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 간혹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심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옮긴다면 그것은 살인이 될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 저 인간 좀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어떨까? 그런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를 저지른 것일까? 나는 종교인이 아닌지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아, 저 인간 좀 죽어버렸으면”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져 본 사람이 만일 가톨릭 신자라면?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기독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독실한 종교적 분위기 아래 자라난 사람이라면? 그는 아주 잠깐일지언정 그런 생각을 품은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시달릴 것이다.
그레이엄 그린이 묘사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종교적으로 그 개인은 신실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분위기 아래 나고 자라서 그런 사회에서 생활해 가기 때문에 살의(殺意)를 품는다든가 또는 이혼을 꿈꾼다거나, 불륜을 저지르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인물은 대부분 그레이엄 그린 그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미국인>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영국 <더 타임스>의 기자인 ‘토머스 파울러’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는 2차 세계 대전 직후 베트남에 특파원으로 보내졌다. 그동안 프랑스의 지배 아래 놓였던 베트남은 이제 해방과 독립의 열기로 달아오르면서 저마다 주의주장을 내세우며 정권을 차지하려는 분파들이 속속 등장해 실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날마다 폭탄이 터지고 논밭에서 살육이 일어나는 이곳에 파울러는 정세를 취재하기 위해 영국에서 날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제껏 제국주의를 주도해온 영국과 프랑스, 거기에 맞서는 베트남 민족주의자들,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 새로운 패권 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아귀다툼의 장이 된 이 베트남에서 기자로서의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고 심지어 전쟁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만사에 심드렁하달까? ‘영원한 삶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갈구’하고 ‘행복을 잃을까 봐 항상 전전긍긍’(104쪽)하는 모순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는 뭐랄까 그냥 산다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니힐리스트처럼 보인다. 전장에서 죽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 정도로 삶에 염증을 느끼는 50대에 접어든 늙은 남자일 뿐이다.
그나마 그가 이 베트남에서 안식을 구할 때는 아편을 피우며 사랑하는 여인 ‘후엉’과 같이 있을 때뿐이다. 그런데 이 관계도 참 묘한 것이, 작품 초반에 파울러는 ‘후엉’을 다른 남자, 그러니까 ‘파일’이라는 젊은 미국 남자에게 보내기로 한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아니, 빼앗겼다고 해야 하나? 작품이 전개되면서 이 기묘한 관계의 실상이 드러나는데, 사실 파울러는 영국에 아내를 둔 남자로 후엉은 말하자면 베트남의 현지처이다. 그것도 거의 서른 살이나 어린…. 영국의 아내는 가톨릭 신자로, 이혼은 절대 못 하는 처지- 이미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라 파울러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고, 후엉과 함께 이혼을 허락한다는 답장을 기다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No’라는 대답뿐이다.
그러던 차에 젊고 싱싱하고 부유한 미국 남자 ‘파일’이 미국 경제지원단 소속으로 베트남에 온 것이다. 그리고 파일은 후엉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끊임없이 구애한다. 이 파일이라는 인물이 바로 제목이 의미하는 ‘조용한 미국인’인데 서른둘의 이 남자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해가 될 여지가 없는, 조용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착한, 이제 막 학생 티를 벗어난 선량한 인상의 남자이다. 처음에 파울러는 그런 인상의 파일을 보고 후엉의 말대로 ‘조용한 미국인’이구나 생각하지만 곧 그가 지닌 모순을 간파하게 된다.
파일은 순수한 이상가. 아니 몽상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책에서 배운 이론을 현실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적용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는 요크 하딩이라는 사상가의 책을 교본처럼 따르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다. 재미난 점은 파울러가 지적하듯이 요크 하딩 또한 현실의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식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이 완벽하다고 믿는 파일은 베트남의 제3세력과 접촉해 그들을 물밑으로 지원한다. 그 일의 위험성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런 중에 파일은 그곳이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결혼하여 다른 나라로 가길 꿈꾸는 후엉을 만나 동정인지 연민인지 선민의식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상에 따라서인지 그 자신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 뇌의 명령(나는 마음의 명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에 따라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파울러(이 늙은 영국 남자의 손에서부터)로부터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결혼까지 신청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파일은 후엉을 데리고 민주주의의 이상을 베트남에서 실현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사실 초반부에 파일이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 순진한 몽상가는 책에서 가르친 대로 세상 판단도 하지 못한 채 이론과 이상만으로 똘똘 뭉쳐 제 신념대로 행동하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파울러는 이 ‘젊고 무식하고 어리석고 쓸데없이 나서기 좋아한 인물이 지나치게 순진해서 생존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죽었는데 저렇게 차디차게 말하다니! 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작품을 읽는 대다수 독자들은 파울러의 심정에 어느 정도는 동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만큼 파일의 순진함, 그 순진한 맹종은 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일은 영국과 프랑스로 상징할 수 있는 제국주의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패권을 손에 쥐고 신이 난 미국의 표본이다. 늙어가는 중년의 영국 남자 파울러에 비해 젊고 싱싱하다는 점에서도 단연 그렇게 보인다. 더욱이 그 나라의 내부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믿는 바가 선이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온 세계에 그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도, 또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생명이 피에 스러지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도 철저하게 미국의 얼굴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지원한 제3세력의 테러로 인해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자기 신발에 묻은 피부터 닦을 생각을 하는 그런 인간에게 이상(理想)이란 과연 무엇인가? “순진함은 일종의 광기”라며 분노한 파울러가 그랬듯이 그런 ‘조용한 미국인’ 파일의 모습에 비위가 상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파일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후엉은 다시 이 늙은 영국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아, 자력으로는 자신이 속한 세계도, 삶도 어떻게 바꿀 수 없는 베트남 여인이여…. 그렇다고 이 늙은 영국(제국주의) 남자 파울러는 선(善)인가? 그 또한 제 나라에 아내를 두고는 이곳 베트남에서 베트남 여인을 착취한다(사랑이라는 이름의 성착취). 전쟁에 염증을 느낀다고 해서,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에 분노한다고 해서, 그 모든 일들에 죄의식을 느낀다고 해서 그가 파일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또한 이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하얀 피부의 인간”일 뿐이다.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얼쩡거리며 이곳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멋대로 설정하고는 굳이 납득시키려고 덤비는”(211쪽) 그런 “하얀 피부의 인간”- <조용한 미국인>은 이렇게 2차 대전 이후 베트남을 배경으로 제국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끝으로 이 작품에는 나름의 반전이 숨어 있는데, 그 반전이 밝혀지기까지는 추리소설처럼 읽히기도 하고, 반전이 밝혀진 후에는 과연 어디까지가 죄일까 내내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