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을 쓰다듬어줘

길고 가는 검지로 피의 회오리를 만들어줘

굳은살 박인 엄지로 이마를 눌러줘

뒤통수까지 관통하는 철의 지문을 찍어줘

사타구니에 두꺼운 책을 떨어뜨려줘

책이 무척 아플 있다는 깨우쳐줘

난간 너머로 공을 던져줘

허공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치볼을 해보자

망치질을 이름을 불러줘

이름이 조각으로 깨지는지 맞혀보자

고통은 공통의 심연

고통은 공통의 심연

노래를 지어줘

혼자서만 부르는 장엄한 합창곡을 지어줘

시집 <오늘은 모르겠어> 문지. 2017

[출처] 공통의 것 / 심보선|작성자 박동진


시인 심보선은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아픈 측면을 놓치지 않고 시로 쓰는 사람이다.

아픔은 혼자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아픔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프다. 그 가족은 더 아플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픔은 혼자만의 것은 아이다. ‘우리의 것이다.

<고통은 공통의 심연>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한 사람이 혼자서 조용히 부르는 노래는 점차 여러 사람이 부르게 되면서,

장엄한 합창곡이 된다.

사회의 아픈 모습들을 보고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기로 하면서,

그 아픔들은 우리 공통의 것이라고 적는다.

뺨을 쓰다듬어줘

길고 가는 검지로 피의 회오리를 만들어줘

손에 피가 묻었다. 지하철 문에 끼어 죽은 청년을 생각했을까?

그 피로 뺨을 쓰다듬으며 얼굴에 피의 회오리 무니가 그려진다.

죽어가는 너의 피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한다.

굳은살 박인 엄지로 이마를 눌러줘

뒤통수까지 관통하는 철의 지문을 찍어줘

문 사이에 끼어서 죽어가는 소년의 아픔을 생각했을 터이다.

뒤통수까지 철이 짓누르는 아픔 속에서 삶을 마친 소년.

사타구니에 두꺼운 책을 떨어뜨려줘

책이 무척 아플 있다는 깨우쳐줘

끔찍한 고통을 상상하기 위해 만든 문장이다.

두꺼운 책에 맞은 신체는 저릿저릿하다.

인체의 고통은 이렇게 언어를 통해, 책을 통해 공유될 수 있다.

그것의 시의 힘이다. 공통의 것. 공통의 아픔. 공통의 죽음.

난간 너머로 공을 던져줘

허공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캐치볼을 해보자

난간 이쪽의 나와 난간 너머의 너

너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이젠, 서로 다른 공간으로 헤어졌다.

용산 참사, 평택 쌍용자동차의 죽음, 세월호, 최근에는 이태원에서

그 아픔을 잊지 않도록 공을 던지고 받는 캐치볼을 해 보자.

망치질을 이름을 불러줘

이름이 조각으로 깨지는지 맞혀보자

망치질을 하던 노동 현장에서 이름조차 깨져서 사라져버린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의 망치질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이제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그렇지만 우리들 공통의 마음에 남아있는 아픈 이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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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수숫대 / 장석남
-"
"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 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一生이
수숫대를 본다
개의 서까래를 올린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井上有의 <>字를 보며" 무한한 세상 하나를 또 그려내고 있다자세히 보니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안에는 달도 칼도 조개도 온 세계가 다 들어 있다  <김인석·시인

 

이 시 속에는 세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매달 차고 기우는 일을 반복하는 달의 세계와,

열심히 알곡을 채우는 노력을 다하면 수수를 비워내고 빈 수숫대가 되고, 다시 빗자루가 되는 수수의 세계와,

오랜 문명을 유지해온 중국의 문자, 한자 가난할 빈 ’ 자에서 상상하는 문자의 세계이다.

 

시인은 자라나는 수숫대 위에서 차고 기우는 달을 바라본다.

수수가 여물어서 알곡이 들어차는 모습과 초승달의 가벼워진 모습을 보면서,

마당을 쓰는 마당빗자루가 달을 쓸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다 이지러진 달, 쓸모도 없어 보인다.

쓸모. 필요없는 것이 너는 왜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인가?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 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그렇게 생각한 다음 날,

마을 입구(동구 洞口) 개울물을 지나가다가 바라본 낮달은,

어제 수숫대 위에 떠오른 달보다 조금 더 커진 달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달이 조금 더 여물어졌다고 생각하면서, 개울물에 잇대어서 꿰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개울물의 흐르는 모습과 달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 것같다.

 

생각한 다음날
조금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아무 욕심없이 가득 찼다가 텅 비는 달을 보면서,

가을이 되어 알곡을 인간에게 모두 내어 주소, 텅 빈 수숫대를 보면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음 가짐을 생각해 본다.

, 인간인 나는 너무 욕심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욕심을 채우려고만 노력하며 살고 있지 않나?

 

한자 가난할 빈자를 떠올려 본다.

그 속에는 나눌 분 分자도 있고, ‘달 월 月자 도 있고, ‘조개 패 貝자도 있다.

나눌 분 자는 어떻게 보면 서까래가 달랑 두 개뿐인 지붕 같기도 하다.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붕을 떠받친 서까래가 두 개뿐이라니. 참 소박하다.

그런 것이 가난한 삶이고, 자연의 이치 아닐까?

수숫대 위의 달을 보면서,

가난할 빈 자를 보면서,

자유자재하게 하늘을 옮아 다니며, 텅빈 마음으로 지나가는 낮달을 보면서,

나의 삶을 반성해 본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一生이
수숫대를 본다
개의 서까래를 올린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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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어찌되든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너를 살리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 하다가 죽어버려라

 

---------------------


정호승 시인의 시집 제목으로 유명한 시다.

원 시는 하정완이란 분의 시라고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저귀지만,

가시나무 새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만 많은' 사람들이 많다.

 

뜨거운 시여서 옮겨 둔다.

뜨거운 시에는 데일지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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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6-1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목에 끌려 정호승님의 시집을 읽은적 있어요.
원 시가 따로 있었군요.음~

전 이 시도 괜찮았는데,'추억이 없다'라는 제목의 시도 맘에 들어 따로 종이에 적어 둔 적이 있어요.
페이퍼에 올려야지~ 했는데...어찌 오늘!ㅋ
다시 읽어도 좋은 시네요.^^


글샘 2012-06-19 07:39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시집을 읽으면서 표제시가 왜 없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추억이 없다, 는 도종환 님 시던가요? ^^

시가 치열해 보이긴 하는데,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 느낌???

복숭아 2012-12-2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없이 읽다가 울다 갑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나봅니다.
 

가을비가 분위기를 돋우며 내리는구나.

시간 참 빠르다.
벌써 올해가 다 가고 마는데,
내일모레면 이제 수능 날이다.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는데,
이왕이면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사람이 자기 할 노릇을 다 하고 나면, 하늘의 운명을 기다려도 좋다는 말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만' 도우니 말이다.  

오늘은 수능 전 마지막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뭘 뽑을까 하다가 김영랑의 시를 두 편 읽어 보기로 했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김영랑, 북)

이 시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주로 '판소리' 용어임을 알겠지?
판소리는 1고수2명창으로 이뤄지는데,
첫째가 고수(북치는 사람)이고 둘째가 명창이란 이야기야.
고수가 주로 스승님이었나봐.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이 말이 처음과 끝에서 딱, 마주보고 있어서 시를 짝 들어맞게 하고 있단다. 

판소리는 그날 공연장의 모임의 분위기에 따라서 창자가 '판'을 짜서 부른다고 해서 판소리란다.
젊은 남정네들이라면 '흥부가에서 박타는 대목'이나 '춘향가에서 사랑가 대목'을 부를 게고,
할머니들 상대라면 '심청가에서 심청 팔려가기 전날 밤 대목'이나 '춘향의 옥중가'처럼 눈물 철철 나는 대목을 부르기도 할 게다. 

혼자서 진행을 해야 하기때문에
노래하는 부분(창)과 말하듯이 사설을 엮는 부분(아니리)로 이뤄지지.
몸동작도 하곤 하는데 그걸 '발림'이란 용어로 부른대. 

창은 슬프고 처량한 대목에선 '진양조'를,
보통 빠르기는 '중모리(중머리, 중몰이 : 표준어가 없단다. 판소리는 전라도에서만 불렀기 때문이야.)'
조금 빠르게 부를 땐 '중중모리'인데, 주로 누가 등장하는 대목이나 제비몰러 나가는 대목처럼 흥미를 돋우는 부분이지.
아주 빠르게 부르는 건 '자진모리'나 '휘모리'라고 하는데, 전쟁터처럼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에서 부르지. 

김영랑은 고향이 전남 강진으로,
원래 전라도가 "예향"으로 불릴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동네지. 

판소리에선 고수와 명창의 <숨결이 꼭 맞아야만 이뤄지는 일>인데,
그런 일은 인생에 흔치 않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이 딱맞게 되면 시원한 일이 되고 말이야. 

소리와 어울리지 않았을 때의 북은 그저 가죽에 불과하대.
그만큼 북과 '고수'는 판소리와 어울려야만 존재 의미가 증폭된다는 강조지. 

장단이 틀리면
만갑이(당대 최고의 판소리 대가. 동편제의 대가)도 숨을 고쳐 쉴 수밖에 없대.
즉, 아무리 이름난 고수라 할지라도 소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판소리에선 장단을 친다는 말로는 부족하대.
판소리의 <고수>는 장단을 맞춰주는 부차적 존재가 아니야.
판소리 연행과 가창을 살려주는 반주를 지나서
북은 오히려 컨닥타(지휘자)이 경지라고 일컫는 것이 옳을 거다.

<1 고수, 2 명창>이란 말을 이 시만큼 잘 표현한 시도 드물어.
훌륭한 명 고수는 잔가락 따윈 온통 잊고서,
떡, 꿍!
북의 울림 소리가 울려나는 가운데 고요가 깃들어 있는 동중정이요.
우렁찬 명창의 소리 속에 감겨드는 고요가 있어
판소리를 듣는 일은
마치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이런 느낌이라는구나. 
가을같이 익어가는 인생이라...
북과 소리의 조화로움이 무르익어가는 가을처럼 온갖 붉고 노란 단풍으로 가득한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이 시는 표현상으로도 묻고 답하는 형식, 수미상관의 구성
시행이 단정하게 가지런히 놓인 모습이 두드러진데,
특히나 시인의 삶에 짙게 묻어든 판소리란 장르의 구성지고도 기름진 맛이 가득 묻어나는 내용이 압권이야. 

판소리에 대하여 친밀하기 그지없으면서
고수와 명창의 찰떡 궁합에 대하여 말하는 듯 궁글리고 있어서
인생과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지를 잘 표현하고 있지.

일반적으로 판소리에서 <창>이 주인공이고 <북>은 종속적이라는 통념이 있는데,
실제로 판소리는 북에 의해 창이 예술로 완성되는 경지의 음악임을 강조하고 있는 시란다.  

이런 예술의 세계를 그린 김영랑의 시, 거문고를 한 편 더 읽어 보자.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 거문고)

이 시는 당연히 일제 강점기의 울분을 노래한 것이란다.
해가 스무 번 바뀌었단 것은 나라를 잃은 지 20년이 되었단 말이겠지.
검은 벽도 왠지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구나.  

 

(그림을 찾다 보니 이 그림이 이뻐서 넣었는데, 줄 수를 보니 가야금이구나. 거문고는 6현이야. 가야금은 12현이고.
아래 그림이 거문고란다.) 

기린은 전설 속 상상의 동물이야.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지.
화자의 '기린'은 바로 거문고란다. 

거문고를 퉁~ 흔들고 간 노인.
이 구절의 '퉁' 한 글자는 <북>의 '떡 궁'과 마찬가지야.
거문고의 예술혼이 가득 담긴 소리지. 

거문고를 황홀하게 연주하던 노인의 손은
이제 어느 연주석에 높이 읹았는지,
땅의 외로운 기린 따위야 하마 잊고 만 것인지... 

이십 년이 넘도록 울려 퍼지지 못하는 예술의 한이 가득 담겨있는 시다.
거친 들에는 이리 떼가 가득 몰려다니고,
사람처럼 보이는 잔나비(원숭이)들이 끽끽거릴 뿐,
북소리 떡 궁, 울리며 소리를 하고,
점잖게 앉아 거문고 연주하던 아름답던 예술혼이 울려퍼지던 평화로운 날들은 기약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의 문화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몹시 질투했어.
그래서 민요와 모든 풍악을 금지하고,
오로지 기생들만 노래할 수 있게 했단다.
그래서 지금도 국악이라면 술집 여자들이 계승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해가 한 해 더 가는데도,
희망은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시를 닫고 있어.
억압된 시대, 절망의 시대를 전통 악기 거문고를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지. 

화자가 희구하는 세상은 거문고 소리 퉁~ 울려나는 높고 아름다운 곳인데,
세상에서 끽끽대는 소리는 이리떼와 잔나비떼의 상스런 문화 뿐이란 상실의 비애가 가득하다.  

오늘은 김영랑의 시 두 편을 읽었어. 
두 편 모두 전통 음악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그 상실감을 짙은 애수와 함께 풀어내고 있지.
전라도 사투리(맘놓고 울들 못한다)도 화자의 비애를 더 짙게 만들고 있지. 

시험이야 늘 치는 것이라도,
또 시험마다 긴장감이 따른단다. 

시험장에서 마음 속에 느린 거문고 소리라도 퉁 울리듯 이런 시를 읽어보는 일도 좋겠다.
판소리 명창의 마음에 꼭 맞는 떡 꿍, 북소리라도 들리듯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 필요하니 말이야. 

시험 마치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지?
그건 시험 마치는 시간까지는 잠시만 더 미뤄두렴.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 그런 생각으로도 금세 흔들거리는 거란다.
오로지 시험 시간엔 시험에만 집중하고,
또 너무 걱정같은 건 하지 말기 바란다. 

네가 한 몫만큼 얻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것이고.
착하게 살았으니 행운도 함께 따라줄 거다. 

날씨도 푸근하니 크게 떨릴 일은 없을 듯해서 다행이다.
아무튼, 고생한 만큼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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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바람 2011-11-27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여기 참 좋네요.
저도 문학을 좋아하긴 하는데... 생활에 쪼달려 책읽을 시간이...
종종 놀러올게요.

글샘 2011-11-28 01:28   좋아요 0 | URL
책읽을 시간은 만들기 나름 아닐까요? ^^
종종 오세요~
 

금목서 향기가 세상에 가득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모과향 비슷한 꽃향기로 대기를 가득채우는 꽃나무가 금목서인데,
금목서 향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걸 보면,
사람의 향기도 저렇게 넓게넓게 퍼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은 금목서 향기가 흩날리는 풍경을 틈타,
치자꽃 향기를 음미해 보자. 

박규리의 '치자꽃 설화'를 우선 읽어 보렴.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박규리, 치자꽃 설화) 

설화는 구비전승되는 이야기야.
치자꽃에는 왠지 이런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다는 시를 쓰고 있지.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서 보내고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스님이 울고 있는 걸, 화자는 보고 말았어. 

캬, 요것만 가지고도 짠한 순애보(순수한 사랑의 기록)가 한편 떠오르는구나. 

 

스님은 고요한 법당 안에 들어가시고,
문 한 쪽만 열어 두고는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
빗물에 우는 소리처럼... 

사랑하던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그 밀어내던 자신이 스스로 <못>이 되어
스스로의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처럼 여겨진대.
그렇게 목탁소리만 은은하게 이어짐으로써 스님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지. 

화자는 스님의 슬픈 순애보에 가슴이 짠해서 계속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
여자는 돌아가지 않고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더래.
그러다 일어나더니
산길을 휘청이며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듯 휘청거리며 내려갔대.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도 듣고(떨어지고)
그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소리만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하필이면, 짝을 잃은 그 순간에 짝을 찾는 소리라니... 

화자는 내려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생각해.
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구나.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구나. 

그러고 있는데,
방 안의 스님은
잿빛 승복만 입은 채
날이 저물도록 경을 읽는 소리로만 남았어. 

떠난 사람보다
더 서럽게 보이는 스님의 잿빛 등과 독경소리. 

아, 화자는 그만, 독경소리가 너무 싫어 졌나봐.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여자가 된 듯,
스님의 버리려는 독경소리가,
오히려 더 깊어가는 사랑인 것처럼 들려서
화자 역시 하염없이 산길에 앉아 있대. 

독경소리는 이렇게 중의적으로 쓰였지.
스님은 여인을 보내고 잊으려고 독경을 시작했지만,
그 독경소리 <저물도록 그치지 않는> 걸 보면, 마음 속에서 잊히지 않는 거야. 

그게 마지막 부분의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이란 표현과 딱 맞아 떨어지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보내며 겪는 이별의 정한을
마치 멜로 드라마 한 편 보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시란다. 

치자꽃이 나온 김에, 이해인 님의 시도 한 편 읽어 보렴.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수녀님은 치자꽃을 보면서,
사람을 만날 때 설레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였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기를 맡는다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그런다면 삶이 곧 꽃밭이 될 것을... 

이렇게 생각한단다. 

치자꽃 향기를 맡으면서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고
향기로운 날들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는 거란다. 

오늘은 작년 모의고사에 난 시조 중에 아이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던 시조를 한 편 읽어 보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 박인로,「입암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 
*왕기순인 : 자기 몸을 굽혀 남을 좇음. 
**소허 : 소부(巢父)와 허유(許由). 상고 시대의 대표적인 은자(隱者).
***엄 처사 : 엄자릉(嚴子陵). 한나라 광무제 때의 은자(隱者).

이 시조는 박인로가 '입암(선바위)'을 대상으로 쓴 시조 29수의 5~8수가 되겠다. 

제5수, 7수는 화자의 말이고,
제6수, 8수는 바위의 말이라고 한다.
한 수씩 뜻을 살펴 보자꾸나.

제5수 [화자의 말]
우뚝이 곧게 서니 본받음 직하다마는
구름 깊은 골에 알 이 있어 찾아오랴
이제나 광야에 옮겨 모두 보게 하여라<제5수>

화자가 입암(우뚝 선 바위)을 보고 "너는 우뚝 곧게 서서 본받을 게 많다."고 했어.
그런데 도회지에 있지 않고 구름 깊은 골짜기에 있어 아는 이가 찾아오겠느냐고 한다.
이제라도 넓은 광야로 옮겨 모두들 보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어.

<영월의 입암> 

화자가 바위를 보고 캬, 너 멋지군.
근데 이렇게 촌구석에 있음 누가 알아나 주겠냐?
야, 너 슈스케 한번 나가 볼래? 이런 거지. 

그랬더니 바위가 제6수에서 이렇게 대답했어.

[바위의 대답]

세상이 하 수상하니 나[바위]를 본들 반길런가
왕기순인(枉己順人)*하여 내[바위] 어데 옮아 가료
산 좋고 물 좋은 골에 삼긴 대로 늙으리라<제6수>

세상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어지럽다 보니) 나를 봐도 별로 반기지도 않을 거 같아.
내 몸을 굽히고 남을 쫓아서 어디로 가란 말이야?
그러니 산좋고 물좋은 골짜기에 생긴대로 늙고 싶다. 

그러니깐, 야, 슈스케 같은 데 나가봤자, 별거 있겠어?
세상은 노래 잘한다고 가수 만들어 주는 거 아니란말야.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 지 잘 알면서?
사람들이 나 본다고 좋아할지 어떨지도 모르잖아.
피디한테 수구리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야 하고... 하이고...
차라리 산좋고 물좋은 여기서 숨어 사는 게 내 팔자에 딱 맞아.  

그러니깐, 다시 화자가 한 마디 거들지.

[화자의 말]

천황씨(天皇氏) 처음부터 이 심산에 혼자 있어
너[바위] 보고 반기기를 몇 사람 지냈던고
만고의 허다 영웅을 들어 보려 하노라<제7수>

아냐, 넌 정말 훌륭해.
네가 처음부터 이 산속에 혼자 있어서 그래.
너보고 멋지다고, 네 숨은 재주를 알아주고 반기던 사람이 몇이나 만났겠어?
하고 많은 영웅들의 이름을 들어서 너랑 비교해 보고 싶다.
화자는 정말 바위가 멋진 존재임을,
그래서 세상 누구라도 바위한테 홀딱 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지. 

다시 바위가 대답하고 있어.

[바위의 대답]

소허(巢許)* 지낸 후에 엄 처사*를 만났다가
아쉽게 여의고 알 이 없이 버려 있더니
오늘사 또 너[화자]를 만나니 시운인가 하노라<제8수> 

소부와 허유, 소허는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은자들이지.
소부, 허유랑 지내다가 다시 엄처사를 만났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서 지냈단 거지. 

이제 소허와 엄처사를 아쉽게 이별하고
알아주는 이 없이 버려져 있은 지 오래였는데,
오늘에서야 또 나를 알아주는 너(화자)를 만나니,
시절 인연이 운이 맞는 것 같다.
우리 한 번 잘해보자. 

이런 거지.  

박인로가 '입암'더러 '은자'라고 추켜세우면서
너, 세상에 나가면 인기 좋을 거야.
왜 세상 사람들이 너를 몰라보는지 몰라...하고 아쉬워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난 박인로가 투정부리는 것처럼 보이거든. ^^ 

왜 세상은 재주 많은 나를 알아보지 않은 거삼? 이러고 말이지. 

사람이 일단 뭐든 무기가 있어야 해.
나들보다 이것은 잘할 자신 있다... 이런 것.
그걸 갖고 있으면, 박인로처럼, 시절 인연을 기다리면 되겠지. 

만리 밖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만리향, 금목서를 다른 이름으로 그렇게도 부르더구나.
향기가 듬뿍 담긴 사람이라면,
어디 숨어 있더라도,
누군가 알아볼 때가 있겠지?  

우리 아들이 금목서처럼,
만리향처럼
은은한 향기로 가득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아빠가 몇 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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