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프, 바이 더 시 - 조이스 캐럴 오츠의 4가지 고딕 서스펜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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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에 이 책을 다 읽고 약간 기운이 빠져 있었더니 집사2가 무슨 책을 읽었기에 기분이 나쁘냐고 물었다. 오츠의 책인데 이러저러하다 말하다가 “아니, 왜 여자들은 쓰레기 만나서 그렇게 당하고 또 쓰레기를 만나는 거야?” 한숨을 내쉬었다. 단지 소설인데도 왜 이렇게 빡치는 것일까. 무슨 내용이냐고 묻기에 이 책에 실린 4개의 중편 중 쓰레기를 피해 또 다른 쓰레기에게로 자진해 걸어가는 여성이 등장하는 <환영처럼: 1972>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피해자 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가끔 집사2에게 ‘너니까 하는 말이지만…’ 하면서 정말 답답한 피해자를 탓하는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환영처럼: 1972>의 ‘앨리스’도 나를 빡치게 한 답답한 여성이다. 앨리스는 이제 스무 살 대학생이다. 똑똑하고 예쁘다. 그래서 그런지 당장 철학과 강사의 눈에 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수순으로 그놈은 앨리스에게 접근한다. 쏟아지는 온갖 칭찬- 너의 재능, 너의 미모, 너의 뛰어남, 너는 다른 학생과 다르다....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은데 차나 한잔? 이런 순서들- 열아홉에서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는 좀 지적이고 섬세한 거 같고 예민해 보이는 똑똑한 남자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더불어 외모를 칭찬해주면 대개는 귀가 번쩍, 눈이 번쩍 솔깃솔깃해져서 기분이 방방 뜨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면 그런 허영쯤은 누구나 갖고 있고 또 누구나 그런 시기를 거쳐 간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속성을 잘 아는 놈들은 늘 그런 부분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런 강사 놈 같은 놈 말이다......지금도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강사와 교수가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나이로는 성년이지만 머릿속 관념이나 생각으로는 아직 미성숙한 이 어린 학생 앨리스는 그의 추켜세움에 넘어가 그와 차를 마시려고 하고, 많은 카페와 음식점을 놔두고 차를 왜 집에서 마셔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집에까지 가게 된다. 안 돼, 앨리스! 제발 돌아가! 내가 샤프롱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놈 집에서 단둘이만 남게 되니, 당연히 그놈은 본색을 드러낸다. 차를 마시자더니 왜 앨리스의 몸을 왜 쓰다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놈의 손길은 바빠진다. 당혹한 앨리스가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며 뒤로 물러나자 그놈은 기분이 잡친 듯 말한다. 내숭 떨지 말라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건 너도 동의한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 비웃고 조롱한다. 야, 이놈아. 뭘 동의해! 차 마시겠다고 했지 몸 섞는다고 동의했니! 그러나 앨리스는  어린 여성- 그 앞의 남자는 자신을 가르치는 강사- 학점도 그놈 손에서 나오겠지. 결국 일은 그렇게 벌어지고 만다. 그놈은 몇 번 더 앨리스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런 쓰레기들이 늘 그렇듯이 이제 앨리스를 모른 체한다.

에휴.......... 답답해. 그런데 이런 사이에서 수정은 또 얼마나 잘 되는지. 앨리스는 덜컥 임신을 하고 만다. 이 작품의 제목은 <환영처럼: 1972>- 1972년이 배경이다. 낙태가 불법인 시절- 앨리스는 끊긴 생리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제발 자고 일어났을 때 침대에 피가 묻어있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 헛된 기대의 나날을 보내는 사이 몸은 점점 불어나고, 앨리스는 전처럼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절로 생각난다). 그래도 학교를 아예 안 나갈 수는 없어서 힘겹게 수업을 듣는 중 영문학 시간이었나, 한 시인의 강의를 듣다가 또 일이 벌어지고 만다. 시인이자 늙은 교수의 질문에 영특한 앨리스는 남들과 좀 다른 대답을 하게 되고 그러는 바람에 이 늙은이의 눈에 또 띄고 만다. 휴... 이 장면에서 샤프롱 본능이 발동한 나는 앨리스에게 대답하지 말거나 평범하게 답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앨리스는 말을 해버렸어.


아니나 다를까 이 늙은이는 앨리스의 답변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벌어지는 일들은 젊은 강사놈의 비열한 시즌2 또는 늙은 교수의 변주곡이다. 늙은이는 앨리스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그놈의 집, 그놈의 차! 아니 제발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라고!!! 아니면 학교 매점이나 카페 없어?!) 시와 문학 이야기를 하면서 영특한 그녀의 재능을 칭찬해주고 환심을 산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강사놈처럼 다짜고짜 몸부터 덮치려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을 들인다(나이가 들어서 그건 좀 무리겠지....). 너는 재능이 있으니 내 일을 도와다오. 보수는 넉넉히 주마. 우리는 문학과 시에 관해 지적으로 충만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등한 친구 사이다 운운.... 아니 교수님 근데 왜 느닷없이 앨리스 입에 혀를 넣으시나요? 친구끼리 누가 혀를 넣는다고.

그런 중에도 앨리스의 몸은 불어가기 시작하고 늙은이는 세상살이에 이미 만랩이라 앨리스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쉽게 짐작한다. 그래서 그 약점을 공략한다. 경제적인 지원, 그리고 결혼해서 그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울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 1972년, 낙태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비혼모로 살아가기는 더 쉽지 않은 상황- 궁지에 몰린 앨리스에게 그의 제안은 쉽사리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다. 저런 불량식품인데.... 먹지 마. 앨리스 아니야, 그 이상한 나라에서 도망쳐! 소리쳐 보지만 이 책 밖의 샤프롱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리가 없다. 드디어 이 앨리스가 자기의 손아귀에 넘어왔다고 생각하여 흥분한 영감탱이는 욕실에 들어가서 무슨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산스러운데 그 틈바구니에 넘나 흥분했는지 안 그래도 고장 났던 심장이 덜커덕 문제를 일으킨다. 아이고야, 이 앨리스의 앞날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카디프, 바이 더 시》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대부분 절망적이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상태는 대학 강사, 교수의 그루밍에 의해 성폭력 희생자가 되는 앨리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가정’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 남성들은 모두 이 작품 속 여성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다. 힘이나 나이 등 물리적 상황 및 심리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답답한 작품을 읽은 후에 <정희진의 공부> 6월호를 듣는데 때마침 ‘학습된 무기력일까? 희망일까?’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정폭력이든 학교폭력이든 데이트폭력이든 우리는 대부분 피해자가 무기력에 빠져서 그러니까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희진은 도리어 그런 상황 속의 피해자들은 ‘학습된 희망’ 때문에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 사람이 언젠가는 달라질 거야’ ‘술을 마셨을 때만 저러는 거야, 원래는 착한 사람이야.’ ‘내가 바꿀 수 있을 거야’ ‘나 아니면 저 사람을 바꿀 수 없어’ ‘저러다 말 거야’ ‘좋은 사람이니까 달라질 거야, 바뀔 거야’ 이런 희망고문 같은 것들- 가정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자신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언젠가는 바뀔 거라는, 자신(만)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못해서 결국 더 큰 희생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카디프, 바이 더 시》의 대부분의 여성들도 그렇다. 운 좋게 벗어난다 한들 그 트라우마와 불안 공포는 평생 그녀들을 따라다닌다. 살아있어도 삶은 지옥이다.

여자들아, 조금만 낌새가 이상하면 도망쳐라....... 당신은 그를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그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당신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언젠가는 그가 바뀔 거라는 희망은 결국 당신을 무덤으로 이끌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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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3 15: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 제가 너무나 싫어하는 이야기네요. ㅠㅠ 리뷰만 읽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젊은 교수도 그렇지만 저 늙은 교수도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데 너무 짜증납니다. 그 상황에 넘어가는 여자도 너무 답답하고, 저는 그렇게 자신의 힘을 인지하고 그걸 성착취에 써먹는 놈들에게 너무 침뱉어주고 싶습니다. 교수라서, 직장 상사라서 휘두를 수 있는 그 힘. 아 세상 싫으네요 진짜. 환멸 … ㅠㅠ

잠자냥 2023-06-13 15:54   좋아요 2 | URL
다락방 님이 안 좋아하실 거라고 그랬잖아요. ㅎ
저 단편 말고도 다른 단편에서는 의붓아버지가 어린 딸 성착취하려고 하고.....
가족 살해 후 자살하는 애비에.. 난리도 아닙니다. -_-
대학에서 저런 일 일어나는 거 지금도 여전히 ing라 진짜 답답해요........

건수하 2023-06-13 15: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우, 저 조이스 캐롤 오츠 안 읽어봤는데... 읽고 싶지 않으면서도 읽고 싶네요.

정말 <사건> 생각나고.. 저런 남자들 어찌나 많은지.. 특히 대학교, 대학원에서 말이죠.
교수 직업 윤리에 <섹스할 권리>의 챕터 제목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포함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대학생이 성인이라고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겠죠? 흥.. 누가 누굴 생각해 주나.

잠자냥 2023-06-13 15:57   좋아요 1 | URL
읽고 싶지 않으면서도 읽고 싶은 그 기분이 딱이네요. ㅎ 저는 이미 읽어버렸고-
저 대학 다닐 때도 저희 과 전공 강사와 학생 사이에 저런 일이 있었어서 더 빡쳤던 거 같아요..... ㅠㅠ
학생들아, 젊은 강사나 늙은 교수나 제발 피해....... 학교 안에서만 만나..... feat. 샤프롱 자냥

Falstaff 2023-06-13 16:10   좋아요 3 | URL
캐롤 오츠,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대중 소설 작가입니다. 근데 괜찮은 작가라서 저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대중소설도 좋아합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잘 쓰는 작가인데 유독 애매한 부분이 돌출된다는... 뭐 그런 겁니다. 학생들하고 지퍼 터지는 섹스하는 건 사실 필립 로스하고 존 쿳시가 더 한 거 같습니다. 뭐 굳이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쿳시의 <추락>도 마찬가지고요.

잠자냥 2023-06-13 16:21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 님이 제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데 오츠를 계속 읽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셨네요!

다락방 2023-06-13 16:33   좋아요 3 | URL
추락은 그래서 다시 읽고 싶은데 다시 읽기 싫은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되게 노골적이잖아요. 교수였을 때는 여대생 성착취 가능하지만 교수란 직함을 잃고 나면 나이든 육체노동자 여성과 섹스를 하는. 저 오래전에 되게 좋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저 존 쿳시 좋아했었는데 …

망고 2023-06-1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조이스 캐롤 오츠 좋아하는 작가라 이 책 샀는데(읽진않음^^)역시나 오츠여사 스타일의 소설이군요 꽉 막힌 답답한 상황 묘사를 너무나 숨막히게 잘 하는 작가라 읽고나면 한동안 기 빠지게 만들죠 그래서 중독성 있어요ㅎㅎㅎ저도 얼른 읽어봐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3-06-13 22:20   좋아요 1 | URL
오츠 팬 당연히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망고 님 말씀처럼 중독성도 있고요. 그러니까 계속 읽게 되는…. 망고 님도 얼른 읽으세요!

moonnight 2023-06-13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배송되어 온 책이에요. 이런 내용이었군요ㅠㅠ 오츠 여사님 책은 읽고 나면 멘붕 오는데도 꼭 사게 됩니다ㅠㅠ

잠자냥 2023-06-13 22:41   좋아요 2 | URL
음 이 단편은 세 번째 이야기고요. 다른 단편들은 또 분위기가 많이 다르니 재미나게 읽으세요. 이 작품도 끝은 어찌되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은오 2023-06-14 04: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이버 짝사랑러 은오 1승

잠자냥 2023-06-14 09:56   좋아요 1 | URL
은오야 땡투 또 잘 받았니?
페이퍼에 건 거라 무슨 책인지 모를 터인데 ㅋㅋㅋㅋㅋ 책 사는 데 보태렴!

은오 2023-06-14 06:2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굿모닝!! 😘 210원 들어왔던데 그렇다면 20,700원짜리 인정투쟁이 아닐까요? ㅋㅋㅋㅋ 가격으로 추측 가능 키키키킥
안그래도 아까 급박해져서 적립금 마일리지 긁어긁어모아서 책 살때 보탰습니다! 🙆‍♀️

잠자냥 2023-06-14 08:45   좋아요 2 | URL
역시 영특하도다

페넬로페 2023-06-1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글을 잘 써도 이제 이런 책을 읽기가 좀 힘들어요 ㅠㅠ

잠자냥 2023-06-14 22:10   좋아요 0 | URL
네 심정적으로 참 힘든 작품입니다…

구단씨 2023-06-15 1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드라마나 소설, 티비 고발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쓰레기 만나서 인생 힘들어졌는데, 또 쓰레기를 만나네. 어떻게 그러지?
그런데요. 가까운 사람이 자기 가족의 보이스피싱을 막아주고 그 가족을 나무랐는데,
세상에나 그 사람이 보이스피싱 당해서 돈 날릴 뻔한 걸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알았어요.
그 낌새가 조금 이상해도 마음이 향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요.
물론 우리는 언제나! 그 낌새를 알아채고 조심해야 합니다!!!

잠자냥 2023-06-15 20:4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나는 아닐 거라고 장담 못할 세상! 경계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살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