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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이들에게
박상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5년 6월
평점 :
그냥 무심히 지나칠 뻔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이들에게> 제목만 보고 흔한 수필집이려니 했다. 하지만 ‘박상률’이란 저자 이름에 못이 박힌 듯 시선이 멈췄다. 박상률, <봄바람> <개님전>의 그 박상률? 책 표지를 훑어봤다. [외로움을 ‘힘’으로 바꿔 내는 특별한 거인들의 이야기]란 부제의 ‘특별한 거인’은 누구일까. 창틀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는 이를 그린 표지 그림도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심히 콕 점찍은 것처럼 표현된 두 눈이 내 눈엔 어쩐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다고나 할까?
박상률은 어떤 작가인가. 저자는 <봄바람>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봄바람이다.’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단박에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짝사랑하는 소녀와의 미래를 꿈꾸는 사춘기 소년의 아픔과 고민, 성장통을 읽으며 줄곧 작가의 자전소설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개님전>은 또 어떤가. 진돗개 황구와 그 자식들의 이야기를 마치 판소리처럼 맛깔나고 질펀하게 풀어놓았다. 순수하면서도 해학적인 글쓰기의 박상률을 나의 애정작가 반열에 올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그런 저자에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특별한 거인’이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크 트웨인은 (중략) “거의 적합한 단어와 적합한 단어의 차이는 반딧불과 번갯불의 차이이다.”라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 14쪽
목차를 보니 제일 먼저 ‘마크 트웨인과 현진건’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생몰 연대가 불과 10년 겹치는 이 두 작가를 묶어놓은 건 어떤 연유일까 궁금했는데 바로 ‘해학과 풍자’였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아픔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과 문장으로 작품을 썼다. 그런 그들을 저자는 ‘특별한 거인’이며 ‘그들의 여깨 위애 올라서서 세상을 두루 살핀다’고 털어놓았다. 글쓰기, 좋은 문장을 고민하는 이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이태준의 <문장강화>다. 저자는 이태준을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언급하며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술술 읽히는 문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또한 이태준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 수필 같았다며 ‘어찌 보면 소설도 수필처럼 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장력 덕분’이라고 짚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일간지의 칼럼에서 저자는 ‘소설과 에세이’의 글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수필이나 에세이가 당당히 문학의 한 장르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런 저자의 고뇌를 본문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수필의 묘미이다. 실수한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고, 너스레를 떨며, 알면서도 속고, 지금도 긴가민가하는 모습을 굳이 그린 것, 이는 ‘고백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잘 보여 준다. - 181쪽
작가를 이야기하거나 책을 이야기하는 책을 만나면 처음엔 ‘내가 읽었던 책, 아는 작가’를 꼽는다. 나와 저자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혹 공통분모는 없을까 궁금한 마음에 먼저 뽑아 읽는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건 아직 만나지 못한 작가였다. 나의 책읽기가 협소했음을 깨닫게 되는데, 반가운 숙제를 받아든 느낌이라 이 역시도 나쁘지 않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거인의 어깨에 저자가 올랐던 것처럼 나 역시 그 어깨에 올라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진다. 높아진 시야만큼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감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첫 목적이자 마지막 목적이리라. 박병률의 글쓰기 작업의 밑바탕은 바로 공감 능력이다. -118쪽
문학을 한다는 것은 억압받는 약자들 편에서 그들의 내면과 외면을 그려 내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큰돈을 벌거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자보다 약자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세상의 하찮은 존재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힘을 지닌 것이 문학 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문학이야말로 쓸모가 많은, 진정으로 유용한 도구이다.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