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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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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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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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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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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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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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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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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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
열몇 시간을 이 책 다시 읽고 이 글 쓰는데만 퍼부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회식 있었는데 거기도 안 가고...... 애들이 형은/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싸요? 막 그러는데, 제가 정말 비싼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책갈피는 손에 쥘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1-28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등상금 30만 원 노리시고 올린 리뷰시죠? ㅎㅎ

글 넘 좋아서요. 1등을 응원합니다. ^^

syo 2020-01-28 22:35   좋아요 0 | URL
30만원 언감생심입니다.

.....5만원은 혹시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28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우.야.(반말아님,혼잣말)
쇼님의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올게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4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원작보다 이게 더 좋...(김초엽님이 때리러 올 거 같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한밤 자고 일어나서 읽으니 더 좋아...걸작이야...김초엽 책 찾다 시공 뛰어넘어 만나는 두 사람...둘이 같은 말 조금 다르게 교차하다 딱 만나는데가 킬킬킬링포인트네요.
김초엽은 좋겠다 이런 팬아트 아니 팬걸작이라니...최고의 헌사 아닐지...예쁜 표현이 정말정말 많아요. 내일 또 읽어야지 ㅋㅋㅋ

syo 2020-01-29 21:15   좋아요 1 | URL
귀여운 캐릭터로 프사를 바꾸셨군요. ㅎㅎㅎㅎ 잘 어울리십니다.
제가 또 귀여운 것에 환장을 하는 족속이온데.....

반유행열반인 2020-01-29 21:24   좋아요 0 | URL
누가 닮았다고 해서 해 보았사온데...얘 따가운 고슴도치..호구력 상승하는 안경 쓴 주제에 이름도 호기...헷지호구?헷지호기?네요.

다락방 2020-01-29 0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잠이 안와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였거든요. 그러다 문득, ‘이렇게나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이제 소설 한 권쯤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생각하자, 이야기를, 하고 나 자신을 다그쳐봤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역시 나는 독자여야만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리뷰를 소설처럼 써내는 쇼님이 있네요. 어쩌면 소설을 쓰는 건 단순히 많이 읽는 걸로 되는게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어쨌든 쇼님이 엄청나게 많이 읽은 건 사실이다, 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 리뷰는 김초엽 작가님이 자신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며 기꺼이 일등을 주실 것 같은데요? ㅎㅎ

syo 2020-01-29 21:20   좋아요 1 | URL
A4 10장이라는 분량은 누가봐도 욕심낸 걸로 보이겠지요? ㅋㅋㅋㅋ 근데 저 진짜 1등은 생각도 안하고 있거든요.
일단 이건 정통 리뷰가 아니니까.....

그래도 노고를 생각하셔서, 책갈피 하나 먹여주시기를 앙망하옵는데, 헤헤.

소설을 쓰는 일은 또 완전 다른 일이지요.
읽는 것만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읽으면서 써야 마침내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다락방님이 한번 써 보세요. 쓰다보면 생각이 줄줄 이어지지 않을까요?

aqua27338 2020-02-03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숙련자를위한고전노트 리뷰보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왜 댓글이 많이 달리고
왜 사람들이 쇼님의 글을 기다리는지 알것같습니다.
와...
구독 알람설정은 없나요 ㅋ

syo 2020-02-03 23:15   좋아요 0 | URL
정말로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ㅎㅎㅎㅎ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에다가 뭐라고 써놨는지 보러갔다가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2020-08-26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