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생활에서나 문학에서나 영화에서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연민도 들고 불쌍한 마음도 들지만 가까이는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의 주인공 ‘주디스 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주디스 헌은 일요일 오후마다 절친이라고 생각하는 ‘오닐 가족’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 가족 중 누구도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핑계를 대서 주디스 헌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주디스 헌의 친구인 ‘오닐’은 정작 자신의 친구인데도 그녀가 올 시간이면 냉큼 서재로 도망가 버린다. 결국 오닐의 아내인 ‘모이라’가 마지못해 그녀를 환대하는 척하지만 주디스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이내 졸다가 잠들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런데도 이 눈치 없는 여자 주디스는 그 가족이 자신을 기피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이 가정의 따뜻함을 그리워하면서 다음 일요일에도, 또 그다음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이 집을 찾아온다. 대체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일까?
1950년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이제 마흔을 넘긴 독신 여성 ‘주디스 헌’은 철저히 혼자이다. 부모도 형제도 일가친척도 없다. 유일한 친척이었던 이모가 몇 해 전 세상을 뜨고 난 후로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이모는 그녀에게 이렇다 할 재산도 남겨주지 않았고, 특출한 재능도 그렇다고 빼어난 외모를 지니지도 못한, 아니 도리어 못난 얼굴에 가까운 이 여성은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했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하숙집을 전전한다. 타인의 마음을 오해도 잘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기 일쑤여서 마음에 드는 하숙집을 찾았나 싶으면 금세 또 불만거리를 찾아내서는 다른 집으로 옮기고는 한다. 그렇게 또 새로이 찾아든 하숙집이 바로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라이스 부인’의 집이다.
처음에 이 작품은 큭큭 웃음이 터진다. 이 각진 얼굴의,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디스- 주디의 성격과 생각이 좀 독특하기도 해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고, 라이스 부인의 하숙집과 하숙인들 묘사가 생생해서 시트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라이스 부인의 아들인 버나드, 버니.......(오 마이갓 다시 생각해도 끔찍해!)를 묘사하는 부분은 너무나 절묘해서 블랙코미디처럼 초반은 그렇게 흘러간다. 버나드는 서른이 넘은 덩치 큰 남자인데도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아 섹스는 하는구나) 거의 없는 인간이다. 밥도 엄마가 먹여줄 기세이고 심지어 중반 이후에는 엄마인 라이스 부인이 몸을 씻겨주는 장면도 나온다(오 마이갓.....). 하숙집에서 이 버나드를 마주한 주디는 허옇고 퉁퉁하게 살 진 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버나드를 보고는 속으로 ‘아기 라이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기 라이스가 결코 아기처럼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것- 제가 편하게 엄마에게 기생해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잔머리를 굴리는지 이 끔찍한 아기 라이스의 간계에 주디도 놀아날 뻔한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이 집에 주디의 눈을 사로잡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아기 라이스의 삼촌이자 라이스 부인의 오빠인 ‘제임스 매든’- 삼십 년 넘게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온 그는 중후한 장년의 남성으로 한순간에 이 외로운 여인 주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말끝마다 미국을 찬양하는 매든은 미국에서 호텔업을 하다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미국에서 호텔 사업으로 성공한 남자가 왜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돌아왔겠는가. 호텔업은커녕 호텔 도어맨 등 변변찮은 직업을 전전하다 고향으로 쫓기듯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여동생의 집에 생활비도 한 푼 내지 않으면서 기거하는 것이고. 그런데 주디는 이 남자를 미국에서 성공한 돈 많은 사업가로 ‘오해’하고 매든은 매든대로 주디가 단지 멋을 부리려고 찬 (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금시계를 보고는 그녀가 골드미스(ㅋㅋㅋㅋ)라고 ‘오해’하고는 한몫 건져보려는 욕심에 주디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 속내를 모르고 주디는 매든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이 블랙코미디는 갑자기 급 우울&슬퍼진다. 한마디로 웃프다. 주디가 왜 그 나이까지 짝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지, 왜 변변찮은 직업(물론 시대배경이 1950년대의 보수적인 아일랜드 지방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조차 없이 이제는 피아노 교습으로 근근이 먹고살아가는지 그 속내를 알게 되는 순간 하, 인생이란 무엇인가 독신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가 갑자기 슬퍼지는 것이다. 단지 주디가 못생겨서 결혼하지 못한 것일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그건 아닐 것 같다. 젊은 나날의 주디에게 그 의무가 없었더라면, 그녀가 이기적으로 자기의 꿈(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좇아 계속 그 시절에 그것을 추구했더라면 꼭 그녀가 바라는 대로 완벽하게 좋은 남자는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어찌어찌 남자는 만나서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살지는 않았을까 싶어진다. 그랬더라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았으리라-
속물스럽기도 하고 남을 제멋대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딱히 악하지도 않고 같이 있는 게 너무나 역할 정도로 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닌 주디스 헌- 그런데도 그녀는 그 젊은 나날에 단지 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 응당 누렸을 법한 우정이나 사랑 등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인간관계에서 소외당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 과도한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기피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일에서도 그렇다. 그 의무에 묶이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결혼 전까지 나름 자기의 커리어를 쌓아가지 않았을까. 주디가 원하지는 않았으나 주디를 원했던 그녀의 의무는 참으로 안타깝고 과도하게 그녀의 삶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몰아간다.
주디의 운명을 굴곡지게 만든 그 의무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뜻하지 않은 복병이 하나 더 등장하는데, 바로 주님- 알코올이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가운데 이렇게 술에 취한 여성 주인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가끔 술에 취하고 망가지는 여성 캐릭터들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토록 철저히 알코올의존증인 여성 캐릭터는 처음인 것 같다. 술에 기대어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잊고자 하는 여자, 그렇지만 저 하느님, 그러니까 저기 저 먼 어딘가에 계실지도 안 계실지도 모를 주님이 이렇게 알코올에 기대는 자신을 보면 꾸짖을 게 틀림없으므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의 주님을 멀리하려고 애쓰는 여자. 그러나 저기 하늘의 주님은 기어코 그녀를 외면한다. 현실에서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신부와 사제들도 그녀의 고해성사나 그녀의 외로움에 지친 하소연은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릴 뿐이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 여자기 기댈 곳은 오직 주(酒)님뿐이 아닐까.........
누군가 단 한 존재만이라도 주디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녀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나조차도 이 주디스 헌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오닐 가족처럼 대했을 거 같으니 참 쉽지 않은 인생이다.
“당신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어요, 모이라 그럼 당신도 나처럼 되는 거예요. 대낮에 망상이나 하면서 그 꿈을 붙잡고 싶어 하는 거죠. 하지만 붙잡을 수 없어요. 그래서 술을 마셔요. 그 망상을 실현해 주는 힘을 얻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모이라, 그 인간이 실제로는 어떤 인간이건 간에, 그는 당신한테 상냥한 말을 건네는 왕자님이 돼요. 왕자님. 설령 그 왕자님이 늙고 못생기고 흔해 빠진 사람일지라도요. 그 남자가 가장 자랑할 만한 경력이 뉴욕 어느 호텔의 도어맨이라고 해도 상관없게 돼요. 이제 내 말이 실감이 돼요?” (3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