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이게 아니게
1
머리를 하고 돌아오는 길, 지붕 위에 멍뭉이가
발 아래 천하를 굽어보니 온누리 백성이 사랑스럽구나,
애민정신이 그냥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동네를 둘러보고 있었다
곤룡포 색깔 자알 빠진 것 좀 보소
2
온 세상이 비에 젖어 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가 오기 전에도, 비가 올 때도, 그리고 비가 온 후에도, 비 내리는 날에는 꼭 그림을 그려야겠다.
_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비에 젖으며 세상은 좀 더 선명해진다. 좀 더 선명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저것이 진짜 세상의 색깔이라고. 젖음으로서 진해진, 서늘하고 분명한 우리의 진짜 윤곽이라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바다에서 걸어 나왔으니까, 젖어 있는 색깔이 진짜 색깔이고, 진해진 우리가 진짜 우리라고.
그게 너무 좋아서, 비 오는 날은 맑은 날보다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 자꾸만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
3
사실 혼자 있어도 완전히 혼자인 때는 별로 없다. 전화기가 울리고 택배가 오고 차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생각하면 그 무언가의 영향을 받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충동만으로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외로울 때야말로 누군가에 대한 지향이 가장 강하다. 혼자일수록 더 혼자가 못 된다. 정말로 혼자라는 것은 마음 둘, 마음 갈, 마음 쓸 곳이 없는 상태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혼자가 된다면, 생각나는 사람도 없고, 생각나는 물건도 보고 싶은 사람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면, 어쩐지 사람답지 않은 무언가가 될 것 같다. 진짜 혼자일 수 있을까? 혼자이고 싶을까?
_ 서한겸,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늘 혼자였던 것은 아니어서 그 말을 우습게 알았다. 지금은 우습지 않고 가엾다. 혼자인 자기를 위로하는 가장 가여운 되뇜 같아서. 진리는 아니더라도 진심인 그 말, 우리는 모두 혼자라는 말.
혼자일 때 혼자인 것이 아니라 혼자라고 생각할 때 혼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척추동물들이 꼬리를 흔들거나, 다가와 손바닥에 머리를 부비거나, 퇴근을 해 내게 오거나, 핥아주거나 할 때도 혼자라고 생각하면 역시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과는 또 두어 뼘쯤은 달라서 어떤 혼자는 외롭지 않았고 또 어떤 외로움 속에서는 혼자가 아니기도 했다.
대체로 사랑이란, 이미 도래한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는 일과 닮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나머지 보는 시간을 보고 싶어 하는 데 빼앗긴다. 내일 오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할 거라면 이 사랑은 절망과 쉽게 착각된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진짜 혼자가 된다.
4
귤을 박스로 들였다. 엄마 손끝이 노래지겠다.
- 읽은 -
+ 나만 잘 살면 안 돼요? / 이치훈, 신방실 : 118 ~ 236
+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116 ~ 243
+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 ~ 149
- 읽는 -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김소연 : ~ 104
- 플라톤 국가 강의 / 이종환 : 130 ~ 261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82 ~ 172
-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 데이비드 에드먼즈 : ~ 84
- 최강의 일머리 / 레일 라운즈 : ~ 172
- 완전탈출 만성피로 / 스기오카 주지 : ~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