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절판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87쪽

내 삶은, 마치 그것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무감각한 기계 장치인 듯, 힘 있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어린 로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들의 세계가 강건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일념으로 그녀는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83쪽

치한(the rapist)과 치유자(therapist)라는 말은 글자로는 큰 차이가 없다.... 정상적인 아이-정상적이라는 걸 명심해-는 자기 아버지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막연한 남성을 미리 본다.('막연한'이라니 좋구나, 폴로니우스를 걸고 맹세하지)-204쪽

현명한 엄마(너의 불쌍한 엄마도 살아 있었더라면 현명했겠지)라면-진부한 표현을 용서해라-여자애가 아버지와 접촉하는 동안에 사랑과 이상적 남성형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북돋아주었을 것이다. -204쪽

나는 역사적으로 보아, 연극을 원시적이고 타락한 형식이라고 믿어 싫어했다. 개별적인 천재는 많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기 시대 의식 같고 사회 전체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예술양식, 예를 들면 독자가 방에 혼자 앉아 기계적으로 술술 외우는 엘리자베스 시대 시처럼 말이다.-272쪽

일어나고 있는 운명은 정말이지 잘 짜인 추리 소설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소설 속에서 독자는 그저 단서에 잔뜩 눈독을 들이면 된다. 젊은 시절에 나는 실제로 해결의 실마리가 될 만한 곳을 이탤릭체로 강조해 놓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맥페이트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어떤 막연한 암시를 감지한다 해도.
(맥페이트는 운명의 여신으로 험버트를 조종한다. 우연에 의해서)-286쪽

본능적으로 나는 화장실이나 전화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내 운명을 걸고 넘어지는 대상들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적인 물체들을 갖게 마련이다. 반복되는 경치일 수도 있고, 어떤 숫자일 수도 있다. 신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조심스레 선택한 것. 여기서 존은 늘 비틀거리고, 저기서 제인은 늘 가슴이 아플 것이다.-287쪽

웃으면서 하는 친선경기 여행은 패스포트와 스포트의 차이를 지운다.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325쪽

그 사나운 환상 속에는 나의 거친 기쁨을 완벽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그 영상은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잿빛의 위대함이여.-359쪽

이제 비슷하게, 얼핏 스치던 광채, 현실의 약속-유혹적으로 그런 척할 뿐 아니라 고상하게 지키던 약속-이 모든 것을 우연은 망가뜨린다. 창백하고 사랑스런 작가의 더 왜소한 인물들로 바꾼다. 나의 환상은 프루스트적이고 프로크루스테적이다.-360쪽

잘 알려진 인물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발전을 거친다 해도 그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X는 그가 늘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류교향악과 전혀 다른 불멸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 Y는 결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Z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361쪽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은퇴한 핫도그 장사가 가장 위대한 시집을 출간해 내었다고 밝혀질 경우 우리는 차라리 그 이웃을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362쪽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지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388쪽

선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질적으로 성급함과 지루함으로 감추었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인위적인 음성을 사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초연한 듯 얘기했기 때문에 듣고 있던 롤리타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무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불쌍하고 상처받은 아이여!-~388쪽

나는 일이초쯤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던 것 같ㄷ. 아, 여러분의 흔한 죄인들이 그러하듯 있던 일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그런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주 잠깐, 나는 내가 부부의 침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했고 침대 위에서 병든 샬로트를 보았던 것 같다. 퀼티는 굉장히 병든 사람이다.-415쪽

내가 들은 것은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였다. 대기가 너무도 맑아서 이 뒤섞인 소리들의 화음 안에서, 장엄하고 미세하고, 아득하면서도 요술처럼 가깝고, 솔직하면서도 신성하게 신비스런 아련한 소리들 속에서 때때로 까르르 터지는 선명한 웃음, 탁 치는 방망이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그럭대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환히 떠오르는 골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가망없이 가슴 아픈 것은 내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420쪽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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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8-23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선물해달래서 선물해주곤 전 아직 못 읽어본 작품이에요.
논란이 좀 되는 작품 같던데 맞나요? ^^;;

프레이야 2007-08-23 10:46   좋아요 0 | URL
무척 흥미로운 문체에요. 물론 원문해독이 안 되니 번역의 힘만 믿지만요..
당대에 논란이 많이 되었던 건 내용의 외설스러움보다 표현의 극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나보코프의 뜻은 그걸 넘어 그 위에 있었어요.
인간본성의 외로움, 연약함. 미학적인 상징과 은유들, 빛나는 말장난들,
고전에 대한 지식과 현실적인(당시의) 법안들에 대한 상식이 바탕되어
읽히는,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의 힘!
진달래님, 좋은 아침이에요. 바람이 좀 선선해요.^^
 
곰 아저씨의 딱새 육아일기 산하어린이 145
박남정 지음, 이루다 그림 / 산하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내가 기르는 아기딱새를 잡아먹고 천연덕스럽게 퍼져서 낮잠을 자고 있는 뱀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아이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선 낯을 찌푸린다.

 정말 권하고 싶은 이 책은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했는데 의외로 별로 안 알려져 있나 보다. 어린이 책이 갖추었으면 좋겠다 싶은 점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맛있는 책이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정보와 지식의 측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쉬운 말로 넣어둔 솜씨도 만족스럽다. 글자크기나 행간의 배열도 눈이 피로하지 않게 잘 편집되었다. 삽화는 물론 실제 찍은 사진과 콜라주를 이용한 곁들이 삽화까지 초등 4학년 정도가 읽기에 지루하지 않는 독서시간이 될 것이다.

 곰이 딱새를 키웠다고? 신기하지?

우직한 곰아저씨는 실제로 이흥기라는 총각아저씨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 아저씨가 지난 봄 실제로 겪은 일이다. 단양에서도 더 들어가는 산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하여 힘도 센 이 아저씨의 직업은 철근 기술자. 하지만 곰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블로그도 운영하며 실제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은 자연지킴이 역할이다. 미련곰탱이처럼 한 길만 밟고 온 이분은 동강에 댐을 건설하려고 했을 때 해남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며 ‘동강은 흘러야 한다!’ 라고 외치기도 했다. 지금도 초등학생 자연체험단을 이끌며 아이들에게 '함께 사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몸소 느끼게 해 주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 책의 글은 이분이 직접 적은 건 아니고 박남정님의 글로 신나게 풀린다. 몇년 전 4월, 곰아저씨가 지인을 만나러 단양 적성초등학교로 갔을 때에서부터 곰아저씨와 딱새의 소중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아저씨는 폐교를 빌려 새한서점이라는 헌책방의 서고로 쓰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간 것이다. 운동장에 세워둔 트럭에 딱새 부부가 둥지를 틀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한 아저씨는 그로부터 한 달간 트럭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이 새끼를 낳아서 기르도록 배려한다. 딱새부부의 지혜로운 집짓기 과정과 알을 품고 있을 때 수컷이 암컷에게 베푸는 헌신적인 모습, 그리고 알을 낳고 나서의 애틋하고 조심스러운 심정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아저씨의 외모처럼 어찌나 소박하고 흥미로운지 책을 읽는 사람이 딱새육아에 공동 참여하는 느낌마저 든다. 찍어둔 사진들을 실어놓아 볼거리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곰아저씨의 블로그로 찾아가면 여기 실린 사진들을 고스란히 다 볼 수 있는데 새한서점을 하는 그 지인이 찍고 올려준 사진이라고 한다. 아기딱새들이 고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은 귀엽기보다 감동이다. 재미난 육아일기와 정보부분은 블로그에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책에서만 볼 수 있다. 육아일기는 모두 13꼭지로 나누어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데 각 꼭지의 끝에 새와 관련된 지식을 실어놓아 알차다.

 딱새는 4월 초순쯤부터 알을 낳고 5월 말경에 부화되어 날아가는 대표적인 새로 몸길이는 약 15cm, 몸무게는 17~18g이다. 번식기에는 깊은 산속에서만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인가 근처나 시가지 공원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겨울도 아닌데 곰아저씨의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걸 보면 트럭이 무척 안전해 보였던가 보다. 아니면 절대 내치치 않을 사람의 트럭인줄 알았던지..

안타깝게도 그리 조심했는데도 뱀이 어느 날 조금만 있어면 날아갈 아기딱새들을 잡아 먹어버렸을 때 곰아저씨는 과연 그 뱀을 어떻게 했을까? 호기심을 유도하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책을 읽게 하면 더욱 재미있는 책읽기가 될 것이다. 곰아저씨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충분히 공감하며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곰아저씨가 육아에 참여한 방식도, 딱새부모의 자리를 넘보거나 넘치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여겨보인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지켜보고 기다려준 것 뿐이다. 우리 어른들의 육아도 그래야할텐데 너무 많이 끼어들고 보호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의 이치야.”

그나저나 트럭을 못 움직여 그해 어버이날에는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못했다는 이 곰탱이 아저씨는 마흔셋인데 아직 총각이다. 인연이 어디 숨어계실까. 지금은 혹시 찾으셨을까. 딱새가 트럭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들을 키웠던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들이라고 말하는 곰아저씨! 


(딱새는 암컷과 수컷이 다른 색인데 다른 새들처럼 이녀석도 수컷이 더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한다. 아래 사진은 암컷이다.)

 큰사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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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는 새대로 뱀은 뱀대로 사는 것이...자연의 이치야"라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누구든지 '-답게'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자연'의 말뜻도 바로 그런 의미겠지요.
그나저나 곰아저씨가 궁금하네요.ㅎㅎ

프레이야 2007-08-21 12:59   좋아요 0 | URL
네, 스스로 그러함이요.^^
곰아저씨는 실물사진을 보니 참 소박하고 우직하게 보이더군요.
텁수룩한 구레나룻에 듬직한 체구에.. 노총각이라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유쾌하게, 그랬어요^^

대한민국곰 2008-01-3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곰아저씨 딱새 육아일기 실제 주인공인 이흥기입니다 책에대해서 좋은설명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0   좋아요 0 | URL
이흥기 님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고 즐거운 독서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게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시고, 실천하며 살고 계시겠지요?
블로그에도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보고 그랬어요.
또 다른 책도 기대할게요^^

대한민국곰 2008-02-1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딱새를 키우던 학교에 와 있 읍니다 이곳은 인터네 헌책방이구요 약15만권을 책을 부유 하고 잇답니다

프레이야 2008-02-15 00:0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인터넷 헌책방 그곳 인터넷주소 가르쳐주시겠어요?

대한민국곰 2008-04-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각 포털검색창에서 새한서점을치시면됩니다
 
내가 찾은 암행어사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1
정명림 지음, 김수연.박재현 그림 / 풀빛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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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힌다면 무척 속이 상할 거에요.

작가의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이 책은 흥미로운 소재와 내용, 알찬 정보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잘 어울려있는 책이다. 초등 4학년 아이들과 수업한 책이고 독후활동으로는 ‘암행일보’ 라는 신문을 만들어보았다.

 누군가 나 대신 괴롭히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는 상상을 하는 어린이들의 바람을 실제로 해낸 사람들은 없었을까?, 하는 아이다운 호기심에서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로 유도하여 간다. 과거의 암행어사 정신을 오늘날에 이어받아 좀 더 행복한 사회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함께 고민하자는 작가의 의도도 건전하다.

 이야기는 새 학년이 되어 모든 게 어리둥절한 우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펼쳐진다.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암행어사놀이가 실시되고 아이들은 아주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놀이체험을 한다. 바로바로 암행어사를 임금이 임명할 때처럼 ‘봉서’를 통해 아무도 몰래 단 한 명이 암행어사로 뽑혀 한 달 동안 선생님의 눈과 귀가 되어 활동하는 놀이다. 고자질이나 감시가 아니라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고 어려운 친구는 돕게 하고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는 없는지도 살펴야한다. 이달의 멋진 친구를 뽑아 보이지 않게 선행을 베푼 친구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상황을 조리 있게 써서 발표해야 한다.

 처음엔 심드렁했던 우진이가 이 활동을 하면서 따돌림 당하고 있었던 정호를 발견하게 되고 몰랐던 면을 보고 우정을 쌓게 되는 모습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식정보의 소득이 쏠쏠하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암행어사를 탐구주제로 하여 탐구조사보고서를 쓰게 하여 모둠을 만들어주었다. 우진이가 암행어사로 활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11모둠의 아이들이 암행어사에 대한 소주제를 스스로 정하고(모두 11가지의 소주제가 나옴) 자세히 조사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정을 함께 엮는다. 그 내용들은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데 삽화를 섞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해두었다. 낯선 용어들이 두루 나오지만 암행어사와 관련된 옛 제도와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용어들이니 알아두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감사원을 소개하며 암행어사 정신을 이어받은 감찰제도로, 그 정신을 오늘날과 미래로 발전하게 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일꾼 이야기’ 시리즈의 첫 편으로 나온 이 책에서 추사 김정희도 충청도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암행어사는 역시 박문수였다. 수령을 한 두 번 한 과거급제자를 임명하는 원칙을 깨고, 수령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문수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가장 많이 암행어사를 보낸 왕이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나도 한 번 암행어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내용면으로 보면 전체가 하나의 탐구보고서 같은 형식을 띈다. 책의 뒷부분에는 ‘탐구조사를 마치며’에서 반 아이들의 재치발랄한 후기가 적혀있고,  ‘암행어사와 함께 한 걸음 더’라는 꼭지에서는 앞에서 논의되지 않은 탐구주제와 부연설명이 실려 있어 역사와 관련하여 시대상을 좀 더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갖가지 이름을 단 일련의 부정부패감시단으로 관심을 나아가게 한다. 암행어사제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암행어사도 힘을 잃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명종 때 이르러 조선팔도에 보냈던 암행어사 제도는 마침내 고종 35년(1898)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오늘날에 그 정신을 부활하여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성종실록> 20년 11월 7일(1489)의 기록이다.
“..... 옛사람의 말이, ‘가혹한 행정은 호랑이보다도 맹렬하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수령들의 나쁜 짓을 모조리 알아내어 우리 백성이 잔학한 행정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겠는지 말해 보거라.”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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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08-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두"가 맞는 표현 같습니다만.. ^^;
저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 책을 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알라딘 분들이 소개하시는 책들 보면 좋은 책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8-20 12:34   좋아요 0 | URL
좌회전님, 저도 그렇게 알고있었는데 이 책의 저자가 밝혀두기로는,
조사결과 두가지 표현을 다 써왔는데, 출도로 쓰인 경우가 더 많아서
출도로 표기하기로 한다고요.. 저도 새로이 알았답니다.
네, 요즘 어린이책은 내용이나 형식이나 너무 좋은 책들이 많아요.
우리 어릴때와는 아주 다르게요.. 그래도 별로인 경우도 있구요..^^

turnleft 2007-08-20 13:05   좋아요 0 | URL
엇.. 그렇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뽀송이 2007-08-2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재미있어 보입니다.^^
우리의 옛것과 현대의 색다른 만남??
한번 찾아서 읽어볼게요.^.~ 추천!!

프레이야 2007-08-20 20:23   좋아요 0 | URL
네, 우리가 암행어사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고 흥미로워요.^^ 줄거리를 이루는 이야기도
좋구요^^ 뽀송이님, 오늘도 무지 더웠죠??

마노아 2007-08-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도 암행어사로 나간 적 있어요.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보관함에 쏘옥이에요~

프레이야 2007-08-20 23:30   좋아요 0 | URL
네, 마노아님 물론이에요. 정약용과 함께 목민심서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일부분이 나와요. 박규수 등 다른 암행어사 이야기도 나오구요.
전, 김정희 암행어사는 첨 알았네요.ㅎㅎ 역사샘이시라 어린이책도
역사관련이면 읽으시는군요, 역시 마노아님!

ㅇㅇㅇ 2007-08-3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ㄳ
해요

프레이야 2007-08-31 21:09   좋아요 0 | URL
뉘신지요? 흠칫.^^

와우~~ 2007-10-0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제가지금 읽고잇는 책인데
딱떨어지네요 ㅋㅋ

프레이야 2007-10-09 18:56   좋아요 0 | URL
혹시, 초등학생인가요? 4,5학년 쯤이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요.
로그인하고 오셔도 되는데요.^^

anias 2008-10-1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어요. 감사감사!!

프레이야 2008-10-17 19: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8월 초,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에서 수상자의 아내가 대신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왔다. 민소매조끼를 걸치고 있는 모습에 입을 삐죽거리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는데(여성분) 나는 시원해 보여 좋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제 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받은 시인 이윤길이다.

 그는 19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채 원양현장 실습이라며 그해 10월 라틴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갔다. 그렇게 시작된 원양어선의 승선이 근 3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아이 둘을 낳았고, 실습항해사에서 3등,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그의 시집 속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동안 난 삼각파도를 뚫는 괭이갈매기처럼 씩씩하게 한 끼의 밥값을 위하여 이 바다 저 바다를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삭혀왔다.”고 했다. “소금물에 절인 마음과 달빛에 부서진 마음, 태양 볕에 달구어진 마음들, 태풍 속에서 오금저린 마음도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오늘의 영광이 되었다. 존재는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이다.”라고도 했다. 책날개에 있는 그의 사진을 다시 넘겨보았다. 희끗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풍채 좋은 59년생 남자였다.

 아내 차미선은 지금 러시아 해역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헌책 냄새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라고 말하는 두 딸 자랑도 했다. 단칸방 가득 책을 쌓아두고 읽어대고 배움의 갈증을 못 이겨 시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수많은 날들을 습작하고, 그런 세월을 오래도록 지켜본 아내는 경남 통영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억양으로 적어온 걸 읽어갔다. ... 새벽에 만취해 들어오는 남편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기존재를 확인하려했다고...

 

 

 난 그 대목에 가슴이 아렸다. 술 취해 객기와 난동을 부리는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  이 시인이 스스로를 칭한 말처럼 ‘황금빛 찬란한 유산이 없어 흔들리는’ 우리의 그들을 봐주는 눈이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다면 나도 정말 중년의 여인인가. 뱃놈이 무슨 시를 쓰냐고 주위에서 말했다고 겸양을 떨어놓았지만, 화기애애한 시상식장에 앉아 그의 시들을 죽 읽어보니 망망대해의 생명력이 꿈틀대며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양의 품에조차 안겨보지 못한 나이지만... 

 

 

 바다에 몸을 담고 부딪히며 쓴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시들, 그 중 표제시 하나를 옮겨본다. 다른 시들보다 여성적인 감성이 느껴진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어리석게 마련인가. 그래도 실러갠스의 새로운 비늘 하나를 꿈꾸며..



진화하지 못한 물고기 한 마리

-이윤길




눈 뜰 때 포프라기 되어 매달리는
세월 갑옷을 걸친 마흔 여자의
스물아홉 의식으로 사랑은
심연에서 화석이 되었고
백만 년 동안이나 변화하지 않고
화석으로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
비늘에다 그리움을 빗금으로 남기다
뻐끔하고 세상 밖에 숨 뱉어놓은 날
기포에 쌓여진 지난, 사랑 하나가
수묵처럼 번지는 파문 만든다
계절이 바뀌면 꽃들도 달라지는데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백만 년 전의 사랑이나
현재의 사랑이나 변하지 못한다
말들의 통로를 따라 연비 되어진
아줌마가 간직한 눈물에 슬픔들이
아저씨 가슴에 비 되어 흐른다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 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어찌하여, 여인 만나게 된 걸까
창 너머 바다에 달빛이 부서진다
실러갠스* 새로운 비늘이 생긴다.

* 실러갠스 : 화석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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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진 수산고등학교...저희 동네에 있던 학교인데...
뱃내음, 바다내음이 비릿한 그의 시가 어떨런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07-08-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잉크님 주문진이 고향이세요?
전 주문진까진 못가봤지만 그 부근 속초까지 가봤지요.
왠지 오늘은 잉크냄새 대신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

twinpix 2007-08-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0 23:21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 네^^ 화석이 되어버린 변하지 않는 마음,
부패되지 않는 마음이요..^^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이 구절도 좋지요.^^
 

전에는 한 권을 들면 끝을 내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는데 언제부터인가 동시다발로 펼치고 있다.

수업하는 아이들 책에, 선물 받은 책에, 구입한 책까지 다 하면.. 집안 곳곳에 두고 찔끔찔끔..

이거 언제 끝나냐.. 집중도 안 되고.. 일단 책갈피 꽂아둔 것들만 우선..

날씨 탓으로 돌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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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지금 한꺼번에 읽고 계신가요?

스킨이 바뀌었어요.
마룻바닥이 나오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님의 분위기와 어울려요.마음이 잔잔해지는 느낌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7 10:59   좋아요 0 | URL
책갈피와 연필을 꽂아두고 그러고 있네요. 찔끔거리며..
스킨이 좀 시원해 보이나요, 민서님! 잔잔해지셨어요? ^^
오늘도 더위와 함께...

백년고독 2007-08-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스킨이 시원스럽게 바뀌었네요.
저도 요즘 이 책 저 책 한꺼번에 쌓아놓고 읽고 있답니다. 이거보다 저거보다 ㅎㅎㅎ
제가 좋아하는 '가재미'와 '반고흐, 영혼의 편지'가 보이네요 ^^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잖아도 님의 서재에서 그 페이퍼 봤어요.
두개 공통, 반가워요^^

가시장미 2007-08-1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그래요.. 왜이리 독서가 안 될까요. 집중이 안되고.. 리뷰도 안서지고. ㅠ_ㅠ
혜경님.. 좋은 책 많이 주문하셨네요? 멋진 리뷰를 보고, 저도 지르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07-08-17 11:00   좋아요 0 | URL
그죠? 가시장미님, 다 날씨 탓으로 우리 몰자구요.ㅎㅎ

네꼬 2007-08-1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리뷰 기대되어요!!

프레이야 2007-08-17 11:0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에고.. 시집리뷰는 정말 어려워요 홍홍..
사실 전 시집은 한번에 다 안 읽고 생각나면 한 편씩 뒤져 읽는 버릇이^^

Jade 2007-08-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의 사물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책이예요 ㅎㅎ 생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혜경님과도 잘 맞을 것 같아요 ㅎㅎ

프레이야 2007-08-17 15:03   좋아요 0 | URL
네 제이드님, 좋은분에게 선물 받은 책이에요. 아마 그분도 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보내주셨겠지요 ㅎㅎ
한 장씩 읽는 게 더 좋은 책 같아요. 님도 좋아하시는군요.^^

다가섬 2007-08-18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러느라 여기저기, 여러 형태로 두었더니
아들녀석이 친구에게 ...
'이방은 들어오지마, 좀 너저분하거든...'이러네요.^^

프레이야 2007-08-18 10:42   좋아요 0 | URL
ㅎㅎ 아들이요? 아직 어릴텐데요, 깜찍!

twinpix 2007-08-1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마구잡이로 독서 중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정작 끝내는 책이 없는 것 같아서 한 권을 진득하게 잡아야하겠다고 결심 중이에요.^^

프레이야 2007-08-19 21:53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도 그래요? ㅎㅎ
읽고 싶은 책들이 산재해있는 까닭이기도 하겠죠.
같이 아자아자.. 결심합시다!