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겨울
1
뭐, 사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시기란 언제나 있고 어디에나 있고 지치지 않고 있는 법이지만, 지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임무인건지, 허덕이는 일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계속 방을 알아보고 있지만 결국 원하는 곳에서 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아무래도 투석을 계속 해야 할 모양이고, 항암을 시작할 때가 지났는데 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스케줄이 또 밀렸다. 그땐 내가 대구에 없을 텐데. 하려했던 공부는 뒷전이 되어 남은 2019년은 사실상 쓰레기통에 처박은 거나 다름없다. 보고 싶은 사람은 늘어 가는데 볼 기회가 마뜩찮아 대체로 혼자다. 몸은 저절로 불어나지만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하러 나가질 못하니 대책이 없다. 추워서 정말 다행이다. 안 그랬음 핑계 댈 거리가 없었겠다. 사랑하는 동안에도 웬만큼은 외로워서, 외로운 동안에도 웬만큼은 사랑하는가.


에픽테토스의 결정적인 요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상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정확히 그런 것들을 걱정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럴 게 아니라 인생의 방정식에서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스토아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항해에 나섰고 거기에 정당한 이유들이 있는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배(비행기)에 태울 최상의 선원들(항공사)을 탐색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관련된 준비 사항들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스토아주의로부터 얻는 최초의 교훈 하나는 우리가 힘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주의와 노력을 집중하되, 그런 다음에는 우주가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에너지 소모와 많은 걱정을 둘 다 덜어줄 것이다.
_ 마시모 피글리우치,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차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그래서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볼 때,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_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즉시 멍청이가 되면 곤란하다.

사람들은 로맨스 서사의 판타지로 배워온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하는 사랑은 이토록 구질구질한데 영화 속 사랑은 감미롭기만 하니, 번번이 내가 어[57]딘가 잘못된 사람처럼만 느껴진다. 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만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은 어떤 실수이거나 고행이거나 투쟁처럼만 느껴진다.
_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해서 삶의 어느 시기에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_ 밀란 쿤데라, 『농담』
3
간혹 우리는 ‘누군가’의 모든 것을 원하기도 하지만 결코 ‘모두’의 모든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충만이 아니라 피로의 영역에 닿는다. 그래서 이쪽의 예상보다 더 서둘러, 지나치게 활짝 열리는 사람은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것은 일종의 월권이고, 침범처럼 느껴진다. 모두 가운데 누구를 ‘누군가’로 만들지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내 권리고 내 취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_ 김세희, 『항구의 사랑』
4
지금 세상에는 내 이별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대하는 내 태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는 선명한 차이가 있다. 애처롭다는 표정을 맞닥뜨리면 별일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데, 어쩌면 이 대답 속에 들어있는 슬픔의 총량이란 진짜 별일인지 아닌지 하고는 무관하게 딱 정해져 있는 것만 같다. 말은 저렇게 해도 사실은 별일이라면, 별일이라서 슬프다. 진짜로 별일 아니면 와, 어떻게 이게 별일 아닐 수가 있지? 싶어서 슬프다. 뭐 어떻게든 슬플 일인가 봄.
그 길은 언젠가 두 사람이 걸어
이끼 앉은 돌 틈에서 목탑(木塔)을 들어내던 곳
찬 이슬을 지닐 때까지 구부러들어야 했던
어둠의 설움의 친정이었을,
숲에선 하루해를 핥아준 냄새가 나고
지하 대수층에 다니러 가는 해가 밤나무 밑으로 접어들면
마른 새가 엎드려 있어도 좋을
눈동자 같은 둥지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오 숲길은,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때가 있어서
두고 가는 사람을 짐작하지 않지만
사람과 다른 과일도 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_ 황학주, 〈막 어두워지는 숲길〉 부분
5
이번 주에는 경기도 어딘가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올 예정이다. 부족한 예산은 물론 복잡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얻어낼 수 있는 대출이라는 제약조건까지 덤으로 안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꼼꼼하게도 지치게 한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집들의 상태와, 어쩐지 눈을 피하며 허공에다 설명 들어가는 중개소 사장님과, 그 흔한 자동차 하나 없어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집과 집들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내 불쌍한 발바닥과, 눈치 없이 바람 부는 겨울과, 모든 조건이 완벽한 집을 만났는데 등기부 등본을 떼보니 시궁창이라 여기에 돈을 부으면 이건 뭐 전세금이 아니라 기부금이겠구나 싶을 때 느껴지는 허망함과, 그렇게 자꾸자꾸 밀리고 밀려서 점점 근무지에서 멀어져만 가는 나의 동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지칩니다.
술도 안 먹는데 술이 고프네요.
불효잔데 엄마 보고 싶네요.
거실에서 엄마 도롱도롱 코 골며 자네요.
그러니 작은 통 속에서 살아가는 동료들이여,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때로는 나의 세계를 좀 줄이는 것도 괜찮다. 축소해도 괜찮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계를 확장하라고, 기꺼이 모험에 몸을 던지라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지만 감당의 몫을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 감당의 깜냥은 각자 다르니까, 빚내서 하는 여행이 모두에게 다 좋으란 법은 없으니까.
_ 김혼비, 『아무튼, 술』
- 읽은 -






+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 ~ 103
+ 읽으면 진짜 재무제표 보이는 책 / 유흥관 : ~ 219
+ 플라톤 국가 강의 / 이종환 : 261 ~ 427
+ 페미니즘 탐구생활 / 게일 피트먼 : 176 ~ 343
+ 파이어족이 온다 / 스콧 리킨스 : 157 ~ 297
+ 독서모임 꾸리는 법 / 원하나 : ~ 152
- 읽는 -




- 진격의 독학자들 / 인문학협동조합 : ~ 129
- 철학 한 입 / 데이비드 에드먼즈, 나이젤 워버턴 : ~ 92
- 돈의 인문학 / 김찬호 : ~ 98
- 9번의 일 / 김혜진 : ~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