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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는 왜 철학이 없는가?
철학할 만큼 한가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돈을 벌어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인 세상을 만들었고,
이제 돈을 못벌면, 물려줄 수 없으면, 자식을 만들지 못하는 헬조선으로 전락했다.
그런 세상에 대고, 왜 철학을 못하냐?고 묻지 말라.
그 추운 20주동안, 철학이 없다면 길거리에서 촛불을 들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 혁명보다 더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면 길바닥에서 수백만이 모여 촛불하나에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가진자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배워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자들끼리 둘러앉아,
왜 이나라에는 철학이 없었느냐고,
왜 동양에는 자존이 없었느냐고 반성하는 일은 하품난다.
이 책에서 의미있는 시작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읽게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작가가 한국 사회에 대하여 애정과 관심을 덜 가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고종이 왜군을 불러 동학농민군 3만을 우금치에서 학살한 것은 혁명에 대한 왕조의 행태였다.
청나라까지 박살내고 당연히 왜놈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민비는(혹자는 명성왕후를 애국자연 추켜올리지만, 학살자들에게 애국은 어불성설이다.)
철저한 왕조사관에 빠진 자로서,
왜놈들을 러시아에 기대 뻗대보려 하다 죽음을 맞는다.
결국 러시아까지 박살난 후,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다.
일본군의 침략도 없이, 나라를 진상한 셈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간섭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짓을 12년간이나 해먹는다.
저항을 제주도에서 또다시 학살이라는 방식을 써서 짓밟는다.
이승만이 쫒겨나고도 박정희는 18년의 압제를 자행한다.
경제적 발전은 박정희의 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을 관리하는 미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에 힘입은 것이었다.(관세도 없이 수입해 준 시절도 있었다.)
박정희가 죽고 다시 군사 독재는 이어지고, 광주에서 학살은 벌어진다.
비겁하게 살아남는 일만이 삶의 목표가 된 사람들에게,
철학의 유무를 묻는 일처럼 치사한 일이 있을까?
가진 것 없는 아이들에게 전투적으로 공부하라는 나라에서, 철학 없는 국민을 꾸짖는 일이 가능할까?
아직도 노동조합을 불온시하고 전교조를 응징하겠다는 자가 '보수'를 참칭하고 대선에 나서는 세상에,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철학적으로 공을 차보려는 자는, 역시 가진자의 편이 아닌가 하고 열받으며 읽었다.
장자를 감명깊게 읽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장자에 감명을 받고 기껏 한다는 생각이,
장자처럼 살아보는 일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네.(93)
이러면서 서양의 것을 몰아내야 한다는 논지를 세운다.
서양의 철학이 주가 된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철학은 어디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
중국은 공산주의를 철학의 기조로 삼고 있으나, 문화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억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웨이보 같이 국내망으로 부분적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이고,
일본의 철학은 점점 보수화되는 군국주의 부활을 지켜보는 실정이다.
가장 다이내믹한 철학이 한국의 광장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는 제한적 현실을 인정한다면,
1980년대 광주와 2014년 세월호를 목도한 세대는,
누구처럼 싸우지 않고 끈질기게 촛불을 들었다.
강의를 이끌기 위해 한자를 하나씩 앞에 놓았는데, 책에서는 그것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작가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경제적 기준으로 나누려고 한다.
그것 역시 서양 중심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선진국은 철학이 있어서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부자 나라가 되었을 뿐이다.
땅따먹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세계대전을 일으켜 천만 명 이상을 희생시키고,
그러고도 공황에 접어들자 전쟁을 통해 GDP를 높이는 방법을 쓰는 짐승같은 것들이다.
일본과 독일만 개새끼가 아니다.
일본과 독일은 나눠먹을 땅이 없어 대들다가 얻어터진 쫄짜들일 뿐이고,
세계대전 백년 전부터, 선진국이란 것들은 식민지에서 온갖 추잡한 일을 다 한 선배 개새끼들이다.
논어에서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 吾喪我'를 인용하면서,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운 세상을 촉구하는 외침을 보여준다.
항상 가진자들이 못가진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한국 땅에서 과연 스스로 돌아볼 만큼 여유있는 시절이 있기나 했던가?
그럴듯한 말로 독자를 개돼지 취급하지 말았음 좋겠다.
물론, 그가 독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고깝게 들리는 나의 억하심정일지,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못마땅함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이야기가 나쁜 말은 없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다.
능동적 주체를 장자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지배하던 규정적 관념, 즉 성심으로부터 벗어난 소요의 정지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유라고 표현해도 되겠습니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율, 자정 등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됩니다.(250)
노자 운운하는 사람의 말 치고는 참 가볍다.
이것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시절하고 비슷한 논조가 아닌가?
후진국 국민이여, 깨어나라! 이런 것 아닌가?
내 보기에 장자의 시대는 잔인한 폭정의 시대였고,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장자의 '소요'는 출세하려 애쓰다 죽지 말고 평화롭게 사는 걸 추구하는 것이지,
결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남을 짓밟은 폭력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유'의 '自'는 그처럼 유목적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자기로부터 말미암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고,
스스로 규율을 세우고,
스스로 깨끗하게 만들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의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애써 선진국이 되려면 또 짓밟고 억누르고 GDP를 높이기만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자'는 <저절로>라는 의미에 가깝다.
인위적으로 애써 하는 일은 지배하는 자나 평범한 자나 일을 망치기 쉽다.
노자는 저절로 다스려지게 하라는 통치철학이고,
장자는 저절로 태어난 인생, 저절로 되어지는대로(自然) 살라는 삶의 철학이 아닌가 싶다.
나도 강의를 들었더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철학자들, 기업가들 불러놓고 지껄이는 강의라면,
광화문에서 낄낄대던 동학 농민들의 웃음과,
광화문 위를 날아 오르던 고래 등 위의 304명의 별빛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아마도 모르는 일이기 쉬울듯도 싶다.
송시열의 이런 시조가 생각난다.
靑山(청산)도 절로절로 綠水(녹수)도 절로절로
山(산) 절로절로 水(수) 절로절로 山水間(산수간)에 나도 절로
절로 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송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