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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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 책을 구입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나는 책장을 넘기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내 영혼과 사유에 영향을 끼칠 글들을 발견한다. 책을 통해서 내영혼은 다른 영혼들을 만난다. 그들과 대화한다. 내가 쓰는 글들에도 어느새 그런 글들의 흔적이 묻어나온다.

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할 수 있었다. 그후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 능력을 얻었다. 그 많은 책들이 내 마음에 심어준 여러 생각들, 지식들이 없었다면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을까.

때로 내게 언어는 '갈등'으로 다가오지만, 가다가 아니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음만도 못하다. 나는 언어의 세계에 들어왔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아왔다. 그러니 그 세계의 끝까지 가봐야겠다. 책들과 더불어 사유했던 시간들, 다양한 진리·진실들과 대면했던 순간들, 그 사유의 순간들이 한 올 한 올 되살아난다. 책갈피 속에 묻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이.(에필로그) 

나의 후각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수학의 정석이다.
책을 넘길 때마다 맡아지던 알싸한 계피향 비슷한 냄새는 아직도 뇌의 한 부분에 갈무리되어 있어,
그 냄새를 맡으면 바로 정석에 대한 추억이 떠오를 것 같다. 

이정우의 독서 편력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도서들은 뒷표지의 책날개 안쪽에 적혀 있다. 

 

문학과 과학과 철학을 두루 가로지르는 그의 독서 행위는 그를 철학적 사유에 익숙하게 만들었나보다.
그렇지만, 그의 과학 이야기는 일반인이 읽기엔 지나치게 복잡하다. ^^ 

문학을 통하여 그의 편력을 읽는 일은 재미있었으나,
과학과 철학의 파트로 넘어가면서는 지나치게 자신의 탐독 성향을 드러낸 것 같아서
이정우가 쓴 다른 책을 찾다가,
<고전의 향연>이란 책을 만났다. 

한겨레 지면에 소개되었던 고전의 백과사전식 서술인 모양인데,
필자들이 탁월하다.
결국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과학 이야기 중,
과학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중후함과 깊이가 없어지고 천박함과 오만방자함으로 바뀌고 과학자들의 상이 현저하게 변했다...(221)는 이야기는 놀랍다.
리처드 파인만을 비롯해 미국 과학자들이 쓴 저서들을 읽으면서 유럽적 교양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세계를 만나고서 실망했던 기억... 더구나 책 중간중간 철학에 대한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 무지와 악감정으로 갇그찬 구절들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의 독서 지평의 밑바탕이 된
인문학(사건들, 인물들, 텍스트들, 작품들...)
인간과학(언어, 사회, 의식/무의식, 정치, 경제...)
생명과학(신체, 환경, 면역, 기억...)
그리고 이들을 포괄한 철학(비판적, 종합적 사유)에 대한 표를 그릴 정도로 그의 탐독은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른 것이다.
부럽기도 하고, 그런 수준의 외국어 공부를 하기까지의 노력도 본받을 만 하다. 

그의 스승 소은 박홍규 선생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다름과 모순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다름이라는 것은 모순과 다릅니다.
다름의 정도를 점점 극대화시키면 반대, 모순으로 갑니다.
그러나 다름의 이면에는 어딘가 또 닿는 데가 있어요.
그러니 다름의 성격 자체가 공존과 비공존의 양면을 지니고 있죠.
그래서 비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시간이라고 하고,
공존에서 나타날 때에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다름을 통해 나올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나온다...(309) 

천민 자본주의가 삶의 기본 양식이 되어버린 한국,
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탈근대사유를 한다는 것은 결국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
맹목적 탈주도 시대착오적인 회귀도 아닌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 근대성을 재고하는 것.
전통-근대-탈근대가 모두 균형있게 성찰되는 사유를 시도하는 것.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다산 정약용에 이른다. 

다산이 시대에 맞서려 공부한 성리학...
결국 천민자본주의와 맞서려면 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인 모양이다. 

그의 공부 궤적이 탈주하는 곳을 따라가노라면 끝간 데가 없어보이지만,
또 그를 따라가는 재미도 만날 수 있다.
마침 도서관에서 '다산의 재발견'을 빌려다 둔 참이다. 든든하다.

 ----------- 틀린 글자 하나...

192. 윤형자...는 운형자가 맞다. 구름 모양으로 생긴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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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10-2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는 사 놓고 지금 다른 것 먼저 읽느라고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이번주 중으로 시작하려고요.

글샘 2011-10-25 18:20   좋아요 0 | URL
문학 부분은 저도 읽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재미있었습니다만,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스킵하는 페이지도 많고 철학 부분은 잘 알아먹지 못하겠는 부분이 많더군요. 잘 모르는데, 또 서로 비교를 하고 하니깐, 어렵습니다.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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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매력'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한자로 매력을 쓰면 魅力 '도깨비 매(홀릴 매, 미혹할 매), 힘력'으로 도깨비에게 홀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신형철의 문학 비평집을 읽은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매력덩어리라 말할 만 하다. 

숱한 시인들의 언어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세상.
사람들은 시인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언어가 삶과 동떨어진 조각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극심한 비유로 낯설어진 시의 언어들,
그 사금파리들을 붙여 원래의 의미를 재구성하듯,
큐레이터가 작품 너머에서 반짝이는 작가의 사고를 짚어주듯,
시인을 소개하고 시인의 작품을 마음에 남겨주는 역할을 하는 글들이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라지만,
삶의 궤적과 살아온 궤도에 따라 '느낌' 자체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일들이 많다.
대학 등록금을 반값으로 줄여주겠다는 거짓말로 당선된 대통령은
반값 등록금에 일언반구 말이 없는데,
선거가 다가오자 갑자기 거짓말 잘하는 사람들이 반값 등록금을 '선점'하려고 난리다. 
오세훈같은 사람도 두 딸 대학보내면서 허리가 휘었다는 개그를 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김경주를 말하면서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고 말하는 벗이여, 너의 현생까지도 음악이다.
이런 칭찬을 보았나. 

'미친년 널 뛰듯이'라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 한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날카롭다.
날카롭지만, 그의 눈은 결코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공동체를 해체하려는 자들에게 날카로운 펜을 겨누고,
우리는 이렇게 <느낌의 공동체>로 뭉쳐서 너희에게 승리를 거두련다! 하는 전의를 다진다.
그러나 결코 전투적이지 않다.
마치 서울대 아이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거기서 붉은 머리띠를 매고 투쟁을 외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고 앉은 모습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시위인 것처럼,
신형철의 문학 읽기는 부드러운 칼, 환상적인 총알로 무장한 공동체다. 

"내 거북은 염산을 타 마시고 목구멍이 타버려서 점자처럼 안들리는 노래를 부르지.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껴안고 뒹굴어야 온 몸에 새겨지는 바로 그 쓰라린 노래"를 부르는 김민정,
점자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우리가 오히려 불구임을,
미련곰탱이 아저씨는 모르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들은 아는 그 '점자의 노래'를 읽어주는 사랑스런 문학 큐레이터.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두고 자비라 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어디서 이런 단어를 찾아오는지)
그의 다정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양 하여 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마라.
그래야 우리가 산다." 이건 문태준에게 보내는 따스한 야유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를 읽으면서 방심, 마음을 내려 놓기와 마음을 열기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 방심은 "추석날 고향에도 못가고 화장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흐느껴 우는 안마사 김양 누나"에게로 꽂힌다. 

"모든 감정의 끝에는 슬픔이 있다.
기쁨, 분노, 증오, 사랑이 그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결국 슬퍼진다."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 사이에서 슬픔과 기쁨의 스펙트럼을 줄타기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떠오르게 한다.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내에게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이걸 위라라고...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여자'가 아닌 '이'에 포인트.
적어도 그 순간, '한' 여자도 '이' 여자를 대체할 수 없다.
'이 여자'가 '한 여자'로 전락될 때 고통은 사라진다.
가라타니 고진이 단독성과 특수성 을 구별한다.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 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 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 데 한 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 데는 일 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러운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김소연, 불귀 2 중)

역시 김소연을 그도 떠올렸다. '한 사람'이 '이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뿐이다."
허수경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흘린 절망과 희망, 문학론은 오래 남는다. 

심보선더러, 반성하는 시인보다 엄살떠는 시인이 더 애틋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엄살의 기록을 읽었다, 고 적었다. 귀엽다.^^ 

나도 정말 간만에,
포스트 잇에 빼곡히 글자를 옮겨 적으며 책을 읽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성자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장석원'의 시를 그는 형의 시라고 한다.
그 빛나는 폐허에 나도 끼워줘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엄살'도 이 정도면 '철학'의 반열에 오를 만한 소재의 하나가 되시겠다.  

꽃이 지니 몰라보겠다. 

용서해라.
蓮. <목련에게, 윤제림>

아마 저 '련' 한 글자는 사람 이름인 게다.
련이가 늙었나. ㅋㅋ 몰라보겠단다. 
무릇 좋은 시란 '분단된 영혼의 내전' 같은 것이라서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종군기자처럼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 행갈이 하나에서조차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목련...을 읽으면, 화약 냄새 정말 난다. 
그 냄새는 쌉쌀한 이별의 냄새와 나이든 만남의 냄새의 슬픈 맛이다. 

성기완은 '화음에 정통한 자만이 소음으로도 시를 쓸 수 있는 법'이라며 부추기고,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노랫말에도 그는
바람이 든다. 정말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김경주의 '무릎'을 베고는,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삶을 맴도는 자리,라는 정의에 자지러진다.
몸,
몸의 파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삶을 맴도는 무릎의 파문, 몸의 울림...
그 몸을, 인간을 이야기하는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도 그에겐 시다.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 넣어 무모했습니다. ...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문화방송, 2009년 1월 20일 뉴스데스크)

21세기의 선동의 아침은 이렇게 온다.
붉은 화염으로,
검은 시신과 피눈물로,
그리고 이어지는 촛불로... 

시에서 보여준 그의 매력에 빠지다 보니,
소설에서 보여주는 그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밋밋하다.
신형철의 산문을 읽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문학 장르인 '평론'을 접하는 기쁨을 준다. 

바람이 불면,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되어버린 추억처럼,
그러나 서로 '이 사람'이었던 '두 사람'에게
추억은 다르게 적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도깨비처럼 홀리게하는 언어의 마력이 시라면,
그 시를 읽어주는 평론가의 산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순간을,
휘딱 지나가 버려 '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독자에게,
차근차근 친절하게
확대하고 느리게 재생하지만,
그래서 감동은 더 증폭되도록 도와주는 큐레이터이자,
느낌의 '복원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이 책과,
신형철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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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6-0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도 도서관에서 후다닥.. 읽었습니다.
저는 꽤나 기대하는 책을 마치 탐험을 하듯, 가방에 넣어 집 책상의 10배쯤 되는 도서관에 들고 가서 나무 책상에서 메모도 하면서 읽는 걸 좋아하는데요. 이 책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되었네요.

이 책과 신형철의 매력에 대해 글샘님의 마지막 적어 놓으신 구절이 참 멋집니다. ^^

글샘 2011-06-06 23:47   좋아요 0 | URL
저는 침대에 뒹굴면서 새벽 2시까지 읽느라 요즘 좀 피곤했답니다. ㅎㅎ
도서관 큰 나무책상에서 책읽고 싶네요. 여름 방학엔 해보고 싶습니다.
이 책과 신형철의 매력, 느낌을 증폭시키고 복원시키는 그런 거... 맞죠?
 
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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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09님의 소개로 이 책을 도서관에 사뒀었는데 이제야 서가에서 만난다. 

나는 알라딘에서만 출몰하는 블로거지만, 다른 세상에도 많은 블로거들이 책이란 주제로,
글을 쓰고 읽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런 인연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마을이란 말은 여러 사람이 모여사는 <장소>의 의미도 있지만,
<마실>이란 용법으로 <모여 노는 연회, 모꼬지>의 의미도 있다. 

이 책은 여러 사람의 책에 대한 단상들을 자유롭게 묶어 두었는데,
그 분야가 다양하다.
그중에 느리게 살아가는 삶을 찾아가는 이의 글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김연수의 한 마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놓여 있어서 줄거리도 없는 책의 스포일러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Q : 당신에게 뭘 주거나 하지 않는데,
당신은 왜 그따위 인생을 살고 있어?

A : 최선을 다해봤자,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애당초 나는 뭔가 돌아오는 게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을 읽은 건 아니지.
그럼 왜 읽었냐고?
거기 한 작가가 진심을 다해서 쓴 문장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다해 읽었으니까. 

 
   

그런 데 비해, 마지막에 달린 변정수의 까칠한 <보론>은 이 책을 '밥맛없게' 만들었다. 

독서의 종합선물세트를 기획한 편집자라면, 마지막 글까지도 조금 더 부드러운 글로 만들 수 있었을 건데 아쉽다. 

   
 

독후감을 써놓고 서평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독후감은 자신의 일기장에 쓰는 것으로 족하다. 또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지인에게나 보여줄 만한 것이다. 설령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할 수 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격과 만나는 일 자체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312) 

 
   

너무 고압적이지 않은가?
영화를 본 비평가가 영화의 흥행과는 반비례되는 칭찬과 비난을 하기도 한다지만,
그렇다면 인터넷 블로그에 영화 비평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블로깅하면서, <여기는 전문 비평가의 블로그입니다> 또는 <저는 개인적 글만 씁니다>하고 적으라는 건지... 

책의 편집 의도와 정반대되는 글을 적었고, 그것이 편집자가 보여주려는 또다른 면이었다면 이 글은 성공한 것일지 모르지만,
글쎄, 나는 부조화처럼 읽고 만다. 

   
 

서평에 담기는 가치평가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고, 제시된 근거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서평뿐 아니라 모든 글은 언제나 '도대체 누구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써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17)

 
   

이런 구절을 만나면 나는 망연자실, 아연실색하게 된다. 

마치, 조선일보가 한겨레신문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논조나 다를 게 뭐 있는가 싶다. 

책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리고 모든 비평문의 기본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 주관성이 어떤 <공신력>을 가진 매체, 예를 들면 신문의 서평란이나, 텔레비전의 도서 소개 프로그램 등에서도 소개하는 사람의 개성에 따라 충분히 다양한 해석으로 만나게 될 수 있는 것이 서평이란 장르인데, 글쓴이는 마치 서평자는 정답을 알고 써야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과연 이 책이 <누구 읽으라고 쓴 글인지> 아는 사람들이 만든 책일까?
이 책의 글쓴이들은 그저 세상엔 책이란 사물이 있고,
책이란 사물을 즐겨 보는 사람들, 그리고 독후감이든 서평이든, 책에 대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게 하고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이 책의 기획의도였던 것 같은데,
마지막에 이런 엄격한 사감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앞서 들었던 달콤한 마실 속 수다들은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어 못내 아쉽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글은 '독후감'이다. 서평이 아닌 것이다. ㅎㅎ 

그런데 그가 쓴 책이 '만장일치는 무효다', '편집에 정답은 없다'같이 느슨한 것이라니... 잠시 쓴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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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7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27 13:36   좋아요 0 | URL
그냥 그런 게 아니라, 좋은 부분도 있었는데...
임팩트가 좀 약했죠.
막판에 저 글이 임팩트가 강한 글이었습니다. ㅋㅋ

양철나무꾼 2011-04-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독후감이 그 어떤 서평보다 설득력 있는걸요.
저는 다행히 밥 다 먹고 읽었어요~^^

글샘 2011-04-27 13:38   좋아요 0 | URL
괜히 마지막글보고 시비가 걸고 싶어졌나봅니다. ^^
다행이네요. 밥 다 먹고 읽으셔서... ㅎㅎ
 
북카페 인 유럽
구현정 글 사진 / 예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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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문자성'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큰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적으로 독특한 역사를 가졌기에,
향학열이나 학구열보다는 '교육열'만 엄청 강한 나라였기에,
이제 약발이 떨어져가는 단계에서 <자기주도적 학습>에 대하여 엄청 강조하지만,
역시 인프라가 없는 단발성 마약류의 교육은 국민의 무지함으로 결말을 짓는 것 같다. 

대형 서점도 픽픽 자빠지는 현실에서,
소형 서점들이 파는 거라곤, 오로지 이 무서운 나라의 <수험용 문제집 뿐>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하나 끼고 있으면, 문제집 파는 데서 남는 수익으로 적어도 망할 일은 없다.
나도 어디 인문계 고등학교 앞에 가서 서점이나 하나 열까 생각도 했다.
뒤져보면 서점없는 학교도 있지 않을까? 젠장~~~ 

요즘 아내랑 시내 구경을 갔다가 잠시 쉬려고 커피전문점엘 몇 번 간 적이 있다.
시내에 웬 커피숍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리고 왜 거기엔 그렇게 인간들이 많은 건지...
도무지 커피 한 잔을 맘 편하게 즐길 공간이 못 되었다. 

그런 판국에, 북 카페라니... 이건, 완전히 염장질이잖아.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커피를 한 잔 마실 수도 있고, 맘에 들면 살 수도 있는, 그런 데가 있단 말인가?
조용한 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돈을 주고 대여하는 곳이 커피숍인데,
거기서 혼자서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한국에선 어디까지나 제 책이고,
그나저나 조용히란 단어가 커피숍에선 도무지 먹혀들지가 않는 곳이거늘... 

작가는 베를린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에서 북카페를 찾아다니며 짜릿한 전율을 느낀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이라곤. 오로지 부러움, 그것 뿐이었다.
교사가 책을 읽으며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국의 교육 풍토에서
학교엔 도서관이 있지만, 거기엔 낡은 지식들이 일렬종대로 정렬해 있을 뿐.
다사로운 커피향과 아울러 도란도란 오가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기는 힘들다. 

우리학교 어디 한구석이라도 빌려서 북카페를 하나 차려볼까?
커피메이커도 하나 들여놓고,
편히 쉴 수 있도록, 사진집도 몇 권 구비하고,
사람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도록 스탠드도 한 두개 준비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 모습은 세상의 어떤 걸작을 구경하는 순간보다 가슴이 뜨거워지게 한다.   
   

이런 구절 하나만 만난 것으로도 나는 가슴이 뜨거워 이런 글을 두드리고 있다. 

스위스에서 불어와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독일어판과 불어판 신문을 자유로이 읽는 노인들 이야기를 읽으면,
이 좁은 땅에서 사는 일이 왜 이렇게도 초라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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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3-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져요. 도서관에 커피향 가득하게 하고 싶어라. 방향제라도 준비할까봐요. ㅎㅎ
여긴 그러기엔 이용자가 너무 많아요.
자주 가는 카페를 그런 분위기로 만들려고 했는데 오는 손님들이 거의 단골이라 늘 시끌벅적하고 의자가 불편해요.

글샘 2011-03-27 20:03   좋아요 0 | URL
몇 사람하고 이야기해본 결과, 북카페를 만들긴 힘들거 같구요.
제가 앉은 자리에서 향기 강한 커피나 좀 내려야겠습니다.
손님한테 책도 좀 권해 주고. ㅋㅋ
너무 일만 많고 사람을 멀리하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건 슬프잖아요.
 
디지털 시대에 어린이의 자리를 묻다 아동청소년문학도서관 7
황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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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어린이의 자리'라고 되어있어 아동 문학에 대한 이야긴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것이었다.  

<평론>이란 것은 '훈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냥 이렇다 저렇다 책임없이 말을 거드는 것이 훈수라면,
평론은 작가의 창작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런데, 이 평론가는 다부지게도 '아침햇살'을 닮은 평론가가 되겠다고 한다. 

밋밋하게 뭉뚱그려져 있는 것에 또렷한 미적 시점을 제공하는 아침의 그 밝은 빛처럼... 

그런데, 이 책에 쓰여진 글들은 애초에 하나의 구도로 묶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각종 잡지 같은 공간에 쓴 칼럼 같은 글들을 한 권에 묶어두었을 뿐이다. 

구성 중에 '피카레스크식 구성'이 있고 '옴니버스식 구성'이 있다.
이 책은 '옴니버스'는 될지 몰라도,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서의 평론집은 아니다.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서의 의도로 편집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옴니버스식 구성'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아동 문학 내지 청소년 문학'이란 <공통 주제로 몇 편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들을 늘어 놓아 한 편의 소설이 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피카레스크식 구성'은 <동일한 인물이 등장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 방식>이다.
그러니 이 구성이 되려면, '포켓몬스터'나 '명탐정 코난'처럼 매번 같은 등장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응집력이 있기 위해서는 미리 구도를 잡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면, 사계절 출판사의 작품을 한 꼭지, 푸른책들의 작품을 한 꼭지, 청소년 소설을 한 꼭지, 외국 청소년 소설을 한 꼭지, 이런 식으로 품을 조금 더 들였더라면 훨씬 좋은 책으로서 '훈수' 두는 사람의 볼품없음을 벗어날 뻔 했다. 

아동 문학에 대하여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비평을 가하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되나 모르겠지만,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의 책이 아쉽게도 산만하게 발표된 글들의 짜깁기일 뿐이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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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유래없는 폭설~은 '유례없는'으로 고침이 옳다.
유래~는 ~~에서 전해진 것이고, '유사한 사례'가 없다는 표현은 '유례'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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