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강유원 서평집
강유원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국어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면 아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점이 많다.
국어 교사는 글을 잘 쓸 거야. 책을 많이 읽을 거야... 이렇게.
나는 진지하게 "교과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농담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간혹 아이들이 진지하게 '어떤 책을 읽을까요?'하고 묻는다.
지 수준에 맞는 책을 읽으면 되지, 그건 왜 묻는담? 하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진지하다.
왜 자기가 읽을 책을 스스로 고르지 못하고 물으러 다닐까?
그 이유는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은 없고(안 읽으면 읽고 싶은 책이 없는 법이다.),
책을 읽어야 인간이 된다는 말에 따라 왠지 뭔가 교양을 쌓고 싶을 땐,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해 보는 것일게다.

나의 독서는 주제 독서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찾으려는 '순수이성비판'쪽의 마음 공부도 읽고 있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으려는 '실천이성비판' 쪽의 사회역사 책들도 읽고 있다.
그리고 직업에 따른 연구로 문학 작품이나 언어학 연구 서적들도 읽고 있으며,
동양의 철학이랄까. 그 기본이 될 법한 책들도 간혹 읽는 법이 있다.

이 책은 스스로 '비정규직 철학박사'라고 일컫는 강유원의 주제독서다.

그의 주제는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라고 나누고 있는데, 뭐 내가 읽는 책들도 이런 범주와 많이 겹쳐 보인다.

아무래도 서평집이다 보니 강유원의 시니컬하고 시원시원한 욕지거리를 듣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깊은 독서를 하는 방법에 대해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재미없는 부분도 많다. 너무 수준이 높다고나 할까.

다치바나의 '교양'을 읽는 그는 다치바나가 쌓아올린 지적 탐구를 보면서, 그 탐구가 '주제'가 없었음을 비판한다. 그의 내면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는 연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도 단테의 신곡을 기회를 봐서 읽으려고 하고 있는데, 푸른숲의 '단테', 서해문집의 '신곡'을 소개해 준다. 고맙다.

한스위르겐 괴르츠의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뿌리와 이파리, 2003 도 좋은 책이라고 극찬이다. 가만있자. 강유원의 이 책도 뿌리와 이파리에서 나온 책인데... 음. 그렇군. '그동안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어온 사람들은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일단 중간 정리를 한 다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독서의 질적 변화와 공부의 진전이 느껴질 것이다.' 매력적인 추천사다.

모 교수의 책을 비평하면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핵심적인 것들... 이어서 올바른 동기와 나무랄 데 없는 전개 구도...를 칭찬하는 체 하다가, 갑자기 내용은 한마디로 '학부학생 리포트'라고 힐난한다. 책값 싸다고 막 주문할 일이 아니란다. 욕도 이런 욕이 없다. ㅎㅎㅎ

벌린의 마르크스 비평에서 그가 우파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제 군국주의 찌꺼기인 유사-파시스트적 한국 우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아, 이 땅의 '일군찌유-파우파'여! 짜증나게 좀 살지 말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공병호의 '실용 독서'를 그도 어지간히 씹는다.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지식의 창출'이 그의 독서 목적인데, 그는 속도감을 어지간히 좋아한다. 강유원은 그런 '지적인 사업가'를 <마름>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통쾌하다. 그가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언선들이 끼치는 해악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신경 바짝 써서 경계해야 할 무리들은 바로 이들인 것이다. 음, 자본의 <마름>. 자본가는 말이 없다. 다만 그 중간관리자인 마름들이 설치고 다닐 따름. 시니컬하면서도 날카로움이 드러난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를 은폐하기 위해 공병호와 같은 '쓰레기 지식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자기계발 뷔페를 차려놓고 노동자들을 현혹함으로써 자본가에게 기여한다. 고 쓴다.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 좋아하는 민족애... 뭐, 그런 잡스런 쓰레기같은 민족주의는 파시즘의 동의어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한국적'이란 관형어가 바로 '파시즘적'이란 말이었다. 그 조상은 아까 이야기한 '일군찌유-파우파'였던 것이다. 카미카제들이 죽었는데, 그들이 꽃으로 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딱 하나. 그들의 죽음이 개죽음이었다는 것 뿐이다. 이런 말들은 근질근질 한 데를 확 긁어주는 느낌이다.

한국 현대사를 읽으면서, '명백한 사실이 밝혀져 사람들이 모두 다 그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행동하리라 생각하는 건 순진한 착각'이라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읽어준다. 맞다. 노동자가, 그리고 진보 세력이 옳다라고 알아 봤자, 사람들은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포를 맛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선거에서 가진자들의 당을 찍는다. 그래야 공산당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폭력적 세뇌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인간 백정', 독재자 박00, 살인자 전00라고 쓰는 강유원의 독서는 이미 '중립적일 수 없는 독서'이다.

그도 잘 알고 있다. 중립은 폭력을 기만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한 방법이었음을...
그래서 그가 주류 학계로 들어갈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공부는 분명히 또 하나의 좋은 학문의 길임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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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4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7-06-24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살면 좋은 게 그런 거죠. ^^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그런 것. 하긴 저도 서울 한 10년 살았지만, 대학로에서 연극 본 거 10번도 안 되겠네요.^^ 그때는 한창 마당극이 유행이어서 그런 것들이나 보곤 했죠. 음, 변강쇠같은 사람의... 시니컬한 강의라...ㅎㅎㅎ 재밌겠네요.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강유원은 한 마디로 시니컬한 사람이다.

시니컬한 사람은 비주류에 속하고, 왕따가 되기 쉬우며, 왕따인 주제에 남들을 혼자서 다 따돌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강유원의 책은 딱, 보면 안 팔리게 생겨 먹었다. 홍보도 안 될 것이 '여름언덕'이란 출판사는 보다보다 처음 본 출판사다.

그런데 점쟁이보다 못한 '철학과'를 그것도 박사가 될 때까지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의 글은 참으로 정직하다. 그의 이력이 궁금하여 책날개를 보니, '동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몇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가 전부다. 이 사람 참 담백하고 깔끔하다. 딱 내 스탈이다. 여자들도 좋아할 스타일. 그런데, 돈이 없어서 속물들은 별로 안 따를 스탈이지만...

공부의 방식이 베끼기이고 한 50번쯤 좋은 책을 읽는 것이란 말에는 동감이면서도 50번에 질린다. 나는 좋은 책을 한 번도 제대로 못 읽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몇 번 읽어도 몽땅 까먹어 버리기도 했을 뿐더러...

공부라면, 공자 맹자를 달달 외우고, 그것들을 적절히 베껴서 글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학이고,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민족, 개화 이후로는 오로지 썩은 동앗줄이 아닌 줄을 잡기 위해서 택해야 했던 '공부' 제일주의가  만든 '서울대학교' 및 명문대의 전설은 그래서 '부실한 명문'의 결과를 낳고 말았겠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학문적 성과보다는 폭탄주가 더 유효했으며,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보다는 일 년에 수십 편의 쓰레기 잡글들을 '베끼고, 재탕 삼탕 우려내고, 바치고, 훔치는' 교수들의 '학자연'하는 실상을 정말 시니컬하게 읽어내고 쓰는 글이다.

이 책은 실제로 '대학 입학 공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제대로 된 <학문>을 하자는 충언이다. 충언을 바친 충신을 죽여버린 임금의 말로는 어땠는지 다 알지 않는가. 이 땅의 학문이 밑도 끝도 없이 곤두박질치는 것에는 충신의 충언을 우습게 보는 권위자들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판결이겠다. 이래갖고는 출세하기 힘들지^^ 그치만, 강유원씨 나같은 사람이 좋아하니깐 힘 내쇼~~

그의 시니컬한 말들에 속이 시원한 곳이 몇 부분 있다.

51. 그의 아들의 전락에 대해서는 애비가 나쁜 짓을 그만큼 했으니 마땅히 그런 벌을 받아야지라는 일종의 통쾌함을 느낀다.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누구게요? 그란... 이렇게 시원스럽게 그때 그 새끼를 깐 책은 잘 없지 싶다. 때려죽이고 싶다...라고라...

56. 꽤 많은 소설가들이 소설만 써서 먹고 살기를 꿈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단계에 들어섰을 때 그가 여전히 소설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기업가로 변신할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는 '소설가'로 부를 수 없고 '기업가'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죄일선보같은 데서는 그를 선전해주고 그를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며, 그런 신세를 갚기 위해서 그는 그 매체를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공생관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식들도 많지만, 그 대표자로 꼽은 사람이 정말 딱, 이다. 통쾌하다.

74. 000 같은 이가 텔레비전 제작자의 이쁨을 받는 이유,... 그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있으므로 미디어에서 말썽을 일으킬만한 소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상당한 쑈맨쉽도 가지고 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언제 들어도 좋은 공자님 말씀이다. 방송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안전빵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진지한 학술적 비판에는 거의 응대를 하지 않는다.

카멜레온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충성을 다짐하는 거 아닌가 싶은 이넘은 텔레비전에 나와서 지가 쓴 책 팔아먹는 데 도가 텄다.

75. 이들과 비슷한 부류들로 예전에 자유기업센터 소장을 하던 000처럼 기업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박사들이나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인데, 이들 모두를 우리는 유기적 지식인, 기능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다. ... 그들은 월급 주는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 그들의 일은 이미 미디어에 길들어진 학자들을 관리하고 그런 재질이 있어 뵈는 똘마니들을 발굴해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학위를 딴 학문 분야의 학회에 참석해서 학자인 척하며, 거기에 참석한 다른 학자들은 기자를 가까이 하고자 할근거린다. 어차피 미디어를 핥아먹고 살기는 매일반...

이 인간의 책들은 구역질 난다. 근데 죄일선보는 참 사랑하는 작자겠다.

리영희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도 솔직 담백하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 결론을 보고 생각한 것도 재밌다.
결론 :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안 일어난다.
반론 : 물론 예외는 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야겠다고 맘먹으면 전쟁은 난다.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킬 원인은 미국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이렇게 쉽게 명백하게 이야기한 사람 어디 있던가? 쥐뿔도 잘난 체하면서 이리 저리 에두르고 다니기만 했지, 결론은 없지 않았던가 말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학자들의 돈타령'이라고 하는 부분도 통쾌하다.
인문학자가 유사-공학적 태도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문학의 위기라고...

그의 충고. 리더십에 관한 고전을 쓰고 싶은가? 그러면 고전을 읽으라.
진정한 리더십을 가지고 싶은가? 그러면 고전을 읽으라...
부박한 세상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사회에서 믿을 건 고전뿐이다... 라고 하면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기 전에 이미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10권에 관하여'를 저술한 예를 든다. 징헌 넘들끼리 서로 알아보는군. ㅋㅋ

그의 <시니컬>한 방법론이 제시한 <지도교수론>은 그의 탁견이다.
이런 지도교수 만나면 나도 몸으로 한번 공부해 보고 싶다...

지도학생에게 잔심부름 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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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6-1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명성에 굶주린 거지들... 많죠. 서정주도 그렇고, 박목월도 그런데, 그 아들 박동규는 애비 뺨칩디다. ㅎㅎㅎ 박동규는 대학다닐 때 수업을 들었는데 거의 방송 출연한다고 결강이 많았어요. 3학점짜리를 30분 수업하는데, 지랄같이 들을 것도 없곤 했죠.
저같이 착한 사람에게 시니컬하고 욕도 잘 한다 하심은... ㅎㅎㅎ 제대로 보셨군요.

꼬마요정 2007-06-1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51의 그는 박정희인가요??^^ 56은.. 이문열? 74는 도올??
그 외에는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 왠지 이 책 꼭 읽어봐야 하겠어요~~ 궁금해서요^^

글샘 2007-06-1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퀴즈를 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답을 다시다니... 이거 선거법 위반이라고 깝죽대는 미친개가 물까봐 못 쓴 거랍니다. ㅎㅎㅎ 공병호라고 한 사람은 못 맞추셨네요. 한번 읽어 보시죠^^

달팽이 2007-06-1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처럼 시니컬하고 과감한 언변은 사회의 가려운 것일수록 시원하겠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칼같은 말 언저리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간추려놓은 글들이 재미있습니다.
보관함으로 넘깁니다.

꼬마요정 2007-06-1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머지 한 사람이 공병호였군요~ 그러고보니 딱이네요^^

글샘 2007-06-2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도올처럼 잘난 척 병에 걸린 사람들이 조금만 겸손하면 큰 사람이 될 수도 있을텐데요...
꼬마요정님... 저도 공병호는 아예 읽은 일이 없어서 그 인간이 욕먹을 인간인지는 분간이 안 되지만... 안 읽어도 뻔할 뻔자인 것 같습니다.^^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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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엄청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남자랑 같이 살면서, 큰 맘을 먹고 책을 합치기로 한다. 겹치는 책도 많지만, 암튼 서로 책을 배열하는 방식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는 이야기가 맨 처음 등장하는 수필집이다.

원 제목은 Ex Libris다. 책날개에 이 말은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이라는데,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하는 라틴말이란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ex가 밖으로~ 이런 어근이고 libris는 책의 어근이니깐... 뭐, 책으로 부터~~ 이런 어감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겠나 싶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긴 열 여덟 편의 수필이지, <서재 결혼> 이야기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긴,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말이다. )

한 마디로, 책벌레라면, 이렇게 재생지를 써서 가볍고, 그래서 좀벌레도 잘 먹을 법 하고, 그러면서 정말 편집증적으로 글자를 읽어내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묘한 일체감을 느낄 법도 한 그런 책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참 다르게도 책이란 도구를 개발했다. 도서관, 서재, 서가, 서고, 낡은 책냄새, 책갈피... 이런 말들은 추상 명사가 아니면서도, 독특한 추상성을 가진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특성 중 하나가 책과 독서란 작업이 아닐까 한다.

독서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도 쉽지 않지만, 앤 패디먼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도 해서 재미있기도 하고, 어떤 수필은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이로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기도 한 책이다.

요즘 아내가 '내 남자의 여자'던가 뭔가 하는 드라마를 본다. 그러면 나는 좁은 집안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거기 나오는 교수 애인을 보면 참 까칠하단 생각이 든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책읽은 이야기를 나눌 순 있어도 따끈한 해장국이나 칼칼한 된장찌개조차 끓일 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맛없는 여자. 늘 있어서 귀한 줄 모르는 산소같은 아내 대신에 까칠한 여자를 찾아간 남자의 머릿속에선 얼마나 산소 생각이 날까... 숨이 컥컥 막히도록 숨이 막혀봐야 비로소 산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

난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박제화되는 거나 아닌지... 조금 걱정은 한다. 그래서 책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연수도 받고, 음악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가족과 함께 놀기도 하려고 한다. 드라마의 김희애처럼 까칠한 인종은 재수없지 않은가 말이다. 수업 시간에도 까칠하기만 한 교사로 정감없는 사람이 되긴 싫지만, 본분상 읽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많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구절이 나오면 밑줄도 치고, 접어도 두었다가 나중에 독서 노트나 이렇게 리뷰를 쓸 기회에 옮겨 두는 일은 책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책 같은 경우 좀 불편한 경우도 많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마구 구기거나 접기도 어렵고, 밑줄을 좍~ 치기도 불편하다. 그렇지만 책에 견출지를 덕지덕지 붙이면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니(난 이런 교수님 한 분을 보았는데 좀 보기 싫었다.) 가끔 책에게 미안하지만 귀퉁이를 접는 만행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제본한 풀이 너무 빡빡하면 읽기 불편해서 억지로 쫙~~ 잡아 펴는 일도 있지만, 나는 책을 공손하게 보는 편이라는 데 손을 들 수 있다.

독서하면서 <교열>을 보듯이 틀린 글자나 맞춤법이 눈에 '확' 들어오는 이야기를 읽을 때, 야, 이건 내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법에 자신이 없어서 공부하려고 논문까지 쓰긴 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책을 읽으면서도 맞춤법에 틀린 구절들이 나오면 빌린 책이라도 고치고봐야 직성이 풀린다. 맞춤법이 많이 틀린 책은 신뢰도를 낮춰 잡는 단점도 생기게 된다.

요즘, 우방과 제국 - 한미관계를 다룬 책을 읽고 있는데, 저자가 역사학자인지라 '시점, 초점' 등(한자어끼리 묶인 말이라 사이시옷을 쓰면 맞춤법에 어긋난다.)을 '싯점, 촛점'으로 쓰고 있는 것을 읽으며 계속 불편하다. 더군다나 그 출판사가 창비처럼 유명한 곳이라면 더 심하기도 하다.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나오는 손으로 쓰기(육필)와 컴퓨터로 쓰기의 장단점 이야기가 여기서도 중첩되는 걸 읽으면서 생각이 이리저리 넘나든다. 책읽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나의 경험이 작가의 경험과 겹쳐지고, 다른 작가의 이야기들과 넘나들 때, 삶의 연대감 같은 것은 즐기게 되는 것이 독서의 간접 체험이라고나 하는 것이 아닐는지...

그의 현장 독서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곳에 직접 가서 읽는 재미.
헌 책방에서 9킬로그램(우엑이다. 도대체 몇 권일까?)이나 되는 책을 사서 1킬로의 캐비어보다 맛있다는 작가. 대단하다. "새로 책을 찾아 나서는 길은 언제나 인도 제도로 항해하는 것이며, 묻힌 보물을 찾아 나서는 것이며, 무지개의 끝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 끝에 금이 든 단지가 있든 그저 즐거운 책 한 권이 있든,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늘 경이가 넘친다."는 말 이상의 책에 대한 찬사가 있을까?

집이 없는 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집은 책을 읽는 사람의 체취와 호흡과 손때를 연결시킨다. 서가의 자리에 다소곳하게 자리잡은 책은 주변의 책들과 오묘한 아우라를 풍긴다. 서점의 신간 서적들이 빚어낼 수 없는 아우라를... 저자는 책을 영국 책과 미국 책으로 나누고, 다시 영국 책은 역사가 오래 되었으니 시대별로 나눈달 정도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인 데 비해, 내 서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오래된 책들은 별로 인기가 없어 아직도 내 서고에 남은 것들이 많고, 몇 번의 이사를 통해 그 자리가 획획 뒤바뀌다 보니 5권짜리 한국문학 통사같은 시리즈도 짝달라 붙어 있지못하는 불운을 나날이 지키며 나를 기다리지만, 나는 대범하게 그들을 무시한다. 언젠가는 붙여 주리라 생각하면서...

작가 부모의 아래서 자랐고, 그래서 늘 책을 접할 수 있었던 저자의 환경은 다시 계속 대물림될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도 비주얼 매체들이 발달하여 책처럼 눈을 고정시켜두고 두뇌의 신경 회전을 집중해야하는 작업에서 쾌감을 얻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바일 세상의 <네버랜드>는 책을 읽지 않고도 환상 속으로 여행하는 일을 가능한 것처럼 꾸며대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랜덤하우스란 출판사의 한 편집자가 존 반빌의 'The sea'라는 소멸에 관한 소설을 보내 주었는데, 오늘 받은 그 책의 번역자와 오늘 읽은 이 책의 번역자가 같은 우연도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어찌 읽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덕무 선생처럼 '책만 읽는 바보'라고 '간서치'라 놀림 받아도 이유가 있다면 유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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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7-05-1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편이랑 결혼했을 때 겹치는 책이 많더군요.
만나기 전부터 뭔가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좋았어요.

향기로운 2007-05-1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리뷰가 참 맛이 있어요^^

알맹이 2007-05-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목이 딱입니다! 이 책 재밌게 봤어요~

글샘 2007-05-1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그러셨군요^^ 저는 딱 한 권 있었습니다. 보캐뷸러리 22000 ㅋㅋ
향기로운님... 최고의 찬사를 듣는군요^^
앤디뽕님... 이 책 재밌죠... 가끔 재미없는 부분도 있지만 ㅋ

프레이야 2007-06-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글샘 2007-06-0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정말요? 확인해 봐야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달팽이 2007-06-0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귀하게 대하는 마음은 저도 글샘님과 같아요.
그래서 꼭 사서 읽는 편이지요.
내 책이라 하더라도 특별하게 주석을 달거나 내 생각을 적어놓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새 책인양 화장을 고치고 다시 서재의 자기 자리를 찾아 간답니다..ㅎㅎ

몽당연필 2007-06-08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를 결혼시키고 싶었는데...ㅠㅠ

글샘 2007-06-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저는 요즘 돈이 없어서... 책을 별로 못 삽니다. 학교에 가득 사 두고 읽는 걸로 만족해야죠. 안 사니깐 또 거기 적응되네요.
몽당연필님... 결혼시키시지 그러셨어요^^

드팀전 2007-06-0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글샘 2007-06-11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marine 2007-06-1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과 저는 겹치는 책이 오직 교과서 뿐이었습니다 (같은 과라서) 사실 그 사람은 교과서 말고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죠 어쩌면 그런 것들 때문에 마지막 결심을 못했던 것 같기도 해요 나와 인생관이나 취향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

misswon2002 2007-06-23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꿈중 하나가 바로 서재 결혼시키기였는데..^^ 실현이 될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윗분들 부럽습니다.

글샘 2007-06-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ne님... 취향이란 바뀌고 그러잖아요^^ 서로 달라도 다른 걸 인정하면 되구요.
misswon2002... 부러운 사람들이죠. 저는 잘 사는 세상 사람들 저런 게 부러워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읽던 책을 읽었다... 뭐, 그런. 우리 아이들은 늘 컴터 앞에만 있어서 안됏구요.

빌보 2007-06-25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 책 사서 보는 돈을 아끼고 생활비로...ㅡㅡ;
대신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듭니다..신랑도 억지로 도서관 회원증 만들게 해서..(이럼 안되는데..)혹시 제 책 연체 됐을때..신랑걸루 빌리기도 하죠..^^

글샘 2007-06-25 12:15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을 열심히 이용하면서 책을 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 책이나 사주고, 가끔 공짜책이나 얻어서 읽고... ㅎㅎㅎ
서재는 갈수록 허접한 책들로 넘쳐나는 듯...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공부란 말을 사랑한다. 왠지 공부 하면 친근감이 든다. 사는 것이 하나의 공부의 연장 아닐까?

그런데, 장정일의 공부, 를 보았을 땐, 장정일이 좀 부담스러웠다.

그 앞에 붙은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가 가관이다. 딱, 이 말만 볼만 하다.

장정일은 책을 많이 읽고, 꼼꼼하게 읽는다. 학벌은 없어도 그만하면 좋은 학자라 할 법하다.

그런데, 장정일이 돈을 벌려고 그런건지,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돈을 벌려고 그런건지... 인문학 부활... 이건 아니다 싶다.

인문학이 부활되는 것엔 나도 대찬성이다.
결국 인문학으로 돌아서지 않고는 사회의 기반을 따져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구난방, 되는대로 여러가지를 읽도록 해 두고서는 인문학 부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다. 하, 그 출판사 이름도 참 '랜덤'하구만.

차라리 그의 '독서 일기' 라는 제목이 훨씬 내용과 부합된다.
물론 그래서는 판매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겠지.
남의 리뷰를 돈내고 열심히 읽으려 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적을 테니깐.
장정일의 이름을 앞세우고, 공부! 하고 붙여 두면 아무래도 인문학 쪽 사람들이 사서 보겠지. 그러니깐,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는 <인문학을 즐겨 읽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술 프로젝트>의 미화 정도 되겠습니다.

<분서>를 쓴 명말의 이단자 이탁에는 '성인의 가르침'에서 "나이 50 이전까지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덧붙였다. 언젠가 나는 이 글을 보고 핑, 눈물이 돌았다...고. 나도 이 글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공부란 <열정적 독서>와 같다는 그의 말에는 동감이다. 목적적 독서란 말이다.
알고 싶어 읽고, 입장을 갖고 싶어 공부한다는 그의 말도 좋다.
그래서 정열적으로 쓴 책만이 정열적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책은 정열적으로 쓴 책이기도 한데, 정열적으로 읽히지 않는 면이 있다. 너무 많은 주제들을 무질서하게 엮었기 때문이 아닐까?(내가 무식해서란 말은 곧 죽어도 안 한다. ㅋㅋ)

역사에서는 패배의 원인을 등한시하고 승리의 원인을 알고싶어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승리에는 임기 응변이 있고, 모든 패배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 법이다... 마르크 블로흐의 '역사를 위한 변명'에 이런 멋진 말이 적혀 있단다. 오늘날 이 혼란스런 사회를 바라보면서, 모든 패배에서 읽을 수 있는 불변의 법칙이 너무 많이 보이는 것 아닐지, 걱정스럽다.

친러파 민비조차 애국자로 만들고 마는 우리들의 정신적 승리법의 우매함을 꼬집는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같은 글도 지나친 흑백논리에 집착하는 이들을 우려하는 장정일의 시선이 따스하다.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좋은 글들을 많이 옮겼고, 특히 조봉암 선생 같은 이를 연구한 글들은 좋았는데... 이 책은 그간의 장정일의 행보에 뭔가 어긋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나의 성격 이상 탓이라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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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부란 책을 좀 읽어보려 시도해도 넘 복잡다양한 지식성이 짬뽕과 설렁탕을 통과해서 미래에 올지 안올지 모르는 운하를 통과해서 다시 어디로 흐를지 모를 그런 난해하고, 아리까리한 책인 듯 싶습니다.
장정일의 사상을 이해하기도 전에 이책을 대하는건 좀 무리일듯....
공부란것 아마도 책내용속의 역사적인내용, 어려운단어를 개인적으로 찾아서 공부해야하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듯함. 그럼 또 봅시다.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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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직원회의 시간에 행정실장 왈, 행정실장 모임에서 행정과장과 행정실장의 호칭을 행정실장으로 통일했단다. 그리고 계장으로 부르던 이를 행정과장으로 부르고... 학교도 주임 선생님을 부장 선생님으로 바꾼 것이 제법 되었다. 처음 그 소리를 듣고 내 뇌리를 파팟~~ 스쳤던 생각은 '제길~ 염병하고 있네...' 뭐, 이런 것이었다. 회의가 마치고 다시 든 생각은 그것이 그냥 염병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칭이야 어쨌든 괜찮은 것 같지만, 사실 아다르고 어다른 것이 말 아닌가? 과장은 그저 부서장이란 느낌이 들지만 실장이야 관리자같은 느낌의 포스가 팍팍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영어의 포스는 남을 괴롭힐 수도 있는 힘을 뜻한다. 좋은 의미의 힘은 파워라고 하겠지...

고추장이란 이름을 듣고는 별명 참 희한하네... 하고 말았는데, 추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일리가 있다.
임원진들의 이름은 획일적이다. 무슨 위원장, 회장 이런 거... 요즘은 빠다를 발라서 팀장님...
추장은 상당히 친근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좋은 이름이다. 그 성씨가 고씨라서 더재미있는 이름이 되었고.

이 책은 <독>과 <론>의 두 부분으로 되었다. 독은 리뷰의 일종이고, 론은 논설의 하나다.
각종 매체에 올렸다고는 해도 한겨레와 프레시안 같은 곳이 대부분이다.

리뷰의 화두들은 역사적으로 참으로 지랄같던 <추상명사>들이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 역사, 사실, 여성, 기술, 화폐, 선물, 사회, 인권, 국가, 혁명... 일반명사로 보이는 것들도 골똘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 부분은 충분히 추상적이다.

사랑, 혁명... 이런 것들만 정말 추상 명사일까? 국가... 이것도 완전히 날조된 환상 속의 악마 아니던가... 화폐에 까지 건너가면 더욱 심하고... 고추장의 전공이 화폐라고 하니, 그 글도 읽고 싶어 진다만, 드팀전님이 요즘 낚시질하는 페이퍼들처럼 읽고는 싶으나 능력 부족이어서...

현대는 충분히 문제적이다. 그렇지만 고추장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은 정답에서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다른 방향을 발명해 내는 것이 그들 연구 공간의 목적이란다.

자동차를 버리고, 아파트를 버리고... 살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일은 기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기계에게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새롭기도 하지만, 근본에서 출발을 달리하는 좋은 뜻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코뮨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같이 밥비벼먹는 일이든 화폐를 우습게 보는 일이든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여차하면 코뮨 운운하는 연구자들은 국보법 위반으로 잡아들이기 딱 좋은 사람들 아닐까 싶어서... 아직은 국보법이 거들떠도 보지않는 미약한 단체겠지만, 일이십 년이 지나고, 서울대 출신 미국 유학자 출신 박사들에 맞설 지적 재산권을 운운한다면 국보법이 충분히 덮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홉스가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란 괴물로 비유했지만, 지금은 지구가 글로벌이란 괴물이 되었다.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던 시대도 있었지만, 아직도 죽봉이든 짱돌이든 시위현장에선 이런저런 폭력이 오가기도 하는데, 권력자를 가장 곤란스럽게 하는 것이 운동이 휘드르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결여라는 말에 섬뜩하다. 문부식의 동의대 사태 반성 같은 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자기 반성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지금 시대의 무기는 화염병을 뛰어넘는 막강 화력이나 대포가 아닌 대중을 엮고 소통시키고 전염시키는 무기여야 한다는 그의 말은 일견 진보한 논리지만, 현실은 거리가 많이 있어 보인다.

사회와 국가는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의 글들은 상당히 어렵기도 하다. 특히 그의 독후감은 철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읽어내기 쉽지 않은 주제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의 논점은 명확하다.

사회와 국가는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장애인을 차별하고, 농민을 고사시키며, 교육을 황폐화시키고, 비정규직을 대량양산하며, 이주노동자를 가두고 태워죽이고, 새만금의 조개들을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 사회와 국가의 존재 목적이라면... 과연 시민, 국민의 자격을 갖는 것이 인간으로서 정당한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한미FTA를 체결하지 못하면 지옥이 온다지만, 체결 후 오는 천국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것>이고 90% 이상의 우리들에겐 이러나 저러나 <지옥>만이 강화될 따름인 미래를 볼 때, IMF이후 강화되는 <추방>의 역사와 계층 구조의 분화가 가속되는 체제를 고착시킬 따름인 고급직업, 정보, 의료, 서비스, 교육의 삶과 저급한 그것들의 삶의 투쟁은 글로벌리제이션의 본색을 점차 드러낼 것으로 분석한다.

시골 국도를 운전하다 보면 농민들이 걸을 만한 갓길이 없다. 농번기가 되면 차에 치어 죽는 농부가 숱하게 나오는 것은 다만 갓길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농약음독 자살률이 세계 3위인 것은 그라목손이 폐부종을 일으켜 멀쩡한 정신으로 호흡을 못하게 만드는 제초제인 것처럼 멀쩡한 농부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본모습이었던 거다.

학문의 폐쇄성은 학문의 죽음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 학문은 이미 충분히 미국식으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일제에게서 얻은 한반도에서 미군정이 처음으로 강하게 밀어붙여 강한 반발을 얻었던 <국립종합대학교안>의 실시 목적을 이제서야 한국에서 거두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나는 요즘 협상장에서 웃으며 대화하는 웬디 케틀러와 한국측 협상단의 얼굴이 같은 나라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들은 결국 겉으론 노랗지만 머릿속은 완전한 백인인 바나나 협상단이었던 것이다.

파병에 대해서는 이틀간 연장같은 건 없었지만, 협상은 이틀 연장했다. 철저하게 빼앗아 가야겠다는 거겠지.

악마성은 악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파시스트들은 겁쟁이란다. 그런데 그들은 겁쟁이들 속에서 자란다.

조선일보가 왜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길로 몰아넣는지, 왜 젊은이들이 좌파라고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지... 요즘 대학생들이 토익과 해외 연수와 공무원 시험에만 몰입되는 <생각하지 않음>의 현상은 파시즘적 FTA, 그리고 악마의 세상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이 고추장의 생각이다.

그는 정말 꼬추장처럼 고추장답게 빨갛다. 빨갱이는 사과가 아니고 간첩이고 국보법의 세례를 받아야 할 대상이겠지. 민주주의의 데모크라시에서 기술자, 전문가의 테크노크라시로 옮아가는 세상.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대선 후보 운운할때 나는 소름이 끼친다. 아무리 정치가들이 전문가가 아니라지만 교수들이 권력과 부에 적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지식 기반 사회라고 할 때, 나는 발전을 생각했더랬는데, 그게 착각이었다.
지식 기반 사회가 교수같은 넘들이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거머쥐고 사회 구조를 재생산해내는 지랄같은 사회가 지식 기반 사회의 본색이었던 것 같다. 아카데믹 캐피탈리즘은 더이상 아카데믹하지 않다. 그것은 충분히 이미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김태희가 다니면 서울대도 <상표>가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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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4:58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드팀전 2007-03-3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민과 국민의 자격이 부끄럽고 더이상의 가능성도 없어보이지만 ...저는 늘 과연 코뮌이라는 형태가 더 나은 출구를 위한 입구 역할을 할까 질문해보게 됩니다.결국 국민국가의 틀거리 안에서 현실이 움직이고 있는데 말입니다.밉다고 그쪽에서 등돌리는 것이 과연 좌파적일까 (고병권을 좌파지식인이라 본다면) 생각해봅니다.잘은 모르지만 이런 논지가 네그리의 <제국>과 <제국>비판 사이의 경계처럼 보이더군요.
지식인들의 실험이 매력적이기는 한데 과연 그것이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것인지 무수한 이해와 갈등이 충돌하는 장사판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