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냐 감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1
금토, 서울 경기 일대 부동산 문턱을 갈아 마시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필연적으로 읽은 책도 거의 없기도 했고,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신세 처량하여 북플이고 뭐고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더란 말이지요? 그러다 방금 뭐 새 책 나온 거 없나 어슬렁어슬렁 알라딘에 들어왔다가 실수로, 습관이 무섭지, 정말 자동적으로 내 서재를 눌렀다가 울 뻔. 눈 깜짝하면 syo의 코를 베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서울경기일대를 어리숙한 syo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동안, 많은 서재이웃 분들이 진심어린 응원의 댓글을 달아놓으신 것이 아닌가. 캐-감-동- 어쩐지 막 마음속에 용기가 피어올라 부동산 사장님들의 노련한 기술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더라니. syo가 사랑한다네요, 여러분…….
2
결국 가계약한 집은, 내부는 물론 외관까지 새로 공사를 마친, 딱 봐도 허름해 보이는 집들만 가득한 그 골목의 미친 매물이라 할 수 있는 깔끔한 집이다. 지하철역까지 도보 15분은 걸리니까 역세권이라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인류를 어여삐 여긴 신께서 마을버스라는 은총을 내리셨으니 아직 희망을 버리긴 이르다. 그러나 세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첫째, 우리 집이(아직 아니다) 산간지대(……농담 같죠?)의 꼭대기 바로 아래 블록에 위치해 있다는 것. 부동산 사장님이 syo와 三을 차에 싣고 그 집을 향해 달려갈 때, 아,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에버랜드의 추억이 떠올랐다. 거기 롤러코스터 정말 끝내주는데, 첫 낙하지점까지 딱 이 각도로 올라갔었어. 와, 방 보러 가는데 설렌다. 내려 보니 너무 탁 트인 시야. 정말 너무, 너무 탁 트인 시야……. 저 건너에 보이는 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게 지금 그 산의 정수리인 것은 확실했다. 三에게 우리 이참에 고랭지 농업을 통해 쏠쏠한 부수입을 올려보는 게 어때? 라고 물어보려 했는데, 입을 채 떼기도 전에 三이 이쪽을 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무래도 배추가 좋겠다는 뜻 같았다. 가로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는 집들은 대체로 평등하나, 세로 골목은 그야말로 계층구조다. 마르크스적인 동네가 아닐 수 없군. 짱이다. 각도와 세기에 관한 정교한 계산을 마친 다음 아래방향으로 대차게 한번 넘어지면, 최단거리 도보로 1422걸음 걸린다는 이마트까지 단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마트 자동문을 밀고 굴러들어오는 나를 맞이하는 종업원의 특별 인사멘트도 기대할 수 있겠다. “명복을 빕니다, 고인님.”
둘째, 택배 받을 사람이 없다. 이걸 사소한 문제라고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만, 사실 아파트라도 들어가지 않는 한 도리가 없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해서 택배 시킬 줄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택배상자의 뜨거움
집에 계시냐고 계시냐고 속삭이는 기사님
돌아서는 그 등 뒤에서 터지는 쌍시옷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셋째, 근방에 도서관이 없다. 가장 가까운 곳은 송파도서관으로서,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40분이 더 걸린다. 결국 퇴근 후 강동도서관에 들러서 잽싸게 빌리든지, 2주에 한번 큰 가방을 메고 1시간 20분씩 버스를 달려 남산-용산 쌍도서관(재밌게도 걔네는 횡단보도 하나 건너 맞은편에 있습니다)에서 책을 맥시멈까지 업어오는 수밖에 없는가. 사실 출근하기 시작하면 그조차 다 읽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니 이건 정말 소소한 문제 같긴 하다.
3
어쨌든 가계약은 마쳤고, 이제 남은 일은 은행의 손에 달려있다. 사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만사가 금융 권력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니 뭐, 새삼스럽다 하겠다. 모쪼록 영농의 길을 허하소서…….
- 읽은 -
+ 9번의 일 / 김혜진 : 124 ~ 258
- 읽는 -
- 돈의 인문학 / 김찬호 : 98 ~ 184
- 안 느끼한 산문집 / 강이슬 : ~ 121
-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 마시모 피글리우치 : 98 ~ 141
- 오릭스와 크레이크 / 마거릿 애트우드 : ~ 64
-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주네요 / 허재삼 : ~ 82
-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권김현영 :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