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리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온 적이 있다. 11월 늦은 저녁이었나, 조금 이른 밤이었나. 엄마가 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그 시절 하던 가게 문을 닫고 오던 길이었는지 또렷하지는 않은데, 아무튼 조금 늦은 시간에 한 아이와 함께 집에 오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고 동생들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들어가자.” 하면서 엄마가 데리고 들어온 그 아이는 내 바로 아래 동생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다.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단발머리의 그 소녀는 추위 때문인지 볼이 빨갛게 부르터 있었다. 나도 동생들도 눈이 동그래져서 그 아이를 쳐다본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몹시 어색해하던 그 애의 어정쩡한 태도도.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밥상을 차려서는 아이 앞에 가져다주셨고, 그 애는 처음에는 좀 계면쩍어하더니 한 숟갈 두 숟갈 밥을 떠먹다가 이윽고 밥맛에 푹 빠져서는 우리가 슬쩍슬쩍 쳐다본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몰두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참 고팠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그 아이에게 별 질문을 하지 않으셨는데 단지, 집에 진짜 오늘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지, 하룻밤 여기서 자도 괜찮은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셨다. 동생들은 곧 그 소녀에게서 흥미가 사라졌는지 자기들끼리 놀기 바빴고 아이는 동생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미소 짓다가 자기도 모르게 큭큭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는 어쩐지 그 애가 신경 쓰여서 동생들과 노는 척하면서도 흘끔흘끔 그 아이를 관찰했다. 저 앤 어디서 온 걸까? 집이 없나? 고아일까? 엄마가 이제는 하다 하다 애도 주워 오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엄마는 가게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똥개 새끼도 두 번인가 주워 오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이 이제는 희미한데도 그 아이의 눈빛, 그 미소만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동생들이 노는 걸 지켜보던 그 눈망울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아이답지 않은 그 쓸쓸한 웃음- 나는 내 또래이거나 조금 어린 그 애를 보면서 어쩐지 가엾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추운 곳에 오래 있었던지, 배도 부르고 몸이 따뜻해진 아이는 한구석에서 동생들이 노는 걸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엄마는 곧 그 애에게 이부자리를 펼쳐주고 눕혀주었다. 아이는 곤하게 잠이 들었고 그때서야 나는 “엄마 쟤 누구야?” 하고 물었다. 엄마는 처음에는 숨겨둔 딸이라고 그러더니 우리가 아무도 믿지 않자, 그 애가 우리 집 계단에 한참 앉아 있었다는 것, 곧 집에 가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엄마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어서 집이 어딘지, 추운데 왜 집에 안 가는지 묻기 시작했단다.
아이는 말을 잘 하지 않았지만 띄엄띄엄하는 대답으로 유추하건대 집에서 매를 맞은 것 같고, 그길로 그 얇은 옷차림으로 집을 나와 어디 갈 곳도 없이 우리 집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몇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엄마가 조심조심 질문을 던져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아마도 그 아이는 그렇게 매를 맞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동학대’ 개념조차 일반적이지 않았고 아이가 매를 맞든 방치를 당하든 부부간 싸움이 일어나 아내가 구타당하든 가정폭력 개념은커녕 모두가 ‘남의 집안일’로 치부하던 때라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날 그 애를 집으로 데려다준다니 집이 어딘지 도통 말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얼어 죽을까 봐 일단 데리고 들어오셨단다. “그럼, 저 언니 이제 우리 언니야?” 막내가 물었는데 엄마는 “그래도 집이 있는 아인데, 데려다줘야지…” 말끝을 흐리며 잠든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다 보니 문득 그 시절 우리 집에 잠시, 아니 단 하루 맡겨졌던 그 소녀가 떠올랐다. <맡겨진 소녀>의 소녀는 무슨 일 때문인지 낯선 집에 맡겨진다. 아이를 데려다준 아빠는 얼마나 무심한지 헤어질 때 작별 인사나 포옹은커녕 아이의 짐조차 제대로 내려주지 않은 채 빨리 자리를 뜬다. 알고 보니 사랑이라고는 없는 소녀의 집안. 그런데도 부부끼리 섹스는 주야장천 하는지 이미 아이들이 여럿인데 거기에 또 엄마가 임신과 출산을 앞두고 있어 이 소녀를 먼 친척 집에 맡기게 된 것이다. 소녀는 그 여름, 무심한 듯 따뜻한 친척집- 킨셀라 부부의 돌봄 속에 처음 사랑을, 환대를, 배려를. 다정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녀는 자연스럽게도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이 소녀가 영원히 이 부부의 아이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리하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일까 마음을 졸이며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소녀에게는 사랑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부모일지언정 부모가 있고, 집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소녀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마주하는 것은 그 사랑 없음, 무관심과 삭막함, 눈치를 보며 늘 무언가 조심해야만 하는 풍경이다. 그곳에선 그 따뜻한 킨셀라 아저씨와 밀드러드 아줌마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럼에도 마침내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소녀는 참지 않는다. 아니 참지 못한다. 부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 심장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기 킨셀라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려간다. 그리고 토해내는 그 뜨거운 말에는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진다.
내 어린 시절 잠시 맡겨졌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차가운 집으로 돌아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지켜내며 성장했을까. 더는 상처받지도 파괴당하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잘 버티고 자랐을까. 망가지지 않고 어른이 되었을까……. 그 아이는 그때 그 시절 우리 집의 따뜻한 밥 한 그릇, 아랫목의 따뜻함을 기억할까. 만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따뜻함일까, 박탈감일까, 상실감일까. 또 다른 상처일까. 부디 <맡겨진 소녀>의 소녀에게도, 그리고 그때 그 아이에게도 그 여름, 또는 그 겨울의 짧았던 기억이 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기를, 그리고 그런 환대와 다정함의 기억들이 더 많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