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오님이 아름다운 질문들을 쏘아 올릴 때만 해도. 연휴의 시작을 알리는 잠자냥님의 어마어마한 답변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일이 어디로 흘러갈 지 알지 못했다. 그저 지나가던 한 떨기 먼지로서 감탄만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물론 호들갑도 좀 떨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부캐 부자 잠자냥님(a.k.a. 캣gpt, 프랑스 고양이, etc.)의 댓글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 페이퍼를 본 후 7일 이내에 페이퍼를 쓰지 않으면 7개월 동안 당신은 책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이 댓글 어쩐지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됐을 것 같지 않나요?) 책을 살 수 없다니! 책을 살 수 없다니?! 책을 살 수 없다니!!!! 이건 책 읽기보단 책 지르기에 중독되어 있는 책먼지를 꿰뚫어 본 회심의 일격이 아닌가! 해당 페이퍼를 거듭 다시 읽는 방식으로 7일씩 새로고침하겠다는 나름의 편법을 고안했으나 혹시 답을 달고 싶어도 그간 올라온 고품격 페이퍼들 앞에 망설이고 있는 알라디너 분들이 계시지는 않을까 싶어 이따위로 써도 된다는 마구잡이의 선례를 남기고자 이 글을 쓴다.
1. 병렬독서 하시나요? 아니면 한 권씩 읽고 한 권 다 끝내면 다른 책으로 넘어가시나요? 엄청 두껍고 머리 아픈 책이면요?
병렬독서가 혹시 '한꺼번에 여러 책을 벌여 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면, 맞다, 병렬독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권을 저질러 놓아도 한번에, 동시에, 여러 권을 펴놓고 읽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눈앞에 여러 책을 펼쳐 놓는다 하더라도 독서의 순간에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권 뿐이다. 그러므로 병렬독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고 이론과 실재는 다른 법. 현재 읽고 있는 책들을 출근 전에 찍어왔다(그렇다, 출근해서 이 글을 쓰려고 아침부터 벼르고 있었다).
외출할 때 보통 종이책 두 권과 전자책 기기를 챙긴다. 주력해서 읽는 책은 한 권이고 나머지 한 권과 전자책은 막상 가지고 나왔는데 그 책을 별로 읽고 싶지 않거나 책을 다 읽었을 때를 대비해서 들고 다닌다. 지금 가장 열중해서 읽고 있는 책은 데어라 혼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이 책의 강점은 잔인할 정도로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다. 진짜로 자존감이 높고 강인한 사람은 은유나 미화 없이 스스로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e.g., 뭐 어때? 이게 나인 걸). 이 책이 딱 그렇다. <일본산고>는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사이다 같은 글을 읽고 싶어 골랐고, <현장비평>은 직업인으로서의 비평가의 고충을 엿볼 수 있어 재밌다.
직업과 관련하여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읽는 책, 관심이 가는 주제와 관련된 책, 재미로 보는 책 등 전략적으로 분류를 정해 병렬독서를 하는 경우, 모임에서 읽는 책, 혼자 읽는 책, 자기 전에 읽는 책, 진지하게 책상에 앉아서 읽는 책, 이동 중에 읽는 책 등 상황에 따라 구분해서 병렬독서를 하는 경우 등 병렬독서의 사례는 다양할 것이다. 내 경우는 읽던 책에 질렸거나 그저 궁금하단 이유로 다른 책을 펴고, 또 다른 책을 펴면서, 대책 없이 읽고 있는 책을 증식시키는 편이다. 한 권씩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통째로 습관을 뜯어 고치고 싶다.
2. 도서관에 신청도 하시고 전자책도 구입하시는 것 같은데 도서관 신청or전자책 구입or종이책 구입은 어떤 기준인지?
a. 통장 잔고가 위험할 때: '책을 너무 많이 샀어, 절약해야 해' 싶으면 1)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이 있는지 확인한다. 2-1) 없으면 인터넷 서점에 전자책이 있는지 확인한다. 2-2)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지 확인한다. 3) 상호대차도 불가능하면 도서관에 신청한다(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경우 수요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일부러 신청하기도 한다).
b. 급박할 때: 서점에 사러 가거나 인터넷 서점에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릴 여유도 없다. 당장 읽고 싶다. 그런데 전자책이 있다. 전자책을 산다.
c. 무거울 때: 종이책이 있지만 들고 다니기 무거울 때 같은 책을 전자책으로 추가 구매할 때도 있고, 여행이나 출장 일정이 잡혀있을 때 작정하고 전자책만 구매할 때도 있다.
d. 집이 좁을 때: 열린책들, 을유문화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전자책으로 먼저 읽다가 가독성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종이책으로 건너간다. 반대로 너무 좋아서 소장하고 싶을 때 종이책을 사기도 한다. 그 외 장르소설이나 종이책으로 사기 아까운 책도 전자책으로 먼저 읽는다.
3. 읽은 책은 다 100자평 남기시는 건가요?
기록에 집착하다가 책 읽기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던 적이 있어서(강박적 성향이 있는 사람은 취미까지 생산적이면 위험하다고 한다) 아예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거나 포스트잇에 짧은 감상을 써서 책 표지 안쪽에만 붙여두고 넘어갈 때도 있다.
4. 막상 읽어보니 별로라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는 책은 미련 없이 덮으시는지 아니면 그래도 붙잡고 완독하시는지?
왜 별로라고 느끼는지 먼저 생각한다. 당장 생각나는 경우는 총 네 가지이다. a) 좋은 책이지만 내 수준이 못 따라갈 때 b) 내가 기대했거나 예상했던 바와 다를 때 c) 감정을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아예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않을 때 d) 정말 나쁜 책일 때. 앞의 두 경우에는 끝까지 읽지만 뒤의 두 경우에는 포기한다.
5. 중고로 팔아버리는 책과 남기는 책은 어떤 기준인지?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을 것인가'이다. 다시 읽을 것 같지 않다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거나 좋은 책이라도 팔고, 다시 읽을 것 같으면 선호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남긴다.
중고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이 애초에 물건을 살 때부터 되팔 것을 염두에 두고 포장과 영수증을 모두 보관하고, 물건을 모시듯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책에 비춰 생각해보니 중고로 책을 팔 걸 생각했을 때 그게 나의 독서 경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팔 걸 생각하면 당연히 책에 마음껏 표시를 하거나 플래그를 붙이는 걸 망설이게 되고 슈퍼바이백 기간에 팔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 쫓기듯 책을 읽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땐 되도록 그냥 안 팔 책이라고 생각한다.
6. 책 구입하실 때 중점적으로 보시는 게 뭔지? 평소 믿고 보는 작가라면 그냥 구입해도 되겠지만 아니라면 저자 이력이나 뭐 소재나 상 받은 목록이라든가 뭘 주로 보시는지. 더해서 이런 책은 아묻따 거른다 하는 것도 있으실 텐데 궁금합니다.
먼저, 무조건 거르는 책. 앞서 답변 주셨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계발서는 믿고 거른다. 너는 존재만으로 소중하고 지나치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힐링서 역시 거르는 종목이다. 나는 세상이 단순하다고 말하는 책들이 싫다.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쉽게 설명하려 드는 책이 싫다. 경제적 성공도 마음의 평화도 다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책이 싫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책이 싫다.
책을 살 때는 막 산다. 다 산다. 알라디너 분들이 좋다고 해도 사고, 지인들이 추천해도 사고, 한겨레 신문 주말판 서평을 읽고 흥미로워도 사고,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홀려서도 사고, 상을 받았어도 사고, 상을 못 받았어도 사고, 좋아하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못 들어본 작가라도 사고, 심지어 싫어하는 작가라도 산다. 본문 미리보기 정도는 하고 사지만 미리보기가 없어도 인용된 몇 줄이 취향인 것 같으면 사고, 굿즈가 예쁘거나 책 디자인이 예뻐도 산다.
헥헥.. 저주를 풀었으니 이제 책 사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