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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바다를 사랑하는 내가, 내가 가 본 바다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만, 그날 그 바다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오늘에야 그 바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그날 우리는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날의 바다는 우리의 바다 중 하나는 아닐 테지만 나는 흐린 차창 밖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다시 못 올 그 바다를 몰래 내 바다의 목록 안에 집어넣었던 거야.
그즈음 나는 다시 못 올 줄도 모르고 다시 못 올 것들을 스쳐 보내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겁을 내던 중이었잖아. 아무 생각 없이 딛고 살아왔던 세상의 밑바닥이 실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혼자 끙끙대며 참다 어느 밤 결국 머뭇머뭇 네게 이 걱정을 털어놓았을 때, 너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말했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잖아? 그 밤 너는 나를 품에 넣고 토닥여 주다가 금세 잠이 들어버렸고 나는 네 고른 숨소리 속에서 길게 외로웠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어서, 그런 세상에 너와 내가 살고 있어서.
출장이 잦아진 너와 부쩍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내가 좁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았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겠지. 많은 생각은 곧 위기니까,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너와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날 나는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네 출장지라는 강릉을 향해 함께 가고 있었어. 오직 외롭지 않으려고. 네가 없는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없는 너는 알 수 없겠지, 전에 살던 누군가가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별 모퉁이가 떨어져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숨소리가 고른 너는 끝내 모르겠지, 뭐 그런 원망을 했던 것도 같아.
바다는 주로 우리의 오른쪽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앞만 보고 운전하던 너보다는 보조석에 앉은 내가 바다와 접촉하기 더 쉬웠을 거야. 바다가 보여. 내가 말했지. 너는 흔들리는 와이퍼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어. 우리 조만간 바다 보러 갈까? 형 바다 좋아하잖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유명한 바닷가가 있는데 왜 우리는 다른 조만간에 다른 바다를 보러 가야 하는 걸까, 그저 잠시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도 저기 회색 비를 받아내고 있는 회색 바다가 보이는데, 왜 보이지 않는 바다를 위해 보이는 바다를 무시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 그러자 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제부터 차에서 내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알았고, 실제로도 우린 그랬고,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바다를 바라봤던 거야. 저 바다의 색조를, 윤곽을, 조용함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음을 기억하려고. 우리의 지금 이 아무 말 없음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 시도는 실패했지. 그건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수많은 실패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금방 잊힐 만도 했지만, 그날 그 바다를 오래 바라본 바람에, 그 바다의 세밀한 특징들을 집요하게 기억에 새겨넣은 바람에, 오히려 다른 크고 날카로운 실패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작은 실패가 되어버린 것 같아. 참, 생각처럼 되지 않아, 그렇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아마도 너는 말하지 않을까.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했던 건데, 자꾸 네 이야기만 하게 되네.
이제는 너의 집이 된 우리의 집을 나오고 나서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작은 방 속에 틀어박혔어. 내가 없는 우리의 옛 좁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네가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모르고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참 오래도 흔들렸지. 내 좁은 방 안에 더 좁은 침묵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영영 틀어박혀 버리려고, 원래 그런 세상 따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생각만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방 밖으로 나와야만 했어. 내가 만든 침묵이 침묵하지 않더라고. 좁은 방의 여섯 면이 자꾸 내게 말을 거는데 그게 다 네 목소리더라고. 방은 네 목소리로 가득 메아리치고, 침묵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이 시끄럽더라고. 귀를 막았는데도 들리는 네 목소리에 입을 닫았는데도 내가 대답을 하고 있더라고.
그 방에서 나오고 내가 제일 처음 생각한 게 그 바다였어. 그 바다로 가자. 네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그 바다로. 내 침묵을 다 깨 먹은 네 목소리가 그 바다까지는 도착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가서 다시 한번 작은 방을 만들자, 인터넷도 전화선도 없는, 우체통도 없는 견고한 침묵을 만들고 그 속에서 변하지 말자,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비 내리는 바다처럼 살자, 그런 다짐이었어. 그리고 작은 차에 작은 짐을 싣고 나는 출발했지.
그런데 있잖아, 그 바다가 없더라. 아무 데도 없었어. 나는 지금도 그날 그 바다를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데, 심지어 그 바다를 떠올리면 그날따라 깔끔하게 면도되지 않아 거뭇했던 네 오른쪽 턱이라든가, 두 번째 단추를 풀지도 않고 억지로 두 번 접는 바람에 터져나갈 것 같던 네 셔츠 소매라든가, 벨트 위로 살짝 넘친 네 배와 그 배를 만들던 당시 네 식습관과 그 식습관을 만들던 상사 새끼의 은근한 악행이라든가,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느꼈던 그 순간의 내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이 아직도 그날 속에 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떠오르는데, 그런데 그 바다는 이 세상에 없더라. 원래 그런 세상만 있고, 그 세상 속엔 내가 알던 바다와 비슷한 바다들 몇 개가 있고, 세상에 더는 있지도 않은 바다를 찾겠다고 부산에서 강릉까지 두 번을 왕복한 나는 있는데, 그 바다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너 없는 데서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거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건조하게 슬퍼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고. 그날부터 며칠을 울고 울었어. 이 많은 물들은 다 어디서 왔나, 이제 세상에 없는 어떤 회색 바다로부터 왔나, 그 바다가 원래 그런 세상이 지겨워 도망치려고 내 눈과 불안과 내 침묵을 찢어버린 네 목소리 같은 것들을 이용했나, 내가 언제까지 울어주면 세상에 없는 그 바다가 다 마를까.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뚝 멎더라.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도, 무슨 그럴듯한 생각을 해낸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갑작스레, 밥상에 앉아 숟가락을 들 때만 해도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설거지를 할 때쯤에는 볼이 다 말라 있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리고 그때부터 긴 시간 오직 한 가지 궁금증만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에 도착한 거야.
우리에게 우리는 어디였을까.
참다못한 편지가
소리치기로 작정한 순간,
확인했습니다
두 줄짜리 글에는
몇 달치의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그렇고 그런 말들
내가 입기엔 너무 큰 말들
비가 그쳤는데 급하게 우산을 펼치는 말들
힘을 잃은 나를 창밖의 바다가 채갑니다
그러고는 볶습니다
이미 열여섯 번 볶아진 적 있습니다
바다가 뱉어낸 몸은 매일매일 아픕니다
아무도 안쓰러워 안 합니다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손수건 한 장이 나를 안쓰러워합니다
손수건 한 장은
아슬아슬하고 별것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_「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전문
저기, 이제 바다에 같이 가 보지 않을래? 내가 찾던 바다가 더는 없는 것처럼, 네가 보러 가자고 했던 바다도 아마 없을 거고, 조만간도 더는 조만간이 아닐 테지만. 어느 바다든 한 번 다녀오자. 그곳에도 여느 바다처럼 밀물과 썰물이 있고, 밤에 젖은 모래나 돌멩이가 뒹굴 거잖아. 사람들은 영원히 그 바다를 찾겠지만 누군가 다녀간 흔적들은 영원히 씻겨나가고, 우리가 다녀간 자국도 시간 앞에 그렇게 되겠지. 어쩌면 영원한 건 영원이란 단어뿐이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가 씻겨나가는 공간이 우리에게도 있어서,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뭐랄까, 어렴풋이는 알 것 같은데 말로 하기가 참 어렵네. 그냥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