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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
한때 이런저런 명화들을 갖다가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박아놓던 때가 있었다. 어찌나 부지런을 떨었던지 매일매일 새 그림을 찾아내어 성실하게 프사를 바꿔댔다. 처음에는 알려진 화가의 알려진 그림을 택했지만 그런 그림은 얼마 못가 고갈되었다. 그래서 알려진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진 그림,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까지 꽤 의욕적으로 찾아다녔던 기억이다. 카톡 세상에서는 syo가 프사를 뭘로 바꾸건 얼마마다 바꾸건 그딴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막상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전혀 뜻밖의 인물이 관심을 표하는 경우가 많아서 놀랐다. 형 때문에 새로운 그림을 알게 된다니까? 그래? 난 지금 새로운 널 알게 되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잘난 척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야, 그 눈깔 한개 달린 그 그림 그거 뭐냐? 은근 좋던데? 아, 또 우리 고객님 또 그런 그림 좋아하시는구나? 아유 안목 좋으시다, 그 그림 그게 또 인상파 애들 한참 인상 쓰고 어깨에 힘 빡 주고 다니던 시기에도 또 꿋꿋이 독고다이 상징주의 외길 걸으신 선생님의 작품으로써 말입니다잉?
2
그런 정황 속에서도 프사로 삼지 못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받아는 놓았으나 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야 했던, 관심받기는 물론 잘난 척 하고 싶은 불같은 욕망조차 그 앞에만 서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는 어마무시한 녀석이. 분명히 유명 작가의 유명 그림인데도, 이 그림을 카톡 프사에 올림으로써 내가 하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를 어떤 주장의 무게와 쓸데없이 감당해야 할 통념의 공격력을 예상해보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 이런 그림을 병인양요 시절에 머스킷으로 시민들 탕탕 쏘아대는 나라에서 그릴 수 있었다니, 정말 전 당신께 존경밖에 드릴 게 없잖아요, 쿠르베 선생님…….
그랬는데 syo가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쿠선생님은 알고 보니 이런 분이셨다고.
쿠르베는 취미로 주식거래에 손을 대던 사회주의자(대개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는 특징을 지닌 이들로 여겨지는)였으며 땅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마찬가지로 이상향을 향한 신념이 있었는데도, 그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사창가와 정부, 분별없는 청년들의 향락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시대와 계층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런 까닭에 그는 "여자는 딴생각 말고 양배춧국이나 끓이고 살림살이나 신경 써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그 같은 감상을 조금 더 드높여 기개 있는 금언을 만들었다. "숙녀의 임무는 남자의 사색적 합리성을 감정으로 교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씩 예술을 하느라 결혼할 시간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또한 이따금씩 결혼하려고 애를 썼다. 1872년, 그는 같은 프랑슈콩테 지역 출신의 젊은 여자를 배우자로 점찍은 뒤 중매쟁이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나 자기 집안은 여자 쪽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말하고는 분별없게도 다음과 같이 늘어놓았다.
촌사람들이 어리석은 조언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옹턴 양이 내가 주려는 화려한 지위를 거절하리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레옹턴 양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프랑스 여자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며,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자리를 얻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프랑스 여자라도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요.
자만의 응보를 믿는 사람이나, 잘 만든 일일 연속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레옹턴 양이 프랑스 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신부가 되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면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쿠르베는 자기를 밀어낸 시골의 어느 경쟁자와 "지능은 그들이 키우는 소 정도 되지만 돈으로 치면 소만큼의 가치도 안 되는 뻔뻔한 촌뜨기들"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97-98)
3
동네 인근에 쫄쫄쫄 흐르는 도랑을 산책할 때도 쿠션 살아있는 운동화를 골라 신는 법인데, 하물며 미술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산책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덤벼서는 될 일이 없다. 아무리 그 산책이 사적인 미술 산책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미술을 너무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면 미적을 까먹듯이 미술을 까먹는다. 미술가는 잘 몰라도 무식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들 잘 모르니까.
대화 1
Q. 고흐?
A. 알지.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Q. 고갱?
A. 그…… 고흐 동생인가 그렇지? 아, 아니다, 형이다 형.
대화 2
Q. 레오나르도 다 빈치?
A. 모나리자.
Q. 미켈란젤로?
A. 천지창조.
Q. 라파엘로
A. 아, 알았는데, 걔 유명한데…….
Q. 도나텔로
A. …… 닌자 거북이?
대화 3
Q. 풀밭 위의 점심식사?
A. ……마네?
Q. 올랭피아?
A. ……모네?
Q. 수련?
A. ……마네?
Q. 피리부는 소년?
A. ……모네?
Q. 건초더미?
A. ……마네?
Q. 너 지금 순서대로 대답하냐?
A. ……모네?
이것들 중 딱 하나는 정말 실제로 벌어진 대화를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온데…….
4
이토록 평범한 인간 syo에게 미술 근처를 사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요원하지만 포기하기도 어려운 멋진 꿈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미술에 대해 알려준다기보다는 미술을 산책하는 신뢰할만한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나라별 시대별 미술 사조를 좌르르 꿴다거나, 알려진 화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의 알려진 작품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들을 파헤친다거나(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신나게 통달했다면 셋 중 하나일 공산이 크다. 업자, 수집가, 아니면 그림변태), 지식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몇 개의 그럴싸한 그림 해석을 암기해놓는 그런 방식 말고, 하나의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미술가의 삶에서 오늘 이곳에서의 내 관심사와 맞물리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접점들을 찾아내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렇게 써도 결국 이렇게 쓰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쓰긴 해야겠다는 느낌. 저곳에 도착하지는 못하더라도 저곳을 향해 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 북극성을 따라간다고 북극성까지는 못가겠지만 그래도 북극까지는 가서 북극곰하고 콜라 한잔 하고 올 수는 있겠다는 마음.
5
미술가의 삶은 미술가의 작품만큼이나 놀랍거나 아름답거나 기이하거나 경탄을 자아내거나 한다. 미술가의 작품이 예술이듯이 미술가의 삶 또한 하나의 예술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법이다. 비약해서 다시 말하면,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가 예술가이듯이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사람 또한 예술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작업을 맡길 사람으로 줄리언 반스 정도의 거장을 데려오셨다면, 아 이놈의 무지렁이는 그냥 믿고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