 ~ 225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172 ~ 263
+ 최강의 일머리 / 레일 라운즈 : 172 ~ 334
+ 완전탈출 만성피로 / 스기오카 주지 : 95 ~ 205
- 읽는 -
- 타락한 저항 / 이라영 : ~ 65
- 파이어족이 온다 / 스콘 리킨스 : ~ 157
-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마시모 피글리우치 : ~ 98
- 페미니즘 탐구생활 / 게일 피트먼 : ~ 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